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진짜 작가 짱이다. 넘 재미있게 웹툰을 그리신다.
마가복음은 자유주의를 상대로
마태복음은 근본주의를 상대로 한다.
이 구조는 참 좋다.
언젠가 김세윤 박사님도 요렇게
"자유주의자들의 문제는 성경에 대한 경외심이 없고
역사적 기독교 신앙의 진리에 대한 확신이 없으니까
함부로 경솔하게 판단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근본주의자들의 문제는 성경 말씀의 정신을
이해하지 못하고 문자에 얽매어 율법주의로 나가는 것입니다."
(김세윤, 신약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p. 86)
한 말씀하셨다.
톰 아저씨도 여기 한 깔떼기 하셨는데
"18세기 계몽주의가 역사적 기독교에 던진 도전은
'잘못된 방식으로 필요한 질문을 제기한 것'이라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오늘날 기독교 진영이 자유주의자와 보수주의자로
갈라지게 된 것이다.
전자는 역사적 질문을 던질 필요가 있음을 알았고
그것이 계몽주의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한편, 후자는 계몽주의의 질문 제기 방식이 잘못된 것을 알고는
역사적 질문 자체가 불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톰 라이트, 예수의 도전, p.20-1)
계속해서
"우리가 예수의 이야기를 들려줄 때 이 이야기를 세상에 구현해야 할
공동체의 일부로서 그렇게 한다는 점이다. 나는 예수를 탐구하는 일에
참여하면 할수록, 개인으로서 또 성직자로서 더 많은 도전을 받는다.
내가 발견하는 내용이 전통적인 정통 교리를 깎아내리기 때문이 아니라,
역사적 자료에서 발견하는 더 풍성한 정통 교리가 나 자신과
모든 회중에게 도전을 주기 때문이다. 이런 도전들은 바로 복음의 도전이자
하나님 나라의 도전이기에 굉장히 버겁게 느껴진다....
우리가 그렇게 할 때에만 사람들은 우리의 역사적, 신학적 주장을
진지하게 받아들일 것이다. 우리가 그렇게 할 때에만 처음에 하나의
게몽주의 프로그램으로 모호하게 시작되었던 그 탐구가
하나님의 섭리로 뜻밖의 목적을 수행하게 되며, 우리는 그 수단으로 사용될 것이다.
역사적인 예수 탐구를 두려워하지 말라. 이 탐구를 계기로 우리 시대에 교회가
예수와 하나님을 보는 새로운 시각을 얻개 될 것이다." (앞의 책, p.40-1)
(역시 이분은 목회자;;)
2. 상호본문성(interextuality, 상호텍스트성)이란 말이 있다.
성경을 해석할 때 좋은 기준이 되는 도구다.
예를 들어, 이 웹툰에서도 아주 잘 표현 되었듯이
"마태복음의 구조가 신명기 27-30장 구조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라는 것이 상호본문성을 잘 표현해 준다.
보수적이다라고 말을 할 때에는 이 방법이 강하다는 표현이기도 하다.
그런데 왜 상호본문성에 우리는 주목하는 것일까?
크레이그 에반스 박사님의 말을 들어보자.
"나는 여러 신약학자들과 교제하면서(세계성서학회의 지역별,
국가별 모임에서) 신약학자들 중 상당수가 신약의 셈어적 배경에
대한 훈련을 제대로 받지 못했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스어에 능숙하고 그레코-로만 세계에 대한 지식은 있지만
히브리어와 아람어 능력이 빈약했던 신약학자들과 나는
자주 의견 충돌을 하게 되었다. 대부분의 신약학자들은
초기 랍비 문학과 아람어 성경 석의본에 대한
지식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적지 않은 신약학자들에게서 볼 수 있는 이런 학문적 역량의 부족은 1985년에
로핑크 펑크가 설립한 예수 세미나가 보여준 기괴함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를
잘 성명해준다. 이 세미나의 회원 다수는 그리스 문학과 그레코-로만 문화와
관십에는 익숙하지만 예수의 셈적(유대적) 배경에 대해서는 이해가 턱없이
부족하다. 그들 중 소수만이 고고학을 진지하게 연구해 이스라엘 지리에
익숙해 있을 뿐 랍비 문학과 성경의 아람어 석의본에 대해서는 거의 알지 못했다.
이런 불완전한 학문을 바탕으로 진행된 예수 세미나가 그처럼 요상하고
의문스러운 결론에 이르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크레이그 에반스, 만들어진 예수, p. 19)
아마도 이것은 무시무시한 불트만의 영향인 것 같다.
이상일 교수님의 말을 들어보자.
"불트만의 주장이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던 무 탐구(No Quest)의 시기에는
비유사성의 원리(Principle of Dissimilarity)가 판단기준으로 적용되었다.
진정한 예수 전승은 유대교와 유사하지 않아야 하고, 주후 일세기 교회와도
유사하지 않아야 한다. 유대교와 유사하다면, 유대교에서 영향을 받은 전승일 뿐
진정한 예수 전승이 아니기 때문이다. 거꾸로, 일세기 기독교와 유사하다면,
제자들이 만들어낸 것일 뿐 진정한 예수 전승은 아니기 때문이다.
비유사성의 기준을 적용시켰을 때, 복음서 전승에서 예수 전승은 거의 발견되지 않았다.
불트만의 경우, 우리가 가진 복음서에서 예수전승은 거의 존재하지 않고,
팔레스타인 교회나 헬라교회에서 거의 대부분의 복음서 전승이 형성된 것으로 보았다.
그 결과, 복음서를 통한 역사적 예수에 대한 탐구 자체가 불가능하게 된다.
그래서 시기적으로 무 탐구(No Quest) 시기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상일, <교회와 문화> 27(2011): 53-74. 톰 라이트의 예수 연구 방법론에 대한 평가, p. 64-5)
3-1. 나도 새벽기도 준비를 하면서 이 상호본문성에 매료 되었는데
마가복음 3장을 한번 보자. 3장의 시작은 안식일에 손 마른 사람을
치유해 주시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먼저 치유에 대해서 한 번 보자. 지난 주 박윤만 교수님이 발제한 내용이
이것이었는데 마침 잘 설명해 주셨다.
"하지만 현대 한국 사회의 병과 치유에 대한 이해와 예수 시대,
곧 예수님의 그것에 대한 이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이러한 세계관을 고려한다면 예수 시대의 유대인은 한 사람의 아픔을
개인의 문제를 뛰어 넘어 사회적(가족과 마을의) 문제로,
몸의 병을 뛰어 넘어 존재와 신분 전체에 찾아온 혼돈으로 여겼을 것이 틀림없다. (p. 22-3)
...
결론적으로, 예수님이 행하신 놀라운 일 혹은 기적은 그를 통해 하나님 나라가
임하고 있음을 알려주는 표적이었다. 그가 행한 표적을 통해 엿볼 수 있는 하나님 나라의
특징은 죄 용서, 악한 영의 축출, 사람의 몸 기능의 회복, 사회적 관계의 회복,
그리고 혼돈의 자연에 질서를 부여하는 것들을 포함하는 총체적 회복이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박윤만, 성경과 언어 심포지움 구원과 칭의-예수, 총체적 종말론적 구원자: 마가복음의 예수의 치유, 축귀 그리고 죽음을 중심으로, p. 30)
치유가 혼돈된 세상의 총체적 회복이라면 안식일은 어떤 의미인가?
신현우 교수님의 설명을 들어보자.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질문하신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어느 것이 옳으냐?'(4절).
이 질문은 이미 예수의 답을 암시하고 있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생명을 구하는 것이 옳다. 예수께서 이렇게 생각하시는 이유는
선을 행하고 생명을 구하는 일이 안식일의 근본 정싱에 부합되기 때문이다.
안식일은 애굽에서 노예로 전락하여 쉬지 못하고 중노동에 시달리다가
죽어가는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는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다.
그러므로 안식일의 목적과 정신은 생명을 구하는 것이다."
(신현우, 메시아 예수의 복음, p. 62-3)
그렇다! 안식일 역시 회복이며 이는 대반에 출애굽을 떠올리기 십상이다.
그런데 마가복음 3장 13-19절은 이런 출애굽의 기억이
또 떠오르는 내용이 등장한다. 키워드는 산과 열두 제자이다.
"예수꼐서 열두 제자를 세우셨다. 이러한 사역이 산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출애굽기 19-20장을 배경으로 보면 잘 이해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창조하심이 산을 배경으로 이루어졌듯이 이제 새 이스라엘이
산을 배경으로 창조되기 시작한다. 12라는 숫자는 이스라엘 열두 지파와
관련되므로 예수께서 12 제자를 세우신 것은 이스라엘을 회복하시려는
의도를 암시한다. 북조 이스라엘이 망한 후 사라진 지파들이 종말에 회복되어
이스라엘이 다시 12지파로 회복되리라는 유대인들의 기대가 이제 성취되기
시작하였다."
(앞의 책, p.68)
그렇게 마가복음 3장은 새출애굽에 대한 기억을 가져온다.
머 계속해서 그렇다면 그 하나님의 백성, 그러니깐 가족은 누구인가?
하는 질문이 응당 일어나는데 이것을 예상했는지
바로 예수님의 가족이 등장한다. 가까이 있지만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는.
그런데 이 모습은 누구랑 굉장히 닮았다. 바로 선민으로 생각했던
이스라엘 서기관(율법학자)들이다.
"마가는 예수의 가족과 예루살렘에서 온 서기관(율법학자들)을
비슷한 생각을 가진 집단으로 분류한다. 이것은 마가가 예수와의
혈연적 관계를 통해서 새 이스라엘의 초석 역할을 하며 교권을
장악하려는 사람들이나 율법학자의 지위에 의존하여 그렇게 하려는
사람들을 경계하고 있음을 암시한다."(앞의 책, 70)
머 이런 구조를 샌드위치 구조라고도 하는데 무튼 그렇다면
반드시 해야할 질문이 있다. 그렇다면 누가 하나님의 가족,
그러니깐 백성이란 말인가? 역시 예상했던지 마가는 3장 마지막절
35절에 이렇게 말한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3-2. 요한복음 2장 역시도 이러한 상호본문성을 살펴 볼 수 있다.
우리나라 문화에서는 많은 거부감이 드는 구절하나를 대면
바로 요한복음 2장 4절을 들 것이다. 감히 어머니에게 여자라고 하다니.
우리 문화에서는 어지간히 불손한 표현이 아닐 수 없다.
그러면 먼가 다른 의도가 있지 않을까?
한 번 친절한 우리 성경학자의 말을 들어보자.
"'여자여'라는 호칭은 구약적 배경으로 볼 때 불손한 표현은 아니다.
그렇다고 어머니와 아들 사이에서 부를 수 있는 호칭도 아니다.
여기에서 예수님께서 예수의 어머니와 가족의 주관적 관계를 떠나
창조주와 피조물의 객관적 관계를 설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객관적 관계는 예수님과 그의 어머니와 거리감을 확증하고 있다.
이러한 확증 앞에서 '마리아'라는 이름 대신 '예수의 어머니'라는 호칭을
사용한 것과 대조를 이루는 점에서 더욱 강화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 호칭의 사용은 이 사건에서 아주 중요한 메시지를 던져 주고 있다.
곧 이 호칭의 사용은 그리스도가 하시려는 사역이 혼인 잔치 자리에서
흔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의 차원에서 주어지는 사사로운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큰 계획의 그림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이필찬, 요한복음1 이 성전을 허물라, p. 169)
그런데 여기의 설명은 먼가 조금 부족한 듯 보인다.
그래서 요한복음 최고의 대가로 꼽히는 분의 말을 가져와 본다.
"투리안(Thurian)의 방법은 마리아론에 관한 가장 개신교적 입장일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가톨릭적 접근보다 훨씬 낫다.
우리는 가나에서 마리아가 가지는 상징에 대해 요한계시록 12장에
대한 고찰로부터 시작할 것이다. 여기에는 요한계시록이 요한학파의
사상적 패턴과 관심사에 관한 증거로 사용될 수 있다는 전제가 깔려있다.
요한계시록 12장에는 구속사적 드라마에서 핵심적 역할을 하는 "한 여자"라는
신비한 상징적 인물이 등장한다. 요한계시록이 뱀과 여자,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이 상호 대적하며 여자가 뱀과 맞서는 창세기 3:15에 예시된
드라마를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요한계시록에는
여자가 해산하여 메시아인 아들을 낳아(12:5, 시 2:9) 하늘로 데려 간다.
12:9에 의하면 창세기의 옛 뱀에 해당하는 큰 용은 아이의 승천으로 절망하여
여자와 그녀의 다른 후손들을 공격한다(12:17).
많은 사람들은 요한계시록의 여자가 하나님의 백성의 상징이라는 사실에
동의한다. 이스라엘은 구약성경에서 종종 여자로 묘사되며 그녀의 고통은
해산의 고통으로 묘사된다(사 26:17-18, 66:7). 신약성경과 관련하여 요한계시록
자체(19:7)는 교회를 신부로 묘사한다. 하나님의 백성인 여자에 관한 드라마는
신구약 성경을 모두 망라한다. 이스라엘로서 그녀는 뱀에게 질 수 없는 메시아를
낳으며 교회로서 그녀는 이 땅에서 계속해서 싸우며 박해를 당하지만 후손을 보호한다."
(레이몬드 E. 브라운, 엥커바이블 요한복음1, p. 379-380)
4. 종교개혁자들의 성경해석 방법에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해야 한다.'
는 방법이 있다. 구약과 신약(물론 학자들은 신구약 중간기까지)을
하나의 맥으로 잇는 작업은 굉장히 중요하다. 우리가 흔히 아는
창타구(창조-타락-구속)는 굉장히 큰 틀이다. 성경을 배운다는 것은
이젠 이 큰 틀에서 이제는 조금씩 명확하고 정확하게 알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왜 중요할까?
"진정 교회다운 교회가 되려면 각 세대는 예수의 문제를 붙들고
새롭게 씨름하고 그 성경적 뿌리를 깊이 탐구해야 한다.
추상적인 교의학만 연구하고 세상에는 참여하지 말라는 의미가
아니라, 오히려 예수께서 구하러 오신 그 세상에 참여하기 위해
예수께서는 누구셨고 또 누구신지를 더 많이 알아야 한다는 의미다.
이것은 온 교회의 과업이며, 특히 리더십과 가르침을 담당하는
사람들에게 주어진 과업이다."
(톰 라이트, 예수의 도전, p. 38-9)
5. 예수님이 한 말씀이 내 마음속에 드리운다.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요 21:22)
우리의 신앙이 예수와 상관이 없다는 것만큼 끔찍한게 어딨는가?
내가 알고 있는 성경이 정말 거기서 끝인가?
사랑한다면 알고 싶게 되어있다고 난 믿는다.
성경을 마음껏 사랑하자! 온 맘 다해!
일단 나부터!
6. 참고
1. 김세윤, 신약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성서유니온선교회
2. 신현우, 메시아 예수의 복음, 킹덤북스
3. 이필찬, 요한복음 1 이 성전을 허물라, 엔크리스토
4. 레이몬드 E. 브라운, 앵커바이블 요한복음 1, CLC
5. 크레이그 에반스, 만들어진 예수, 새물결플러스
6. 톰 라이트, 예수의 도전, 성서유니온
7. 박윤만, 예수, 총체적 종말론적 구원자: 마가복음의 예수의 치유, 축귀 그리고 죽음을 중심으로
8. 이상일, 톰 라이트의 예수 연구 방법론에 대한 평가
(예전에 읽고 쓴 글을 다시 공유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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