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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리뷰/신학

[책리뷰] 김근주 - 구약으로 읽는 부활신앙[SFC I 신실하신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 I 부활 I 구약 I 부활신앙]

by 카리안zz 2022. 10.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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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사역자들이 부활을 주제로 3분 스피치를 해야한다. 3년 전에는 유진 피터슨의 <부활을 살다>를 참조했고, 2년 전에는 제임스 던의 <부활>을 참조했다. 작년은 건너뛰었다. 올해는 김근주 교수님의 책으로 정했다. 읽고 나니 부활절에는 이 책을 참조하라고 권하고 싶다. 구약만이 아니라 신약과 신구약중간기까지 언급하며 부활을 설명한다. 물론, 신약은 짤막하게 몇 구절 언급하지만 그럼에도 큰 틀에서 부활신앙이 무엇인지 하나의 줄기로 잘 관통했다.

 

구약에는 신약과 같은 부활개념이 있을까? 아쉽게도 구약에는 몸이 부활하여 영원히 살 것이라는 개념이 잘 없다. 그나마 있어보이는 이사야 26장과 에스겔 37장 역시도 육체 부활과는 무관하게 민족 집단의 회복에 초점을 둔 본문”(70)이라고 말한다. 몸이 부활한다는 개념이 어디에서 생겨났을까? 여기에서 저자는 제2성전기 문헌들을 추적해나간다.

 

용어 정리가 잘 되었다. 2성전기, 초기 유대교, 형성기 유대교, 신구약 중간기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주 잘 정리가 되었다. 75-76장을 보시면 좋다. 신구약중간기라는 용어가 아닌 2성전기라는 용어를 쓰는지도 알게 되었다. 좀더 학술적인 면인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궁금하신 분들은 이 책 76페이지를 읽어보시면 알 것이다.

 

저자의 박사학위가 70인경 전공으로 알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신구약중간기 문헌들에 대해서 잘 다루는 것같았다. 어찌보면 이 분야 전문가라고 해도 되지 않을까? 여튼, 저자는 부활이 등장하게 된 여러 가능성들을 말한다. 바알의 부활이라든가, 페르시아의 오랜 지배를 받았기에 조로아스터교라든지, 이후 중동의 패자가 된 헬레니즘이라든지 조금씩 언급을 한다. 그렇지만 신약이 시작되기 전 역사를 살피며 부활이 대두된 이유를 조망한다.

 

로마의 지배 전 셀류커스 왕가의 에피파네스로부터의 엄청난 탄압을 받았는데 이 때 유대 마카비의 저항이 일어난다. 이 저항은 성공했으며 하스모네안 왕조를 이룩하기까지 한다. 포로기의 핍박이 토라와 그 계명을 지키지 못해서 일어난 것이라면 에피파네스의 핍박은 하나님의 율법을 목숨 바쳐 지키려했기에 일어난 것이었다. 결국 전쟁에서 이겼고, 독립까지 했으니 유대인들의 마음이 어땠을까. 수백년의 지배를 벗어난 일이었다. 후에 로마에 멸망당했지만 이것이 이후 새로운 해방자, 새로운 다윗의 후예를 기대하는 것으로 이어지게 된 계기가 되었다.

 

부활이 어떻게 대두되었을까? 저자는 바로 목숨을 바쳐서 토라를 순종한 의인들의 순교에서 찾는다.

 

“의인들이 맞닥뜨린 현실은 토라에 순종하는 것이 개인을 생명으로 이끄는 것이 아니라 죽음으로 이끌고, 토라에 불순종하는 것이 도리어 사람들을 생명으로 이끄는 것이었다. ... 하나님의 도를 지켜 의의 길로 걸어가는 소수의 사람들이 환난과 괴로움을 겪는 것이야말로, 옛예언자들이 선포했던 말씀을 재해석하게 만드는 동인이라고 할 수 있다”(104)

 

그렇다. 여기에서 이사야 65장에 새 하늘과 새 땅에 관한 말씀도 새롭게 들려진다. “현실의 박해 아래서 죽어가는 의인들을 볼 때, 그들에게 약속된 새 하늘과 새 땅은 무엇을 의미할까?...그 영광의 날은 언제, 어떻게 이루어질까?... 하나님께서 선하시다는 사실을 굳게 확식하는 것이 이런 질문들에 대한 답변으로 부활신앙을 발견하도록 이끌었다”(104) 책의 부제이기도 하지만 저자의 계속된 강조점이기도 하는데 그건 부활신앙의 요체는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신실하시다는 것에 대한 견고한 신뢰하고 할 수 있다”(107)는 것이다.

 

구약에서 희미하지만 새로운 변화를 가져올 씨앗을 충분히 품고 있다는 말이다. 곧 이것은 하나님 나라와 연결된다.

 

“그날에 의인과 악인이 모두 부활할 것이며, 하나님의 재판장에 서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부활은 야훼 하나님의 공의로운 재판, 달리 말해 하나님의 통치, 곧 하나님 나라를 기대할 때의 전제 조건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 생각하면, 부활보다 근본적인 것은 야훼 하나님께서 임하시는 것, 야훼 하나님의 통치를 기대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흔히 그저 부활신앙이라고 말하지만, 부활신앙의 근본은 하나님의 통치를 기대하는 것이며, 그렇게 임하실 하나님을 견고하게 신뢰하고 하나님 나라를 확신하는 일일 것이다. 그 점에서 레벤슨이 부활신앙을 일컬어 ‘생명의 하나님의 궁극적인 승리’라고 표현한 것은 매우 적절하다고 할 수 있다.”(130-1)

 

부활은 구약과 신약에서 그토록 강조했던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확증하는 것이다. 죽음의 세력들은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신실함을 위협한다. 초기 기독교는 복음으로 인해 가정에서, 마을에서, 도시에서 세상살이 그 자체가 힘들었다. 목숨을 위협하는 박해는 간헐적으로 있었지만 진정하게 초기 그리스도인들을 위협한 것은 세상으로부터 배제된 것이다. 오늘 우리는 그런 배제는 없다. 오히려 대형 교회를 가는 이유가 살림살이 좀 더 좋아지기 위한 경우도 있다(물론 이게 마냥 나쁜 것이라 보진 않는다. 그런 계기로 신앙이 생길 수 있을 테니까). 오늘 현실은 초기 기독교 시대와는 다르지만 한층 교묘해졌다고 본다. 영원할 것이라는 걸 다른 곳에서 보이고, 전능하다는 걸 거대 집단에서 보인다. 누구를 신뢰할래?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활하셨지만 여전히 상처를 지니신 예수님의 몸처럼 신앙생활하며 하나님의 신실함을 지키기 위해 몸부림쳤던 내 상처들도 주님 앞에 서는 날 남아 있을 것이다. 바울의 몸에 새겨진 예수의 흔적(6:17) 채찍질과 얻어맞음으로 인해 생겨진 흔적이겠지만 나의 예수의 흔적은 무엇일까? 나는 무엇을 상처로 남겼을까? 하나님 앞에 설 때에 내 통장 잔고가 아니라 이 상처의 흔적을 들고 있을 텐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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