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산 책 중에 수용소에 관한 내용이 세 권있다.(어제 엘리 위젤의 '나이트'를 사서 한권 더 추가!)
산둥수용소, 이것이 인간인가 그리고 그 유명한 '죽음의 수용소에서'다.
인간이 얼마나 악해 질 수 있을까 보고 싶어서 샀다.
산둥수용소도 진지하며 무거울 지 알았는데
절반 쯤 읽었지만 너무 재미있다. 진지하지만
무겁지 만은 않다. 글을 너무 잘 쓴거 같다.
그럼 죽음의 수용소는 어땠을거 같은가?
단연 1장인 강제수용소에서의 체험이 많은 점을 가르쳐 주었다.
2장은 그 수용소에서 얻은 경험을 저자의 전공 영역에서 잘 녹아낸 이야기를 하고 있다.
저자는 '로고테라피'라는 개념을 설명한다. 물론 몇 십장으로 모두 설명하기는 불가능이라고 말한다.
3장은 레젠스부르크 대학에서 발표한 내용을 바탕으로 쓴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읽는데 집중이 잘 안되었다.
1장에 대해 이야기를 많이 하고 싶다.
저자는 극한의 상황에서 3년을 보냈다.
극한의 상황이라서 저자는 인간의 통찰을 많이 보여준다.
책을 읽기 전에도 프랭클이 이야기한 의지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들었다.
살고자 하는 의지가 있는 자와 없는 자의 차이는 확연했다.(p.134-7)
이 의지에는 의미가 있어야 한다.
인간의 삶을 이어가는 삶의 의미가 있어야 한다.
가치가 있는 가? 의미가 있는가?
저자는 여기서 소유(기능, 성과)가 아닌 존재자체에 의미가 있다 말한다.
좀 더 자세하게 말하자면 이런 유용성은 그 사람이 사회에 이로운 존재인가 아닌가 하는 기능적인 측면에 초점을 맞추어 정의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 사람이 이루어낸 성과를 무엇보다 중요한 것으로 여기고, 그래서 사회적으로 성공하고 행복한 사람, 특히 젊은 사람을 숭배하는 것이 요즘 사회의 특징이다.
실제로 이 사회는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가치는 무시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측면에서 가치 있다고 하는 것과, 인간의 유용성이라는 측면에서 가치 있다고 하는 것 사이에 놓여 있는 엄청난 차이를 애매모호한 것으로 만든다.(p.238-9)
저자 역시도 그가 사랑했던 아내의 기억이
수용소에서의 극한 상황을 이겨낼 수 있었다고 고백한다.(p.78-83
그런데 나는 그 이야기 보다는 다른 이야기를 꺼내고 싶다.
수용소를 나온 후의 이야기다.
이런 심리적 단계에서 원색적인 기질을 지닌 사람들이 수용소에서 자신을 둘러싸고 있던 야만성의 영향에서 쉽게 빠져 나오지 못하는 것을 관찰할 수 있다. 그들은 이제 자유의 몸이 되었으니 이 자유를 마치 특허를 받은 것처럼 잔인하게 사용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변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그들이 이제는 억압을 받는 쪽이 아니라 억압을 하는 쪽이 되었다는 것뿐이다. 그들은 이제 폭력과 불의의 대상이 아니라 그것을 자행하는 가해자가 된다. 그들은 자기들이 겪었던 끔찍한 경험으로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 시킨다. 이런 일은 별로 대수롭지 않은 일에서 자주 발생한다.(p.157-8)
SBS스페셜 '학교의 눈물'에서 의외의 점이 피해자가 가해자가 된다는 점이다.
정확하게 몇 퍼센트였는지는 기억이 안나지만 꽤나 높았다.
고통받은 자는 상처입은 파괴자가 되는게 순리인가?
상처입은 치유자와 상처입은 파괴자.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파괴자가 아닌 치유자의 길이겠지.
이 당연한 것을 읽고 쓰고 말하기가 어려운지.
상처입은 자들이 너무도 많다.
작년에 청년으로 있었던 교회는 2년마다 작은 글모음을 내는데
그 글들 중 절반이 상처에 대한 이야기다.
교회의 유치부 아이들 중에도 몇몇은 상처의 흔적이 보인다.
물론 이 상처의 흔적은 아이나 어른에서나 모두에게 보인다.
물론 나에게서도.
그러나 우리는 이 상처를 안고 나우웬이 제시한 길을 가야한다.
오! 상처입은 치유자여!
고통을 노래하자꾸나!
이 책의 저자도 이렇게 말한다. 노래는 아니지만
"이 치료에서는 타고난 유머 감각으로 자기 자신에게 초연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을 활용해야만 한다."(p.202)
그럼 와 닿았던 몇 문장들을 옮겨 본다.
정말로 이상한 것은 흔적도 남지 않은 단 한 방의 구타가 어떤 상황에서는 그보다 심한 흔적을 남긴 구타보다 더 상처를 준다는 사실이다.(p.57-8)
내가 여기서 이런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끄집어내는 것은 아무리 감정이 무뎌진 수감자라고 할지라도 분노를 느끼는 순간이 있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이다. 그 분노는 육체적인 학대와 고통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받으면서 느끼는 모멸감에서 나오는 것이다.(p.60-1)
수용소에서는 신체적으로나 지적으로는 원시적인 생활을 할 수 밖에 없지만 영적인 생활을 더욱 심오하게 하는 것은 가능했다. 밖에 있을 때 지적인 활동을 했던 감수성 예민한 사람들은 육체적으로는 더 많은 고통(그런 사람들은 흔히 예민한 체질을 가지고 있으니까)을 겪었지만 정신적인 측면에서 내면의 자아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 비교적 적게 손상 받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정신적으로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가혹한 현실로부터 빠져나와 내적인 풍요로움과 영적인 자유가 넘치는 세계로 도피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별로 건강해 보이지 않는 사람이 체력이 강한 사람보다 수용소에서 더 잘 견딘다는 지극히 역설적인 현상도 이것으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p.76)
(만약 서평으로 썼다면 허무주의에 대해서 추가를 했을 것이다. 오늘 체스터턴의 '정통'을 읽었는데 마침 3장 생각의 자살편을 읽었다. 이 장은 서구의 허무주의를 비판하는 챕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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