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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요한계시록

[설교문] 요한계시록 7장 1-4절(계 7:1-4, 계 7:1~4)[144,000의 뜻, 십사만사천의 뜻]

by 카리안zz 2021. 9.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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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71-4

 

6장에서 여섯째 인을 떼었기에 7장에서는 일곱째 인을 떼는 내용이 나와야 자연스럽습니다. 그런데 인을 떼는 내용이 아니라 7장에서 갑자기 다른 이야기가 나옵니다. 7장이 갑작스러운 건 아닙니다. 왜냐하면 617절에 누가 능히 서리요라는 단서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 내용이 7장으로 이어지는 겁니다.

 

7장에서는 갑자기 네 천사가 등장해서 땅 네 모퉁이에 서있는 이야기를 합니다. 당시 네 모퉁이나 사방이라는 표현은 온 세상을 가리킵니다. 그러니 지금 네 천사들이 땅과 바다, 각종 나무 그러니깐 창조세계이죠. 이 창조세계를 파괴시키는 걸 막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천사가 와서 하나님의 인을 가지고 해 돋는 데로부터 올라와서 땅과 바다를 해롭게 할 권세를 받은 네 천사를 향해 큰 소리를 외칩니다. 그 내용은 3절에 나오는데 3절 다 같이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3: 이르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치기까지 땅이나 바다나 나무들을 해하지 말라 하더라

 

천사가 가지고 온 인은 아마도 근동의 왕들이 공적인 문서를 공인하고 보호하기 위해 사용하던 인장 반지일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인을 치는 장면은 에스겔서 94-6절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다같이 에스겔서 94-6절을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4: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예루살렘 성읍 중에 순행하여 그 가운데에서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우는 자의 이마에 표를 그리라 하시고

5: 그들에 대하여 내 귀에 이르시되 너희는 그를 따라 성읍 중에 다니며 불쌍히 여기지 말며 긍휼을 베풀지 말고 쳐서

6: 늙은 자와 젊은 자와 처녀와 어린이와 여자를 다 죽이되 이마에 표 있는 자에게는 가까이 하지 말라 내 성소에서 시작할지니라 하시매 그들이 성전 앞에 있는 늙은 자들로부터 시작하더라

 

요한계시록에서도 마찬가지로 인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심판에서 구원받는다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나오는 문제적 숫자 144,000이 나옵니다. 신천지는 문자적으로 이 숫자를 정말로 자신들의 구원받을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시험 쳐서 144,000명을 뽑기도 합니다. 아직 신천지를 믿는 진정한 144,000명이 등장하지 않아서 하나님의 심판이 연기되고 있나 봅니다. 당연하듯이 이 숫자는 하나의 상징으로 봐야 합니다. 저희가 백화점을 문자 그대로 100개의 재화 상품이 있는 상점으로 보는게 아니지 않습니까? 이때의 백은 엄청나게 많음을 뜻하는 상징적인 표현이지요. 마찬가지로 천군만마라는 단어도 그렇습니다. 문자그대로 천 명의 군사와 만 마리의 말이 아니라 엄청나게 많은 군사와 강한 군사력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144,000도 이런 방식으로 읽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상징적인 숫자를 어떻게 봐야할까요? 삼위일체의 숫자 3에서 동서남북을 상징하는 4를 곱하자고 합니다. 4로 곱하는 것은 인침을 받은 자가 온 사방으로부터 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숫자 12는 하나님의 백성의 숫자인 동시에 삼위 하나님이 온 세상 가운데 역사하심을 상징하는 걸로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구약과 신약의 백성은 12지파와 12제자로 상징되기에 이 둘을 곱하면 144가 됩니다. 그리고 무수히 많다는 의미의 1,000을 곱하면 144,000이 됩니다. 이렇게 봤을 때 144,000명은 기독교로 개종한 혈통적인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니라 신구약의 모든 신실한 하나님의 백성을 상징하기에 적합한 수가 됩니다. 그리스도 교회를 가리키는 상징적인 숫자 하나님의 새로운 이스라엘로 볼 수 있습니다. 4절 이후에 열두 지파가 표현된 것으로 힌트로 군사적인 의미도 표현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민수기에 이스라엘 백성을 계수할 때 전쟁 가능한 인원을 헤아렸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이 내용은 재해석하여 이 새로운 이스라엘 백성은 폭력적 충돌이 아니라 자신들의 생명을 희생하는 데까지 신실함을 지키는 군대로 만들기 위해 소집합니다. 다윗의 가지에서 나온 군사적 메시아가 죽임을 당한 어린 양으로 재정의되는 것과 비슷합니다. 예수님의 경우처럼 고난은 악을 전복시키는 중심 전략이랄까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과연 이처럼 구원을 갈망할까요? 작년 코로나가 대구를 휩쓸 때 저희 아버지가 정비공장 월세 4달치가 밀렸습니다. 1000만원이 밀렸는데 땅주인이 대단히 화가 많이 났다고 하더라구요. 코로나 상황인 것도 있고 공장을 거기에서 30년 동안 하고 있는데 그게 그렇게 화가 날 상황인가 싶었습니다. 그게 아버지 장례식 때도 안 올 정도로 화가 날 일인가 싶었습니다. 뭐 그분 사정도 힘든 거면 이해를 합니다. 전형적인 땅 부자에다가 정비공장 부지를 70억에 주고 재개발하자는 제의도 거절한 분입니다. 뒤에 정비공장도 가지고 있는 분인데 그 70억까지 합쳐서 140억이라는 돈을 거절할 정도로 부자입니다. 결국 최근에 재개발을 승낙했는데 아마 140억 이상 되는 돈을 받았을 거라 짐작이 됩니다. 근데 땅이 여기에만 있는게 아니라 도처에 많이 있습니다. 많이 물려받았다고 하더라구요. 이렇게 수백억의 자산가인데 그리 여유가 없는 건지 의문이었습니다. 제가 막 여러 생각을 하고 있는데 그분을 다시 볼 일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꼭 해주고 싶은 말은 돈으로 구원받을 수 없다는 말을 면전에서 해주고 싶더라구요. 죽어서 가지고 가지도 못할 돈이고 다 쓰지도 못한 돈을 가지고 왜그리 미친 듯이 모을까요? 어느 정도라면 모르겠지만. 물론, 제가 그정도 재력을 가지고 있으면 더 잘 알겠지만 아마 평생 가도 모를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제가 잘못 생각한 게 있었습니다. 저런 분들에겐 구원이 필요없겠다 싶었습니다. 이 세상은 그분에겐 너무나 큰 낙원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오늘 말씀에는 하나님께서 심판하신다고 합니다. 이것이 우리에겐 희망이고 삶의 이유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원동력입니다. 초기 그리스도인은 이 계시록을 읽으며 그 희망과 이유를 붙잡고 살았습니다. 오늘이 돈이라면 그때는 로마의 권력이었겠지요. 오늘 우리에겐 여전히 구원이 필요합니다. 정치인들에게, 막대한 자본가들에게, 세상을 움직이는 것 같은 자들에게 심판이 있다고 너희들이 손에 쥐고 있는 것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다고 외치고 싶습니다. 교회의 입을 막을 수 없습니다. 부디 우리의 교회가 다른 말을 하지 말고 하나님의 이 말들을 온전히 외칠 수 있는 교회가 되길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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