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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리뷰/인물

[책리뷰] 김교신(KIATS 엮음) - 김교신

by 카리안zz 2020. 1.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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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교신이다. 이름이 멋있지 않은가?

내가 김교신을 안건 고등학생 때였다. 

존경하는 분이 우치무라 간조에게 영향을 많이 받았다기에

나도 우치무라 간조의 책 '구안록'을 하루, 단숨에 읽었다. 

물론 내용은 어려워 그냥 눈으로 따라간 경우다. 

그런 우치무라에게 제자들이 있었는데 

김교신, 함석헌, 송두용 등이 있었다. 

 

이 세 분은 성서조선이라는 잡지를 발견했다.

그 잡지는 조와 사건을 통해 폐간 되었는데 

그 내용은 고등학교 근,현대사 시간에 나온다. 

어찌나 전율을 느꼈던지. 

 

그 김교신의 글을 이번에 읽었다. 

사실 평전인 줄 알고 있었다.허허 

 

 

Ⅰ. 느낀 점 

 

이 책은 과연 80여 년 전에 쓰여진 책인가 싶었다.

'망하면 망하리라' 편과 '우찌무라 간조론에 답하여'에서 특히나 더했다. 

아니 내용 곳곳에 지금 들어도 생생할 정도의 외침이 들렸다.(p. 38-41, 82, 89, 139 등)  

그래서 메모를 남기고 코멘트를 적을 때 '지금도 통하는 말이다!' 연일 캄탄 했다. 

특히나 모 대학원에서 말도 안되는 사건이 터졌을 때 그 때나 지금이나...

남을 의도적으로 왜곡한다. 

 

 "연전에 조선 기독교인 105명의 옥사 당시에 선한 사마리아인으로서 그리스도와 정의를 위하여, 조선 예수교회를 위하여 노력한 일이 있은 외에는 대체로 우치무라 선생은 조선 기독교와는 관계 영향이 전무합니다. 그 우치무라 선생을 향하여 '종교의 독재 제국 건설'이니 '조선 영계를 탐탐웅시(노려보고 위세를 보이면서 남을 대함)'하는 영적 제국주의 야심' 운운함은 너무도 사실을 왜곡한다고 하기보다도 군인이 군비에 관하여 신경과민한 것처럼 교회인이 교회 방비에 관하여 과도하게 신경이 쇠마하여진 병증으로 볼 수밖에 없을까 합니다.

'전도 데이', '전국총동원', '대거전도', '대거기행렬' 등의 문구나 선동은 일찍 한 번도 우치무라 선생께서 들을 수 없었습니다.

대 전도를 하려고 시도하지 말고, 대 기적을 행하려 말고, 오직 신명을 중히 하고, 그 말씀이면 다만 좇고, 신을 믿는 것이 곧 사업인 줄로 믿고, 무위에 유사한 생애를 보내는 것이다. 신앙생애의 대부분은 인내다. 정숙이다. 그러므로 활동 비약을 사랑하는 이 세상과 이 세상 교회에는 칭찬받지 못하는 생애다. 그러나 이것이 신과 함께 걷는 생애다..... 아무런 사업을 일으킴이 없을지라도 감히 불만을 느끼지 않는 생애다. 또 신에게서 어떤 것도 받지 않을지라도 저 자신을 주셨으므로 그 외 다른 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 생애다." (p. 137ㅡ9)

후반부에 과학에 대한 이야기는 왠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번에는 코멘트도 달지 않겠다. 

김교신의 글 그대로 읽어보자. 

 

Ⅱ. 책 속 中 

 

신앙생활이라 하여 복술자(점을 치는 사람)처럼 길흉화복을 예측하거나 특별한 청탁으로써 하나님의 총애를 편취(치우쳐 취함)하는 것을 능사로 아는 것은 대단한 오해입니다. 신앙생활은 기술이 아니라, 천도의 대도, 공의를 활보하는 생활입니다. '망하면 망하리라'는 각오로써. (p.40-1)

 

 

그러므로 기독자는 단지 소극적 금욕주의자가 아니요, 또한 단순히 미래의 천당만을 동경하는 자도 아니요, 실로 현실 생활에서 위대한 욕구를 품고 맹렬히 진구(나아가 힘써 구함)하는 자이어야 하겠습니다. 병고에 신음하는 형제, 실직과 빈한에 공구(몹시 두려워함)하는 형제, 위대한 기도를 품고 시세의 불운을 단식하는 이들은 우선 한 번 모든 급박한 소원을 제쳐 놓고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여' 보지 않겠습니까. (p. 82)

 

지금은 설교로 또는 소위 문서전도로써 복음을 증거할 시대가 아니요, 신도의 전존재 그것으로써 입증하여야 할 때를 당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의 사도된 것은 그 학식과 문필의 힘에 있는 것이 아니요, 실로 존재 그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금일 전도자는 무취무흔(냄새와 흔적이 없음)하여 팔방미인적인 문화인이 어찌 그리 많습니까. (p. 89-90)

 

그러나 저 자신에게는 50년 전 일본 청년들과 같은 고상한 야심이 주 동기가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세속에 수흔(상처를 줌)한 전비를 씻고 다행히 후생에 극락세계에 입족하기를 애원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저의 관심사는 사후 성불의 문제가 아니었고, 철두철미하게 현생의 문제만 생각하였습니다. 사후에 천사로 화하거나 혹은 지옥 열화 중에 태워지거나, 이런 것이 저의 심령의 오전(괴로움을 평정함)에 반거(근거를 잡고 굳게 지킴)한 가장 긴급한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나의 현재의 육체와 심정 이대로를 가지고서 현생에서 1일이라도 완전에 달성할까?' 이것이 저의 최대 관심사였습니다. (p. 94)

 

저들은 허위 조작을 보고 듣고도 분내지 않고, 불의를 목도하면서도 노발할 줄 모르며, 억울한 일 당하는 것을 보면서도 구제할 마음이 발동하지 아니함으로써 도를 통했고 세석울 초탈한 까닭인 줄로 자긍합니다. (p. 102)

 

그러나 우리가 10년에 걸쳐 우치무라 선생에게 배운 것은 무교회주의가 아니요, '성경'이었습니다. '복음'이었습니다. 설령 우치무라 선생의 내심에는 무교회주의란 것을 건설하며 고취하려는 심산이 있었다 할지라도 내가 배운 것은 무교회주의가 아니요, 성서의 진리였습니다. 그러므로 무교회주의에 관한 왈가왈부의 변론을 당할 때는 우리는 대개 유구무언하니, 이는 우리가 전공한 부문이 아닌데 저편에서는 훨씬 열정적으로 공구(힘써 연구함)한 문제인 듯이 보이는 까닭입니다. (p. 114)

 

그러므로 교회 개혁 운운의 일절의 생각을 염두에 두지 않고, 오직 성서의 진리를 배우며 자신을 채찍질하여 그리스도의 족적을 따르려는 것이 우리의 일입니다. 이래도 무교회주의라고 부르고 싶거든 부르십시오. (p. 114-5)

 

오늘날 우리 기독도의 앞에서 진리를 거역하는 역할을 메고 대립한 자는 심히 강대한 괴물입니다. 여호와를 경배하면서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주되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 아버지께만 바치고자 하는 무리는 모조리ㅡ교회의 안에 있거나 밖에 있거나 힘을 다하여 싸워야 할 시대를 당하였습니다. (p. 118)

 

 <성서조선>아, 너는 우선 이스라엘 집집(모든 집)으로 가라. 소위 기성 신자의 손을 거치지 말라. 기독보다 외인을 예배하고 성서보다 회당을 중시하는 자의 집에는 그 발의 먼지를 털지어다. 

 <성서조선>아, 너는 소위 기독 신자보다도 조선 혼을 소지한 조선 사람에게 가라. 시골로 가라. 산촌으로 가라. 거기에 초부(나무꾼) 1인을 위로함으로 너의 사명을 삼으라. 

 <성서조선>아, 네가 만일 그처럼 인내력을 가졌거든 너의 창간일자 이후에 출생하는 조선인을 기다려 면담하라. 상론(서로 의논함)하라. 동지를 1세기 후에 기약한들 무엇을 탄식하겠는가. (p. 168)

 

 

 모진 동결은 고통과 절망을 심각하게 하나 춘양의 기쁨을 절대하게 합니다. 지금 우리에게 임하는 모든 동상은 춘양의 부활을 확연히 하고자 하는 데 없을 수 없는 과정입니다. 우리의 소망은 오직 부활에 있고 부활은 봄과 같이 확실히 임합니다. (p. 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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