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낀 점
작년 8월부터 조직신학 책을 읽기 시작했다. 세 권을 정해서 읽었는데 이 책을 가장 먼저 읽었다. 몇 년 전 신대원 입학즈음 이 책을 읽었던 기억 때문이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마음이 뜨거워졌기 때문이다. 조직신학 책을 읽으면서 마음이 뜨거워 지는 경우가 있을까. 신기한 경험이었다. 뜨거워진 이유는 아마도 저자가 현대의 상황에 맞게 메세지를 던지는 것과 문장을 잘 써서가 아닐까 싶다.
뜨거움의 이유
밀리오리의 문장들 속에서 뜨거움을 느꼈다. 그건 아마도 신학과 신앙에 대한 그의 진단에 공감해서였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오히려 참된 신앙, 즉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우리로 하여금 탐구하도록 자극하고 움직이며,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는 습성과 싸우게 하고, 하나님과 세상과 우리 자신에 대해 미처 검토되지 않은 전제들을 놓고 끊임없이 질문하도록 만든다. (27)
신앙인은 신앙이 있기에 신앙과 삶의 불일치로 인해 자주 혼돈스러움을 경험한다. 신앙인은 최고의 주권을 지니신 좋으신 하나님을 믿지만 악이 종종 승리하는 것처럼 보이는 세상 속에서 살아간다. 신앙인은 살아 계신 주님을 믿지만 주님의 임재보다는 부재를 자주 경험한다. 신앙인은 변혁시키는 성령의 권능을 믿지만 동시에 교회의 약함과 신앙의 연약함에 대해서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신앙인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야 함을 알지만 구체적인 쟁점에 대해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심지어 하나님의 뜻을 알 때조차도 그 뜻을 실행하기를 자주 거부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보다 항상 더 크시고 세상은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신앙에 도전하며 반박하기 때문에, 기독교 신앙은 끊임없이 질문을 제기하고 이해를 추구할 수밖에 없다. 에드바르트 스킬러베익스는 이에 대해 "기독교 신앙은 우리로 하여금 생각나게 한다"라고 간결하게 정리했다. (29)
이론이 없는 실천은 맹목적이다. 중요한 질문들, 즉 "그리스도는 누구인가?", "그리스도의 나라는 어떤 곳인가?" 등등의 질문을 성급하게 무시한다면, 이런저런 행동들 중 어떤 것이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위해" 적합한 것인지 어떻게 판단할 수 있겠는가? 생각을 위한 생각, 이론을 위한 이론이 위험한 만큼이나, 생각이 배제된 성급한 행동 또한 기독교적이지 않다. (36-37)
신학의 과제를 제대로 이해한다면 우리는, 신학이 전문적 신학자만의 활동이 아니라 신앙 공동체의 모든 지체들이 참여하는 활동임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37-38)
조직신학의 책이지만 현대의 우상들을 드러내는 저자의 글들을 보노라면 뜨거워 질 수밖에 없다. 글을 잘 쓴다는 것은 나에게 공감이 되었다는 것이다. 공감되는 글인 이유는 그의 관찰력 덕분이 아닐까 싶다. 현대 사회를 관찰하는 그의 눈이 이 책의 묘미 중 하나이다.
아, 저자는 일단 프린스턴 신학교 교수이다. 아직까지 나는 프린스턴 대학과 프린스턴 신학교의 관계를 모르겠다. 교단이 같다면 장로회신학교와 연세대학교 쯤 관계가 되겠고 전혀 다르다면 서울대학교와 서울신학교의 관계가 되겠다. 그런데 행정적으론 나뉘지만 뿌리가 같아 도서관이나 다른 시설들은 공동으로 사용하긴 한단다. 그런면에서는 연세대학교와 장로회신학교의 사이 정도가 아닐까 싶다. 내가 배운 학교의 역사신학 교수님께서 총신대학교와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사이라고 하던데 이건 쫌... 총신대학교랑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은 행정적으로 분리된 별도의 기관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분은 이외에도 틀린 걸 참 열심히 가르치셨다... 여튼, 프린스턴 신학교 교수이지만 독특하게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렇기에 나도 이 책에 대해 말할 때 이 분이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학위를 받았다는 걸 말하기도 한다. 쓸데없이 공격당할 걸 방어차원이랄까. 장신대에서는 이 책이 조직신학 교과서라고 하던데 내가 생각한 장신의 느낌과 많이 닮았다.
신학 방법
저자는 제1장 마지막 쯤 신학적 질문을 제기하는 신학 방법들을 제시한다. 최애하는 팟캐스트 비아출판사의 <슬기로운 독서생활>에서 조직신학의 묘미가 방법론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서 프롤로그가 가장 중요하단다. 거기에 방법론을 언급하니깐. 그래서 조만간 나올 판넨베르크의 <조직신학 서론>이 의미가 있고 재미있을 거라고 했다. 판넨의 책은 12월 초에 나왔고 언젠가 사볼 생각을 가진다. 비아 책이 나에겐 좋은 건 부록으로 해설이 있기 때문이다. 내가 읽은 느낌과 전문가의 시각을 보면 많은 점에서 도움이 된다.
그렇다면 밀리오리의 방법론은 무엇일까?
첫째, 그리스도 중심적 신학이다. 성경에 증언된 예수 그리스도라는 규범으로 교회가 자신과 자신의 선포를 계속해서 점검하는 교회의 학문이라고 말한다. 이것을 바르트의 신학이라고 한다. 신학이 다룰 일차적 질문은 우리의 경험이나 상황 속에서 나오는 질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지금 여기에서 우리에게 제기하는 질문이다.
둘째, 상관관계의 방법이다. 이 방법은 세상과 계시의 대화이다. 계시는 상황에 의해 판단되지 않지만 계시는 특정 상황에 말을 걸었기에 그 특정 상황 속을 읽을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틸리히의 방법론과 연관이 있다.
셋째, 실천적 접근이다. "실천"은 행동 고통, 반성을 함께 포괄하는 개념이다. 이 방법론은 정의를 위한 실제적 헌신과 투쟁이 가장 우선시된다. 구체적 실천을 비판적, 신학적 반성을 위한 출발점으로 삼을 때, 성경을 읽고 해석하는 새로운 방법이 성립될 수 있다. 이 방법론은 해방신학에서 가져온다.
이 책은 이렇게 세 가지 방식으로 전개된다. 위로부터의 신학, 아래로부터의 신학 그리고 실천. 이 방법론은 긴 역사를 지나온 신학의 가지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싶다. 비아 편집장님의 말대로 현대 신학은 바르트냐 틸리히냐라고 하는데 밀리오리는 그 두 길을 융합한다. 거기에 지식으로만이 아니라 현장까지 연결시킨다. 뜨거워지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삼위일체
이 책을 다 요약할 수는 없지만 몇몇 부분은 요약하고 싶었다. 그 중 삼위일체 부분이 그랬다.
삼위일체에는 경륜적 삼위일체(economic Trinity, 구원의 "경륜"에 드러난 성부, 성자, 성령의 하나이면서 삼중적인 작용)와 내재적 삼위일체(immanent Trinity, 하나님의 존재 안에서 위격들의 영원한 구별)가 있다. 내가 이해한 바로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상을 다시 재창조하기 위한 삼위 하나님의 활동을 경륜적 삼위일체라고 하는 것 같다. 그리고 내재적 삼위일체는 삼위 하나님의 속성과 본질에 대해 말하는 것 같다. 그렇기에 이동영 교수는 그의 책에서 내재적 삼위일체가 경륜적 삼위일체보다 크다라고 말했다. 하나님의 활동에는 이 세상과 연관되어 나타나지만 하나님의 속성에는 그것과 상관없이 하나님 자체이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칼 라너의 유명한 문장과 관련이 있다. 칼 라너는 "경륜적 삼위일체는 내재적 삼위일체이며, 내재적 삼위일체는 경륜적 삼위일체다"라고 말하며 이 뜻이 무엇인지 현대 삼위일체 신학에서 논쟁이 있었다고 한다. 자세한건 이동영의 <송영의 삼위일체론>을 보길 바란다.
다시 돌아와서 신학은 삼위일체를 출발점으로 삼아야 한다. 복음 이야기에 따르면 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령"으로서, 또한 자유롭게 하며 화해시키는 사랑의 원천, 매개, 효력 있는 약속으로 활동하신다. 삼위일체 신학은 하나님이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와 관계 맺으신다는 출발점으로 계속 돌아가야 한다. (132-133). 밀리오리의 이 문장에 성부, 성자, 성령이 다 들어가 있다. 신학의 출발은 삼위일체이다. 교회의 위기는 하나님에 대한 이해, 곧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혼동하거나 알려고 하지 않을 때 생긴다.
삼위일체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서로를 내어주시는 사랑의 관계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이 사랑으로 창조세계의 역사 속에서 일하신다. 그 일에도 완성이 있다. 세상을 창조하고 화해시키는 하나님의 목적의 영광스러운 완성을 우리는 새겨야 한다. 고로 삼위일체에는 과거, 현재, 미래가 있다. 그 역사 속에는 고통과 죽음이 포함되나, 동시에 새로운 생명과 부활도 포함된다. 그리고 하나님의 통치 또는 하나님의 나라로 상징되는 종말의 완성을 향하여 전진한다. 창조세계가 모든 예속으로부터 자유롭게 되고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신 분"으로 찬송을 받을 때에야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광은 완성될 것이다(고전 15:28). 삼위일체 신앙은 우리의 입술뿐만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적 삶과 실천을 통해 표현된다. 또한 삼위일체 신앙의 완성은 교리적 규정이 아니라 송영과 찬송과 예배에서 이루어진다. (151)
종교 다원주의의 유형
이 책을 읽고 가장 정리해보고 싶은 건 종교 다원주의 부분이었다. 배운 바가 많았기 때문이다. 일단 그는 크게 세 부분으로 이렇게 나눴다.
(1) 배타주의: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길이고 진리이고 생명이며, 그에 대한 신앙을 통하지 않고서는 구원이 없다고 주장
(2) 포용주의: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결정적인 계시이고, 그에게서 구원은 모든 사람을 포함하며 모두에게 이용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3) 다원주의: 모든 종교는 하나님의 신비의 지식을 전달하는, 구원에 이르는 동등하며 타당한 길이다.
이렇게 보통 세 가지가 가장 쉬운 정리일 것이다. 그러나 폴 니터라는 학자가 새로운 유형을 제안했다.
복음주의: 타 종교를 완전하게 또는 부분적으로 대체하는 유형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의 로마 가톨릭 입장: 타 종교를 성취하는 유형
개신교 자유주의와 로마 가톨릭의 자유주의의 입장: 종교간의 상호성을 인정하는 유형
후기 자유주의적 입장: 종교 각각의 특수성과 비교 불가능성을 인정하는 유형
뒤에 혼잡하게 내용이 전개 되지만 찬찬히 살펴보자.
유형 (1) 배타주의
복음주의는 타 종교는 그분 안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은혜를 알지 못하거나 선포하지 않기 때문에, 계시나 구원은 기독교 이외의 종교에서 발견할 수 없다고 본다. 이것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 자체와 그에 대한 우리의 개념과 이해를 구별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한다고 해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정체성과 그가 의미하는 모든 것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다. 아직 밝혀지지 않은 진리의 빛을 다 밝혀진 것처럼 여긴다고 보는 것 같다.
유형 (2) 복음주의
예수 그리스모만이 구주이고 주님이며, 구원은 그에 대한 분명한 신앙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고백을 확고하게 고수한다. 그러나 유형 2는 타 종교 안에도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어느 정도 드렁 있음을 인정하고, 기독교의 진리 주장이 무시되거나 약화되지 않는 조건 하에서 타 종교인과의 대화를 조심스럽게 승인한다는 점에서 유형 1과 차이가 있다. 내가 보기로 일반계시적인 측면에서 다른 종교들도 들을 말이 있다고 보는 거 같다. 도덕이나 양심, 자연이 그러한 것에 포함 된다. 그러나 그 지식으로 구원에는 이르지 못한다고 확실히 못박아 둔다. "계시에 대해서는 긍정이요, 구원에 대해서는 부정"으로 요약했왔다고 한다. 아마 여기서 계시란 일반계시를 말하는 것이다.
유형 (3)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의 로마 가톨릭
이 유형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의 구주와 주님이며 하나님의 진리와 은혜의 "충만"이다. 모든 종교는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다고 본다. 비기독교 종교들은 본질적인 가치를 담고 있으며 하나님의 진리의 참된 빛을 소유한다고 본다. 따라서 타 종교는 기독교 복음의 진리의 충만성을 수용하기 위한 준비로 간주될 수 있다. 아퀴나스의 유명한 말처럼 "은혜는 자연을 파괴하지 않고, 그것을 성취한다"를 채택한다. 그러니 타 종교 역시도 나중에 기독교로 완성될 것이라고 보는 것 같다.
타 종교에도 구원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유형 3에서는 조금이라도 열어두거나 혹은 침묵한다.
유형 (4) 개신교 자유주의와 로마 가톨릭의 자유주의 입장
유형 4는 예수 그리스도만이 모두의 구주이며 주님임을 확증하는 점에서는 이전의 세 유형과 일치한다. 그러나 유형 4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결정적으로 알려진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사람들이 기독교 복음을 들었는지 아니든지 상관없이 모든 사람에게 어떤 방식으로든 현존함을 주장한다는 점에서 앞의 세 유형과 차이점을 보인다. 따라서 구원은 타 종교 안에서, 그리고 타 종교를 통해서 가능하다. 칼 라너가 대표적으로 주장했다.
그 근거가 무엇일까.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 받기를 원하신다(딤전 2:4). 그렇다면 그 방법 역시도 다양할 수 있음을 해석해 볼 수 있다.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모든 인간 존재의 실존의 심층 속에는 "자유와 하나님과의 구원적 관계성에 대해 영구적으로 현존하는 가능성"이 존재한다고 라너는 본다. 타 종교의 공동체 내에서 그 종교에 의해 매개되는 빛을 향해 신실한 자들은 "익명의 그리스도인"으로 불릴 수 있다. 라너는 비기독교 종교가 "불완전하고 초보적이며, 부분적으로 가치가 떨어진다"고 하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그것을 사용해 "인간이 그분과 그리스도에 접근할 수 있는 구원의 길"이 되게 하신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비판점들도 많다. 성경과 전통에 근거가 없기때문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이 이론은 '신학적 제국주의'라고 비판받기도 한다. 누군가가 '익명의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듯이 왜 누군가는 '익명의 불교도'라고 부를 수 없는가? 라는 비판이다. 결국 기독교가 다른 종교보다 더 진리라는 걸 입증하는 것 아니냐는 비판 같다. 또 다른 사람들은 도덕적이며, 신실하고 선한 의지를 드러내는 사람이 구원을 받는 대상이라면 죄인과 범법자들을 오직 은혜에 의해 받아들이는 하나님의 복음 선포와 모순된 것이 아닌가 하는 비판을 한다.
라너의 이 입장은 확실히 기독교적인 틀이 중심일 수밖에 없다. 그 기독교적인 틀로 타 종교를 보니 신학적 제국주의라는 비판을 받는 것이다. 언젠가 진보적인 신학자가 불교 학회에 가서 불교에도 구원이 있다라는 주장의 논문을 발표했단다. 그런데 반론이 들어왔다. 왜 불교에 구원이 있어야 하는가? 그건 너희들의 개념아닌가? 그렇다. 타 종교에도 구원이 있는가 없는가라는 건 처음부터 끝까지 기독교의 관점인 것이다.
유형 (5) 후기 자유주의의 입장
이 유형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들은 적이 없거나, 혹은 들었지만 이생에서 거부한 자들이 구원받을 가능성에 대해 열린 태도를 보이면서 종교의 차이점을 우선적으로 강조하는 태도이다. 조지 린드벡이 대표적으로 이렇게 주장했다.
린드벡은 타 종교와의 유사점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각 종교가 가진 특수성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강조한다. 종교 간의 대화는 구체적인 논점과 협력 가능성에 대해 "쟁점 위주의 특별한" 만남의 형태를 취한다면 대화의 가능성이 높아질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자세를 유지한다면 그리스도인들은 더 훌륭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고 한다. 비그리스도인의 구원에 대해서 린드벡은, 이생의 마지막 순간이든 그 이후의 비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의 은혜를 만나고 수용할 것이라고 주장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고 본다.
린드벡은 바르트의 강조점과도 유사하다. 니터는 바르트를 초기 신학만 보고 배타주의의 대표자라고 보았지만 바르트는 훨씬 더 복잡하다. 바르트의 견해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가 생명의 유일한 빛이며 하나님의 유일한 성육신한 말씀이라고 고백한다고 해서, 이런 선언이 성경과 기독교 교회 밖에 "참된 말씀"과 "다른 빛"이 존재하지 않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교회는 다른 빛과 말씀을 , 예기치 못한 방식으로 교회에 주어지는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으로 인정하고 열린 태도를 취해야 한다고 했다.
바르트는 보편 구원에 대해서 열린 태도를 취했다. 그 이유는 비그리스도인이 죽음의 순간이나 사후에도 결정할 가능성이 있다는 식의 사변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 창조 때부터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에 대해 가지는 명확한 긍정에 근거한다.
유형 (6)
유형 6은 종교 간 대화의 필수 불가결성을 이전의 다른 유형들보다 훨씬 더 강조한다. 이 유형에 따르면, 그리스도인과 다른 종교인은 각자 자신의 신앙적 헌신에 대해 최대한 진지해야 하며, 다른 종교 공동체를 향해 진심으로 열린 대화를 추구해야 한다. 이와 같은 대화를 통해 양 진영에 실제적인 상호 호혜가 있을 것이다. 이 유형을 지지하는 자들은 그리스도의 보편적 구원의 의미를 확증하면서도, 그리스도와 그를 통한 구원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타 종교와의 만남 속에서 증대되고 교정되며 완성된다고 보았다.
각 종교들 사이에 있는 진리가 서로의 대화를 통해서 더 깊어지고 윤곽이 확실해진다는 주장인 것 같다. 폴 틸리히, 한스 큉, 존 캅이 대표적이다.
이 유형의 비판점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중심성, 기독교 복음의 예리한 특성들, 세상에서의 복음 선포의 긴급성을 상실하는 경향이 있다고 비판한다.
유형 (7)
이 유형은 종교신학이 그리스도 중심주의로부터 철저한 신 중심주의로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 하나님 또는 "궁극적 실재"가 중심이어야 한다. 존 힉이 대표적 주장자이다. 그는 각 종교의 특수성이 아니라 종교 일반이 지녔다고 간주되는 공통점에 초점을 둔다. 각 종교 전통은 서로 다른 길을 통해 동일한 산의 정상에 도달하는 순례자들과 같다고 본다.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를 구주로 받아들이듯, 타 종교 각각도 나름대로 구주를 신봉하고 구원의 길을 제시한다.
이렇게 각각의 유형을 봤다. 풍성한 논의들을 다 옮기진 못했지만 어느 정도 내 생각에 중요하다는 부분들을 옮겨 봤다. 부족하지만 한 번 정리해 보았다. 도움이 되기를.
나가면서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은 장단점을 언급하며 항상 균형을 잡으려고 한다는 점이다. 그렇기에 이 책은 개론서로서 제격이라고 본다. 나도 이 책으로 조직신학을 공부했더라면 어땠을까 싶다. 두께도 그렇게 두껍지 않기에 좋은 책이다. 뒤에 있는 부록 역시도 재미있다. 근데 이런 가상 대화는 로저 올슨의 <신학 논쟁>이 훨씬 재미있게 썼다.
조직신학 책이지만 흥미롭고 재미있고 잘 정리되어 있는 책이었다! 추천! 추천!
메모
질문이 우리를 이전에 다녀본 적이 없는 길로 이끌 때 우리는 질문하기를 두려워한다. 하나님과 그분의 목적을 너무 깊이 탐구한 나머지 우리의 생각과 믿음과 삶이 혼란스러워지는 것을 겁내는 것이다. 우리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발견하지 못하면 전적인 절망에 빠질 것이라고 두려워한다. 이러한 두려움으로 인해 우리의 신앙은 더 심오한 이해를 추구하기보다는 신앙을 감옥에 가두며 지루하고 무능한 것으로 만들고 만다. (32)
- 두려움으로 인한 머뭇거림. '과학이 신을 부정하면 어떻게 되는 거지'라는 두려움이랄까. 근본주의자들이 느끼는 게 아닐까.
칼 바르트는 예언자 아모스의 말을 익살스럽게 차용하여, 끝없는 무의미한 논쟁에 빠진 신학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내가 너희 강의와 세미나를 미워하여 멸시하며 설교와 강연과 성경 공부를 기뻐하지 아니하나니 ... 너희가 지혜의 해석학적, 교리적, 윤리학적, 목회학적 나부랭이들을 내 앞에 드릴찌라도 내가 받지 아니할 것이요... 너희 살진 두꺼운 책들과 논문들과 신학 잡지들과 월간지들과 계간지들도 내가 돌아보지 아니하리니 내 앞에서 치워버려라. (34)
- 하하하하하 나중에 인용해야지.
바르트에게 신학이란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드러난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교회와 교회의 선포를 질문하고 점검하는 과정이다. (48)
- 바르트에게 신학이란.
많은 현대 신학자들은 계시의 의미를 하나님의 인격적 자기-드러냄으로 이해하는 작업의 실마리로서 이야기 형태를 연구했다. (83)
- 여기저기서 내러티브가!
바르트에 따르면 하나님의 말씀은 삼중적 형태, 즉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존재한다. 이 세 가지는 구별되지만 서로 불가분리적 관계를 맺고 있어서 마치 세 개의 동심원과도 같다. (87)
- 와우!
"성경적 내러티브의 사라짐"이라는 심각한 결과를 낳기도 한다. 텍스트 이면에 있는 사실들에 관심을 집중시키면, 결과적으로 성경의 의미는 그것의 문학적 형태로부터 분리된다. 그리고 사실로서 자격을 갖춘 요소만이 근대의 성경학자가 제시하는 새로운 해석의 틀에 맞춰지는 것이다. 그 결과 역사주의적 접근은 해석자가 역사의 본질에 대해 가진 전제들을 텍스트에 적용하고, 이런 전제의 한계 내에서만 성경의 의미를 파악하게 된다는 약점을 가진다. (101-102)
- (아주 좋은) 역사비평 비판
성경을 삼위일체적으로 일관되게 해석하는 작업은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끊임없이 변혁시킬 뿐만 아니라, 인간 자신의 문화적, 정치적 기획에 하나님을 이용하고자 했던 많은 방식에도 도전한다. 자유롭게 하는 하나님의 활동을 드러내는 성경의 이야기는 우리 자신의 다양한 자유의 운동을 허락하는 동시에 계속적으로 비판한다. 교회가 해방신학적 자유를 추구하는 운동들에 대해 반사적으로 불안해하며 반발한다면, 이는 교회가 성경 메시지를 더 이상 이해하지 못함을 폭로할 따름이다. (115)
- 아! 자유롭게 하는 하나님의 활동 vs 인간 자신의 문화적, 정치적 기획
책 맛보기
그리스도인은 성경의 존재를 믿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증언하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다. 성경은 성령의 권능으로 우리로 그리스도를 통해 살아 계신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를 맺도록 하기 위해, 그래서 이웃과 창조세계 전체와 새로운 관계를 맺도록 하기 위해서 필수 불가결하다. 성경의 권위를 올바로 말한다는 것은, 성령을 통해 하나님과 이웃과의 관계 속에서 새로운 삶을 창조하고 영육하는 것을 돕는 성경의 능력을 말하는 것이다. (103)
예수의 재림에 대한 소망은, 첫째로, 기독교의 소망은 아무리 매력적이고 귀중하다 할지라도 어떤 사물이나 개념에 대한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 대한 소망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그리스도인은 생명, 환희, 자유, 정의, 평화를 단지 추상적으로만 소망하지 않는다. 또한 단순히 개인의 생존이나 또는 가족이나 국가나 인류의 생존을 소망하지도 않는다.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소망한다. 선한 모든 것의 토대와 의미가 그에게 있으며, 그가 없이는 모든 것이 공허하고 무가치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소망이 다시 오시는 주님이신 그리스도와 그의 통치를 소망한다. (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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