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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리뷰/신학

[책리뷰] 프랑스아 보봉 - 예수의 마지막 날들[비아 I 십자가 사건의 역사적 재구성 I 역사비평]

by 카리안zz 2022. 10.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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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주간이 시작되었다. 나도 거기에 맞춰 이 책을 읽었다. 하지만 고난주간을 위해서라면 이 책보단 닉 페이지의 <가장 길었던 한 주>를 추천한다. 고난 주간 묵상을 위해서라면 이 책은 추천하지 않는다.

 

몇 년 전 신학교 입학할 필요가 없는 이유라는 글로 유명해지신 분이 있다. 정확한 문장은 기억나지 않지만 대략 타키투스, 수에토니우스, 요세푸스의 예수에 대한 기록이 다 후에 기독교인들에 의해 가필이 되었다는 글을 쓴 적이 있었다. 그렇다면 예수는 실존 인물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프라이스같은 학자들의 좋은 근거가 될 것이다. 요 부분을 김규섭 교수님께 물었고, 무슨 책 몇 페이지를 보라고 말주셨다. 메모를 해놨는데(책이 바트 어만이었던가 브루스 메츠거였던가 전혀 다른 책이었던가ㅠ) 그게 없어져서 대략 난감했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어떤 내용인지 비로소 알게 되었다. (p57~67 보시면 됩니다).

 

자료 챕터에서도 그렇지만 자료를 어떻게 활용하는지가 돋보였다. 특히나 챕터3 사건의 전개 부분이 가장 알찼다. 실제 있었던 한 주를 역사적 다양한 자료를 가지고 재구성해나가는데 참으로 담백하고 깔끔하다고 느껴졌다. 여태 복음주의권에서 비평학에 대한 반론을 제시할 때 간접적으로 본 내용들을 직접 읽을 수 있어서 유익했다. 네 복음서들은 같은 사건을 다르게 서술하는데 무엇이 사실이었을까 추적을 한다. 지금 생각나기론 비유사성의 원리가 떠오른다. 예수님이 죽으시고 40년 뒤쯤 복음서가 기록되었는데 그때 저자의 공동체적 상황에 맞는 기술들이 아닌 기술이 나오면 이건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수정했을 내용인데 수정을 안 했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창작이라는 말도 이러한 이유들 때문에 나온다.

 

저자는 117페이지에서 변증의 의도’, ‘이야기에 구약의 모티프’, ‘익숙한 전설의 요소을 살펴보고, 다른 역사적 자료들도 살펴보며 재구성을 한다. 그래서 이 책은 이러한 말들을 조금이라도 들으신 분들에겐 추천을 하지만 아에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분들께는 비추한다. , 나처럼 이런 말들에게는 익숙하지만 복음주의권에서 방어할 때만 읽은 분들께는 읽어봄직하지 않을까 싶다.

 

결론 부분은 부활을 다루는데 처음에는 부활 역시도 위의 세 요소 중 익숙한 전설의 요소나 다른 요인들을 가지고 왜 이렇게 서술했는지 재구성하는 작업을 하는게 일관성을 있지 않나 싶었는데 부활에 관한 자료가 복음서 말고는 없기에 역사적 연구의 대상이 되지 않겠다 싶었다. , 이를 자세하게 쓰려면 책의 주제를 벗어나기도 하다.

 

오래 전 했던 역사에 대한 질문도 다시 떠올랐다. 복음서의 저자들은 역사를 어떻게 봤을까? 그럼에도 후대의 그리스도인들은 네 복음서를 정경 속에 넣었을까? , 역사를 어떻게 봐야할까? 네 복음서의 다른 기록들은 근대를 지나왔기에 현대인들에겐 불편한 지점이고, 역사를 있는 그대로 온전한 사실로 그리려는 건 근대 이후를 지나고 있기에 역시나 불편한 지점이기도 하다. 톰 라이트는 자신의 주저에서 이런 간극 속에서 비판적 실재론이라는 방법론을 들고 온다. 소박한 실재론(객관)과 현상학(주관) 사이에서 비판적 실재론으로 타계해 나가려고 한다(철학 전공하는 페친인 윤유석님이 요즘 철학계에선 현상학을 이렇게 나이브하게 보진 않는다고 하더라. 라이트 주저가 40년인가 전에 나온 거니 이해를). 과연, 라이트의 이러한 시도는 패러다임 쉬프트가 될 것일까 아님 똥망이 될 것일까. 시간이 지나면 더 확실해 질 것같다(지금은 후자의 포지션에 있다가 언제든 낌세가 이상해 지면 태세전환 가능한 표지션을 취해보자ㅋㅋ).

 

아마도 다시 복음서 관련 책을 읽을 때면 이 질문들을 중심으로 읽을 것 같다. 이미 홍목사님께 추천받은 앤서니 르 돈의 <역사적 예수>가 반짝이고 있다. 셋트로 그의 스승인 던의 <예수님에 관한 새관점>도 집으로 데려 왔다.

 

질문들이 집요하게 추적해 나가는 욕구가 그렇게 강하지 않다. 아마 내가 학자적인 기질이 있다면 그랬을 것이다. 없는 걸 어떡하냐! 그럼에도 앞서 보았듯이 품어놨던 질문들의 대답들을 책 속에서 발견하기에 간헐적이더라도 좋다. 지금 읽고 있는 고먼의 <삶으로 담아내는 십자가>에서도 그 맛을 보고 있다. 이렇게 좋은 책을 예쁘게 내주는 비아출판사에게 참 감사하다. !

 

, 106 쪽에 신성모독에 대한 보봉의 주장에 의문이 든다. 14:64, 26:6에서 대제사장이 예수님의 말을 듣고 신성모독이라고 말한다. 예수님은 인자를 말하며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볼 것이라고 말했는데 이 말에서 예수님의 신적 정체성이 드러난다고 주장을 한다. 보봉은 신성모독은 1세기 유대교에서 광범위한 의미로 쓰였다고 한다. ‘자신들의 종교에 커다란 위협이 되는 것처럼 보이는 행동’(106)은 뭐든 신성모독으로 불렀다는 것이다. 근거로 예수님의 죄 용서 하는 장면에서 역시 신성모독이라는 걸 말했다는 걸 든다. 내 의문은 산헤드린 구성원들이 광범위한 신성모독을 했다는 걸로 사형을 언도한 경우가 많았을까란 의문이다. 예수님의 죄 용서 선언이 신성모독인 이유는 하나님이 계신 성전이 아닌 곳에서 자신이 죄 용서를 선언하니 자신들의 위협은 물론이요 심장부를 자극하는 마치 자신에게 신적 권능이 있다는 걸 말했기 때문에 나온 반응이 아니었을까? 뭐 인자를 말하며 우편, 구름 타고 온다고 말한 게 창작이라면 모르겠지만 그 말들을 했다면 그 역시도 신적 권능이 있다는 아주 신성모독적인 말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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