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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공부흔적

[강의] 소예언서 - (6) 호세아 6장 1-11절(호 6:1-11, 호 6:1~11)

by 카리안zz 2020. 5.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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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호세아 61611

앞서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는 지금 자신들의 상태가 상처 입었다는 사실은 알고 있다고 했습니다. 이 상처를 고치려고 13절에 앗수르에게 갔다고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모습을 보시고 사자와 같이 찢어버리실 거라고 14절에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나오는 고백이 호세아 61-3절입니다. 한 번 다 같이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1-3절입니다.

 

1: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2: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니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

3: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

 

이제 북이스라엘고 남유다는 어디로 가야하는지 알고 있습니다. 513절에 앗수르가 아니라 여호와께로 돌아가자고 고백합니다. 그분이 사자같이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라는 희망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3절에 새벽 빛 같이 밤이 끝나고 아침이 시작되듯이 항상 그랬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나타나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늦은 비 역시도 마찬가지입니다. 언제나 늘 그렇듯이 비가 오는 것이 늦어도 언제나 오게 되어 있습니다. 자동적으로 오는 기대를 지금 이스라엘은 보이고 있습니다. 호세아가 그렇게 강조했던 것처럼 힘써 여호와를 알자라고 강조하며 백성들은 말하고 있습니다. 백성들은 드디어 진정으로 깨달은 것일까요?

 

그러나 이 구절을 그렇게 긍정적으로만 볼 수는 없습니다. 대다수의 학자들은 이 구절을 긍정적으로 받아드리지 않습니다. 이유는 4절 때문입니다. 4절을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4: 에브라임아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유다야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너희의 인애가 아침 구름이나 쉬 없어지는 이슬 같도다

 

에브라임과 유다 모두를 언급한 것은 5장의 맥락을 그대로 가져온 것입니다. 58-15절에는 에브라임과 유다가 계속 같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4절 역시도 에브라임과 유다가 같이 언급되고 있는데 호세아서에서 이렇게 에브라임과 유다, 둘 다를 같이 언급하는 경우는 참 드뭅니다. 그렇기에 5장의 맥락을 그대로 잇고 있다는 단서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1-3절에 나오는 백성들의 고백을 평가하고 계십니다. 그 내용이 4절인데 4절에 너희의 인애가 아침 구름이나 쉬 없어지는 이슬 같도다라고 표현하십니다. ‘아침 구름은 해가 떠오르면 사라지고, ‘쉬 없어지는 이슬은 아침에만 잠깐 있다가 금방 사라집니다. 에브라임과 유다는 여전히 제대로 고백하는 회개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여호와를 알자고 말합니다. 여호와를 아는 사람은 인애를 가까이하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인애가 쉽게 사라진다고 표현하셨습니다. 말은 하지만 아침 구름이나 이슬처럼 흉내만 내고, 금방 사라지는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종교적으로 인애를 흉내만 낸 것일 뿐입니다. 진실로 인애를 행하며 살지 않는 현실을 고발하는 것이 바로 4절입니다.

그러니 그 고발 다음 심판이 선언됩니다. 5절을 다같이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5절입니다.

 

5: 그러므로 내가 선지자들로 그들을 치고 내 입의 말로 그들을 죽였노니 내 심판은 빛처럼 나오느니라

 

예전자들은 자주 그러듯이 백성들의 실태를 고발하며 그 모습에 대한 심판을 선언합니다. 그때 자주 쓰이는 단어가 5절에 나오는 그러므로이기도 합니다. 백성들은 지금 말만 잘하고 있습니다. 삶 속에서 진리와 인애가 없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심판이 빛처럼 오게 됩니다. 백성들의 기대와는 전혀 다르게 되었습니다. 3절에 하나님께서 오시는게 우리를 낫게 해주시려고 새벽 빛 같이 나타나시는 줄 알았는데 되려 심판을 하시기 위해 빛처럼 오십니다.

 

1-3절에 대한 구절을 좀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참 유명한 구절이기도하고 해서 많은 사람들이 암송을 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 고백의 내용은 그렇게 잘못된 것인가 싶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알자라고 말은 했지만 그들이 1-3절에서 묘사하고 있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인가를 말입니다.

이 고백에 나오는 하나님은 마치 기계와도 같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를 낫게 해주신다는 그 고백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의 확고한 믿음일 수도 있겠지만 달리 보면 하나님의 행동은 무조건적이고 기계적인 내 예측과 내 기대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2절이 이틀 후셋째 날이라는 표현을 통해 회복과 구원이 즉각적으로 일어날 것이라고 여깁니다. 이러한 표현들을 볼 때 하나님을 무조건적이고 기계적이라고 은연 중에 생각한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기계적인 인식의 이면에는 바알 제의가 놓여있는 것은 아닌가 추측해 볼 수도 있습니다. 이유는 이렇습니다.

바알 종교에서는 비가 오지 않는 건기를 바알이 죽음의 신인 모트에게 죽임을 당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왜냐하면 바알은 폭풍의 신이고 이 푹풍의 신은 비를 내립니다. 이런 바알이 죽었으니 당연히 땅에 비가 오지 않는 것이지요. 그런데 바알의 아내인 아낫이 죽음의 신 모트를 죽입니다. 그후 바알이 부활을 하게 되기에 다시 비가 내리는 겁니다. 오늘 본문 1-3절에서 다시 살아나는 것과 땅에 내리는 비를 언급한 모습에서 이런 바알 종교에 대한 이해가 하나님께 투영된 것은 아닌가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바알 종교야 말로 신을 기계적이고 자동적으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1-3절에서는 자신들의 병고침만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자신들이 어떤 잘못을 했고 그 잘못이 무엇인지 돌이켜 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자신들이이 어떤 참담한 상황에 놓여있는지 전혀 자각하는 단서가 없습니다. 죄에 대한 올바른 인식 없습니다. 그런데도 치료에 대한 기대를 가지는데 이는 그릇된 신앙입니다. 그걸 호세아 71절에서 말하기도 합니다. 한 번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71절입니다.

 

71: 내가 이스라엘을 치료하려 할 때에 에브라임의 좌와 사마리아의 악이 드러나도다 그들은 거짓을 행하며 안으로 들어가 도둑질하고 밖으로 떼 지어 노략질하며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서 바알 종교의 유혹은 끊임없이 있었습니다. 그 유혹 끝에 하나님에 대해 아는 것이 바알처럼 공식과 법칙에 따라 분으로 알게 된 것입니다.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이 외친 여호와를 알자라는 내용은 새벽빛 같이 일정하고, 땅을 적시는 비처럼 임하는 분이라는 것이죠. 백성에게 하나님은 언제든지 구하는 자에게 응답하시고, 나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분입니다. 결국 이런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내 욕망으로 정당화되는 하나님이십니다. C. S. 루이스의 책 제목처럼 <피고석의 하나님>이죠. 내 마음대로, 내 욕망대로 안 되니 하나님을 고발하고 내 뜻대로 움직이려고 합니다.

 

이제 호세아서에서 가장 유명한 구절이 등장합니다. 6절입니다. 다같이 읽어보겠습니다.

 

6: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인애입니다. 그리고 제사가 아니며 번제보다는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십니다. 다른 말로 그걸 더 기뻐하신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인애는 하루아침에 금방 사라지는 것이었죠.

제사와 번제가 이렇게 나오는 것보니 당시 제사와 번제에 대한 열심히 상당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앞서 1-5장까지 그런 내용이 자주 등장했습니다. 그 제사는 바알종교의 제의와 혼합되어 있었던 제사였지요. 제사를 지낼 수 있는 장소도 참 많아졌고요. 오늘 본문 1절에 하나님께 돌아가자 했을 때 그들이 행한 행동이 제사와 번제일 수 있습니다. 많은 제사와 번제를 드린다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이라는 게 그들의 생각이었습니다. 하나님을 그렇게 알고 있었고 그 앎은 이방 종교와 비슷한 앎이기도 했습니다.

물론, 이 구절을 가지고 지금의 예배가 의미가 없다나, 교회의 집회가 의미가 없다는 말로 껑충 뛰어서는 안 됩니다. 무엇이 먼저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말하는게 이 구절의 핵심입니다.

이 구절대로라면 하나 살펴볼 만한 지점이 있습니다. 제사와 번제는 행위에 대한 표시에 집착하는 삶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내가 이만큼 제사를 드렸고 번제를 드렸으니 나는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사람이라던가 복을 많이 받는다던가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오늘로 친다면 십일조를 얼마나했고, 주일 성수와 교회 모임을 수 십년째 빠지지 않았고, · 담배를 한 번도 하지 않았으니 나는 정말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사는 거야 라고 생각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과 하나님을 아는 것보다 이러한 외향적 표시에 더 우선을 둔다면 그것이 무엇이라도 잘못되었다는 것이 오늘 호세아서의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인애가 없다면 그저 아침 구름같고, 쉬 없어지는 구름같은 신앙일 뿐입니다. 호세아서에서 계속 강조하는 것이 바로 인애입니다. 그리고 그 인애와 함께 계속해서 나오는 것은 정의와 공의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은 정의, 공의, 인애, 진리를 행하는 삶입니다. 이 점을 다른 예언서에서도 확실히 말했는데 다같이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미가서 66-8절입니다. 미가서 66-8절입니다.

 

6: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로 일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7: 여호와께서 천천의 숫양이나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로 말미암아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8: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여기서 인자는 원어로 헤세드이기에 인애로 볼 수 있습니다. 미가서에서도 정의, 인애, 겸손히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스가랴서에서는 그 정의와 인애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잘 나타나기도 합니다. 이번엔 제가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스가랴서 79-12절입니다.

 

9: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진실한 재판을 행하며 서로 인애와 긍휼을 베풀며

10: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와 궁핍한 자를 압제하지 말며 서로 해하려고 마음에 도모하지 말라 하였으나

11: 그들이 듣기를 싫어하여 등을 돌리며 듣지 아니하려고 귀를 막으며

12: 그 마음을 금강석 같게 하여 율법과 만군의 여호와가 그의 영으로 옛 선지자들을 통하여 전한 말을 듣지 아니하므로 큰 진노가 만군의 여호와께로부터 나왔도다.

 

스가랴서에 따르면 옛 선지자들은 진리의 재판, 인애와 긍휼, 약자를 압제하지 말 것, 서로에게 악을 꾀하지 말 것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이라고 말했습니다.

 

힘을 가진 자든 안 가진 자든 정의롭게 사는 것은 굉장히 힘든 일입니다. 인애와 긍휼을 가지며 약자들을 품는 것 역시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당장에 정의와 인애를 통해서 내 앞이 깜깜해지면 어떻게 됩니다. 내 먹고 사는 것이 어려워지고 내 위상과 처지가 나락으로 떨어진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 판단을 쉽게 할 수 있을까요?

제겐 작년에 한 가지 대단히 정의와 인애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대한민국 민정수석과 법무부 장관은 거진 대부분은 검사출신이었습니다. 특히 법무부 장관은 대부분 검사였고 간혹 판사였습니다. 민정수석은 보수정권일수록 거의 검사가 민정수석을 맡고 있었습니다. 제가 팩트체크를 해봤습니다. 왜 청와대 내에서 법무부와 민정수석을 검사로 삼았을까요? 대부분 청와대로 가는 사람들은 검찰총장 다음으로 가는 자리인데 왜 그럴까요? 그건 기수문화가 강한 검사를 컨트롤하기 위해서입니다. 한참 위의 선배가 지시하면 검찰을 해야 됩니다. 정권에서 누구하나 잡자고 하면 바로 검찰이 조사와 기소를 할 수 있는 것이고요. 그래서 우수게 소리로 개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번 정권에서 민정수석과 법무부 장관을 어떤 사람들이 했죠? 검사출신은 전혀 없습니다. 학자들, 공무원이었습니다. 법무부 장관은 사시출신도 아닌 법학자들이 맡기도 했죠. 그나마 지금은 사법고시를 통과하고 판사를 했던 사람이 맡고 있습니다. 그래서 일각에서는 이런 소리도 있습니다. 왜 지금 정권은 저번 정권처럼 하지 않냐고. 검사들을 사냥개로 만들어서 이제 역습을 해야지 왜 착한 척하냐고. 그런다고 사람들이 알아주느냐고.

지금 정권이 그래도 꿋꿋이 밀고 나갑니다. 왜냐면 그건 민주주의 통치에 정의로운 방식이 아니라는게 그 이유입니다.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와 궁핍한 자들이 억압하던 그 방식이었는데 그게 정의로운 방식이 아니라고 합니다. 정의를 선택하니 어떻게 되었습니까? 최순실 국정논단 사태보다 더 큰 언론 보도가 있었고 난리가 났습니다. 현실은, 탄핵 부결되어 계엄령 군대까지 동원하려 했던 일보다 정의를 선택한 것이 더 나쁜 일이 되었습니다. 지지율은 처참하게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일련의 사태를 보면서 나는 저렇게 할 수 있었을까? 나라면 저기서 저런 선택을 할 수 있었을까? 그냥 한 번 참고 좀 타협하고 다음으로 넘기면 안 되나? 우리는 정의라는 말은 좋아하지만 현실 앞에서, 내 삶 앞에서 정의는 처참하게 다가옵니다. 우리가 그렇게 비난하고 욕하는 정치인도 정의로움을 위해서 무수한 희생을 하는데 하물며 그리스도인 나는 정의 앞에서 말만이지 않았나 싶은 부끄러움이 내내 들었습니다.

 

이후 7절 이후는 인애를 저버린 이스라엘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인애가 강조됩니다. 호세아서는 인애와 정의를 늘 강조했습니다. 오늘 본문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말뿐인 인애였습니다. 되려 하나님을 자신의 욕망으로 가두려고 하고 이방 종교의 모습으로 만들려고 했습니다. 종교적 행위에 더욱 몰두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하면 이방 종교에는 통했거든요.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모습보다 인애를 원했습니다. 삶 속에서 제사와 번제같은 것보다 정의와 인애, 긍휼을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공평하게 대하고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 같은 소외되고 연약한 자들을 돌보라고 하셨습니다. 돈과 권력이 많다고 대우가 달라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오늘 분몬과도 연관이 있는 시가 문득 생각났습니다. 이 시를 읽고 오늘 마무리 하도록 하겠습니다. 기형도 시인의 <우리 동네 목사님>입니다.

 

 

읍내에서 그를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철공소 앞에서 자전거를 세우고 그는

양철 홈통을 반듯하게 펴는 대장장이의

망치질을 조용히 보고 있었다.

자전거 짐틀 위에는 두껍고 딱딱해 보이는

성경책만한 송판들이 실려 있었다.

교인들은 교회당 꽃밭을 마구 밟고 다녔다, 일주일 전에

목사님은 폐렴으로 둘째아이를 잃었다, 장마통에

교인들은 반으로 줄었다, 더구나 그는

큰 소리로 기도하거나 손뼉을 치며 찬송하는 법도 없어

교인들은 주일마다 쑤군 거렸다. 학생회 소년들과

목사관 뒤터에 푸성귀를 심다가

저녁 예배에 늦은 적도 있었다.

성경이 아니라 생활에 밑줄을 그어야 한다는

그의 말은 집사들 사이에서

맹렬한 분노를 자아냈다, 폐렴으로 아이를 잃자

마을 전체가 은밀히 눈빛을 주고 받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주에 그는 우리 마을을 떠나야한다.

어두운 천막교회 천장에 늘어진 작은 전구처럼

하늘에는 어느덧 하나둘 맑은 별들이 켜지고

대장장이도 주섬주섬 공구를 챙겨들었다.

한참동안 무엇인가 생각하던 목사님은 그제서야

동네를 향해 천천히 페달을 밟았다, 저녁 공기 속에서

 

그의 친숙한 얼굴은 어딘지 조금 쓸쓸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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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이 아니라 생활에 밑줄을 그어야 한다. 저는 다시 고쳐서 성경만이 아니라 삶 속에서도 밑줄을 그어야 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그저 머리뿐만이 아니라 삶 속에까지 보여 한다는 것이 오늘 본문이었습니다. 인애, 정의, 공의. 거창해보이고 누구나 선택할 것 같지만 현실에선 방해되고, 손해보고, 돈이 되지 않는 가치들입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인애를 원하신다는 것을 반드시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그런 하나님을 알기에 힘을 쏟는 우리 성도님들 되시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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