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을 추천한 사람이 접니다. 책이 마음에 드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성경입문서로 다양한 책들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이 책은 하나님 나라로 읽는 성경이였기에 단연 주제가 명확하여 제일 좋았습니다. 그동안 성경의 이야기들을 배우셨을 텐데 저는 이제 절정 부분을 이야기할 겁니다.
1. 예수님의 예언자적인 행동
성경의 예언자들은 독특한 행동을 종종했습니다. 대표적으로 이사야는 알몸으로 예루살렘을 돌아다녔고 에스겔은 밤에 잘 때 왼쪽 편으로만 390일을 잤습니다. 가장 충격은 호세아였는데 호세아는 음란한 여성과 결혼을 했었습니다. 이런 행동들에는 상징이 담겨 있는 행동이었는데 예수님 역시 그런 행동을 하셨습니다.
1) 나귀를 타심
예수님께서 마침내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셨습니다. 입성을 하시긴 했는데 좀 독특합니다. 엄청 대단한 말도 아니고 초라한 나귀를 타고 오셨지요. 확실히 스가랴 9:1-13에서 이스라엘의 왕이 전쟁에서 승리한 후에 예루살렘으로 돌아오신다고 했습니다. 예수님 역시 왕으로서 예루살렘에 입성한 것입니다. 좀더 자세히 들어가 본다면 이 연출은 로마의 총독과 대비되는 장면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반란이 많았었기에 로마의 총독은 으리으리한 군대를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들어오는 액션을 많이 취하였습니다. 예루살렘 성이 있으면 북쪽에서 진입하여 성전쪽으로 갔었습니다. 그들의 갑옷, 말 위에 탄 기병들, 어깨에는 제국을 상징하는 휘장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정반대로 남쪽에서 짐을 싣는 비천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입성을 하신 겁니다. 이는 철저히 로마의 방식과 하나님의 방식은 다르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 나라는 전쟁이 아니라 평화가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분은 겸손과 섬김의 왕권이었습니다.
2) 성전을 심판하심
고대 근동의 방식에 따라서 성에 입성한 왕은 성전에서 어떠한 행동을 해야 했습니다. 성전은 당시에나 과거에나 유대인들에게는 굉장히 중요한 장소였습니다. 지난 번 박목사님이 마가복음 강해를 해주셔서 알겠지만 세상의 중심이 성전입니다. 왜냐하면 그곳에 하나님께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곳에서 죄사함이 일어났으며 이스라엘이 죄로 인해 하나님과 멀어졌던 사이를 가깝게 하는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정치, 종교, 경제, 사회의 중심지이자 이스라엘 백성들의 소망의 중심지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왕은 성전에 와서 심판을 해야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심판이 이방인에게만 일어나는 것이라 생각을 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방인이 아니라 열매맺지 못하는 이스라엘에게 그 심판이 향하게 했습니다. 자주 이스라엘의 심판을 얘기하셨는데(마 21:28-25; 46; 막 12-13장) 결국 성전 안에서 그 모습을 보이십니다. 희생 제사를 위해 동물을 파는 이들을 쫓아내셨고, 돈 바꾸는 자들의 상을 뒤엎으셨습니다. 이스라엘 성전 파괴를 미리 보셨는지 성전에서 이루어지는 일들을 일시적으로 중단시키십니다.
지금의 이스라엘은 온 세상을 위해 있는 하나님의 장소가 아니라 세상과 자신들의 장소를 구별짓기에 힘을 쏟았기에 그랬습니다. 하나님의 방식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운영되고 있는 곳이였기에 성전의 심판은 피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제 새로운 ‘성전’이 등장해야 합니다.
이 행동으로 인해 예수님의 죽음이 가까워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가장 중요한 이스라엘의 장소에서 그곳이 파괴될 것이라는 예수님의 행동과 선언은 유대 지도자들의 심기를 거스르는 것을 넘어 죽일 각오까지 하게 만드는 행동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죽기를 각오하신 겁니다.
3) 제자를 모으심(유월절 식사)
마지막 행동은 제자를 모은 것입니다. 모은 곳에서 예수님은 유월절 식사를 하십니다. 유월절 식사는 다들 아시겠지만 출애굽한 백성이 구원받은 사건을 기념하는 것이었습니다(출 12장). 여기에서 1세기 유대인들은 유월절 식사를 하나님 나라가 도래함으로 오는 ‘새 출애굽’ 사건으로 보았습니다. 이집트의 압제에서 해방되었듯이 로마의 압제에서 해방될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유월절 식사는 바로 그 일이 지금 일어난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물론 표면적 집단인 로마에서의 해방이 아니라 더욱 근원적인 죄에서 해방될 것임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식사를 하시며 떡을 가시사 “이것은 내 몸이니라”(막 14:22)고 선언하십니다. 이는 예수님의 죽음이 최종적인 구원의 수단이 될 것이라는 걸 말해주고 있습니다. 또,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막 14:22) 선언하십니다. 이것은 모세가 피를 뿌려 하나님과의 백성의 언약을 생각나게 합니다. 곧 언약의 피로 포로 생활이 끝날 것이고 하나님 나라가 도래할 것이라고 말씀하신 사건입니다. 언약의 피가 바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실 그 피였던 것이죠.
2. 십자가
성경은 하나님이 창조 세계를 회복하시기 위해 인간 역사 속에서 행하신 위대한 행위를 이야기합니다. 그 구속 사역의 가장 핵심이 바로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십자가에서 인간의 죄와 반역을 해결하시고 자신의 세상을 구원하십니다. 1세기 로마문화 배경에서 자세히 살겠습니다.
1) 1세기 로마 문화의 십자가
확실히 예수님은 로마 황제의 주권에 도전하는 반역의 죄목으로 사형당하셨습니다. 유대인에겐 그것이 신성모독이기도 했습니다. 조롱조의 의미를 지닌 말들이었지만 아이러니하게 그것은 진실이었습니다.
1세기 십자가형은 최악질범, 노예, 외국인들에게 가해진 처형방식이었습니다. 육체적인 고통은 끔찍했고, 발가벗은 상태에서 오랜 시간 십자가에 박혀 있는 것은 끔찍한 수치의 방식이었습니다. 이것은 사회적으로 완전히 죽이는 방식이기도 했습니다. 수치와 명예 문화가 동양의 문화와 비슷하기에 사람들의 눈총이 어떤 것인지 우리는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어느 경우에 죽기보다 더 부끄울 때가 있기도 합니다. 이때 드는 마음이 바로 수치심입니다. 내면을 완전히 파괴시켜 버릴 수 있는 것이 바로 십자가 위에서 죽어가면서 받는 수치심이었습니다. 발거벗은 상태에서 사람들의 눈총을 그대로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십자가에서 죽은 신을 섬긴다는 것은 당시 로마 사회에서 충분히 조롱받을 일입니다. 어리석은 일이며 참 바보같고 경멸받을 일이기도 했습니다. 유대 세계에서도 역시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받은 자(신 21:23; 갈 3:13 인용)라고 했습니다.
2) 신약성경의 십자가(부활의 눈으로 본 십자가)
이렇게 어리석고 저주받은 십자가를 부활의 시각으로 본다면 달라집니다. 그렇기에 초기 기독교인들은 십자가 사건을 하나님의 가장 핵심적인 행동이라고 보았습니다. 부활을 하셨기에 어리석음으로 보였던 것이 실제로는 하나님의 지혜였고 약함으로 보였던 것이 실제로 인간의 반역과 사탄의 악을 정복하신 하나님의 능력이었습니다. 수치로 보이던 것이 사실은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주신 사건이었습니다. 초대교회는 십자가가 하나님이 그분의 선한 창조 세계를 대적한 모든 적을 탁월하게 이기신 것이라 선포했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십자가의 이미지는 세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①승리로서의 이미지(하나님과 사탄 사이의 대 영적 전투). ②희생(흠없는 동물을 제사제물. 예수님은 어린양). ③인간의 대표(두번째 아담이시며 그분의 승리에 동참). 이 세가지 이미지는 결국 악에 대한 결정적인 승리로 볼 수 있습니다. 이 인간의 반역은 십자가에서 멸해진 것입니다.
3. 부활
부활은 이제 새로운 세상이 온다는 걸 의미합니다. 드디어 하나님께서 회복하신 그 나라가 이제 시작됨을 말합니다. 그 시작이 바로 부활입니다.
처음에 제자들은 의심을 했습니다. 그러나 빈 무덤이 발견되고, 천사가 그분의 부활을 알려주고, 부활하신 주님 나타나며 실제로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을 본 사람들의 증언이 계속해서 퍼져 나갔습니다. 이제 확신 속에서 제자들이 자라나고 있었습니다.
1) 유대 사상에서의 부활
유대 문헌에서 부활은 포로에서 귀환한 이스라엘을 묘사할 때 쓰입니다. 글자 그대로 죽은 사람이 실제 육체저긍로 되살아는 사건을 묘사합니다. 이 부활은 개인에게 일어나는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 전체가 새로워진 창조 세계에서의 삶으로 온전해 회복되는 것을 말합니다. 몸의 부활이라는 개념이 창조 세계 전체의 갱신과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말합니다.
2) 부활: 다가올 시대의 시작‘
예수님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습니다. 이제 인간의 육체적인 몸을 포함하여 창조 세계 전체가 새롭게 시작될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그분의 부활 안에 살 것이며 그분의 부활에 참여하는 자가 될 것입니다.
마치 새벽과 같은 것이 부활입니다. 신약성경에서는 세가지 이미지로 이 부활을 말합니다. ① 먼저 나신 분(골 1:18; 계 1:5). 우리는 새 생명을 입으신 예수님을 따라갈 것입니다. ② 첫 열매(고전 15:20, 23). 온전한 추수가 이제 있을 거라는 증거인 추수의 첫 부분으로 묘사되었습니다. ③ 예수님은 구원의 창시자(히 2:10)이십니다. 새로운 영토로 앞서 가시는 분이시지요. 예수님께서 미리 표시한 길 위에서 우리는 표지판을 따라 길을 걸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다음시간
이제 새로운 사명이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모든 만물이 새롭게 시작되었다는 소식을 전하기 위해 제자들이 파송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증인이 되라고 명령하십니다(누가복음의 주제 중 하나). 이제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이후 제자들의 삶이 바로 증인의 삶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완전한 하나님의 나라가 금방 올 것이라 생각했지만 예상 외로 늦어지고 있었습니다. 아니 지금까지 완전히 오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완전히 도래할 하나님의 나라가 오기까지 우리는 어떻게 해야할까요? 무엇을 해야하며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이 질문의 대답을 찾는 시간이 다음 시간이 될 것입니다.
시간이 남는다면 아직 오지 않은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며 살았던 역사가 교회사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세상 속에서 살았을 때의 긴장이 초대교회였습니다. 중세교회는 하나님의 나라와 현국가를 동일하게 보는 세계였습니다. 종교개혁 이후 근대의 교회는 이성을 중심으로 하나님 없이 유토피아(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려 한 세상과 마주했습니다. 1, 2차 대전 이후 즉, 근대 이후(포스트모던)의 세상은 다원주의사회를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시대들을 지나며 공적 신앙에 대한 관심이 부쩍 늘었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고민하며 필시 이 세상의 나라와 가치에 고민하게 됩니다. 때마침 락 밴드 중 U2가 내한 공연을 합니다. U2의 작품 속에서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고민이 묻어 있는데 대표적으로 〈I Still Haven't Found What I'm Looking For〉가 있습니다. 유튜브에서 가스펠 버전도 있는데 저는 원 버전도 좋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고민이 담겨진 U2의 노래를 한주간 듣고 오면 참 좋을 거같습니다.^^
'흔적 > 공부흔적'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강의] 크레이그 바르톨로뮤-마이클 고힌(성경은 드라마다, p. 277-끝) (0) | 2020.08.11 |
---|---|
[강의] 크레이그 바르톨로뮤-마이클 고힌(성경은 드라마다, p. 245-277) (0) | 2020.08.10 |
[발표문] 부활과 삶의 의미(부활절 5분 발표) (0) | 2020.08.08 |
왜 아직도 성경인가?(근대 이후에 관해서) (0) | 2020.08.05 |
[강의] 소예언서 - (6) 호세아 6장 1-11절(호 6:1-11, 호 6:1~11) (0) | 2020.05.13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