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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요한계시록

[설교문] 요한계시록 16장 17-21절(계 16:17-21, 계 16:17~21)

by 카리안zz 2022. 9.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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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역개정

17 일곱째 천사가 그 대접을 공중에 쏟으매 큰 음성이 성전에서 보좌로부터 나서 이르되 되었다 하시니

18   번개와 음성들과 우렛소리가 있고 또 큰 지진이 있어 얼마나 큰지 사람이 땅에 있어 온 이래로 이같이 큰 지진이 없었더라

19   큰 성이 세 갈래로 갈라지고 만국의 성들도 무너지니 큰 성 바벨론이 하나님 앞에 기억하신 바 되어 그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잔을 받으매

20   각 섬도 없어지고 산악도 간 데 없더라

21   또 무게가 한 달란트나 되는 큰 우박이 하늘로부터 사람들에게 내리매 사람들이 그 우박의 재앙 때문에 하나님을 비방하니 그 재앙이 심히 큼이러라
새번역

17   
일곱째 천사가 그 대접을 공중에 쏟으니, 성전에서 보좌로부터 "다 되었다" 하는 큰 음성이 울려 나왔습니다.


18   또 번개가 치고, 음성들이 나고, 천둥이 울리고, 큰 지진이 일어났는데, 이런 큰 지진은 사람이 땅 위에 생겨난 뒤로 일찍이 없었던 것입니다.

19   그리고 그 큰 도시가 세 조각이 나고, 민족들의 도시들도 무너졌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큰 도시 바빌론을 기억하셔서, 하나님의 진노를 나타내는 독한 포도주의 잔을 그 도시에 내리시니,

20   모든 섬들이 사라지고, 산들이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21   그리고 무게가 한 달란트나 되는 큰 우박이 하늘로부터 사람들 위에 떨어지니, 사람들은 우박의 재앙이 너무도 심해서, 하나님을 모독하였습니다.

요한계시록 1617-21

 

오늘 본문 17절에는 일곱째 천사가 대접을 공중에 쏟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대접을 왜 공중에 쏟았을까 의문이 듭니다. 땅이나 어떤 대상이 있는 곳에 쏟았다면 수긍이 될 텐데 공중에 쏟았다고 하니 조금 의문이 듭니다. 하지만 공중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 힌트는 에베소서 22절에서 볼 수 있습니다. 제가 한 번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이 구절에서는 사탄을 공중의 권세 잡은 자라고 말합니다. 이 표현대로라면 공중은 사탄이 장악하고 있는 곳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공중은 바로 사탄이 장악한 곳을 말하고 있습니다. 지금 일곱째 천사는 정확한 대상에게 대접을 쏟고 있습니다. 사탄이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성경이 당시 쓰여져 있던 시대와 비교하면 덜 민감한 것같습니다. 아무래도 과학적 사고방식을 하는 현대인들에게는 낯선 개념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현대 인류학자 중에 이 사탄의 정체를 파악해 내려고 한 학자가 있습니다. 인문학계의 다윈, 아인슈타인으로 불리는 르네 지라르라는 인류학자가 바로 그렇습니다. 지라르는 세상에서 신화로 불리는 기록들이야말로 사탄의 체제가 가장 적실하게 기록된 문서라고 봅니다. 그 이유는 모든 인류가 시작하는 기록인 신화에는 예외가 없이 인신제사를 드리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을 제사물로 바치는 인신제사를 그는 발견했습니다.

사탄의 속성이 바로 모방하는 욕망입니다. 이 모방 욕망은 우리 안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타인의 욕망을 우리는 욕망합니다. 오늘날 cf 모델들을 생각해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모방 그 자체가 사탄은 아니지만 이 모방 욕망은 불행히도 끝이 없습니다. 욕망의 경쟁은 끝을 멈출 줄 모릅니다. 그러다가 일이 터집니다. 서로 한 대상을 욕망하던 집단들이 다툼을 벌입니다. 이것을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으로 불립니다. 그러나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은 마지막엔 결국 만인의 일인에 대한 투쟁으로 바뀝니다. 한 사람을 희생시키면 그 모방적 갈등에서 불러온 폭력을 그칠 수 있게 됩니다. 집단들의 그 폭력이 한 명의 사람에게 쏟아부어집니다. 한 명을 희생시키면 이상하게도 사회는 평화로워집니다. 그 희생양은 신성화되고 신으로 추앙됩니다. 그리스 신화의 신들이 바로 이 희생양이었다고 르네 지라르는 말합니다. 신화에서 이 신들에게 죄가 있다고 말하며 자신들의 폭력을 감추어버립니다. 은폐된 폭력이죠. 그리고 찾은 평화는 그리 오래가지 않습니다. 다시 또, 희생양을 만들어 같은 일들을 계속 반복시켜 버립니다. 평화를 이룩하고 공동체를 다시 재생시키는 이 모습은 하나님의 모습을 연상시키는데, 계시록에서도 표현했지만 하나님의 모습을 가장한 짐승의 모습과 다름없습니다.

사탄이 희생시킨 자들은 하나같이 가장 약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리스 신화의 신들은 이상하게 불구자, 육체적, 사회적 결함이 있는 자들이 많습니다. 복수를 피하기 위해 거주지가 없는 사람, 가족이 없는 사람, 불구자, 병자, 버려진 노인들같이 사회적으로 가치가 없는 사람들을 희생양으로 삼은 것이죠. 가장 보잘 것 없고 약한 자들을 희생시킨 겁니다. 이런 걸 보면 독재정권이 희생시킨 자들이 자이니치가 있는데 그 이유가 있어 보입니다. 어디에도 속해있지 않은 자들입니다. 일본인도 아니고, 한국인도 아닌 어디에도 책임져주지 않는 자들이기에 희생양 삼기에 적격이었죠. 살인마 유영철이 그렇게도 많은 사람을 죽일 수 있었던 것도 집에서 가출한 여성들을 타겟으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집에서 버려졌거나, 가출했거나 했기에 사라져도 아무도 찾지 않았기에 그랬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성경은 그 신화에 정면으로 반박을 합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신화 속에 꿈틀거린 사탄은 지극히 작은 자 하나를 희생양 삼고 죽였지만 하나님은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곧 자신에게 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이 사탄의 체제를 폭로합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로 모든 자들이 희생양으로 잡아 죽인 그 죄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오늘 계시록에서는 가장 약한 자를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약한 자를 심판해왔던 그 사탄을 심판하신다고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그때 보좌로부터 큰 음성이 들립니다. “되었다!”

 

19절 하나님께서는 큰 성 바벨론이 어떻게 했는지 기억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전지하시기에 아십니다. 하나님이 또 기억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순교자들의 기도와 땅에서 고난받는 성도들의 기도를 기억하십니다. 이 순교당하고 고난받는 성도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시려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의지와 행위가 바로 오늘 본문 말씀입니다.

 

사탄의 체제에서 우리도 모르게 그 죄악에 빠질 수 있습니다. 오늘 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기억하십시오. 성경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우리를 구해줄 유일한 소리입니다. 그 소리를 붙드는 우리 성도 여러분들이 되시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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