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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리뷰/신학

[책리뷰] J. 판 헨더렌 & W. H. 펠레마 - 개혁교회 교의학(신지철 옮김, 새물결플러스)

by 카리안zz 2021. 3.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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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낀 점

 
 1400페이지의 책이다. 페이지가 아닌 두께로 치면 가장 두꺼운 책이 아니었나 싶다. 중간중간 보충해주는 글들이 있어서 상당한 양의 글이다. 그런데 두꺼운 양에 비해 이 책이 나에게 큰 도움을 주었을까? 앞서 두 권의 조직신학책을 읽었다. 밀리오리와 티슬턴의 책이다. 앞서 두 권의 책에서 나는 많이 배웠다. 특히 삼위일체에 대해서 많은 배움을 얻었다. 그러나 솔직히 이 책에서 나는 무언가 하나 배웠다고 말하기가 조금 어렵다. 그냥 개혁신학을 변호하는 조직신학 책이랄까? 그래서 성경 역시도 그 변호에 맞춰서 집어넣는 느낌이 많이 든다. 사실 이 점이 내가 조직신학에서 가장 걱정했고 나랑 안 맞는 점이기도 했다. 그런 점을 이 책에서 자주 말하니 솔직히 읽는 게 힘들었다. 솔직히 이 책보다 바빙크 축약본을 읽었으면 어땠을까 후회를 한다. 하지만 목사 안수를 받았고 개혁교회에 대해서 그래도 잘 알고 싶은 마음에 이 책을 골랐다. 
 일단은 이 책에 대해 좀 더 이야기해보자. 

교의란?


 교의와 조직신학이 다르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 책에선 그걸 그렇게 구분해서 말하는 것 같지는 않다. 조직신학을 전공한 분들은 교의와 조직신학을 잘 구분을 하던데 나는 대략의 느낌은 있는데 정의까지는 못하겠다. 일단 이 책에서 말하는 교의는 이런 것이다. 

 교의는 교회가 성경의 메시지에서 핵심적이며 본질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간명하게 표현한 것이다. 교의학은 그것을 분석하고, 제시하며, 논의하고, 더 자세하고 명료하게 설명한다. (31)

 

 나는 이 설명에서 이런 메모를 썼다. "이런건 성경학자들이 교의를 더 잘 알 수 있지 않나? 추가- 교의학의 주제들(성령론, 신론 등) 그런 주제를 중심으로 성경을 논하면 성경의 풍성한 주제가 드러날까?" 이렇게 메모를 써놨다. 이 책의 원서가 90년대 초반에 써졌기에 한계가 있긴 하겠다. 그러나 90년대 초반이면 복음주의권에서도 성경해석이 부족한 시기는 아니었던 것 같다. 여튼, 교의의 목적을 성경신학이 어쩌면 더 잘 할 수 있지 않을까? 성경의 메시지를 분석하고, 제시하며, 논의하고, 더 자세하고 명료하게 설명하는 건 조직신학 책보단 성경신학 책에서 훨씬 더 많이 봐왔다. 이 책을 다 읽은 지금도 티슬턴의 성경 분석과 설명이 훨씬 뛰어나다고 나는 말할 수 있다. 

 

내로남불 성경해석?



 이 책에서 가장 내 눈에 띄는 표현이 있다. 

 

성경은 그와 같은 견해를 전혀 지지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289)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는 점이 이 책에 가장 큰 공격이랄까? 논거중에 하나로 자주 등장한다. 초반부 이 표현에 메모를 한 걸 보니 이렇게 썼다. "성경을 어떻게 바라본단 말인가? 성경은 무엇이라 답을 내리는가?" 성경을 해석하는 도구가 있어야 한다. 그것은 언어학, 역사학, 사회학, 본문, 문맥 등 많은 도구를 필요로 한다. 그러나 이 책은 그러한 설명이 전혀 없다. 그래서 내가 몇몇 구절을 가져다가 이렇게 써져 있으니 이렇게 해석해야 돼! 라고 말하는 듯하다. 
 이러한 표현이 나올 때 메모를 하곤 했는데 결국 넘 많아서 다 메모해 놓질 못했다.(307, 1013 등등등)

 나는 이러한 교의신학이 성경을 인용하는 방식에 자꾸 태클을 건다. 

이와 같이 이른 시기부터 나중에 중보자로 세움을 받았다고 언급된는 것이 나타났다. 이것은 성경에 기초한 것이다. 베드로전서 1:20은 15.1.에서 이미 인용되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셨다고 말한다(엡 1:4). 곧 바울은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위치를 언급한다. 칼뱅은 하나님이 그분의 기름 부으신 자이신 그리스도에게 시선을 돌리셨다고 말한다. (344)

 전제를 두고 근거를 댄다. 그런데 문맥은? 해석은? 이런 인용은 계속되는데 p. 668에도 마음에 들지 않는 사용법이다. 


 또 한 가지. 

창세기 2:2은 이 두 가지를 서로 연결하고 서로 구분해서 말한다. 하나님이 안식하셨다는 것은 그분이 창조 사역을 계속해서 하지 않으셨다는 것을 암시해준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 사역을 마치셨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구절은 하나님이 더 이상 일하시지 않는다는 것을 암시해주지 않는다.(참조, 요 5:17) (437)

 창세기의 창조에 대해 존 월튼이 쓴 책이 있다. 성경신학자들의 작업은 이럴 때 도움이 된다. 그런데 교의신학은 그 작업에 흔적이 없다. 그저 성경을 인용할 뿐이다. 물론 그것은 그것대로 중요하겠지만 그 의미를 그 당시 맥락에서 읽을 수 있다면 훨씬 성경을 깊고 풍요롭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대립은 계속 일어난다. 

이 이론은(창조의 설명은 문학적란 해석이론) 외부의 간섭에 얽매이지 않는 권한을 과학에 부여한다. 하나님이 창조자라는 진리를 거부하지 않는 범위 안에서 말이다. 관념적 시간가설은 창세기 1장의 계시 내용을 과감하게 축소한다. 하지만 창세기 1장을 순전히 문학적인 관점에서 생각할 수 있는 성경 구절의 근거는 무엇인가? (455)

 이 점은 정말 성경을 어떻게 바라보는 가의 차이다. 성경구절에 '이것은 문학적 장치입니다'라고 써져 있어야 하는가? 당시 문화와 문서를 비교하고 문학 기법이 있는가를 봐야한다. 전혀 거기에 대한 조회가 없다. 나는 이점이 교의신학의 한계가 아닐까 싶다. 

 그리고 내로남불이라고 느낀 부분이 있다. 

우리가 로마서 5장에 대해 논하기 전에, 우리는 위에서 언급한 본문들이 죄의 보편성을 아담과 명백하게 연결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곧 로마서 5장은 (창세기 3장과 고린도전서 15:22을 연결해서) 죄의 보편성에 대한 성경적 개념의 근원으로 해석해야 한다. (669)

 여태까지는 성경에 기록된 것으로 명백히 봐야한다고 했으면서 왜 지금은 해석을 할까? 아까의 논리라면 명백히 적히지 않았기 때문에 본인의 주장이 틀린게 아닐까? 여태 해석이라는 말은 없었다. 그러니 본인의 주장되로 이 본인의 주장 역시 성경적인 근거가 없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니 내로남불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자신의 주장은 문맥을 봐가면서 해석하려고 하고 남의 주장은 그대로 본문에 없으니 틀림이라고 하고. 정당하려면 나와 상대의 주장을 다각도로 분석하며 논증해야 한다. 그런데 그건 학자들이 해야 하는 일. 근데 이 책을 쓴 저자들은 학자인데... 나같은 목회자는 좀 짐을 덜 수 있겠지만 이 두 학자들은 큰 짐을 져야하는데. 아쉽다. 아마 그걸 가능하게 하는게 클래스가 높은 학자가 아닐까 싶다. 

바울의 말에서도 구원의 성취와 적용이 서로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것이 명백하게 드러난다. 곧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으며(고후 5:14),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고후 5:17). 바울의 말은 그리스도가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모든 사람을 위해서 죽으셨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만약 그렇다면, 모든 사람은 죽은 후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일어나서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단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만이 새로운 창조물인 것이다. 그렇지만 각 사람이 모두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은 아니다. (867)

 이 글도 마찬가지다. 여태 저자들이 해왔던 방법처럼 보편구원론을 암시하는 구절을 가져와서 이것은 정경적이지 않다라고 말하면 어떨까? 본인들의 방법으로 본인들의 주장을 반박할 수 있다! 계속해서 자신이 불리한 주장은 주해까지 해가면서 반론을 한다. p. 870이 그렇다. 반대로 자신들이 근거로 했던 여태까지의 주장도 이런 방법으로 반론이 가능하지 않을까? 

 나는 계속해서 이 저자들의 글에 반론을 했다. 

야고보의 관점에서 볼 때, 믿음은 단지 말로 고백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 결코 아니다. 믿음에는 그 이상이 있다! (모세가 받은 것과 같은 살아 있는 말씀과 대조적으로[행 7:38]) 의롭다고 여김을 받는 것을 단지 냉담하고 생명력이 없는 말들에만 국한시키는 사람들은 [하나님에게서] 거부당할 것이다. (1002-1003)

 내가 이 책의 저자들이 하는 방법처럼 "믿음은 행함"으로 의롭게 된다고 쓰고 야고보서 2:24절을 인용하면 어떨까? 성경에 있는 말 아닌가. 이처럼 명확한 말을 어떻게 반박하는가?! 그러나 이 저자들이 주해를 했듯이 해석이 필요하다. 성경에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라 얼마나 통일성과 다양성을 설득력 있게 풀어내는지가 중요하다. 그래서 이런 점은 분명 성경학자들이 더 앞선다고 본다. 티슬턴의 조직신학이 훨씬 뛰어나다고 느낀 이유다. 저자들이 처음에 교의를 정의한 것이라면 나는 성경신학자들에게 자리를 내줘야 한다고 본다. 

 

오호! 했던 점


 그래도 '오호!' 했던 점이 있다. 내용을 보자.

성경이 역사적인 권위를 갖는다고 말할 때, 이것은 성경에 기록된 모든 것이 실제적으로 일어났다는 것보다 그 이상의 뜻을 내포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의 역사다. 이것은 역사적인 정확성을 가지고 모든 것을 기록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우리는 성경이 역사적으로 신뢰할 만하다고 고백해야 한다. (171)


 
 개혁교회 교의학에서 가장 궁금했던 점이 바로 이 점이었다. 과연, 개혁교회 교의학은 역사비평에 어떻게 대답을 할까? 무대포로 나갈까? 아니면 어느 정도 수용을 해줄까? 저자의 저 대답에 나는 크게 만족한다! 개혁 교회라도 일점 일획도 팩트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여서 역시나 역시였다! 저자는 또한, "성경은 일반적인 역사책이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시대적 한계"라는 개념을 매우 신중히 사용하고 적용할 필요가 있다"(171-172)라고 말한다. 역사비평을 부인하는 것도 아니며 그 한계 역시 인정하는 말이다! 나 역시 개혁교회 인원으로서 강력히 동의하는 바다! 그외에도

"성경이 모든 가능한 우발적인 사건들에 적용할 수 있는 법 조항들을 가진 법전이라는 견해는 거부될 필요가 있다. 또한 성경은 해당 문맥에 관심을 전혀 기울이지 않은 채 성경에서 개별적인 본문을 선택해 인용할 수 있는 참고서가 아니다."(173)

 이와 같은 교과서적인 말일 수 있지만 이 말이 보수적인 신학책에서 하는 말이여서 나는 흥미로웠다!


그리고 성경이 중심인 교의신학이 고민할 수 있는 좋은 점 역시 이 책에 나타났다. 

우리가 신약성경의 메시지를 곰곰이 생각할 때, 다음과 같은 의문점이 떠오른다. 성육신 및 속죄 사역 전체와 더불어 하나님의 아들이 중보자로 임명된 것은 하나님의 작정 안에 놓여 있는 것인가? 또는 그것은 세 위격들 사이에 맺어진 어떤 언약을 반영하는가? 또한 그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이 공동으로 작정하신 것인가, 또는 삼위일체 하나님이 공동으로 맺으신 언약인가? (345)


 이러한 고민들은 성경신학에서는 볼 수 없는 고민이었다. 전체적인 짜임이 있기에 본문을 확대한 성경 자체를 놓고 떠올릴 수 있는 질문이라고 본다. 

 

나가면서

 솔직히 추천하지는 못하겠다. 관심있는 사람들은 읽어보시라. 그러나 나는 긴 시간 이 책을 붙잡고 있었던 것을 후회한다. 차라리 바빙크를 읽었다면 어땠을까. 다음 조직신학을 읽을 때는 바빙크로 도전해보려고 한다. 그렇지만 나름의 유익했던 점들이 있었다. 그건 밑에 메모들을 참조하길 바란다. 

 


메모

 

만약 성경이 꼭 필요하지 않다면, 성경은 핵심 지위를 잃어버릴 것이다. 성경 대신에 다른 것이 한가운데로 들어올 것이다. 곧 교회(로마 가톨릭), 신령한 사람(신령주의), 종교 공동체(슐라이어마허), 또는 인간의 개인적인 견해가 핵심 지위를 차지할 것이다. (191)

- 그렇지

 

 

주님은 그의 말씀이 문서로 기록되어 나타나는 것뿐만 아니라, 그의 말씀이 역사 속에서 계속해서 보존되게 하는 것을 통해 교회를 돌보았다. 성경의 정경이 지니고 있는 권위는 교회의 권위로부터 유래되었다는 이론을 지지해주는 역사적 및 신학적 근거는 전혀 없다. 우리는 정경의 권위는 교회의 권위에 의해 인정받고 보증된다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입장을 거부한다. 교회는 성경을 만들어내지 않았다. 오히려 교회는 성경을 하나님의 손으로부터 받았다. 이 점에서 성경은 단지 수용의 기능만을 지녔다. (199)

- 음... 근데 정경으로 빠졌다가 넣어졌다가 목록이 그리 확정된 것은 아니었지 않나?

 

 

하나님이 그분의 이름들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우리에게 계시해주실 때, 이 이름들은 우리의 이해력에 맞추어졌다. 하나님이 스스로를 우리의 왕과 아버지라고 소개하셨을 때, 그분은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이다. (231)

- 계시해 주시는 방식 = 이름으로

 

 

하지만 하나님의 다양한 이름에 대한 이와 같은 해석을 지지해주는 성경적인 근거는 없다. (235)

- 성경을 근거로 주장들을 반박. 이 책의 특징을 잘 나타낸다. 

 

 

네덜란드의 신학에서 헨드리쿠스 베르크호프의 견해는 매우 타당성이 있다. (262)

- 뒤에는 죄다 반대인데?

 

 

우리는 이와 같은 스콜라적인 사상의 흐름을 여전히 바빙크의 저서 안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303)

- 바빙크라고 예외는 없다.

 

 

하지만 베르크호프 자신도 성경보다 헤겔을 연상시키는 견해들을 제시한다. (307)

- 벌코프가 철학적이라는 게 바로 이런 것인듯. (이 책의 저자는) 벌코프 역시도 비판적으로 본다. 무조건 따르는 것이 아니다. (315도 마찬가지, )

 

 

다른 사람들의 발자취를 따른 스킬더가 이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사물들과 관련된 창조적 진화는 성경을 믿는 이들에게 결코 걸림돌일 수 없다." (463)

- 이정도면 한국에서는 자유주의 소리 들을 듯...

 

 

훅세마(495)

-후크마는 아니겠지?

 

 

바빙크의 고통의 견해에 대해서(522)

- 정리해도 좋을 것 같음.

 

 

따라서 우리의 해석에 의하면, 이것은 남편과 아내 사이의 성관계가 전적으로 자녀를 낳는 것만(생육의 측면)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614)

- 결혼과 성관계에 대해

 

 

우리는 죄란 언약을 어기는 것이라고 결론을 내린다. ... 그것은 절대주권을 지니신 창조주를 거역하는 것이다. (652)

- 죄는 거역

 

 

 우리는 집단적, 제도적, 구조적 죄라는 개념을 반대한다. 오직 하나님 앞에서 책임을 질 수 있는 존재만 죄를 지을 수 있다. 죄를 짓는 사람들은 반드시 회개해야 한다. 구조와 제도들 자체는 회개할 수 없다. (692)

- ? 무슨 말이지?(이 말에 동의가 안 된다.)

 

 

하지만 "죄악된 구조"와 "구조적인 죄"는 동일한 게 아니다. 우리는 "죄악된 구조"라는 표현은 받아드리지만 "구조적인 죄"라는 용어는 거부한다. (693)

- 구냥 같은 말을 본인이 다르게 단어를 사용해서 말하는 거 같은데... 뭐, 영어로 보니 조금 이해는 간다. (언어적인 차이가 아닐까 싶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역에서 사실상 예언자적, 제사장적, 왕적 측면들이 번갈아 가면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을 본다. 특히 그의 복음 전파에서는 예언자적인 측면이, 그가 자신을 희생제물로 드리는 것에서는 제사장적인 측면이, 또한 그가 하나님의 오른쪽에 앉아 있는 것에서는 왕적인 측면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763)

- 삼중적 표현. 좋은 문장. 

 

 

만약 죄가 이 세상에 들어오지 않았다면, 과연 하나님의 아들의 성육신 하건이 일어났겠는가?(Osiander, 1550), 성육신의 이유는 어디서 찾아야 하는가? 인간에게 구속이 필요하기 때문인가 아니면 그것과 상관없는 하나님의 목적들 때문인가?(Haubst, 1969). (782)

- 그러게. 생각해봄직한 질문.

 

 

아마도 그가 십자가 처형을 받은 사건을 시간 속에 확정하려는 의도에서 빌라도의 이름이 언급되었을 것이다. (788)

- 시간 속에 확정하기 위해서 빌라도 이름을 넣음. 

 

 

W. L. Craig, ..., New Testament Studies, 31 (1985): 39-67 (804)

- 크레이그가 NTS에도 논문을 기고했구나!

 

 

법적인 용어들로 표현된 이와 같은 관점에서 이해할 때, 칭의는 신앙인과 하나님의 관계가 회복된 것을 의미한다. 칭의는 법적인 선언이다. 죄인이 그 선언에 의해 그의 죄책에서 면죄되고 의롭다고 간주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의로움이 그에게 돌려졌기 때문이다. 이 칭의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로 회복되었다는 것을 함의한다. 곧 그 죄인은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으로 회복된 것이다. (998)

- 칭의 ⊃ 관계회복, 자녀신분회복

 

 

현대인은 더 이상 하나님의 진노로 말미암아 고통당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의 부재로부터 고통을 겪는다. 죄는 더 이상 극복해야 할 어떤 사악한 것이 아니라 존재의 무의미다. (1028)

- 제대로 지적했다고 본다. 

 

 

베르크호프는 그리스도가 참 하나님이라는 신앙고백을 더 이상 지지하지 않는다. (1037)

- 음?! 벌코프가? (내가 아는 그 벌코프가 맞는가?)

 

 

(7) ... 칭의 교의는 상황과 관련된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복음에 근거한 것이다.
(8) 칭의는 의롭다고 여김을 받은 사람들의 삶 속에서 그 결과들이 구체적으로 나타나야 한다. 이 결과들이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면, 칭의는 부인된다. (1043) 

- 그러니깐 재조명에 대해서 어떻게 결론을? 이날치가 판소리를 현대적으로 재조명했듯이 신학도 그렇게 못할까? 무엇이 핵심인지만 잘 잡으면 현대에 상황에서도 매몰되지 않고 충분히 자신의 소리를 낼 수 있다고 본다. 이날치의 음악을 듣고 판소리가 아니라고 할 사람들이 있을까? 

 

 

거룩하신 하나님의 형상은 오직 - 또 다시 - 거룩하다고 불리는 하나님의 백성 안에서만 드러날 수 있다. 칼뱅이 성화의 목적을 하나님 형상의 회복이라고 이해하는 것은 성화에 대한 칼뱅의 견해가 지닌 특징이다. (1050)

하나님 형상 회복 = 성화의 목적(칼뱅 견해의 특징)

 

 

곧 하나님은 교회를 선택하시고, 하나님의 아들은 교회를 모으시며, 성령은 교회를 거룩하게 하신다. (1142)

- 삼위일체 하나님과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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