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사니?”라고 친구들을 놀릴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 질문을 대단히 진지하게 생각합니다. “왜 사니?” 또는 “무엇을 위해 사니?”라는 질문을 말입니다. 이런 본질을 묻는 질문은 오늘날 선호하지 않습니다. 감각적이고 피상적인 이 시대에는 특히나 그렇습니다. 스마트폰에서 손으로 누르면 바로 바로 반응이 오고 컴퓨터 마우스 역시 몇 번의 클릭과 엔터 한 번이면 질문의 답을 쉽게 찾을 수 있는 시대이기에 이런 본질을 묻는 질문은 대단히 짜증납니다. 왜냐하면 쉽게 답이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럴까요? 진지한 사람들을 “진지충”이라 혐오하는 걸 볼 때 더욱 그렇게 느껴집니다.
그런데 저는 이런 불편한 질문을 마구 마구 던지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사역하다보면 교회를 아무 이유 없이 어렸을 때부터 나왔으니까 계속 나오는 분들을 봅니다. 저는 그분들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왜 교회에 나오십니까?” 물론, ‘속으로’ 하죠. 이 질문들은 저에게 가장 먼저 하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이런 삶에 대한 질문에 답을 한 철학자가 있습니다. 바로 하이데거라는 사람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은 죽음을 향해 존재한다고 말입니다. 인간이 사는 목적지는 죽음이라고 합니다. 그 증거가 바로 ‘불안’입니다. 인간이 끊임없이 불안한 이유는 무의식적으로 죽음을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한 신학자는 그리스도인은 이와 다르다고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존재는 죽음을-향해-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부활을-향해-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기뻐할 수 있습니다. 우린 때론 불안하지만 그 너머 근원적으로 기쁨이 있습니다.
우리는 아담과 하와의 때를 기억합니다. 그들은 사탄의 유혹에 선악과를 먹어버립니다.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창 3:7)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로 인해 인간에게는 죄가 들어왔고 그 끝은 죽음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이제 뒤집어 집니다. 누가복음에서 이 이야기는 뒤집어 집니다. 때는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엠마오로 가는 두 사람에게서 시작됩니다. 두 사람도 마침 아담과 하와처럼 부부로 여겨집니다. 그들에게 예수님께서 다가가십니다. 그리고 이야기를 하며 마침내 떡을 가지고 축사하시고 떼어서 주십니다. 그 순간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 보더니”(눅 24:31, 이 그리스어는 창 3:7의 70인역과 매우 비슷하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인해 이제 그리스도인들은 옛 사람이 아니라 새로운 존재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로 인해 우리는 새로운 존재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제 부활을 향해 가는 존재이기에 때론 고통과 절망과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뻐할 수 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그 나라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굳게 믿고 하나님께서 완전히 다스릴 그 나라를 소망하기 때문입니다.
저에게 묻습니다. “왜 사십니까?”, “무엇을 위해 사십니까?” 저는 그리스도인이기에 살고 부활을 향해 살아갑니다. 좀 더 좁혀서 저에게 질문해 봅니다. ‘제가 사역을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담임 목사가 되기 위해 사역을 하는 것일까요? 그래서 좋은 스펙, 학위, 성과를 내야 할까요? 사람들을 많이 모으기 위해 사역해야 할까요? 그래서 엔터테이너의 능력을 길러야 할까요? 큰 목사님이 되기 위해서 사역하는 것일까요? 그래서 유명해지기 위해 노력해야 할까요?
아닙니다. 제가 사역하는 이유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삶의 목적과 닿아 있습니다. 저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와 사망으로부터 우리를 구했고 새로운 하나님의 창조의 세계가 시작되었다는 예수님의 부활을 전하기 위해서 사역합니다. 만약 제가 이를 잊어버리고 포기한다면 제 삶은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매번 속으로 하던 질문을 이제 대놓고 다시 묻겠습니다. “왜 사십니까?”, “무엇을 위해 사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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