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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리뷰/성경신학

[책리뷰] 베르너 H. 켈버 - 마가가 전하는 예수 이야기(김태훈 옮김, 감은사)

by 카리안zz 2021. 3.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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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낀 점


 연말부터 신약성경을 차례로 읽기 시작했다. 마태, 마가, 누가복음을 차례로 읽고 있었다. 그냥 읽기만 하기보다는 약간의 설명을 해주는 책이 있으면 어떨까 싶었는데 책장에 있던 이 책이 생각났다. 모두들 극찬하던 이 책이었다. 과연 어떨까? 사람들의 극찬에 나 또한 동의할 수 있었던가? 

 대답을 YES! 이 책이 제시하는 방향에서 마가복음을 읽어나가다 보면 우와! 감탄한다. 마가복음의 이음새를 잘 이어나가는 것 같았다. 마지막은 스포가 될 수 있어서 말하기는 그렇지만 충격적인 결말까지! 물론, 모든 면에서 수긍되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일관성을 유지한 지도를 만나며 마가복음을 읽는다면 정말 유익할 것이다. 내심 모든 성경을 이렇게 간략하게 해설해주는 책이 있으면 좋겠다. 

여행, 그 여행의 목적


 마가복음에 등장하는 여행이 있다. 이 여행은 상당히 중요하다. 

우리가 예수의 여행 패턴에 다시 주의를 기울인다면, 예수의 갈릴리 사역의 목적과 결과가 분명하게 드러날 것이다. 이 여행에는 방향 전환의 세 가지 주요한 국면들이 있다. 간략하게 말하자면, 첫 번째 국면은 가버나움에서 시작되고 갈릴리 전역을 여행하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이 국면에서는 예수의 사역이 압도적인 반응을 낳는다. 두 번째 국면은 가버나움에서 시작하여 어느 한 집, 회당, 곡식 밭 등의 장소로 이어지는 여정이다. 여기에서는 예수의 하나님 나라 메시지에 대한 저항이 점점 커진다. 세 번째 국면은 두 번째 국면과 겹치는 것으로서, 사람들이 점점 많이 몰려드는 바닷가를 배경으로 하는 세 차례의 여행을 담고 있다. 바닷가에 모인 무리들에게 나아가는 이 여정은 새로운 공동체의 청사진을 예견하며 갈릴리 바다를 건너가는 새로운 방향성을 보여준다. (31)


 이런 여행을 통해서 이방인들을 받아드려 새로운 공동체, 즉 하나님 나라 공동체를 보여준다. (밑에 메모를 읽어보라.) 오병이어 이후 갈릴리 바다에서 사건이 발생한다. 이를 켈버는 이렇게 말한다. 

실은, 가지고 있었지만 볼 수 없었던 것이다. 제자들은 유대인과 이방인의 하나 됨(oneness)을 구현해 주는 한 덩이의 떡을 가지고 있다. 이 하나 됨은 예수께서 배를 통한 여행들을 통해서 분명하게 보여주셨던 것이었다. 제자들이 가지고 있었던 떡덩이는 모든 사람들의 하나임[unity]을 상징하는 것이다[고전 10:17을 참조하라-역주]. 배 여행은 순전히 이 하나 됨을 위한 것이다. (65)


 그러니, 배 여행의 목적을 잃어버려서 예수님께서 질책하신 거였다. 그러나 제자들은 계속해서 질책을 받는다.

예수께서는 떡 다섯 덩이로 오천 명을 먹이신 사건과 떡 일곱 덩이로 사천 명을 먹이신 사건에서 얼마를 거두었는지를 물으시며, 제자들로 하여금 상징적인 숫자들인 열둘과 일곱을 대답하게 하셨다(8:19-20). 그리고서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고 물으셨다(8:21). 이 달갑지 않은 어조의 물음이 답변되지 않은 채, 여행은 끝나게 된다. (66) 

 
 제자들이 계속해서 질책을 받은 이유가 여행의 목적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계속 이 여행의 목적을 상기시키려고 하신다. 

예수께서는 세 차례, 세 곳의 다른 "십자가 역"[station of the cross]에서 제자들에게, [아니,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열두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으로 가는 여행의 목적에 대해 가르치셨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눈을 뜨게 하려는 노력을 아끼지 않으셨고, 그들이 예수 생애의 의미를 깨닫도록 애쓰셨다. 예수께서는 고난을 받고 버린바 되어 능욕 받으며 침 뱉음을 당하고 결국에는 죽임을 당하게 되실 것이다. 그러나 그는 죽음을 이기고 삼일 후에 부활하실 것이다. 여기까지가 열두 제자들이 알 수 있고 알아야만 했던 것이다. 이들은 예루살렘에 도착할 때까지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하여 준비될 수 있었고 준비되어야만 했다. 모른다 하더라도 변명의 여지는 있을 수 없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눈을 여시기 위하여 사력을 다하셨다. (74) 


 마지막 결말은 '이 제자들이 눈을 떳을까'와 연관되어 있다. 그 부분을 기대하면서 이 책을 읽어나가면 재미있고 유익할 것이다. 물론, 마가복음은 베드로의 설교에 흔적이 있는데 나는 베드로의 실패를 그 반성으로 본다. 켈버는 거기에 대한 말은 없다. 물론, 그런 말이 있으려면 책은 두꺼워져야겠지. 이 책은 또한, 대비를 통해 그 뜻이 분명히 잘 드러낸다. 밑에 메모를 살펴보면 충분히 이해될 것이다. 

 

나가면서

 
 이 책, 강력히 추천한다! 성경신학이 어떤 책인지 알고 싶다면 이 책을 읽으라. 성경신학의 매력에 흠뻑 빠져보시라! 성경에 빠져보시라! 동의하던 안 되던 읽으라! 그 방법을 읽으라! 


메모

 

예수께서 함께 계실 때는 [말 그대로 예수의] 제자였지만, 예수께서 멀리 떨어져 계시거나 부재하실 때는 사도가 될 것이다. 따라서 이 선교여행으로 인해 제자들은 미래에 예수께서 부재하실 때에 사도로서 역할을 감당할 수 있도록 준비되었다. (52)

- 오호!

 

 

이방인들 가운데서 행해진 대규모의 귀신 축출(5:1-20)과 다수의 치유 이적들(6:53-56), 그리고 이방 땅에서의 한 개인의 귀신 축출(7:24-30)과 한 개인의 치유 사건(7:32-37)이 있은 후에, 이방인들을 공식적으로 수용하는 때가 이르렀다. 사천 명을 먹이신 사건(8:1-9)은 이전에 [유대 지역에서] 오천 명을 먹이신 것에 상응하는 사건으로 이방인을 정식으로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인정하는 것에 대한 확증이 된다. (61)

-오호! 이걸 두 번이라 한 것의 의미

 

 

유대인들을 먹이신 이적에서는 숫자 열둘을 강조하고 이방인들을 먹이신 이적에서는 숫자 일곱을 강조함으로써, 마가가 예루살렘에 있는 초기 기독교 공동체-누가에 따르자면, 열두 사도의 리더십 구조와 스데반의 감독 아래에서 일곱 헬라인들로 구성된 집단이 주재하는 공동체(행 6:1-6)-를 떠올리고 있을 가능성을 배제시킬 수는 없다. (62)

-오호!

 

 

이런 여행의 결과로서 발생하는 것은 바다가 장벽으로서의 힘을 잃고 통합의 상징으로 변형되어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갈라진 틈에 다리가 놓이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두 개나 그 이상의 많은 떡덩이가 아닌, 오직 하나의 떡 덩이만이 있을 뿐이다. 인간의 상태는 더 이상 서로 적대하는 한 쌍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반대와 적의는 극복된다. 이것이 바로 배 여행 단락에 내포된 근본적으로 종교적인 의미[significance]이다. 둘이 하나가 된다. 하나님 나라에는 보편적인 차원이 있다. (67)

- 음. 바다가 아니라 바다 가운데 있는 예수님이 하나로 다리 놓이게 하는 것 아닐까?

 

 

이른바 베드로의 신앙고백이라는 것은 예수께서 베드로를 반박하시고 그럼으로써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의심하도록 만들도록 극적으로 전개되는 이야기의 초기 단계에서만 통하는 묘사일 뿐이다. 그러한 이유로 우리는 마가복음 8:27-33을 예수와 베드로의 대결로 불러야만 한다. (79)

- 이래서 다른 복음서들과 비교해서 보지 말라고 했구나. p. 9-10에 그렇게 말한다. 

 

 

야고보와 요한이 구했던 것은 사실상 권력을 가진 높은 위치가 아니라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곳이었다. 야고보와 요한이 "하나는 그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15:27) 앉게 해달라고 요구했던 그 자리는 실제로 예수의 십자가 처형 당시 두 명의 강도들이 차지했다. 또 다시 제자들, 특히 열둘, 그중에서도 특별히 베드로, 야고보, 요한이 보여준 완전한 오해를 이보다 더 단호하게 강조하는 것이 과연 가능할지 모르겠다. (83)

- 아하!

 

 

이러한 태도는 우리가 이미 살펴본바, 권력을 갈망했던 제자들과도 잘 부합하고, 예수의 첫 번째 수난-부활 예고를 반박했던 베드로와도 잘 어울린다. 그들은 고난과 죽음의 차원을 제거해버림으로써 하나님 나라로 가는 지름길을 갈망했다. 이와 대조적으로 마가복음의 예수께서는 [영광의] 성취를 뒤로 미룰 뿐 아니라, 진정한 삶과 십자가가 죽음 사이의 끊을 수 없는 관계[말하자면, 십자가에서 죽는 것이 진정한 삶이다-역주]를 주장하셨던 것이다. 변형의 영광은 십자가 위애서의 고통을 통해서만 완성될 수 있다. (90)

- 베드로의 모습

 

 

예수와 가장 가까이에 있고 예수를 가장 잘 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진리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사람일 수 있고, 반면에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예수와 멀리 떨어져있는 사람들이 영적으로나 삶의 모습엣 있어서 예수와 매우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일 수 있다는 것이다. (92)

- 오호!

 

 

그들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신앙의 근본 조항에 동의한 서기관과 그것에 따라 살아가는 과부였다. 이렇게 새로운 공동체 안에서 남성뿐만 아니라 여성까지도 받아들이는 행위는 과거의 모든 권력, 특별히 대제사장들, 서기관들, 장로들, 헤롯당원들, 바리새인들, 사두개인들과 같은 남성들이 주도하는 권력 구조에 도전하는 것이었다. (108)

- 음... 과부가 그걸 지지했다고 보는 것은 너무 짝 맞춤이 아닐까? 

 

 

예수께서는 대제사장이나 제사장들에게 기름부음을받지 않으시고, 한 익명의 여인에게 기름부음을 받으셨다. 예수의 기름부음은 사람들의 칭송을 받지 못했고, 오히려 비난을 받았다. 무엇보다도, 예수께서는 생명과 권위를 위하여 기름부음을 받으신 것이 아니라, "장례를 미리"(14:8) 준비하기 위해 기름부음을 받으셨다. 예수의 기름부음은 죽음으로 가는 기름부음이다. (119-120)

- 뒤집기

 

 

이 마지막 만찬은, 하나님 나라가 조상 다윗의 나라와 다르듯이, 베다니에서의 기름부음이 기대되었던 왕위 임명식과는 다르듯이, 전통적인 유월절과는 달랐다. 이들의 식사의 중심은 유월절 어린양도 아니었고-그들이 무엇을 먹고 있었든지 간에-예수의 말씀은 출애굽 사건을 기념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 대신 예수께서는 전통적인 유월절을 자신의 죽음에 비추어서 과감하게 재구성하셨다. (122)

- 뒤집기(다름)

 

 

열두 제자들의 대변자인 베드로는 제자들이 도망갈 것이라는 예수의 예언에 항변했다. (124)

- 항변? 앞선 대결에서 단어는 항변으로 볼 수 있겠지만 지금은 항변으로 볼 수 있을까? 

 

 

그러나 예수를 따라가고자 했던 두 사람이 있었다. 한 사람은 신비에 싸인 청년이다(14:51-52). 이 청년은 예수를 따라가다가 무리들에 의해 체포되지만, 가까스로 도망가게 된다. 체포와 도망과 분열의 중심에서, 이 청년은 죽음으로부터의 구원과 궁극적인 회복을 암시한다. 그 홑이불을 버려두고 벌거벗은 몸으로 도망친다. 유사한 방식으로 예수께서도 세마포로 싸이셨고(15:46), 부활로 인해 그 세마포에서 벗어나신다[escape]. 아 청년은 마가의 복음 이야기 마지막 부분에 다시 등장하여, 예수의 무덤에 앉아서 부활의 소식을 알려줄 것이다(16:5-7). (129)

- 크아!

 

 

예수의 고백은 사형선고를 초래했지만, 베드로의 세 번의 부인은 자신의 생명을 구하려는 시도였다. (133)

- 대비

 

 

예수께서 임박한 고난의 실체에 대해 세 번이나 제자들, 특히 열두 제자들의 눈을 뜨게 하려고 시도하셨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한다(8:31; 9:31; 10:33-34). 그러나 세 차례 모두 그들은 깨닫지 못했다. 예수께서 겟세마네에서 고난의 기도를 드리는 동안 세 제자들에게 깨어있으라고 세 번이나 요구하셨다(14:32-42). 그러나 세 차례 모두 그들은 잠을 이기지 못했다. 베드로의 세 번의 부인은 정점에 이른 제자도의 비극을 보여준다. (133)

- 3번

 

 

한 때 예수의 권위가 귀신들을 몸부림치게 했던 것처럼, 귀신들의 존재는 십자가 위의 예수로 하여금 칠흑 같은 어둠속으로 소리치게 한다. (136)

- 크~ 대비

 


책 맛보기

 

하나님 나라는 새로운 생활방식과 새로운 우선순위, 새로운 공동체를 수반한다.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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