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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요한서신

[설교문] 요한일서 2장 12-14절(요일 2:12-14, 요일 2:12~14)

by 카리안zz 2020. 9.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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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일서 212-14

 

정신승리라는 말이 있습니다. 말싸움을 하다가 논리에 밀려서 졌지만 자기가 이겼다고 우기는 겁니다. 사소한 트집하나 잡았다고 그거 가지고 자신이 토론에서 이겼다고 스스로 합리화하는 것입니다. 그걸 보통 정신승리라고 합니다. 저는 가끔 기독교가 정신승리하는 것은 아닐까 싶을 때가 있습니다. 부를 통해 일궈놓은 으리으리한 건물이던가 집을 보면 그렇고 과학의 위대함 업적들을 볼 때도 그렇습니다. 위축됩니다. 티비에 나오는 어마어마한 사람들을 봐도 그렇습니다. 어마어마한 집의 안을 티비로 보여줄 때면 이야, 저렇게 좋은 곳에서 사는 사람들도 있구나감탄하는 마음이 듭니다. 마치 세상은 이제 기독교가 따라잡을 수 없을 거 같은 위화감이 듭니다.

그래서 그런지 한때 고지론이란 말이 등장했었습니다. 복음을 전하려면 높은 자리로 가야 한다는 말입니다. 부자가 되고, 세상에 높은 자리에 오르고, 유명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게 그분들의 주장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복음을 받아드릴 것이라고 말입니다. 확실히 그런 것도 같습니다. 기독교 연예인들을 보면 그렇습니다. 비와이라는 가수가 요즘 아주 독보적입니다. 시상식에서 요한복음을 암송하고 아주 대단했습니다. 그래서 그 가수가 클럽에서 공영한 영상이 유튜브나 이런데 올라오면 그 밑에 댓글들이 참 재미있습니다. 클럽을 기도원으로 바꾸어 버리는 가수라는 댓글이 참 기억에 남습니다.

하지만 이런 긍정적인 면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높은 자리에 기독교인들이 참 많이 올랐습니다. 돌이켜 보면 대한민국 대통령 열두명의 대통령 중에 3명이 교회 장로님들입니다. , 13명 중 7명이 개신교인 4명이거나 천주교인 3명입니다. 13명 중 7명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최근에 장로를 위시하여 대통령님 되신 분이 계십니다. 그분이 지금은 감옥에 계시죠. 원래도 전과가 많으신 분이신데 대통령 자리에 계시면서 범죄를 저질렀습니다. 교회 장로라는 걸 전면에 내세웠고 자신이 다니던 교회 사람들을 청와대 요직에 앉히기도 했었습니다. 그런데 범죄를 일으키니 교회의 이미지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더 큰 문제는 긍정적인 부분보다 부정적인 부분이 너무 많다는 겁니다. 사건 사고를 치면 교회 장로님들이 너무 많습니다. 목사님들도 뉴스에 자주 오르내려서 도리어 사고치고 유명해지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그냥 대충 기억나는 것만 봐도 우리 교단에서 총무까지하셨던 분은 가스총을 들지 않나 칼부림을 하질 않나. , 초대형교회들은 세습을 하면서 유명해집니다. 얼마 전에는 우리 교단인데 모교회는 제자훈련을 하면서 상상할 수도 없는 짓거릴 해서 세상을 놀라게 했습니다.

이런 일들을 겪으면 왠지 작아지고 패배감에 젖어듭니다. 그러니 저는 제가 왠지 정신승리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그런 제 정신승리를 마치 확정이라도 하는 듯한 뉘앙스를 풍깁니다. 한 번 다같이 12-14절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12: 자녀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받았음이요

13: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

14: 아이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아버지를 알았음이요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안에 거하시며 너희가 흉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

 

자녀들, 아비들, 청년들에게 반복적으로 말씀을 전합니다. 이 세 그룹 중에 청년들에게 주는 말씀에 가장 강조점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청년들에게 주는 권면이 계속 마지막에 나오고 청년들에게 주는 권면에서 앞의 내용을 풍부하게 설명하기 때문입니다. 아주 당당하게 악한 자와 흉악한 자를 이겼다고 말합니다. 과연 그때 당시 상황이 그랬을까요? 요한일서는 대강 1세기 후반에 써졌을 텐데 그때 로마는 무너져 가지 않았습니다. 당시 기독교인들이 1%나 됐을까요? 소수자들이 이겼다고 하는 꼴이 앞서 제가 말한 정신승리가 아닐까요?

그렇지만 조금 인내심을 갖고 요한의 말을 계속 들어봅시다. 그 이유가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안에 거하시기 때문이랍니다. 하나님의 말씀. 요한일서 11-4절을 보면 그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 안에 거하는 것은 계속해서 요한이 강조하는 사귐과 관련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거하시기에 사귈 수 있는 것이죠. 그 아들과의 사귐을 통해 죄에 대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이제 믿음의 문제로 넘어옵니다. 과연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다고 합니다. 태초부터 일하신 지금까지 일하고 계셨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말합니다. 태초부터 시작된 삼위 하나님의 구속 계획이 있었습니다. 그 절정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세상의 악한 자의 지배를 깨뜨리고 승리했다는 것입니다. 승리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신다는 것. 바울이 그리스도 안에서라고 말했다면 요한은 말씀 안에서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그분과 사귐으로 이어져 내려온다면 우리 역시도 승리자가 아니겠습니까?

이것을 믿으십니까? 교회사에서 내려오는 큰 가르침이 있습니다. 도나투스 논쟁입니다. 로마의 박해가 거의 끝나갈 무렵 교회를 배교했던 사람을 로마의 주교로 세웁니다. 사람들은 난리가 났습니다. 왜냐하면 순교자들이 있었거든요. 당연히 순교의 거룩한 행위가 절대적으로 강조되어 가던 시기였습니다. ‘거룩함은 어디에 있는가가 이 논쟁의 핵심이었습니다. 인간이 순교라는 위대한 행위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거룩함은 거기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고 외친 게 바로 어거스틴이었습니다. 순교를 통해 흐르던 기존의 신학 흐름을 완전히 뒤바군 것입니다.

앞서 말했던 것처럼 기독교인들의 몰지각한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교회의 거룩함이 끝이 났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교회를 통해서 대규모 감염이 일어나는 지금 더욱 그렇습니다. 그러나 교회의 거룩함은 목사와 장로, 집사나 성도들의 행위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거룩함에 달려 있습니다. 그래서 가톨릭에게나 혹 이단에게 세례를 받더라도 우리가 그것을 용인하는 이유는 그것을 행한 자들에게 권위를 두는 게 아니라 그 고백. 그러니깐 삼위일체 하나님께 한 그 고백에 권위를 둡니다. 인간의 행위로는 하나님의 거룩함을 하나도 흠집낼 수 없습니다.

그분에게 달려 있습니다. 교회의 많은 연약함에 이제 우리가 눈을 돌려야 합니다. 그들의 행위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하셨던 것과 일하심에 집중합시다. 우리도 그분의 이름을 알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하는가에 집중하십니다. 그것을 믿으십니까? 교회가 이제 큰 분기점을 맞아 급격히 내리막길을 가더라도 우리가 집중할 것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하는가. 삼위일체 하나님과 우리가 사귐을 가지고 있는가. 우리 거기에 집중을 합시다. 그리고 오늘 본문인 이 담대한 선언을 기억합시다. 마지막으로 오늘 본문을 읽고 기도하겠습니다.

 

12: 자녀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받았음이요

13: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

14: 아이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아버지를 알았음이요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안에 거하시며 너희가 흉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

 

기도 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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