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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요한서신

[설교문] 요한일서 3장 11-18절(요일 3:11-18, 요일 3:11~18)

by 카리안zz 2020. 10.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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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일서 3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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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서로 사랑할지니 이는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소식이라

가인 같이 하지 말라 그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떤 이유로 죽였느냐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의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라

형제들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여도 이상히 여기지 말라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얼마 전 신대원 친구를 만났습니다. 그 만나서 이야기를 하는데 그 친구가 요즘 외로움과 허무한 걸 많이 느낀다고 합니다. 올해 결혼도 했지만 무언가 텅 빈 것 같다고 말을 하더라구요. 원체 혼자 있는 걸 좋아하고 외롭다는 게 뭔지 이제 잘 모르고 있는 저에겐 그렇게 공감되지는 않았습니다. 근데 그때 예전 친구가 영화 <버닝>을 보고 뭔지는 모르겠지만 마지막 주인공의 절규가 이해가 된다는 말이 떠올랐습니다. 영화 <버닝> 자체도 그런 텅 비어 있는 허무한 세계를 그린 작품이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전 읽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을 보면서 그 허무함을 조금 알 것 같기도 했습니다. 영화 <버닝>도 사실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작품이었습니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그려내는 세계는 허무하고 무언가 사람이 텅 빈 시대를 그려냅니다. 그런데 그 허무한 세계를 많은 사람들이 공감을 합니다. 노벨상 후보로까지 종종 거론되며 전세계에 무라카미 하루키 열풍이 부는 걸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우리 나라도 하루키 열풍이 대단합니다. 한국인이 가장 사랑했던 일본저자는 기독교 저자였던 미우라 아야코였고 그의 소설 <빙점>은 우리나라에서 드라마로 나오기도 했죠. 그런데 이제 하루키가 등장하므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루키가 그리는 허무한 세계에 공감을 표합니다. 하루키가 그려낸 허무하고 텅비어 있는 세계가 사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적실하게 보이는 것 같습니다.

하루키의 대표작 <노르웨이의 숲>을 어떤 출판사에서는 <상실의 시대>로 제목을 바꾸어 출판했습니다. <상실의 시대>가 어떻게 보면 주제를 관통합니다. 그 책에선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들이 많이 나옵니다. 어떠한 극적인 사건이 있어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 텅 비어 있고 허무하기에 그것을 견딜 수 없어 그랬을까요? 분명 상실의 시대는 어두운 시대이며 잔혹한 악은 아니지만 고요한 악이 가득찬 세계입니다.

재일 한국인이며 최고 한국인 도쿄대 교수인 강상중의 <악의 시대를 건너는 힘>의 한 대목이 떠올랐습니다. 그 책에서도 역시 텅 비어 있고 불안해하는 시대이며 그 시대를 사는 사람들이라고 말합니다. 일본어로 샤덴프로이데라는 말이 있습니다. ‘타인의 행복은 꿀맛이라는 말입니다. 쉽게 말하면 꼴 좋다!”라는 말입니다. 지겹도록 잘난 척하던 인간이 몰락했을 때, 나를 매정하게 차버린 남자가 다른 여자에게 불쌍하게 차였을 때, 혹은 반대로 자신을 버리고 부잣집에 시집간 여자가 남편의 사업 실패로 한 푼도 없는 신세가 되었을 때 등 이런 상황일 때 하는 말이 바로 샤덴프로이데입니다. 바로 이 마음이 사람 안에 있는 악의 뿌리라고 강상중은 봅니다. 이런 이해할 수 없는 악은 허무와 불안을 가진 인간 속에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 묻습니다. 허무하여서 감각을 느끼지 못하지만 사회의 도덕과 규범을 어길 때 오는 그 마음 속에 불편함으로 자신이 살아 있음을 느껴버립니다. 결국 그 극단인 살인이 일어나는 게 그런 이유가 아닌가 저자는 분석합니다. 나고야대학의 여학생이 잔혹한 살인을 저지르고 드디어 해냈다SNS에 글을 쓴 것을 소개하면서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이유없는 악이 나옵니다. 12절에 가인의 행동을 통해서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도덕적인 판단을 따르거나 그러한 정당한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악한 자에게 속했기에 그렇습니다. 미워하는 세계. 좀더 원문과 적실한 단어는 증오와 혐오인데 증오와 혐오가 가득찬 세계. 그 세계의 끝은 결국 죽음입니다. 텅 비어서 스스로 죽음을 불러내는 세계나, 텅 비었기에 혐오와 증오로 채워넣는 지금 이 세계 역시도 어둠이 있고 악이 있습니다.

이 악의 시대를 건너는 힘을 무엇을까요? 이러한 죽음과 악의 세계를 분석한 무라카미 하루키도 강상중도 답은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강상중 씨야 크리스천이지만 하루키는 아닌데 그 단초를 조금 발견한 거 같기도 합니다. 그래서 어떤 작가는 르네 지라르라는 학자와 하루키를 빌려와서 기독교를 변증하는 책을 쓰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말하는 해답보다 더 적실한 답이 오늘 본문에 있습니다. 다같이 오늘 본문 11절과 16~18절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제가 11절과 16~18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11: 우리는 서로 사랑할지니 이는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소식이라

16: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17: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

18: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바로 사랑으로 이 악의 시대를 건널 수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그 사랑을 채움으로서 우리는 바르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더구나 자본이 주인이 되는 이 세계는 악을 배양하는 세계입니다. 자본이 주인이 되어가려 하기에 증오와 미움, 혐오 같은 일만 악의 뿌리가 우리 마음 속에 비집으려고 합니다. 텅 빈 이 마음을 자본으로 채울 수 있는 줄 알고 끊임없이 부어넣습니다. 너무 많이 채워넣지만 그럼에도 더욱 허기지고 허기집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의 가르침은 세상의 방법과는 정반대의 말을 합니다. 채워서 넣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버려야 한다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몸을 바쳐 버리셨던 것 우리 그 사랑을 닮아야 합니다. 오늘 말씀은 해석할 것도 많지 않습니다. 행동지침까지 분명히 일러줍니다.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자고 말합니다.

어쩌면 오늘 재물의 사용은 교회의 헌금사용 원리를 말해주는 것 같습니다. 교회는 형제의 궁핍함을 품어주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단순히 우리 테두리 안만이 아니라 이 지역을 포괄하기도 합니다. 더 나아가서 한반도를 포함하기도 합니다. 우리에게도 형제로 부를 수 있는 나라가 있기도 합니다. 지독히도 가난한 형제가 있기도 합니다. 그 형제를 도와줄 마음이 열린 교회에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 있다고 오늘 말씀은 가르칩니다. 우리 교회가 쓰는 예산에 그 마음이 깃들어야 합니다.

한 교회에서 그러한 사례가 있습니다. 그 교회의 선교부 예산 중에 최근에 노숙인을 돕는데에 쓰이게 되었다고 합니다. 사례를 보니 한 노숙인이 있는데 17년 동안 노숙 생활한 만성 노숙자였습니다. 부모님은 20살 때 돌아가셨고 22녀 중 셋째며 부모님 돌아가신 후 형제들과는 연락두절로 살고 계셨습니다. 일용직 노동자로 근근이 살다가 노숙인이 되었고 주민등록 말소가 되고 삶의 원동력 없이 무기력하게 거리에서 17년을 살다가 노숙자 센터에 간 후로 일자리를 얻었고 임시주택에 거주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보증금이 필요했는데 그 교회에서 보증금을 지원해주었습니다. 단순히 물질을 돕는 것이 아니라 17년 동안 노숙생활을 청산하여 이제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도록 한 사람의 인생을 교회가 도운 것입니다.

사실 이 내용은 제가 이번 주 총체적 선교부 광고를 할 내용입니다.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이 말씀을 우리가 몸소 보인 것 아니겠습니까? 증오와 혐오, 자본으로 채우는 것이 우리를 살아있게 만드는 게 아니라 바로 오히려 있는 것을 나누고 화해를 이루는 것이 바로 우리가 진정한 존재가 되는 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계속해서 우리 교회에 보이길 원합니다. 더 나아가 우리 한국교회가 이 말씀을 본받아 우리의 궁핍한 형제인 북한을 가장 먼저 사랑할 수 있도록 소망해 봅니다. 예수님께서 목숨을 버리셨듯이 한국 교회도 이를 본받길 원합니다. 더 이상 증오, 혐오, 분열에 앞장서 있는 한국 교회가 아니라 믿음, 소망, 사랑에 앞장서는 한국 교회가 되고 OOOOO교회가 되길 소망하며 오늘 간절히 기도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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