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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리뷰/신학

[책리뷰] 앤터니 티슬턴 - 조직신학(박규태 옮김, Ivp)[진리 성경 역사 해석]

by 카리안zz 2021.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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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낀 점


 앤터니 티슬턴이 누구던가? 저명한 해석학자이자 성경신학자이다. NICNT의 고린도전서 주석을 쓸 만큼 실력도 있으신 분이다. 성경해석학에서는 이분이 거의 대장급이라고 알고 있다. 그런 분이 조직신학이라나? 조직신학과 성경신학은 천적이 아니었던가? 하나의 구조 아래에서 성경을 해석하는 것(연역적 방법)과 본문을 가장 먼저 해석하는 것(귀납적 방법)에서 두 분과가 많이 다투는 것 같다. 물론, 보수신학 안에서의 문제일지도 모르겠다. 다른 곳에서는 성경신학의 해석을 자신의 도구로 사용하는 경우도 많은 것같다.

 어쨌든, 이 책은 나에겐 눈에 띄는 책이었다. 티슬턴의 대표작들을 읽어는 봤고 나쁘지 않았기에 티슬턴은 조직신학을 어떻게 이야기할까? 궁금했다. 그래서 개혁교회 교의학보다 먼저 읽은 책이기도 했다. 어쩌면 그가 해석학자이기에 조직신학을 이야기할 수 있고, 나아가 성경신학자이기에 본문을 세밀하게 파고들어 이야기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다 읽고나니 확실히 후자의 강점이 좋았다. 밀리오리의 조직신학이랑 개혁교회 교의학은 본문을 다루는게 영 그저 그랬다. 개혁교회 교의학은 나중에 쓰겠지만 정말이지 비판적인 메모를 많이 적어놨다. 나는 그 책보다 티슬턴의 조직신학을 보라고 추천할 것이다. 

 

조직신학이란? 

 
 티슬턴은 1장에서부터 왜 자신이 이 책을 쓸 수 있는가에 대해서 말한다. 

'조직신학'은 웹스터가 말하듯이, 대학과 학계에서 '교리'(doctrine)를 가리키는 말로 으레 사용하는 요어가 되었다. 조직신학은 성경, 역사, 철학의 자료에서 나온 내용을 포괄한다. 나아가 조직신학은 일관성 내지 일치성을 강조한다. (20)

 

 그렇다. 조직신학은 그저 일관성만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다. 성경, 역사, 철학을 폭넓게 알아야 한다. 그렇다면 성경, 역사, 철학을 포괄적으로 잘 아는 사람이 조직신학을 말하기에 유리할 것이다. 그런 사람이 누구인가? 그렇다. 앤터니 티슬턴이다. 
 그런데 티슬턴은 성경, 역사, 철학만을 말하지 않는다. 더 많은 것을 알아야 한다고 한다. 그의 말이다. 

이것이 우리가 방법론과 관련하여 방법과 진리, 철학 탐구가 행하는 역할을 논의한 내용의 결론이다. 우리는 특별히 일관성과 체계, 철학 탐구, 우연과 맥락 속에 자리한 성경의 내용, 개념 해명, 해석학, 사회학, 문학적 신학을 살펴보았다. 오늘날의 조직신학에는 이 모든 영역이 반드시 있어야 하며, 우리의 신학 탐구와 진리 탐구에 활력을 불어넣으려면 이 모든 영역을 활용해야 한다. 아울러 이 모든 영역은 그리스도인의 제자도가 추구하는 목표에 이바지하는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성찰과 기도, 성령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을 더 깊이 이해하게 하고 하나님과 더 깊은 사귐을 나누도록 도와줄 수 있다. (59)


 티슬턴이 조직신학 책을 쓸 수밖에 없는 이유가 이 문단에 있다. 사실, 이 작업은 성경신학자들 중에 티슬턴이 아니고서는 해낼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싶다. 

 

나가면서

 
 제접 두께가 나가는 책이지만 한 번에 다 읽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한 학기 대학 강의를 엮은 책이기에 한 주, 한 주 공부를 한다고 생각하며 읽어나가면 좋을 것 같다. 티슬턴의 책들은 늘 그렇지만 백과사전 같다. 역사적으로 정리도 좋았고, 해석학적인 설명들도 좋았으며, 철학적인 것도 더구나 성경을 인용할 때가 나는 가장 좋았다. 내 성향이 성경신학을 더 선호하는지라 그렇다. 다른 조직신학 책에서는 느껴보지 못했는데 이 책에서는 본문을 디테일하게 접근할 때 참 좋았다. 제일 좋았다. 신약학자의 조직신학 사용이랄까. 나중에 좀 더 많은 조직신학 책을 접하면 어떻게 느껴질지 모르겠지만 나에겐 참 유익했다. 앞으로도 주제가 나올 때 이 책을 찾아볼 것 같다. 
  


메모

 

하지만 조직신학은 구체적인 본문을 주해한 결과 그리고 성경에 있는 대다수 진술의 역사 맥락 및 이 진술을 제약하는 역사 조건을 아주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으면 조직신학의 성경적 기초에 충실학 수가 없다. 성경의 내용은 보통 특정 성경 저자가 특정 청중을 대상으로 말한 것이다. (37)

- 조직신학은 필시 주해의 결과물을 가지고 논의해야 한다는 말일까? 그가 신약학자여서 이렇게 말하는 것인가? 

 

 

원서에서 티슬턴은 로버트 캐롤을 미국의 신약학자 존 캐롤로 잘못 썼다 - 옮긴이 (54)

- 박규태 목사님 정말 대단하심... (뒤에 티슬턴의 오기를 하나 더 바로잡지만 생략. 두 지평에서 더 대단했기에!)

 

 

다시 말하자면, 소통, 정체, 관계는 우리에게 인격성의 핵심을 가져다준다. 이것도 역시 자아 인식, 자의식, 생각, 의지를 동반한다. ( 65)

- 하나님이 인격적이라는 근거. 물론 초월하시지만. 

 

 

"성부는 성자가 함께 일하시지 않는 어떤 일도 혼자서 하시지 않으며, 혹은 성자도 성령과 따로 특별한 활동을 하시지 않는다. ···모든 활동은 ··· 그 기원이 성부지만 성자를 통해 나와 성령 안에서 완성된다." (67)

- 활동에 집중

 

 

G. 크벨은 '사랑'을 '자신도 모르게 일어나는, 자신을 내주도록 좨쳐 대는 느낌"이라고 정의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 정의에서 "자신도 모르게 일어나는 느낌"이라는 말에 물음을 제기할 수 있겠다. 비트겐슈타인이 늘 말하듯이, "자신도 모르게 일어나는 느낌"을 통제할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다. 이것은 마치 "이 농담을 듣고 웃어라"라는 명령만큼이나 말이 되지 않는 소리다. 그러나 성경에는 사랑하라는 명령이 있다. 사랑은 의지와 뿌리 깊은 습관에서 나오는 행동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이렇게 말한다. "사랑은 느낌이 아니다. 사랑은 검증을 받으나 고통은 그렇지 않다. '그것은 참 고통이 아니었어. 그렇지 않았다면 이렇게 빨리 사라지지 않았을 거야'라고 말하는 이는 아무도 없다." (85)

- 사랑과 고통의 차이. 사랑은 느낌만이 아니다. 

 

 

이런 점에 비춰 볼 때, 하나님이 사랑 때문에 인류를 창조하셨다는 것이 거듭 분명해진다. 창조 때 자신을 내주신 하나님의 행동과 십자가에서 자신을 내주신 하나님의 행동 사이에는 긴밀한 평행 관계가 있다. (86)

- 사랑은 감정만이 아니다. 행동도 포함된다. 물론, 행동을 한다는 것만으로 사랑이 있다고 판단할 수는 없다. 

 

 

하지만 바울은 자기 독자들에게 확실한 정의를 내놓는다. 사랑은 포기하지 않는다(13:7), 사랑은 결코 끝나지 않는다(13:8), 사랑은 성숙과 하늘의 실존을 보여 주는 지울 수 없는 표지다(13:11-13). 뉘그렌의 말을 빌리면, 사랑은 우리에게 새 창조로 다가온다. (88)

- 삼위일체와 사랑을 한 번 연결시키면 어떨까?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의 사귐! 우리는 그 사귐 안으로!(나는 이 주제를 가지고 결국 설교 한 편을 완성했다. 물론, 내 모든 설교가 그렇지만 이 설교 역시도 업데이트가 필요해 보인다.)

 

 

블랙프라이어스판 편집자들은 아퀴나스가 이 논증을 하나님이 존재하심을 증명하는 "증거"가 아니라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확신을 얻는" 방법으로 여긴다고 주장하며, 이런 믿음이 이성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114)

-오오!

 

 

코클리는 "부성"을 거부하려 하고 정의라는 이름으로 몇몇 신학 진리를 오해했던 이전의 페미니즘에 강한 우려를 표명한다. (206)

- 코클리의 뼈있는 주장

 

 

펠라기우스 자신은 죄의 '유전'을 인정하는 어떤 견해도 거부했다. 죄는 다만 자유로운 선택으로 아담의 예를 따르는 바람에 생긴 결과였다. 그는 인간에게 선을 행할 능력이 없다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생각을 거부했다. 펠라기수스와 반대로, 아우구스티누스는 무지, 정욕, 약함, 고난, 하나님께 관심 없음, 죽음의 불가피성이 보편성을 가진다고 지적했다.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이 행하신 역사는 그야말로 값없이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 인간이 홀로 극복할 수 없었던 것들을 극복할 수 있었다. (256-257)

- 우리가 공적신앙을 가져야 하는 이유.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은혜만이 이런 악을 바로 잡을 수 았다면, 그것이 이 세상에 어떻게 흘러가야 할까? 공적신앙을 가져야 하는 이유!

 

 

우리가 아타나시오스나 아우구스티누스를 고찰하든지 지지울라스나 판넨베르크를 고찰하든, 이들에게 죄는 본질상 하나님을 거부하는 것, 하나님의 자리에 자기를 대신 앉히는 것이다. 지지울라스는 하나님 및 다른 이들과 맺은 관계를 해석학적 열쇠로 본다. (281)

- 반역. 관계가 끊어짐. (이것이 바로 죄다.)

 

 

뒤에서는 요한복음과 히브리서가 예수가 인간이라는 것과 그의 신성을 동시에 강조한다는 점에서 독특하다는 점을 논증할 것이다. 요한복음에서는 예수의 신성을 기탄없이 천명하면서도, 예수가 피로를 느끼는 존재(요 4:6), 목마른 존재(4:7), 비통해하며(11:33), 눈물을 흘리는 존재(11:35)임을 보여 준다. 히브리서도 몇몇 유사한 본문을 제시한다. "예수가 그들을 형제자매라 부르길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신다"(히 2:11), 예수가 "내가 그(하나님)를 신뢰하리라 하시고"(2:13), 예수를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4:15). 이 서술들은, 1960년대 후반과 1970년대 초에 영국에서 등장하여 이렇게 예수의 인성과 신성을 함께 인정하는 말들은 모두 논리상 모순이라고 주장했던 많은 기독론을 반박했다. 오히려 요한복음이나 히브리서에는 이렇게 내적 긴장을 암시하는 부분이 전혀 없다. (376)

- 예수님의 감정

 

 

데일 마틴은 이 주제를 다룬 그의 책에서 노예제에 "겸비가 담긴 의미가 아니라 권위와 힘이 담긴 의미"를 부여한다. 아울러 마틴은 바울이 자신을 "그리스도의 노예"라 정의한 것(롬 1:1; 고전 4:1; 빌 1:1)에 어느 정도 권위를 부여한다. 어떤 이들은 마틴이 이경우를 과장하여 말한다고 주장했지만, 분명 그는 노예제를 구성하는 내용이 노예 소유주나 주인의 태도와 입장에 철저히 달려 있음을 설득력 있게 보여 준다. 그리스도가 주라면, 그분을 섬기는 일은 고된 노역이 아니라 충성과 자유다. 불트만이 말하듯이, "그는 더 이상 자기 자신을 염려하지 않는다." (386-387)

- 바울은 살림을 경영하는 노예?! 그래서 어느 정도 권위?!

 

 

고린도후서 5:5에서 하나님이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셨다"고 말하는 것처럼 미래에 있을 무언가를 확약하는 계약금이나 보증 또는 첫 할부금을 가리키며, 이는 곧 더 많은 것 혹은 더 좋은 것이 오리라고 보증하셨다는 말이다. 이와 비슷한 좋은 예를 현대 세계에서 둘 찾는다면, 하나는 상업 쪽에서 사용하는 말인 계약금이요 다른 하나는 산업 쪽에서 사용하는 말인 생산 라인에서 나온 시제품이다. 계약금은 제 기한에 완전히 더 큰 금액을 지불할 것을 보증하는 착수금에 해당한다. 시제품은 장차 더 많이 나올 생산품을 미리 보여 주는 모델을 말한다. 고린도후서 1:22에서는 이 말을 종종 "첫 할부금"으로 번역하기도 한다. 쿨만은 이렇게 썼다. "성령은 바로 현재에 종말을 미리 지급하는 것과 같다." (431-432)

- 좋은 예

 

 

켈리는 이 영을 성령이라 말하며 이 견해가 더 설득력 있다. 베드로전서 3:19은 복잡하고 논란이 많은 본문이다. 여기서 모든 해석을 살펴보기는 불가능하다. 다만 켈리는 성령이 곧 생명을 주시는 분이라는 틀 안에서 그리스도의 부활에 초점을 맞춘다. 마지막으로, 베드로전서 4:14에서는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신다"고 말하는데, 이는 요한복음 1:32과 유사한 본문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영은 그리스도, 그리스도인, 영광과 긴밀한 관련이 있다. (446)

- 성령은 생명을 주시는 분. 부활도 그런 연장. 

 

 

반면 슐라이어마허를 비판하는 이들은, 슐라이어마허가 비록 그렇지 않은 주장을 할 때도 있으나 그래도 인간이 영을 의식하는 것을 의식 자체를 의식하는 것으로 축소해 버리는 경향이 있다고 주장한다. 분명 슐라이어마허에겐 신학을 종교현상 쯤으로 축소해 버릴 위험이 있었다. (470)

- 인간 -> 영 / 인간 -> 의식 / 고로 종교현상

 

 

아울러 우리에겐 화행 이론 혹은 수행 발화와 성례의 연관성 탐구라는 더 독특한 목표가 있다. C. K. 배러트가 강조하듯이, 신약성경에는 '성례'라는 말이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배러트는, 사방에서 사람들이 이런 사실을 주장하면서도 그 의미는 자주 무시하고 넘어간다고 말한다. 
1) 성례. 성례라는 말은 200년경. 테르툴리아누스가 <세례론>이라는 논문을 발표했을 무렵에 그리스도인들이 사용하는 언어 세계 속으로 처음 들어왔다. (499)

- 용어 면에서 '삼위일체'처럼 '성례'도 비슷하게 볼 수 있지 않을까? 뒤늦게 생겨난 말이지만 의미가 있다. 

 

 

"'기대한다는 것'은 ··· 분명 어떤 과정이나 마음 상태를 가리키지 않는다. 나는 둘이 마실 차" 등을 준비한다. (537) 

- 기대는 행동을!

 

 

오늘날에는 신약학자로서 평판이 나 있는 사람 중 적어도 일곱이 이 소수설을 지지하는데, ... A. C. 티슬턴... 이 견고한 소수에 속한다. (539)

- ㅋㅋ 본인도 포함

 

 


책 맛보기



키르케고르는 이렇게 결론짓는다. "논리 체계는 가능하다. ··· 실존 체계(즉, 진짜 삶의 체계)는 불가능하다." (21)



그는 일부 철학 탐구는 그리스도인에게 도움이 된다고 여겼지만, 다른 것들은 그리스도인을 그릇된 길로 인도한다고 보았다. 가장 넒은 의미로 보면, 철학은 모든 인류가 본디 갖고 있는 합리적 의문을 실제로 캐묻는 일이다. 이 점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 준 것이 그의 켈수스 논박이었다. 클레멘스처럼 오리게네스도 철학 연구를 "성경의 더 깊은 신비를 탐구하기 위한 준비로" 여겨 독려했다. (31) 



마찬가지로 몰트만도 이렇게 강조한다. "교회론은 오직 기독론에서만 전개할 수 있다. 몰트만은 하나님의 영이 교회에 능력을 부어 주심을 언급하면서 이렇게 단언한다. "세상 끝날까지 구원을 가득 채울 사명을 가진 곳은 교회가 아니다. 그것은 아들(성자)과 영(성령)이 아버지(성부)를 통해 이루실 사명이며, 그 사명에 교회가, 계속 이어져 갈 교회를 창조하시는 일이 포함된다." 그는 같은 페이지에서 이렇게 역설한다. "교회는 영을 맡아 관리하지 않는다. ··· 영이 말씀과 믿음의 사건, 성례와 은혜, 직무와 전통으로 교회를 다스리신다." "참된" 교회는 "십자가 아래 있는 교회"다. (488) 



"여호와여 나의 종말을 ··· 알게 하사
 내 삶이 얼마나 덧없는지 알게 하소서." (시 39:4)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 (시 90:12)
 오늘날 이런 태도는 먼 이야기며, 적어도 서구에서는 그러하다. 모든 이가 죽음을 피할 수 없음을 아주 잘 알고 있는데도, 죽음을 생각하며 예견하는 일을 밀어 버리며 때로는 억누르기도 한다. 몰트만이 말하듯이, "죽음에 과한 모든 생각을 밀어 버리고 우리 앞에 무한한 시간이 있는 것처럼 여기며 살아가다 보면 우리는 껍데기만 알고 무심해지며 ··· 망상을 쫓아 살아가게 된다. (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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