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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요한서신

[설교문] 요한삼서 1장 9-12절(요삼 1:9-12, 요삼 1:9~12)

by 카리안zz 2021. 3.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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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삼서 19-12

 오늘 본문에는 두 명의 등장인물이 나옵니다. 먼저는 디오드레베입니다. 오늘 본문 9-10절인데 다 같이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9-10절입니다,

 

9: 내가 두어 자를 교회에 썼으나 그들 중에 으뜸되기를 좋아하는 디오드레베가 우리를 맞아들이지 아니하니

10: 그러므로 내가 가면 그 행한 일을 잊지 아니하리라 그가 악한 말로 우리를 비방하고도 오히려 부족하여 형제들을 맞아들이지도 아니하고 맞아들이고자 하는 자를 금하여 교회에서 내쫓는도다

 

 장로 요한은 디오드레베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말합니다. 일단 정리해보자면 디오드레베는

첫째, 으뜸이 되기를 좋아한다.
둘째, 장로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다.
셋째, 장로와 장로에게 충실한 사람들에 대해 거짓말로 헐뜯고 다닌다.
넷째, “형제들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한다.
다섯째,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하지 못하게 할 뿐만 아니라 그들을 교회로부터 내쫓는다.

 짧은 두 구절이지만 디오드레베에 대해서 장로 요한이 말한 걸 정리했습니다. 그런데 현대에 와서 어떤 사람들이 장로 요한과 디오드레베의 갈등을 재구성하려는 시도를 합니다. 일단 장로 요한의 반응이 조금 모순된다는 걸 지적합니다. 요한2서에 보면 장로 요한은 외부의 가르침에 경계하라는 충고를 디오드레베가 잘 시행한 거 아닌가 의문을 제기합니다. 이걸 근거로 어떤 신학자(케제만)는 오히려 디오드레베가 정통이고, 장로 요한이 기독교적 영지주의자인 이단이 아닌가 하는 주장까지 하게 됩니다. 정통인 디오드레베가 이단인 장로 요한을 내쫓은 것, 곧 출교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근거는 전혀 없습니다. , 정통과 이단이라는 주제는 찾아보기도 힘듭니다. 본문에서도 근거가 없고, 역사적으로도 증거가 없는 의견이라 그냥 썰로서 끝나게 됩니다.

 이런 재구성들을 여러 신학자들이 많이 하게 됩니다. 첫 번째는 교회법적 해석으로 이 둘의 관계를 설정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장로 요한은 아시아 지역을 총괄하는 중앙 조직의 장이라면 디오드레베는 그 안에 소속된 개교회로 봅니다. 그런데 이제 치리, 그러니깐 교회에서 처벌하는 근거를 가지고 갈등이 일어났다는 게 교회법적으로 보는 해석입니다.

 두 번째는 교회조직들 간의 갈등으로 보는 해석이 있습니다. 첫 번째 해석과 비슷하긴 한데 장로 요한은 유명한 도시의 교회 지도자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그의 지역의 개교회들을 통합하려고 할 때 지역교회의 우두머리인 디오드레베가 말을 듣지 않고 독단으로 일들을 처리해 버립니다. 그래서 교회 조직 간의 갈등이여서 교회조직적 해석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두 주장은 근거가 희박합니다. 장로 요한이 아시아 지방의 우두머리라는 증거도 없고, 장로 요한 이 조직을 통합하려는 시도에 대한 증거도 없습니다. 본문에서도 전혀 근거가 없기에 이 두 주장들 역시 그냥 상상력이 많이 가미된 썰로 보면 됩니다. 이에 비해 세 번째 조금 개연성이 있을 법합니다. 둘이 뭐 때문에 갈등이 있었냐면 유대적 신학 때문이라고 해석을 하는 겁니다. 장로 요한이 초대 교회 전반적인 흐름을 따라 이방인 선교를 실천하고 있는데 디오드레베는 그 지향성을 전혀 이해도 못하고 지역 교회에서 매달려 있는 실정이었습니다. 마치 유대주의적 신학에 붙잡힌 것처럼 말이죠. 그러고보니 디오드레베는 히브리어 이름인 그달랴, 그달랴후의 그리스어 번역인 것 같기도 하고, 으뜸 되기를 좋아한다는 것에서 유대 바리새인의 모습이 보입니다. 그리고 형제들을 내쫓은 것. 곧 출교를 말하는데 유대인들이 출교를 참 좋아하던 것까지 닮아 보입니다. 그런데 이 주장 역시 확실할 방법이 없습니다. 진짜 그랬는지 안 그랬는지 증거가 희박합니다.

 두 사람 사이가 교리적인 차이였는지, 교회법 때문이었는지, 교회 조직 때문이었는지 확인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장로 요한이 서술했던 디오드레베의 특징에 집중해 봐야 합니다. 그는 으뜸 되기를 좋아하는 자였습니다.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의 문자적인 뜻을 보니 다른 사람들을 조종하여 이끌기를 좋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근본 동기가 섬김이 아니라 남을 지배하려는 욕구가 더 강한 것이죠. 이 두 사람의 갈등의 원인은 디오드레베의 성품이었습니다. 순회 전도자들을 접대하지도 않고 도리어 접대하는 자들을 금하여 교회에서 내쫓기까지 하며 선교 사역을 방해했던 이유가 바로 성품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성품만이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그의 성품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전혀 이해 못한 것과 연관이 있습니다. 요한서신에서 말하는 사랑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사 그 아들을 보내신사건에 기초합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은 본질적으로 선교적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본질적으로 세상에 보내진 선교적 존재입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을 디오드레베가 이해하지 못한 것이죠. 이러한 이해가 없었기에 그는 필시적으로 교회의 주인이 그리스도가 아니라 본인이 주인이 되려 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디오드레베가 순회 전도자들을 영접하지 않고 이방인 선교 정책에 폐쇄적이었던 것은 으뜸 되기 좋아하는 성품탓도 있지만, 그 안에는 그가 믿는 진리 곧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그 사랑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입니다. 진리를 엉뚱하게 이해하고 있으니깐 엉뚱한 행동을 디오드레베가 했던 것입니다. 마음과 머리와 다리가 최악의 조합이 된 것이죠.

 반면 가이오와 데메드리오는 달랐습니다. 디오드레베가 자기를 위했다면 7절에서 가이오는 주의 이름을 위해 나아갔습니다. 데메드리오 역시 가이오와 같은 칭찬을 받았는데 데메드리오 역시 자신의 이름이 아니라 주의 이름을 위해 삶을 살았습니다. 장로 요한은 친히 자신이 본 것을 증언하겠다고 말하기까지 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자기를 홍보하라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들어가고 개척하라 합니다. 자기의 이야기를 스스로라도 말하지 않으면 뒤처지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오늘 말씀의 이야기는 어쩌면 요즘 같은 세상이랑 어울리지 않을 것 같기도 합니다. 겸손이 미덕이라는 말이 옛날이 되었듯이 말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야기를 해야 합니다. 우리의 이야기가 세상이 좋아하든 싫어하든 말해야 합니다. 우리의 이야기는 취업을 위하거나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한 것이라고 말입니다. 우리의 이야기는 그리스도의 이야기를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214일 주일 설교에서 들었던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도의 사랑의 네 단계를 우리는 기억해봅시다. 자신을 위해 자신을 사랑하기, 자신을 위해 하나님을 사랑하기, 하나님을 위해 하나님 사랑하기, 하나님을 위해 자신을 사랑하기. 가이오와 데메드리오는 마지막 단계의 사랑을 보였습니다. 우리 역시도 그 사랑의 마지막 단계로 나아갈 수 있도록 오늘 기도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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