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일우 신부님 이야기다.
내가 정일우 신부님을 알게 된 건 중2인가 중3 때였을거다.
내 삶에 '새벽을 깨우리로다'만큼 큰 족적을 남긴 책은 없는데
정 신부님은 그 책안에 등장인물로 등장했었다.
그래서 그런가 빈민촌 안에 그 사람들은
내 영웅들이 되어 있었다.
정 신부님도 그 중 한 분이시다.
그런 정 신부님이 올해 6월 4일 돌아가셨다.
원래 이 책은 훨씬 전에 사서 보려고 했는데
돌아가시고 미뤄서는 안되겠다 싶어 최근 사서 읽었다.
읽고나니 역시라는 생각이 든다.
그저 함께 하고, 그저 있어 준다.
무어라 이래라 저래라 하지 않는다.
그저 들어줄 뿐이다.
그를 겪은 사람들 말이 예수님 같단다.
어린 시절부터 시작해서 농부였던 아버지 밑에서 자랐던 일과
카톨릭 학교를 다녔던 일, 그리고 신부가 되기 과정까지
1장은 그렇게 시작한다.
점점 한국에서 와서 서강대에서 철학을 가르치지만
현장에 세계에 눈을 뜨고 1인 시위까지 하게 된다.
그 뒤 청계천 빈민촌에 김진홍 목사님이 사역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본인도 한 번 가서 빈민들과 함께 살게 된다.
그렇게 한 번 살게 된게 거의 남은 평생을 함께 보냈다.
처음에는 청계천 빈민들, 다음은 양평동 판자촌,
계속해서 복음자리, 한독주택, 목화마을을 건립하며 함께 지낸다.
그렇게 평생을 빈민과 농민들과 함께 사셨다.
전도사 사역을 하는 입장에서
나는 정일우 신부님 같이 사역을 하고 싶었다.
아니 좀더 정확히 말해서는
나는 1970년도 김진홍 전도사 같이 사역을 하고 싶다.
그 역시 정 신부님과 마찬가지로 빈민과 함께 먹고 마시며
지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빈민들은 눈에 보이지는 않는다.
이제는 어느 정도 극빈층은 사라졌고 상대적 빈민층이 (정확히는
서민들이랄까) 늘어가고 있다.
그 가운데 나는 사역을 하고 있다.
나도 정 신부님처럼 되고 싶다.
정 신부님을 겪었던 이들의 말을 옮겨 보겠다.
신부님이 가지고 계신 품성 중에서 가장 닮고 싶은 것이 사람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있게 하는' 능력이다. 신부님이 영적인 삶이나 수도자적 삶은 어쩌면 죽도록 노력하면 흉내 정도는 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사람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있게 하는' 이 능력은 아마도 내가 죽을 때까지 노력해도 그분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리라고 생각한다. (p.188)
그리곤 한결같이 내 어깨를 다독여 주시며 말씀하셨다. '잘 살고 있다. 네가 있어서 좋다.'(p.196)
마음을 본다는 것은 내 마음을 볼 줄 아는 사람이 상대의 마음을 볼 수 있으며 자비심이 흘러나온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무것도 안 하고 존재함으로서, 자기를 이해하는 사람이 될 때 상대를 치료해 주는 역할을 한다고 한다. 신부님은 이렇게 존재로서 많은 사람의 아픔을 달래 주셨고, 이제는 자신의 육체적 고통, 그 자체를 보고 받아들임으로서 하느님의 자비심을 드러내고 계신다.(p.212)
한마디로 '밑바닥으로 내려간 사제'의 상을 모범으로 보였다. 이 모범을 따라 사제들이 흉내를 냈지만 정 신부님처럼 철저하게 밑으로, 밑으로 자기를 낮춰가는 삶을 보지 못했다. 빈민들하고, 농민들하고 똑같이 살아가셨던 모습이 그 증거다. 도대체 어떤 하느님 체험이 이분을 그렇게 만들었을까?(p.255-6)
동네에서 신부 행세를 전혀 하지 않던 신부님이 서원식 미사에서 제의를 딱 입고 나오셔서 새삼스러웠다. "이제 신부님 같으시네요." 그랬더니 "이때라도 신부인척 해야지" 하고서 입장하셨다.(p. 282)
아!
이 얼마나 보고싶은 모습인가.
예수님의 신성으로만 치우쳐 있는 이 현실 속에서
인간 예수를 이토록 담아내다니.
예수님은 사람이시기도 하셨다!
치우쳐 있는 이 현실에 정일우 신부님이 참 그립다.
정 신부님의 성육신의 삶 속에서 나는 배운다.
안녕, 나의 영웅.
(그러고 보니 예전에 어떤 블로그에서 정일우 신부님이 처음 배우셨던 말이 '씨X"이라던데
이건 정확한 정보가 아니다. 보니 이미 미국에서 한국어를 배우셨다고 한다. 신부님이 철거현장에서
잘 하셨던 말이 "씨X"이였단다(p.274). 성직자가 욕설이라니? 예전에 김어준의 욕과 정일우 신부님의 욕을 비교한 적이 있었다.
김어준에 대해선 잘 모르지만 글쟁이 아츠히로가 알려준 사실로 비추어 보면 나는 정일우 신부님의 욕이 신성하다고 느껴진다.
개신교에서는 절대 욕설은 안된다며 극구 말리겠지만 그건 현실을 모르고 하는 소리다.
강제철거되는 그 현장에서 어떡해 분노하리요! 난 여전히 그의 욕이 신성하게 보인다.)
(김수환 추기경님에 대해서 새롭게 알게 되었다. 예전에 김수환 추기경님이 비겁했다하는 얘기를 들었는데
적어도 정일우 신부님의 이야기로는 그 분은 가난한 자와 함께 했다는 거다. 철거현장에서도 늘 함께는 아니었겠지만
정 신부님이 어려움을 청할 때면 도와주셨단다. 김 추기경님은 왠지 미안한 구석이 있었지 싶다.
추기경이라는 신분의 제약 때문에 나아가지 못한 것도 있겠고 성격 때문도 있겠고ㅎㅎ
아무튼 정말 걸출한 인물이시다!)
1985년을 전후해서 서울의 수많은 철거지역에서 강제철거를 막는 주민들의 싸움이 거의 매일 벌어졌다. 항상 긴장했다. 언제 어디서 경찰과 백골단과 깡패들이 지역에 쳐들어올지 몰라 철거민들은 직장도 그만두고 긴장상태로 지역을 지켰다. 천주교도시빈민회 회원들을 중심으로 연일 지역현장을 돌며 지역상황을 파악학 주민들을 찾아 힘을 실어 주었다. 상계동 173번지에도 드디어 올 것이 왔다. 1986년 6월 상계동에 얼청난 철거가 들어왔다. 너무나 폭력적이어서 그 어떤 말로도 표현이 안 된다. 굉장히 비인간적인 철거였다. 이처럼 엄청난 철거는 처음 보고 겪었다. 사람들이 다치는 것은 예사다. 그 현장에 있던 수녀들은 머리에 쓴 가운이 벗겨지고 머리가 뽑혀 끌려 나갔다. 상계동 성당의 손인숙 수녀가 이 사태를 목격하고 긴급하게 김수환 추기경님께 전화를 했고, 추기경님이 직접 오셨다. 그래도 소용이 없었다. 폭력적이고 비인간적인 철거가 계속되었다. 이날 이후 나는 해도 해도 너무 심하게 하니까 상계동에 아예 텐트를 치고 살았다. 먹고 자고를 그곳에서 하면서 이 엄청난 일들을 목격해 나갔다.(p.100-1)
전두환 군부정권이 1987년 4월 3일 헌법을 그대로 지키겠다는 호헌을 발표했다. 8년 임기의 대통령 간접선거제도를 고치자는 국민들은 무조건 잡아들여 가겠다는 엄포였다. 이 발표는 국민들의 거센 저항에 부딪쳤다. 1987년 6월에 전 국민이 들고 일어나 민주항쟁의 기폭제가 되었다. 그런데 호헌발표 다음날 상계동과 양평동 지역이 싹쓸이 강제철거가 집행되었다. 상계동에 트럭 수십대가 동원되어 천막은 물론이고, 주민들의 살림을 싣고 어디론가 가버렸다.항의하는 주민들을 무조건 구타하고 잡아들였다. 그리고 포크레인으로 완전히 집들을 박살냈다. 주민들이 우왕좌왕하고 아이들은 겁에 질려 철거잔재 사이에서 울며 다녔다. 양평동도 마찬가지로 싹쓸이 강제철거가 집행되었다. 철거된 주민들은 최악의 상태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철거민들이 4일 오후부터 명동성당으로 집결하기 시작했다. 나는 이런 무지막지한 강제철거를 보면서 "이것은 국민을 상대로 한 전쟁"으로 봤다. 10개월 여간 상계동 주민들은 매주 세 번이나 네 번을 전쟁터에서 강제철거와 폭력을 당한 것이다.(p.102)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나를 보고 사람을 끌어들이는 마력을 가졌다고 말한다. 뭔가 빨아들이는 마력이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뭔가 자꾸 생긴다고 했다. 내가 직접 만들어서가 아니다. 그리고 대충 뭐가 생기면 떠난다. 나 스스로도 그렇게 느낀다. 살다보면 주섬주섬 뭔가 모이고 생긴다. 그러면 나는 딴 데 가 있다. 그래서 나는 정착해서 사는 사람이 아니다. 유목하는 사람이다.(p.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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