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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리뷰/신학

[책리뷰] 이동영 - 송영의 삼위일체론[경배와 찬미의 신학](새물결플러스) 삼위일체란? 삼위일체에 대해

by 카리안zz 2021. 1.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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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낀 점

 밀리오리와 티슬턴의 조직신학 책을 읽고 나서 삼위일체가 다시 보였다. 그래서 삼위일체에 대해서 공부를 하고 설교로 녹아내 보려고 했다. 그래서 내가 가진 책들 중에 삼위일체에 관한 책들을 살펴봤다. 내가 구상한 논지랑 맞는 것은 잘 없어서 당황하기도 했다. 믿었던 크리스토퍼 라이트의 책 마저도...ㅜ 그래도 하나 건진게 있다면 이동영 교수의 <송영의 삼위일체론>이다. 이 책을 읽으니 정리가 잘 되었다. 밀리오리와 티슬턴을 읽으며 보였던 삼위일체가 이동영의 책을 읽으며 정리가 잘 되었다. 저자는 독일에서 삼위일체를 주제로로 박사학위를 썼다. 그것도 최우등의 성적이었단다. 그만큼 빠삭하다. 그래서 전문성 역시 놓치지 않고 있다. 


철학적 이해가 아니 송영의 삼위일체

 이동영은 첫 장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래서 그들은(초기 교회 교부들은 - 카리안 주) 하나님을 향하여 "말"하고 "노래"하는 것, 즉 하나님을 향하여 기도하며 찬양하는 행위를 "신학"이라고 불렀다. 신학은 하나님을 향하여 말하고 찬양하는 것이기 때문에, 신학에서 크고 중심 되는 주제는 "하나님"이다. ... 그러므로 신학은 하나님에 관한 말, 즉 하나님에 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17)


바빙크는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교의학(신학) 전체의 유일한 교리이자 독점적인 내용"이라고 주장한다. 신학은 곧 신론이다. ... 그러므로 바빙크는 신론, 즉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야말로 신학의 유일하고 독점적인 주제라는 사실을 다음과 같이 천명한다. (18) 


신학은 우리 구원의 하나님이신 삼위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나아가 삼위 하나님께 찬양과 존귀와 영광을 돌리는 것을 그 "목표"로 삼는다. 그런 의미에서 신학은 신론이며, 이로한 신론은 곧 삼위일체론이다. 이 삼위일체론은 삼위일체에 대한 찬양인 "영광송", 즉 "송영"을 지향한다. 왜 신학은 송영인가? 그 이유는 성부이신 하나님이 성령의 능력 안에서 자신의 독생자를 이 세상에 보내주시지 아니하셨다면 그리스도교 신학은 애초부터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서 그리스도교 신학에 있어서 신론, 즉 삼위일체론의 중요성과 그것의 송영적 성격이 명백하게 드러난다. 그러기에 신약성경 안에서 삼위의 성호가 축도 내지는 송영의 형식으로 등장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고후 13:13). 초기 교회에서 신학, 즉 신론은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찬양(송영) 속에서 표현되었다. (21)


 이 설명을 보고나니 확실히 조직신학의 주제들은 삼위일체의 확장에 불과했다. 신학은 곧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며 그것이 곧 삼위일체에 대한 이해로 이어져야 한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어떤 도구를 가져야 하나? 철학적 이해일까? 삼위일체라고 하고 철학적인 어려운 이론이 생각나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것이 우선이 아니다. 그리스 철학의 바탕으로 초기 기독교가 탄생한게 아니기 때문이다. 

 왜 이렇게 철학적 이해를 중요하게 생각했을까? 그건 서방교회가 그리스 철학을 가지고 삼위일체를 발전시켰기 때문이다. 그리스 철학을 도구로 쓴 게 잘못은 아니다. 잘못 나아갔을 때가 문제다. 잘못 나아갔을 때 "전제군주적 일신론"(70)으로 빠진다. 

 

철학적 이론이 된 배경

 
 물론 철학적 이해가 된 배경이 있다. 저자는 이렇게 그 이유를 소개한다. 

예배 속에서 경배되고 찬양되던 삼위 하나님에 대한 기도와 찬양을 정리하고 체계적으로 해설을 붙이는 작업과 더불어 삼위일체 교리를 정교하게 정립하게 된 동기는 교회 내부에서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잘못된 사상을 유포하는 이단들의 출몰과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다. ... 성부의 "피조물"임을 주장하며 "종속론"을 유포했던 이단자 아리우스와 그의 추정자들의 등장은 초기 교회로 하여금 삼위일체 교리를 이론적으로 치밀하게 정립하는 데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아리우스 이단에 대항하여 아타나시오스와 그의 지지자들 그리고 그후에 등장하는 카파토키아의 세 명의 교부들, 즉 카이사레아의 바실리오스, 니사의 그레고리오스, 나지안조스의 그레고리오스는 정교한 체계를 가진 삼위일체 교리를 정립하는 일에 매진해야만 했다.(참조. 헤르만 바빙크, <개혁교의학>, 제2권, 355). 

- 이동영, <송영의 삼위일체>, 92 각주 12


 이단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정교한 이론적 작업이 필시 필요했다. 하르낙처럼 모든 것을 다 버리려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것을 해체하는 것이 원래 복음을 보는 게 아닐 수 있다. 교부들은 이미 그 균형을 다 가지고 있었다. 비판적으로 수용한 것 뿐이다. 비판을 하려면 삼위일체 자체가 아니라 그 논리 전개나 역사적 배경에서 하면 될 것이라 본다. 이 책이 그것을 보여준다. 

 교부들의 철학을 수용한 작업을 이 책에서는 보여준다. 페이지 200 각주 17이다. 카파도키아 교부들 중 한 명인 카이사레아의 바실리오스가 그렇게 했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론>의 개념을 재해석했다. "휘포스타시스"를 개별실체로, "우시아"를 개별실체들이 공유하는 공동본질의 의미로 사용하여 세 위격들과 한 본질을 구분하여 하나님의 "삼위성"과 "통일성"(일치성)을 동시에 표현하였다. 바실리오스는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비유하며 설명했다. 베드로, 야고보, 요한은 개별자이자 개별실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세 개별자(개별실체)가 공유하는 우시아, 즉 공동본질은 "사람"인 것이다. 이러한 구분을 삼위일체에 적용하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세 위격들, 즉 세 개별자(개별실체)들이며 세 개별자가 공유하는 공동의 본질은 하나님인 것이다."(200)
 그러니깐 강아지의 종류가 여럿있다. 말티즈, 치와와 등. 그러나 이들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본질은 '강아지'다. 그걸 범주로 묶으며 각각의 실체를 볼 수 있는 것이다. 강아지는 여러 종류가 있지만 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령만 있으신 것이다. 하나라는 것은 그 공동본질에서 "하나님"이라는 것이 바실리오스의 가르침같다. 이 부분은 유명론이냐 실재론이냐가 생각났다. 그때도 이런 범주를 소개하며 유명론 논쟁을 소개한 게 자연스레 떠올랐다. 이런 철학적인 설명으로 삼위일체를 설명했었구나 싶었다! 이걸 저자는 신학 역사에서 불명의 공헌으로 본다. 왜냐하면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경에 남겼기 때문이다. "세 개별실체들(위격들) 안에 있는 한 공동본질(본질)" 신대원때 조직신학 교수님은 이걸 왜 그냥 외우게 했는지 이해가 안 된다. 이렇게 철학적인 배경으로 설명해서 이해를 시켜주면 쉽게 알았을 건데... 아쉽다. 한 학기 학자금 몇 백만원으로는 못배웠지만 단돈 만오천원으로 배웠다. 신학교의 위기가 괜히 있는게 아니다!

 

 

서방교회와 동방교회 사이에서의 균형

저자는 삼위일체를 이해하는데 동방과 서방의 삼위일체에 균형을 가지려고 한다. 일단 그가 정리한 요점은 이것이다. 82페이지에 있는 내용을 옮긴다. 

 

서방의 이해 방식: 한 분 하나님의 본질 또는 주체를 전제한 후, 그 한 분 하나님의 본질이 어떻게 삼위, 즉 세 위격들로 존재하시는가를 해명하려고 한다. 

 

동방의 이해 방식: 세 위격들, 즉 성부, 성자, 성령을 전제하고, 이러한 세 위격들이 어떻게 "하나 됨"을 이루고 있는가를 해명하려고 한다. 

 

 그러니까 서방은 각각의 존재를 강조하고 동방은 연합을 강조한다. 1970년대 이후 삼위일체 르네상스가 불었다. 그 이유는 동방의 삼위일체가 다시금 재조명 되었기 때문이다. "사귐", "연합", "하나 됨"을 강조하는 동방신학의 이해 방식은 세 위격들의 "상호관계성" 즉 "사회성" 내지는 "공동체성"을 강조하기 때문이다(162). 대표적인 학자로 위르겐 몰트만,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 발터 카스퍼, 레오나르도 보프, 마르 오스타티오스, 존 지지울라스가 있다. 

 서방과 동방의 이해방식에 대해서는 "제 12장 동방과 서방의 삼위일체론, 그 이해 방식의 차이"에서 자세히 나온다. 참 유익한 장이었다. 그 중에 하나를 말하자면 서로 한 쪽으로 치우치면 동방은 종속론의 위험(그러니깐 성자와 성령이 동등하지 않고 성부에게 종속되는)이 있고 서방은 양태론(하나의 존재가 모양만 바뀌어서 존재한다는 것. 예로 한 존재는 아빠이면서 아들이라는 것. 모양만 바뀌어서 존재)의 위험이 있다. 

그렇지만 여기서 명백히 깨달아야만 하는 것은 카파도키아의 세 교부들을 따르는 동방의 삼위일체론이 종속론을 정당화시키기 위하여 신성의 유일한 원천을 성부라고 주장한 것이 아니며, 아우구스티누스 교부를 따르는 서방의 삼위일체론 또한 양태론을 정당화시키기 위하여 한 분 하나님의 유일한 본질을 신성의 원천이라고 주장한 것 아니라는 점이다. 동방과 서방의 교부들은 종속론과 양태론을 배격하는 일에 모두 이견이 없었으며 이 점에서 철저하게 뜻이 같았다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168-169)


그러므로 우리는 동방을 따라 삼위로부터 본질의 하나 됨, 곧 일치성으로 나아가야 하지만, 역으로 서방을 따라 본질의 단일성으로부터 삼위로 나아와야만 한다. 동방과 서방의 삼위일체론의 이해 방식은 역동적인 상호관계 속에서 상보적으로 이해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지극한 삼위일체의 신비 가운데서 하나님의 위격의 삼위성과 본질의 일치성, 즉 하나됨은 양자 중 어느 쪽도 다른 한 쪽을 앞서지 아니하며 동시에 함께 존재하기 때문이다. 본질의 하나 됨을 위하여 삼위를 희생시키지 않고, 삼위의 구별을 위하여 본질의 하나 됨을 희생시키지 않는 것이야말로 삼위일체를 올바르게 이해하는 첩경인 것이다. 그래서 아타나시오스는 알렉산드리아의 디오니시오스를 따라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었다. 
우리는 나누지 않고 통일성을 삼위로 확장시킨다. 그리고 동시에 우리는 삼위를 축소시키지 않고 통일성 속에 요약한다. (178)


 이렇게 위의 저자의 설명을 본다면 될 것이다. 

 

 

다른 종교들과 구분할 수 있다

 다른 종교들과 비교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삼위일체에 대한 이해라는 걸 배우게 되었다. 

그리스도교는 삼위일체 교리로 인하여 "유대교"와 "이슬람교" 등과 같은 전제군주적 일신 종교(Monarchischer Monotheismus)로부터 자신의 정체성을 구분할 뿐만 아니라 "힌두교"와 같은 다신 종교 및 불교와 같은 무신론 종교로부터도 자신의 정체성을 구분할 수 있었다. 만약 삼위일체 교리가 없었더라면 초기 그리스도교는 자신들의 종교 전통에 대해서 대단한 확신과 열정 그리고 물불을 가리지 않는 실천력을 가진 유대교나 이슬람교의 틈바구니에서 스스로의 정체성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삼위일체 교리는 계몽주의 이래로 유럽의 지성들에게 지속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던 철학적 "이신론"(Deismus)이나 종교철학적 "범신론"(Pantheismus)으로부터도 그리스도교의 정체성을 구분 짓는 교리다. (88)


우리는 삼위일체론과 더불어 유대교와 이슬람교의 전제군주 신론이 추구하는 신적 단일성으로 인하여 초래되는 정치적·종교적·사회적 독단성, 그리스 종교 및 힌두교 등의 다신교적 사유가 초래하는 반윤리적인 디오니소스적 무질서의 혼돈, 그리고 철학적 이신론이 초래하는 이 세상에 대한 허무주의적 무의미성의 예찬과, 종교철학적 범신론이 초래하는 이 세상과 만물에 대한 신격화 또는 우상화의 오류들을 모두 물리치고 그것들을 훌쩍 뒤어넘어서 다양성과 일치성, 내재와 초월 가운데서 약동하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과 영광의 신비를 침묵 가운데 묵상하며 찬양한다. (180)


 확실히 그렇다. 다른 종교와 차이를 둔다. 예전에 아버지는 말했다. 세계의 절반 이상이나 하나님을 믿는다고. 이슬람교도 구약에 나오는 하나님을 믿으니깐 절반 이상이나 믿는다는 말이었다. 그러나 나도 몰랐지만 그들은 우리 안식하는 하나님은 연약하다고 본다. 그리고 그때 아버지에게 말했듯이 삼위일체 하나님을 안 믿으니 이슬람은 기독교의 하나님과 같지 않다고 했다. 아버지는 그래도 성부 하나님은 믿지 않느냐고 말했지만 그건 의미가 없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에 대한 믿음 없이는 같은 하나님일 수 없다. 

 

계몽주의 이후의 삼위일체론: 칸트와 헤겔

 삼위일체론이 우리의 삶과는 전혀 상관없는 하나의 무의미한 사변으로 이해된 계기가 있긴 하다. 그것은 계몽주의를 지나오며 생겨났다는 것이 저자의 지적이다. 다른 책 <삼위 하나님과의 사귐>을 읽었는데 거기에선 토마스 제퍼슨의 말을 인용한다. 그 역시도 삼위일체를 하나의 무의미한 사변으로 여겼다. 토마스 제퍼슨도 계몽주의 18, 19세기 사람이다. 대표적으로 칸트와 슐라이어마허 역시도 그렇게 여겼다. 칸트는 "삼위일체론을 완전하게 이해했다고 믿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삼위일체성의 교리로부터 문자를 따라 어떤 실천도 만들어낼 수 없다."(101)고 말했다. 교회가 이해해온 삼위일체론에 반해하여 "윤리적 일신론"을 주장했다. 후에 하르낙 역시도 삼위일체를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해 그리스적 변질된 요인으로 지적했다. 

 그러나 헤겔은 달랐다. 그는 삼위일체적 사유를 자신의 사상의 중추로 삼은 철학자였다. 최근 김균진의 <헤겔의 역사철학>이란 책이 나왔다. 부제격으로 "삼위일체론과 메시아니즘의 지평에서 본 헤겔 철학 이해"로 적혀 있다. 왜 이런 책이 나왔는지 알게 되었다. 헤겔은 이렇게 말했단다. "하나님이 삼위일체 되신 분임을 모르는 사람은 그리스도교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다."(103) 물론, 그가 주장한 절대정신의 3중적 자기 이해는 양태론적이라는게 문제지만(104).  

 물론, 18-19세기를 지나 1970년대로 접어들면서 삼위일체 르네상스가 일어난다. 거기에 대해선 제 9장을 살펴보길 바란다. 

 

나가면서

 삼위일체가 철학적으로 변증하려고 생긴 것이 아니라 예배와 송영때문이라는 것을 저자는 계속해서 강조한다. 계속된 반복이 지나치다 싶었지만 그래도 그 반복때문인지 얼핏 이해가 되었던 것이 이제 확실히 이해가 되었다. 위에 적은 내용 외에도 많은 부분을 배웠다. 성부, 성자, 성령의 각각 비공유성이라던가 삼위일체를 잘못 이해한 이단적 견해라던가 내재적 삼위일체와 경륜적 삼위일체의 관계에 대한 내용들이 그렇다. 그것은 다 옮기지 못했다. 김진혁 교수의 책에서 삼위일체 부분을 옮긴 적이 있었는데 그때보다 나는 더 많이 이해하고 있는 것 같다. 
 이 책을 읽고 나서 저자의 <신학 레시피>도 왠지 기대가 되었다. 그 책을 읽을 걸 괜히 개혁파 교의학을 읽었나 싶다. 삼위일체에 대해서 배우고 싶다면 나는 이 책을 가장 먼저 추천할 것이다! 강추한다!

 


메모

 

삼위일체 하난미은 인간과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소통행위를 통하여 인간과 세계를 사랑하시는 분이다. 이러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으로서의 소통행위는 인간과 세계를 향한 단순한 정보전달 행위가 아니라, 약속하고 명령하며 경고하고 권면하며 위로하는 행위다. 바로 여기서 하나님을 하늘에 있는 독존적인 고독한 절대 권력자로 이해하는 이슬람 식의 일신론의 문제점을 극명하게 노출된다. (76)

- (페이스북에서 어떤 이슬람 학자가 구약에 하나님이 안식했다는 걸 두고 연약한 하나님이라 말한 걸 두고) 그래서 기독교의 하나님이 쉰다는 개념에 집착했구나. 

 

 

동방은 "삼위" 즉 "세 위격들"의 구분으로부터 시작하여 그 세 위격들의 "하나 됨"을 "본질"로 파악한다. 이 경우 삼위 곧 세 위격들이 한 하나님의 본질보다 우선적으로 강조된다. (83)

- 하나 됨

 

 

마르틴 루터의 후계자였던 필립 멜란히톤은 ... "나는 사변하느니 차라리 경배하리라"고 쓰고 있다. ... 이것이 도대체 무슨 말인가? 이 말의 의미를 깊이 숙고해 보자면, 결국 신학은 사변을 위한 지식이 아니라 경배와 송영을 위한 지식이라는 의미다. 삼위 하나님에 대하여 사변하는 것보다 삼위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이 더 낫다. (93)

- 사변X

 

 

그러므로 삼위일체 교리는 신학자들이 책상에 앉아 머리로 만들어낸 탁상공론의 신학이 아니라 공동체의 예배 속에 그 "삶의 자리"를 가지고 있는 예배의 신학이다. (143-144)

- 삶의 자리

 

 

만약 우리가 성자의 출생과 성령의 발출을 이 두 위격들의 단 하나의 기원이신 성부에게 돌리지 않는다면, 우린느 성부와 성자와 성령 사이의 상호 관계성의 원리를 세 위격들 밖에 존재하는 한 분 하나님의 본질이라는 매우 철학적이고 추상적인 개념에 정초시키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 (190)

- 관계와 사귐의 이유

 

 

그러므로 신성의 원천은 성부가 성자나 성령과 함께 공유하는 속성일 수 없는 것이다. (197)

- 비공유성(성부, 성자, 성령이 공유하지 않는 속성이 197쪽에서 200쪽까지 잘 나타난다)

 

 

그러므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하나"라는 표현은 세 위격이 밀가루가 반죽되어 하나를 이루는 것과 같은 숫자적인 "단일성"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되고, "신성의 동일성" 즉 "본질의 동일성"으로 이해되어야만 할 것이다. (199-200)

-숫자x, 동일성!

 

 

그러기에 제2위격의 하나님은 아들, 즉 성자이신 것이다. 아들은 자신의 신성과 존재를 아버지로부터 받는다. 그러나 그는 "신성의 원천"을 아버지로부터 받지 않는다. 왜냐하면 "신성의 원천"은 성부에게만 귀속되는 속성, 즉 성부만이 소유하시며 성자와 성령과는 함께 공유하지 않으시는 성부만의 비공유적 속성이기 떄문이다. 만약 아들이 아버지로부터 신성의 원천을 받으셔서 아들도 신성의 원천이 되신다는 식으로 사유하게 되면, 삼위일체 안에 두 개의 신성의 원천을 설정하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 (214)

- 신성의 원천이 각각 다로 있으면 삼신이 되는 거니깐 반대하는 듯.

 

 

6세기 서방 지역에서 다시 발흥하던 아리우스주의 이단에 대항하여 성자의 신성을 능동적으로 방어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서방에 대한 동방의 오해로 인해 1054년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 사이의 불행한 교회 분열이 일어났다. (235 각주4)

- (필리오케 논쟁. 동방과 서방의 니케아 신조 내용이 다르다. 그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이었다.) 이단에 대해

 

 

아우구스티누스가 필리오케 공식을 표명하게 된 것은 아우구스티누스 당대에 프랑스 지역에 출몰했던 아리우스적인 경향을 가진 이단들 때문이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성자의 신성을 거부하고 성자를 단지 피조물을 폄하하는 아리우스적 경향을 가진 이단에 대항하여 필리오케의 공식과 더불어 성자가 성부와 "동일한 본질"을 가지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좀 더 명확하고 단호하게 표명하기를 원했다. (241 각주 13)

- 동일본질이란 걸 강조하기 위해 성부와 성자를 삽입. 

 

 

264쪽 메모

- 내재적 삼위일체 > 경륜적 삼위일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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