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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리뷰/성경신학

[책리뷰] 마르틴 헹엘 - 십자가 처형

by 카리안zz 2020. 5.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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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낀 점

 십자가에 대한 대부분의 책을 보면 이 책을 인용했다. 마르틴 헹엘은 신학계의 거두이기도 하다. 몇 년 전 신대원에서 에베소서 강의를 들은 적이 있다. 그때 가르쳤던 교수님이랑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그 교수님은 SCI급 해외저널에 기고를 해서 한창 주목받던 신진학자이시기도 하다. Brill에서 책이 나오고 해외저널에 지금도 논문을 실으시기도 하시다. 그분과 여러 이야기들이 기억이 난다. N. T. 라이트는 학계에서 그렇게 높은 수준은 아니라는 것과 보컴은 A급 학자로 평가 받는다. 그중 본인이 생각하는 20세기 최고의 신학자 세명 중 두 명으로 제임스 던, 마르틴 헹엘이라고 말하셨다. 그중 한명은 일부로 남기셨나 싶지만 수업 중 요아킴 예레미아스에게 학문적인 배움을 많이 가졌다고 하셨는데 요아킴 예레미아스가 아닐까 싶다. 여튼, 해외 유수한 저널에 논문이 실릴 정도로 실력있으신 분이 최고로 꼽은 사람이 바로 마르틴 헹엘이다. 이책은 얇지만 각주를 본다면 어마어마 하다. '아 이 책은 진정으로 학술서이구나' 싶은 생각이 바로 떠오를 것이다. 어떻게 이런 책들을 다 읽었지 싶다가 번역을 하신 분께도 감사한 마음이 든다. 

 

1세기 당시의 십자가란?

 지금 우리에게 십자가란 너무나 성스럽고 아름답게 여겨지는 것이다. 사랑의 절정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당시에도 그랬을까? 아니다. 당시에는 철저하게 사형 집행의 잔인한 도구로 여겨졌다. 

신화 전승에는 십자가 처형에 관한 주제가 특히 드물게 나타나는데, 이는 헬레니즘 시대와 로마 시대에서조차, 문학세계 안에 나타나는 모든 형벌 중에서 십자가 처형이 가장 잔혹하다는 것을 강한 반감으로 보여주는 셈이다. (36-37)

 신화에서도 십자가 처형에 대해서 드물게 나타난다. 그만큼 잔인한 것이다. 그로 읽을 정도로 불편하듯이다. 

바울이 말하는 "십자가"의 말씀들에는, 우리에게는 생소할지라도 기독교 전통 밖의 고대 세계에서는 명백했던 바로 그 본래의 잔혹함혐오의 의미가 여전히 내포되어 있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1:17-24에서 말하고있는 것은 오직 이러한 배경 하에 이해되어야 한다. (49)

 십자가에는 잔혹함과 혐오가 있다. 또, 극도로 잔혹한 야만인들의 사형방식이기도 했다. 

특히 켈트족 역시 십자가형을 사용하였는데, 포세이도니오스에 따르면 이들은 범죄자들을 십자가에 달아 신들에게 제물로 바쳤다. (55)

 로마에서도 최고의 형벌 중에 하나였다. 

주후 약 300년경, 파울루스의 저작들이 집대성되어 <격언집>으로 편찬되었는데, 여기에서 "십자가"는 세 가지 "최고의 형벌" 중 최고의 위치에 있다. ... 동시에 <격언집>에서는 십자가형으로 처벌될 것으로 예상되는 범죄들의 목록이 열거되어 있다. 거기에는 적에게 투항하는 것, 비밀을 누설하는 것, 반란을 선동하는 것, 살인, "통치자의 번영 여부"에 관해 예언하는 것, "밤에 경건하지 못한 행위", "마술", 심각한 위증 등이 포함된다. 여기에는 로마제국 후기의 더욱 발달된 사형법이 나타난다. 물론 십자가형은 가혹한 형벌이었기 때문에 언제나 하류계층에게만 집행되었고, 상류계층에게는 보다 "인간적인" 형벌이 주어졌다. (77-78)

 이는 다른 나라들도 마찬가지였다. 

십자가형은 로마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이미 페르시아인과 어느 정도는 그리스인, 무엇보다도 카르타고인들 중 중대한 국가 사범 대역죄인들을 위한 형벌이었다. 말하자면 십자가형은 종교적-정치적 형벌이었다. 특히 정치적인 측면에 무게감이 있었지만, 고대 세계에서 이 두 영역은 분리될 수 없었다. (99)

 십자가는 멸시와 경멸의 대상이었다. 

십자가형은 위험하고도 폭력적인 범죄자들로부터 대중들을 보호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었기에, 대중들은 십자가에 달린 자들을 경멸스럽게 바라보곤 했다. 저 강도들은 종종 도망친 노예들을 그들의 일원으로 받아들였기에, 이때 그 범죄자들에 대한 혐오노예들에게 할당되었던 형벌에 대한 증오와 결합되곤 했다. (105-106)

 십자가는 노예들에게 가해진 형벌이기도 했다. 

대부분의 로마 작품들에 있어서 십자가 처형은 전형적으로 노예들을 위한 형벌로 나타난다. 이러한 특징은, 우리가 알고 있는바 페르시아인들, 카르타고인들 및 다른 민족들 가운데에 있었던 십자가형과 구별되는 로마의 고유한 점으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키케로는 베레스에 반박하는 두 번째 연설문에서 십자가형이 노예에 대한 최고의 형벌이자 극한의 형벌이라고 풍부한 수사학으로 묘사하였다. (109)

 이렇게만 봐도 십자가는 혐오와 수치, 극도로 잔인한 처벌, 멸시와 경멸, 반란자와 노예들에게 가해진 형벌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십자가에 달린 신을 예배한다고 놀렸던 것이다. 말이 안 되는 것이거든. 이것이 바로 1세기 당시의 십자가다. 

 

신약성경의 독특함?

 책에선 우리가 흔히 알고 있던 십자가에 대한 생각의 뿌리를 접근해 간다. 그걸 보면 이 책에서부터 우리의 앎이 시작된 것은 아닌가 싶다. 이 책을 읽고 신약성경이 독특하게 느껴졌던 게 있다. 

로마 세계에서 십자가 처형이 혐오스럽고 넌더리나는 일이라는 것에는 대부분이 동의했다. 그렇기에 이 사건에 관한 언급들을 비문들 안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다. 내가 라틴어로 된 비문에서 발견한 유일한 증거는 "십자가에 못 박히기를!이라는 경건한 소망뿐이다. 여기에서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크룩스"(십자가) 내지는 "파티불룸(교수대)이라는 단어가 카이사르에게서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카이사르가 십자가형을 처벌 방식으로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예컨대, 그는 스페인에서 찹자의 혐의가 있는 세 명의 노예를 즉석에서 십자가에 걸었던 적이 있다; ... , 그러한 종류의 것들에 대하여 쓰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 타키투스 역시 십자가 처형에 관하여 이야기하기를 삼가면서, <연대기>에서 게르만족이나 브리튼족이 로마인들에게 행했던 극악무도한 일로서만 십자가를 최고한도로 언급할 뿐이었다. ... 이러한 상황은 헬라 작가들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본서 10장을 보라). [하지만 고대에 십자가 처형에 관한 언급이 상대적으로 드물게, 그리고 우연히 나타난다는 사실은 역사적인 문제라기보다는, 문화사회학과 관련된 미학적인 문제임을 의미한다. 말하자면, 십자가 처형은 어떤 때보다도 로마시대에는, 광범위하고 빈번하게 시행되었지만, 고상한 문학 세계에서는 이를 다루고자 하지 않았으며 통상적으로 침묵을 지켰다.] (84-85)

 로마 세계에서는 십자가에 대한 기록이 많이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신약성경을 보라! 십자가가 얼마나 많이 언급되었나. 왜 그럴까? 

 앞서 말했듯이 십자가는 극도로 잔인, 수치, 혐오, 경멸, 멸시, 천함, 노예와 반란자들이 받는 아주 부정적인 이미지였다. 그렇다면 왜 이러한 이미지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십자가라는 단어를 썼을까? 

 사도행전을 보면 알지만 사도 바울은 굉장히 유연한 사람이었다. 복음을 위해서라면 중요하지 않는 것은 과감히 타협했다. 그것이 할례문제였다. 디모데를 할례시켰다. 앞에 바로 예루살렘 회의에서 할례는 구원의 문제에서 아무런 효과가 없다고 결의를 했지만 디모데를 할례시킨다. 그것만이 아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을 때도 민수기 6장에 있는 정결법을 지킨다. 그 율법이 효력이 있기때문에 한 것이 아니다. 당시의 정황이 그랬기 때문에 바울이 타협을 한 것이다. 그렇다면 십자가 역시도 그렇게 타협할 수 있지 않을까? 십자가라는 단어를 쓰지 않고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라고 하면 되지 않는가? 왜 그렇게 하지 않았을까? 헹엘이 여기에 대한 단초를 조금 주는 것 같다. 

심지어는 바울 자신의 고통도 마찬가지로 철저히 역사적이고 유일무이한 사건[단번에 죽으심](롬 6:10)의 관점에서 이해되었다. 이 사도가 감내했던 수치와 경멸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수치스러운 죽음을 당했다는 사실에 입각하여 조명되고 설명되어야 했다. 바울의 고난은 십자가와 분리되어 독립적으로 해석될 수 없다. 골로새서 1:24[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의 이해하기 어려운 표현들은 바울에게서 비롯한 것이 아니며(골로새서는 제2바울서신[후대에 바울의 이름을 빌려 쓴 서신-역주]에 속한다), 내가 볼 때, 이 서신에는 바울의 순교-아마도 네로의 박해로 인한-가 이미 전제되어 있다. (49)

 바울은 자신의 고난을 십자가에 비춰서 봤다고 했다. 내 해석으로는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수치와 경멸을 당하고 죽으셨던 이유는 그만큼 인간의 죄를 표현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이 해석은 지금의 신학적 관점으로 보는 것일 수도 있기에 조금 연구를 더 해봐야 한다. 그렇지만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셨다는 것에서 우리의 죄로 당할 처벌이 그토록 끔찍한 것인 것을 나타내는 것은 십자가말고는 다른게 있을까 싶다. 

 

 나는 이 부분을 설교와 연관시켰다. 바울이 십자가라는 끔직한 단어를 타협하지 않고 정면으로 당당하게 쓴 것과 지금 우리가 예배에서 타협하고 있는 성장을 위해 모든 가치를 누락시켜버리는 것을 말이다. 

 

나가면서

 십자가에 대한 근원적 자료를 이 책에서는 보여 준다. 신학생이라면 십자가에 대한 기록에서는 이 책이 각주에 반드시 등장하는 걸 보게 될 것이다. 그 오리지날 소스를 번역된 책에서 볼 수 있음에 감사하고, 이 책을 읽으며 십자가에 대해 더 잘 알게 되어서 공부가 많이 되었다. 


메모

하지만 동시에 이러한 사실은 예수의 십자가가 바울 및 당대 사람들에게 교훈이 되거나 상징적 사변적인 것이 아니라 매우 구체적이고 아주 거리끼는 것 - 최초기의 그리스도인들의 선교 사역에 있어서 부담이 되는 - 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초기의 교회에 속하는 고린도공동체가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멀리하고, 열성적인 영적 생활이나 하늘의 계시가 주는 기쁨, 신비한 성례와 관련한 구원의 확신으로 도피하였던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45-46)

- (십자가는) 부담(이 되는 일이었다.)

 

 

 

신이나 신의 아들쯤 되는 자가 모욕스러운 나무 위에서 죽다니! 이는 새로운 종교를 망치기에 충분했다. (46-47)

- 망치기에 충분!

 

 

 

바울에게 있어서 십자가의 말씀은 결코 단순히 '신학적인 상징'으로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런 식으로 주장하는 것은, 오늘날의 해석 작업이 실제 사실관계에 있어서 빈약하고, 역사와 거리가 있음을 드러낼 뿐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바울의 선포에는 여전히 '예수의 처형 도구'에 대한 완강한 불편함이 발견된다. (49-50)

- 나는 십자가가 불편합니다. 

 

 

 

우리는 (본서 제1장에서 언급한) <옥타비우스>에 나타난 미누키우스 펠릭스와의 곤란한 논쟁에서 정통교리를 수호했던 변증가조차도 거리끼는 십자가로 인해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는 것을 수비게 확인할 수 있다. (50)

- 부담2. 

 

 

 

십자형은 형 집행자에게 우너하는 만큼 때리고 괴롭힐 수 있는 권한이 주어졌던 형벌이었다. (59)

- 자기 마음대로

 

 

 

십자가의 죽음이 노예들에 대한 형벌이었다는 것은 모두가 주지하고 있던 사실이었다. 십자가는 극도로 비천함과 수치와 고통을 상징했다. 따라서 "십자가의 죽음"은 "종[노예]의 형체를 가진 것"의 고통스러운 최후 결과를 뜻하며 찬가 시작부에 나타난바, 십자가에 달리신 분이 선재한 분이라는 신적 본성에 관한 묘사 -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어떤 것보다도 탁월한 찬양[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이셨다] - 와 가장 날카로운 대조를 이룬다. (130)

- 종의 형체, 당시의 십자가는 종들의 형벌이었으니까. 


책 맛보기

 

십자가형을 받을 수도 있었던 노예들과 이방인들에게 있어서 그렇게 혐오스러운 "공포"를 조장했던 십자가가 십자가에 달린 구원자의 메시지를 가로막았던 것은 아닌지에 대해 물을 수 있다. (128)


지금까지 십자가형과 말뚝형 - 이 둘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 이 대역죄나 반국가 범죄, 혹은 전쟁 상황에서 발생하는 범죄에 대하여 나타났지만, 로마시대에는 이 처형 방식들이 노예들이나 폭력범들에 대하여 지방주민들 사이에서 흔히 사용되었다. (156)


우리는 로마제국의 그리스어권 지역에서도 모든 노예들과 하층민들이 십자가형에 대하여 매우 잘 알고 있었다고 결론내릴 수 있다. (160-161)


우리는 동방의 그리스어권 세계에서 십자가 처형이 서방 라틴어권 세계 못지않게 공포스럽고도 혐오스러운 형벌 - 특히 하층민들 사이에서 - 로 잘 알려져 있었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167-168)


이 십자가의 죽음은 통상 중범죄자들이나 로마에 반역한 노예들이 겪는 것이었다. 이러한 십자가에서 처형당한 유대인, 예수 그리스도가 진실로 땅 위에 보내진 신적 존재이자 하나님의 아들, 만물의 주, 도래할 세상의 심판자라는 선언은 어느 정도 교육을 받은 사람들에게 이썽서 틀림없이 "미치고도" 참람한 발언으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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