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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리뷰/신앙서적

[책리뷰] 천년 동안 백만 마일 - 도널드 밀러

by 카리안zz 2020. 1.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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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느낀 점

 

'아버지의 빈자리'는 먼가 약간 아쉬운 감이 있었다.

아마 그건 부재의 고통이 나에겐 부재했기 때문일거다. 

'아버지의 빈자리' 리뷰를 보면 꼭 이 책을 강추하더라. 

어느 날 밀러의 이 책이 손에 땡기길에 쭉쭉 읽어 나갔다. 

 

이 책은 이야기에 관한 책이다. 

나도 평소에 이야기에 대해서 그러니깐 네러티브!에 대해서 말한다. 

얼마 전 청년들이랑 놀러를 갔을 때도 이와 같은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그 이야기는 이런 요지였다. 

 

'이야기에는 배경(무대), 캐릭터, 역할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현재의 임원 체제로는 온전히 이야기를 다 담아 낼 수 없다. 

사람은 조연이기 보다는 주연이길 바란다.

(물론 조연을 원하는 사람이 있지만 살아가는 시점에서는 모두 주연이다.)

그런데 임원체제에서 그러니깐 회장, 부회장, 총무, 서기, 회계의 체제에서는 

주연과 조연의 짜임새가 좁아진다. 그 외의 인물들은 모두 조연이 되어버린다. 

그러나 셀체제는 어떤가? 배경도 역할도 캐릭터도 모두 주연이 될 가능성이 높다. 

그들끼리의 이야기가 피어오른다. 

그것이 더해져 다른 셀들과의 관계 속에서 이야기가 꽃핀다. 

그래서 더 큰 이야기가 펼쳐진다. 

물론, 이야기를 잘 만들어가는 셀이 있는 가하면 그렇지 못하는 셀도 있을 것이다. 

그러니깐

하나의 큰 중심축에서 파장되는 것이 아니라

여러개의 작은 중심축들이 모여서 하나의 큰 파장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우리는 그 속에서 의미를 발견하고 살아감을 느끼는게 더 쉽지 않을까.'

 

대충 이런 요지였다. 

 

그런데 도널드 밀러에게서 그런 통찰을 본다.

"영웅 역할을 연기하는 여자치고 자기를 이용하는 남자와 데이트하는 사람은 없지. 딸은 이제 자기가 어떤 존재인지 알아. 잠시 잊었던 것뿐이지." - p. 69

이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이야기에 대해 말해준다.

그 속에서 어떤게 변화되어지고 

이야기 되어지고 우리의 삶도 영화와 같이 

이야기가 있다는 것을,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끝까지 알려준다. 

의미를 잃어버린 지금 사람들에게 

조근조근하게 또는 덤덤하게 그는 말한다. 

나는 그 조근과 덤덤이 참 좋다. 

 

 

. 메모

 

 

그런데 이제 문 안에 들어섰으니 어쩔 수 없이 살도 빼고 그녀와 부대껴야 되리라. 살이야 꼭 빼지 않아도 되겠지만, 그러면 이야기가 비극이 될 것이다. 비극을 살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드디어 내게 동기가 생겼다. 이튿날 나는 헬스클럽에 등록했다. - (p. 125-6)  

 

 

-사건이(이야기) 인물을 변화시킨다. 

 

 

한번은 그에게 어떻게 사내들을 그렇게 결속시켰느냐고 물었더니, 카이는 남자들을 결속시키는 열쇠는 함께 목숨을 걸게 하는 거라고 말했다. 내가 말뜻을 잘 알아듣지 못하자 그는 암벽 등반, 급류에서 카약 타기 같은 걸 말하는 거라고 설명했다. - (p. 201)

 

 

-어디 남자들 뿐이랴. 어느 공동체 역시도 목숨까진 아니지만 함께 하는 공유된 기억이 우리를 결속 시키는 것 같다. 고로, 수련회는 공동체의 이야기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절호의 찬스다. 

Ⅲ. 책 속 中

 

 가정에 이야기가 없다 보니 딸은 위험과 모험, 반항과 독립이 있는 이야기를 택한 것이다. "딸은 나쁜 아이가 아니야." 친구가 말했다. "그냥 그나마 제일 나은 이야기를 택한 것뿐이지."

 나는 그의 딸이 이를테면 삶의 채널들을 쭉 돌리다가 그 순간 가장 설득력 있어 보이는 이야기, 자기에게 뭔가를 주는 이야기에 채널을 고정시키는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사람들은 이야기 없이는, 연기할 역할 없이는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p. 67)

 

 

 라디오에서 어떤 여자의 인터뷰를 들은 적이 있다. 가정 폭력을 당하는 사람들을 돕는 여자였다. 그녀는 자기에게 도움을 청하러 오는 여자들이 대부분 현재의 상황 속으로, 그러니까 자기를 구타하는 남자에게로 다시 돌아간다고 말했다. 진행자가 이유를 묻자 그 여자의 말인즉, 대다수 여자들이 가족들에게 피할 수도 있고 자기를 받아 줄 친구들도 있음에도 구타하는 남자에게 다시 돌아가는 이유는 그 상황이 아무리 나빠도 익숙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p. 116)

 

 

조던은 인물을 변화시키는 것은 이야기이지 발단의 사건이 아니라고 말했다. "발단의 사건은 인물로 하여금 뭔가를 하게 만드는 장치예요." 벤이 말했다. "한 번 들어가면 다시 나올 수 없는 문이라고 할까요. 나머지는 이야기가 알아서 하죠." (p. 119)

 

 

 나는 그가 하고 싶은 말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자신 없거나 겁을 먹으리라는 생각도 못했지만 그난 자신 없고 겁먹은 모습이었다...

 "뭐하고 변명할 말이 없구나, 아들아." 그가 내게 말했다. 30년 동안 못 본 사람한테 아들 소리를 들으니 이상했다. 누군가의 아들이라는게 이상했다. 틀린 말은 아닌데도 왠지 다른 시간, 다른 장소, 실제로 벌어진 적이 없는 다른 이야기에나 맞을 것 같았다. 

 "미안하다." 그 말 끝에 그는 울었다. 뺨으로 눈물이 흘렀다. 그는 맥주를 내려놓고 자기 의자의 팔걸이 위로 해서 소파 쪽으로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의 손을 잡았다. "미안하다." 그가 다시 말했다. 감정이 겨워 목소리가 갈라졌다. "날 용서해 주겠니?"

 

 "네, 용서합니다." 내가 말했다. 용서해야 함을 그때는 몰랐지만 어쨌든 했다. 그를 용서한 뒤로는 그에게 어떤 반감도 들지 않았다... 그러고는 무픔이 바스러지겠다 싶을 때까지 내 무릎에 손을 얹고 꽉 쥐었다. 그는 손을 뻗어 내 책을 들고는 씩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주 잘 썼던데." 그가 시간 저 너머에서 오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 이야기들이 정말 기막히게 좋구나." 나는 그의 말에 아무런 의미도 없기를 바랐다. 그의 인정을 필요로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 자아의 일부는 영혼이며, 우리의 영혼은 목마르다. 아버지의 말은 내 영혼 속에 물처럼 스며들었다. (p. 170)

 

 

 확신컨대, 이야기의 가장 환상적인 순간, 마침내 모든 긴장이 해소되는 시점은 정작 실생활 속에는 오지 않는다. 진지하게 하는 말이다. 오만 가지 방식을 다 생각해 보았지만, 인간의 삶이 실제로 클라이맥스에 도달하여 인생 만사가 한순간에 형통하는 방식을 나는 알아낼 수 없다. 영화와 책에는 늘 있는 일이지만 내게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미안하지만 당신에게도 없을 것이다.(p. 215)

 

 

 교회에서 자란 우리는 예수님이 모든 문제의 답이라고 배웠다. 우리 마음속에 동그란 구멍이 있는데 우리는 그것을 섹스, 마약, 로큰롤 같은 네모꼴 말뚝으로 메우려 했고, 하지만 우리의 구멍을 메울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의 원형 말뚝뿐이라고 배웠다. 나도 일부는 그런 약속을 바탕으로 그리스도인이 되었지만, 그래도 그 구멍은 결코 없어지지 않았다. 물론 나는 예수님을 좋아하며 여전히 그분을 따른다. 하지만 예수님이 모든 상황을 더 좋아지게 해주실 거라는 개념은 거짓말이다. 기본적으로 그것은 성경의 신학이 광고의 언어로 변질된 것이다. 사실, 예수님은 사도들에게 이곳 지상의 모든 상황을 더 좋아지게 해주실 거라고 약속한 적이 없다. 바울이 광고에 나와 예수라는 명품을 증언하면서, 한때 권력과 권세를 누리던 자신이 예수를 쓰고 나서부터 감옥을 전전하고 매 맞고 걸핏하면 뱀에 물렸다고 말하는 게 상상이 되는가? 그 제품을 살 사람이 별로 없을 것 같다. 베드로도 별로 나을 게 없다. 전승에 따르면 그는 십자가에 거꾸로 달렸다. 스데반은 성문 밖에서 돌에 맞아 죽었다. 요하는 끓는 기름 가마속에 던져졌다고 한다. 이토록 고통과 희생으로 점철된 종교가 어쩌다 이 땅의 행복을 약속하는 종교로 탈바꿈되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나는 예수님이 상황을 더 좋아지게 해주실 수는 있지만, 완전히 해결해 주실 거라고는 보지 않는다. 여기서는 아니다. 지금은 아니다. (p. 2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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