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낀 점
얇지만 강렬한 책이다. 저자부터가 그렇다. 모나 D. 후커.(잉 나는 여태 모나드 후커로 알고 있었지?ㅋㅋ)
신학책 각주로 많이 보던 인물이다. 나는 당연히 남자인줄 알았는데 여성이었다. 캠브릿지에서 여성 최초로 명예박사를 받으신 분이다. 그리고 여성 최초로 1988년 세계신약학회에 회장님이시기도 했다. 대표작으로는 BNTC 주석 시리지의 마가복음을 저술하셨다(The Gospel According to Saint Mark).
구글학술로 검색해보니 593회나 인용되었네. 주석류가 좀 인용이 많이 되는데 이정도면 1991년에 나왔어도 제법 인용이 많이 된 것 같다. 물론 인용이 많이 되었다고 클래스가 높다는 건 아니지만 그정도로 인지도가 높다고 보인다.
어쨌든, 대학자은 어떻게 도입부를 그려냈을까 기대감으로 책을 읽었다.
왜 도입부가 중요할까?
이 책은 각 복음서의 도입부를 보면서 전체 줄기를 파악해 나가려는 책이다. 저자가 마가복음 주석을 쓰신 분이여서 그런지 마가복음이 제일 좋았다. 나는 순서를 누가복음 - 요한복음 - 마가복음 - 마태복음 순으로 읽었는데 마가복음 순으로 읽어야 했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확실히 마가복음에서 저자가 전개하는 방식을 알고 난 뒤에 다른 복음서를 읽었더라면 훨씬 유익했을 것이다. 저자는 마가복음을 어떻게 말했을까 살펴보자.
여느 신약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저자도 복음서는 눈으로 읽기보다는 귀로 듣기 위해 쓰였다는 걸 말한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첫 번째 사실은 이 책들이 '읽히기' 위해서가 아니라 '들려주기' 위해 쓰였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활자로 인쇄된 글에 너무 익숙해서 신문이나 잡지가 없던 세상, 컴퓨터의 문서 작성 프로그램이 아니라 손으로 한 자 한 자 글자를 적어야 했던 세상, 단어 하나하나를 베끼는 지난 한 과정을 통과해야만 사본 한 권이 완성되던 세상을 상상하지 못합니다. ... 그 세계에서 책은 희귀한 물건이었습니다. (15)
읽는 일은 우리를 게으른 청중으로 만들었습니다. ... 그렇지만 청중이 낭독되는 이야기를 잘 따라가도록 돕는 방법이 있습니다. 짧고 선명한 문장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이야기 중간에 같은 말을 반복하거나 비슷하게 들리는 말을 자주 사용해 듣는 이들이 명확하게 알아듣게 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수 있겠습니다. (16)
이 지점은 성경을 읽는 모두가 유념해두어야 할 것이다. 당시는 구술로 전수되던 시대였다. 후커는 여기에서 더 나아가 복음서가 듣기 위해 작성되었기에 서두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려준다. 처음을 시작하는 그 장에서 듣는 이로 하여금 큰 의미를 담아낸다. 또, 복음서는 요즘 우리가 QT를 하듯이 개인이 읽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로 함께 모여 '복음', 기쁜 소식을 듣는 방식으로 복음서를 읽었"(17)다는 점을 잘 말해준다.
듣는 이들은 드라마를 듣는 것과 같은 느낌이었을 것이다. 지금의 드라마와 다른 점은 이 드라마는 관객의 참여를 촉구한다는 것(18)이다. 복음서가 드라마 기능을 했는데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를 보면 잘 이해가 될 것이다. 그녀의 설명을 직접 들어보자.
먼저 비극적인 상황이 일어나게 된 배경이 '복잡한 갈등'으로 제시됩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비극을 피할 수 없게 하는 다양한 사건이 벌어집니다. 이후 이야기의 '전환점' 혹은 '반전'이 뒤따르는데 여기서는 발견 혹은 인식의 순간이 나타나고 인물들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얼핏 알아차리게 됩니다. 이제 드라마는 여태껏 숨겨왔던 이야기의 본질을 열어젖히고 '대단원', 즉 비극이 해소되는 결말을 맞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이 시작하는 첫 장면을 '프롤로그'라고 불렀는데, 실제 드라마에서도 이 지점에서 관객들이 극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정보를 제공했습니다. 모든 것은 '에필로그'와 함께 끝맺습니다. (18-19)
복음서에서도 이런 요소들이 있습니다. 그렇기에 복음서를 드라마로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복음서 저자들은 헬레니즘의 영향을 받은 것일까요? 저자는 그렇게도 볼 수 있지만 그렇게만 보지 않습니다. 당시 로마의 동쪽(팔레스타인 지역을 포함)에서는 원형극장이 상연되었다. 마가 역시 그것에 영향을 받았을 수 있다. 그것이 아니라면 마가 자체가 이런 극작가의 재능이 있었다고 볼 수도 있다. 어쨌든,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미 존재했던 것들을 분석했을 뿐"(21)이니 말이다. 극작가들이 여태 작업한 것을 아리스토텔레스는 분석을 하여 정리했을 뿐 인간은 늘 글을 쓰고 있었다.
저자는 왜 글을 도입부가 중요한 건지 당시 구술문화를 설명하고 아리스토텔레스가 정리한 드라마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그리고 이제 의미를 하나씩 짚어나간다. 극을 이해하는 필요한 정보를 서두에 놓아두었는데 그 의미를 이 책에서 배울 수 있다. 복음에 대해, 세례요한과 엘리야 대비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 광야에 대해서든 말이다.
나가면서
나는 네 복음서들을 다 읽고 이 책을 읽었다. 그래서 많이 아쉬움이 있다. 복음서를 읽기 전에 이 책을 먼저 읽었더라면 훨씬 풍요롭게 읽었을 것이다. 그건 같은 출판사에서 나온 리처드 버릿지의 <복음서와 만나다>도 마찬가지다. 복음서를 읽으실 분들은 꼭 이 책을 먼저 읽길 바란다. 여태 읽어오는 복음서들의 넓은 세계를 더 넓게 열어젖힐 것이다! 강추한다!
메모
'극이 어떻게 진행되어야 할지'를 알려주는 규칙이 정해지기 전에 극작가들은 이미 극을 쓰고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무엇을 어떻게 했느냐'는 논리적인 분석은 누군가 무엇을 이미 행한 후에 이루어지기 마련입니다. 마르코는 단지 자신의 이야기를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전달하기 위해 이러한 방식을 택했을 것입니다. (21)
- 굳이 헬레니즘의 영향만 받아 신약성경이 기록되었다는 주장을 할 필요가 없다.
복음서를 읽다 보면 예수가 자신의 세 제자에게 요한이 주님의 날이 오기 전에 돌아온다던 예언자 엘리야임을 말하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31-32)
- 오호!
광야에 위치한 시나이 산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백성에게 스스로를 드러내 보이신 곳이었고, 자신의 백성을 이집트에 서 탈출시켜 약속된 땅으로 안전하게 이끌고 가셨던 때 통과했던 곳도 광야였습니다. 광야는 하느님의 자기 계시 그리고 구원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어떤 유대인들은 그 시절을 황금기로 회상하기도 했습니다. 자연스레 예언자들은 하느님께서 다시 자신을 드러내시고 자신의 백성을 구원하시는 광야에서 새로운 경험을 얻기를 고대했습니다. (42)
- 광야
구약성서가 그리스어로 번역되었을 때, 히브리어 '여인'은 그리스어 명사 파르테노스 즉 '처녀'(동정녀)로 번역되었습니다. 원문의 맥락을 무시하고 이 구절을 미래에 대한 약속으로 처리함으로써 마태오는 이를 예수의 탄생에 관한 예언으로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본래의 본문을 재활용해 새로운 상황에 적용한 것입니다. (67)
- 마태의 구약사용. 여인 -> 처녀
그의 음모는 이야기 막바지에 예수와 대립했던 유대교 권력자들의 음모를, 그리고 로마 총독의 명령에 따른 예수의 처형을 암시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음모들은 모두 하느님에 의해 좌절됩니다. 이야기 초반에는 예수가 이집트로 피신함으로써, 그리고 이야기 결말에서는 그의 부활로 인해 음모는 산산이 조각납니다. 죄 없는 이들의 죽음은 우리에게 하느님의 계획도 고통 없이는 성취될 수 없음을 깨닫게 합니다. 복음 이야기는 예수 자신이 겪은 수난 이야기이지만, 장래에는 그를 따르는 이들이 겪을 수난도 끌어안게 될 것입니다. 이 복음서 도입부가 우리에게 들려준 이야기는 이야기의 결말을 암시합니다. (84)
- 이야기의 시작이 끝에 분명해진다.
궁핍하고 어려운 상황에서 예수가 태어났다는 것은 그를 보기 위해 찾아온 사람들(목자)이 미천한 출선이었다는 것과 잘 어울립니다. 또한 이들은 값비싼 선물을 들고 왔던 마태오 복음서의 현자들과는 날카로운 대조를 이룹니다. (99-100)
- 초대교회 사람들은 이런 대조에 어떻게 반응했을까?
당연하게도 모세와 예수를 비교하는 행위는 정통 유대인들에게 너무나 충격적인 일이었겠지요. 모세를 통해 율법이 주어졌고 예수를 통해 은총과 진리가 주어졌다는 프롤로그를 읽었기 때문에 저와 여러분은 이를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가 "생명의 빵"이라는 주장은 과월절의 의미를 미루어 생각해 보았을 때 적절한 주장입니다. 과월절은 출애굽과 광야에서 만나를 선물로 받았던 사건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요한이 특별히 언급하는 다른 절기는 초막절과 봉헌절입니다. 초막절 절기 중에는 아침마다 실로암 연못에서 물을 길어다 성전 제단에 붓는 예식을 행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이때 예수는 자신이 생명의 물의 원천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봉헌절은 무너졌던 성전을 재건한 일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152)
- 과월절(유월절)과 봉헌절에 일어난 사건이 그 절지의 주제와 잘 맞다.
이는 십자가를 영광으로 보는 것이 얼마나 기이한 일인지 잊어버렸음을 드러냅니다. 십자가는 사형수를 고통스러운 과정을 거쳐 죽음에 이르게 할 뿐더러, 그에게 수치심과 모멸감을 주기 위해 고안된 처형 도구입니다. 아마도 '영광'이라는 말은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묘사할 때 가장 어울리지 않는 단어일 것입니다. 루가는 이를 논리적으로 서술하기 위해 예수가 영광에 이르기 전에 먼저 고통을 견뎌야 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요한 복음서에서 두 주제는 하나로 합쳐졌습니다. 그는 동사 '들어 올려지다'의 중의적 의미를 활용합니다. 예수는 십자가에 들어 올려지는 동시에 영광으로 들어 올려졌습니다. 요한이 예수 혹은 하느님이 영광을 받으신다는 말을 할 때, 이는 예수의 죽음을 언급하는 것일 때가 많습니다. 십자가는 하느님의 본성이 궁극적으로 드러난 사건, 곧 하느님의 사랑과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하느님의 목적이 궁극적으로 드러난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154-155)
- 십자가와 영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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