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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리뷰/인물

[책리뷰] 최주훈 - 루터의 재발견

by 카리안zz 2020. 2.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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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낀 점

 이 책은 종교개혁 500년 기념으로 루터에 관한 책을 읽어야 하지 않을까 싶어서 읽었다. 일단 여러 책들이 나왔다. 지금까지 나온 책들만 해도 대강 이렇다.

 

롤런드 H. 베인턴, 이종태 역, 마르틴 루터(생명의말씀사)

린들 로퍼, 박규태 역, 마르틴 루터(복있는사람)

스콧 헨드릭스, 손성현 역, 마르틴 루터(IVP)

파이트-야코부스 디터리히, 박흥식 역, 마르틴 루터와 그의 시대(홍성사)

헤르만 J. 셀더하위스, 신호섭 역, 루터, 루터를 말하다(세움북스)

김균진, 루터의 종교개혁(새물결플러스)

김덕영, 루터와 종교개혁()

김용주, 루터, 혼돈의 숲에서 길을 찾다(익투스)

박흥식, 미완의 개혁가, 마르틴 루터(21세기북스)

우병훈, 처음 만나는 루터(IVP)

최주훈, 루터의 재발견(복있는사람)

 

 당시 2017년에 나온 책들 중에 아마도 엄청 전문적이지도, 그렇다고 가볍지도 않은 책으로 최주훈 목사의 책을 선택했다. 일단 최주훈 목사는 루터교 목사이며 독일에서 학위를 받았기에 또 SNS에서 좋은 글들을 쓰기에 호감이 많이 갔다. 지금 만약 저 위의 책들 중 고르라면 린들 로퍼, 셀더하위스의 책은 구입해서 볼 것 같다. 나머지 책들은 도서관이 있다면 빌려서 보지 싶다. 그렇게 읽어서 괜찮으면 구입하겠지만. 김균진이 쓴 루터가 제일 궁금하긴 하다. 우병훈의 책도 좋다고 하지만 나에겐 영 이미지가 좋지 않아서 구입하기 머뭇거려 진다. 

 이 책을 읽으면서 몇 가지 부분이 인상에 남았는데 옮겨 보도록 하겠다. 

 

면죄부인가? 면벌부인가?

 나는 면벌부가 올바른 표현인지 알았다. 하지만 조금 복잡한 이유가 있다. 저자 최주훈의 설명을 들어보자. 

 

최근 들어 '면죄부'라는 용어 대신 '면벌부'라고 고쳐 쓰자는 움직임이 있다. 로마 가톨릭에서 사용하는 '대사'라는 용어에 해당하는 말인데('대사'라는 말은 관대한 용서라는 뜻으로 연옥의 잠벌을 용서하는 수단을 뜻한다) 모두 번역상의 문제다. '번역은 반역이다'라는 말이 있듯이 동일한 라틴어를 번역하는 과정에서 번역자의 신학이 가미되면서 다양한 해석이 등장한 것이다. 가톨릭 측에서는 '면죄부'라는 용어에 심한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고 있는데, 어느 정도 이해가 가는 부분이다. 로마 교회 교리에 의하면, 대사란 '죄'와 관련한 것이 아니라 '형벌'과 관련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루터가 공격한 것은 일반적인 대사나 면벌부가 아니었다. 루터 역시 '관대한 벌의 용서'라는 개념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었고, 이전부터 있던 면죄부(대사)의 사용을 모르던 바가 아니었다. 그러나 루터 당시 독일에서 팔리고 있던 대사는 "모든 종류의 죄를 면죄할 수 있다"고 선전했다. 산 사람들뿐 아니라 죽은 사람들의 죄까지 모두 없애 주는 '전대사'라고 불렸다. 실제로 알브레히트가 고용한 최고의 면죄부 설교가 테첼은 "마리아를 강간한 죄도 깨끗하게 지워 버리는 효력이 있다"고 열변을 토했다. 다시 말해, 루터가 공격한 것은 단순한 면벌이나 관대한 용서가 아니다. 모든 형벌을 지워 버리고 연옥에서 지내야 할 시간을 완전히 지워버린다는 뜻이기 때문에 이제까지 등장했던 모든 증서 중 효력이 가장 강력한 것이었다. 상식적으로 모든 벌을 지워 버린다는 것은 곧 죄를 없애 버린다는 뜻과 일맥상통한다. 즉 루터가 공격했던 것은 '면죄'의 보증표였다. 그 때문에 루터 당시의 '95개조 논제'에 한해서는 '면벌부'라는 용어보다 '면죄부'라는 용어가 보다 타당하지 않을까 싶다. 어차피 번역상의 문제라면 그 의미에 맞게 풀어 쓰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면죄(벌)부는 단순히 종이 위에 쓰인 용서가 아니라, 교회가 보증하는 실제적인 용서였다. 이것을 통해 모든 자범죄들 때문에 보내게 될 몇 달 혹은 몇 년, 아니면 영원히 지속될 연옥의 시간이 지워지게 된다. 물론 실제로는 그렇지 않지만, 당시 순진한 보통 사람들은 죄 사함의 대가로 당연히 지불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에 대한 루터의 반응은 앞에서 살펴본 '95개조 논제'(제1조, 제50조, 제82조)에서 격렬하게 드러난다. (98-99)

 

 면죄부, 면벌부에 대해서 명확하게 말하긴 어려울 것 같다. 위의 저자의 말대로라면 면죄부가 더 맞는 말로 보인다. 

 

종교개혁과 교육(140-146)

 종교개혁은 '오직 성경'을 기치로 달려왔다. 그러려면 모두가 성경을 읽을 수 있어야 한다. 여기에서 하나의 혁명이 등장한다. 루터는 끊임없이 교육의 평등을 강조했다. 곧 '치밀하고 보편적인 교육'을 하고자 했다(140). 루터 당시 문맹률은 상당히 높았다. 당시 자료를 보면 6-10%만 읽을 수 있을 정도였다. 그것도 도시에만 해당한다. 루터에게 교육에 대한 강조는 협상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모든 이가 성서를 읽고 스스로 고민하고 깨달아 실천하는 것'은 곧 기독교 국가의 가장 밑바탕이 되는 출발점이기 때문이다(141). 

 루터의 보편 교육에 대해서 주장했다. 보편 교육이기에 그 대상을 어떨까? <기독교 학교를 설립하고 유지하는 독일의 모든 도시 시의원에게>(1524)라는 글에서 가난한 가정의 아이들을 위해 학교를 세울 것과 장학금을 지원할 것을 도시와 교회에 요구했다. 남자든 여자든 간에 차별 없는 보편 교육에 대한 요구였다.

 다음은 <학교에서 아이들을 돌보는 일에 대한 설교>(1530)를 보자. 당시 독일인들은 덧셈과 뺄셈, 독일어 읽기만 되어도 자녀 교육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루터는 더 높은 수준의 교육을 통해 세속적 삶의 질을 높이고 각자의 직업을 통해 타인을 섬기는 일에 더욱 큰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물론 루터 역시 한계는 있었다. 그는 당시 귀족·군인·농민으로 대표되는 사회적 계급을 인정하고 있었지만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교육을 통해 계급적 서열을 타파할 수 있도록 했다(143).

 그 결과 가톨릭과 개신교의 여성 교육 수준이 확연히 달라진다. 근래 연구 결과를 보면 19세기 말 개신교 여성들이 가톨릭 출신 남자들보다 더 잘 읽고 쓸 수 있었다고 한다. 1908년에는 개신교 여학생 수가 가톨릭 출신 여학생보다 8배나 많았다고 한다. 1970년대를 비교해봐도 개신교 지역이 가톨릭 지역에 비해 교육의 남녀 성비 차가 현저히 적은 것으로 나타난다. 보통 교육은 남성의 전유물로 인식되었고, 독일 내 가톨릭 지역에서는 이런 통념이 그대로 적용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순전히 루터의 크진 않지만 세부적인 교육원리인 '누구나 성서를 읽고 배워서 실천하는 것'이 빛나는 결과이다.(145-146) 

 

옥의 티?

 한 가지 의문 점이 있다. 이 책의 미주 34번이다. 거기에 이렇게 서술되어있다. 

 

다른 개신교에 대한 태도와는 조금 다르지만 현재 교황인 베네딕토 16세가 교황청 교리성 장관으로 재임할 당시인 1993년 교황청 교리성 공식 문서에서는, 루터교회의 실재설에 대해서 논외의 것으로 명시하고 있다. (344)

 

 지금 교황은 프란치스코이며 그는 2013년에 선출되었다. 이 책은 2017년 9월에 출간되었기에 이 글은 적어도 2013년 이전에 쓰여진 글로 보인다. 서문을 보니 2016년 10월부터 청어람에서 '루터의 재발견'이라는 제목으로 5주간 다섯 차례에 걸쳐 진행되었던 강좌가 이 책의 가장 큰 뼈대라고 했다(16-17). 그래도 시간 차이가 3년이나 된다. 어디 썼던 글을 다시 가져온 것일까? 아니면 몇 년간 개인적으로 쓰고 있던 거였을까? 

 편집부에서 이런 부분을 잡아 줬었더라면 좋았을 뻔 했다. 사실 오류가 되는 부분도 아니고 옥의 티일 뿐이다. 완성도 높은 책이 되길 바라는 마음에 이렇게 적어본다. 

 

나가면서

 우리는 여전히 루터에 대해서 배울 부분이 많다. 루터가 살았던 시대에 대해서도 특히 배울 점이 많다. 이 책에서 계속 강조했던 것처럼 루터의 시대와 지금의 시대를 연결시킬 점이 대단히 많기 때문이다. 루터와 그 시대인 종교개혁 시기를 읽으면서 우리의 시대를 대비해 봤으면 좋겠다. 완전히 똑같이 따라갈 수는 없지만 조그마한 길이라도 보이지 않을까? 홀로 교회에서 투쟁하고 계신 분이 있다면 이 책을 추천한다. 당신은 혼자가 아니다. 이미 그 길을 걸어왔던 우리의 신앙의 선배들이 계신다! 그렇다, 우리는 종교개혁의 후예다! 저항하자! 프로테스탄트!

 

 



 

책 맛보기

 

 

교회는 근본적으로 '거룩한 사귐의 공동체'이기에 성직자의 독점적 사유물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신학적으로 규명하고 있다. (108)


그 자리에서 루터는 이 유명한 선언을 처음에는 라틴어로, 그리고 곧 바로 독일어로 말했다. 지식인을 향해서는 라틴어로, 일반인을 위해서는 속어를 거침없이 사용하는 모습은 당시로서는 아주 낯선 풍경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소통의 힘이 곧 루터의 무기였다. (123)


스스로 성서를 읽고 종교적 권위에 질문을 던지는 용감한 신자가 많아져야 한다. 신앙의 이름으로 부패한 성직자를 추종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신앙이 아니라 맹신이다. 스스로 판단하여 행동할 줄 아는 계몽된 신자들이 많아져야 한다. 그래야 수준 미달의 목사, 교권의 수액으로 연명하는 빈대 신학자들의 자리가 줄어들고, 그 자리에 '진짜'들이 자리 잡을 수 있게 된다. (127)


'목사는 교회·대학·시민 사회의 청빙을 통과해야만 자격이 주어진다'는 말은 곧 '신앙과 지성과 사회적 인격이 통합적으로 인정될 때 비로서 목사가 될 수 있다'는 뜻이다. 이 셋 중 어느 한 곳이라도 결격사유가 있다면 개신교 목사가 될 수 없다. (131)


루터에게 비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을 현대적 의미로 재해석한다면, 이웃을 가르고 심판하는 자들이 '교회 밖 사람' 곧 비그리스도인이다. (215)


교회 건물이 필요한 것은 단지 모여서 말씀과 성례전을 함께 나누는 거룩한 성도의 교제가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그는 설명한다.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신자들의 모임이다. (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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