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구의 중세엔 성경에 ‘왜?’라는 질문은 절대 할 수 없었던 질문일 것이다. 믿음의 시기를 지나 근대(계몽주의)를 겪은 서구는 이제 ‘왜?’라는 질문을 할 수 있게 된다. (계몽주의를 간단하게 설명한다면 데카르트로 거슬러 올라간다. 데카르트의 유명한 문장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이다. 중세에는 자신들의 존재를 신의 지식이나 신에 의해 존재한다고 여겼다. 하지만 데카르트는 이를 의심한다. 그는 모든 것을 의심하기 시작한다. 결국 의심하던 끝에 그는 의심(생각)하는 “나”는 의심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그 “나”는 의심할 것 없이 존재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니깐 당연히 이 생각하는 나를 중심으로 지식을 쌓아간다. 왜냐하면 내가 존재하는 것은 객관적인 사실이기 때문이다. 이제 스스로 존재하는 신(I am that[who] I am)을 통해 지식의 중심을 두는 것이 아니라 내가 존재하는 자(I think therefore I am) 곧 내가 스스로 존재하는 자의 시작이 되었다. 인간이 주체이며 인간의 이성이 이제 주체가 되었다. 성경 역시도 인간의 이성 아래에 두기 시작했다.)
물론, 데카르트때(17세기)부터 바로 성경의 권위에 도전을 한 건 아니다. 18세기에 발전하여 정치·사회·문화 등 모든 분야에 계몽이 일어나면서 슬슬 19세기에 이제 종교에도 계몽주의의 질문이 시작된다. 곧 많은 사람들이 이제 기독교에 대해서도 의심하기 시작하는데 기독교의 기준인 성경이 가장 타겟이 된 것이다. 흔히 신학에서 자유주의라는 말은 여기서 형성된다. 이 계몽주의의 질문에 그대로 수납하여 신학을 형성하기에 아무래도 성경을 이해 가능한 영역으로 보려고 한다. 가령 성경의 기적들은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가 될 수 없는 부분들이니 그것들을 제거해 버린다. 대표적으로 예수님을 이러한 시각에서 그들은 연구했는데 그 연구의 결과물은 “예수님은 곧 윤리선생”일 뿐이다는 것이었다.(물론 이는 우리가 잘 아는 슈바이처가 단지 좋은 소리만 하고 윤리적인 말을 했던 사람이였다면 왜 예수님은 죽으셨는가?란 주제의 논문으로 자유주의자들의 논리는 다 깨져버린다.)
자유주의자들이 있다면 반대의 사람들도 있다. 계몽주의의 질문은 모두 거부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을 우리는 근본주의자들이라고 한다. 근본주의자들의 단점을 인간의 이성적 영역을 거부해버리니 학술적인 곳이나 공적영역에서는 배제되어 버린다. 시대와 대화가 안 되며 그들만의 리그가 되어 버린다. 성경 역시도 덮어놓고 믿기 때문에 부작용이 상당하다.
이와는 반대로 계몽주의의 질문에 답하려고 하며는 사람들을 복음주의자들이라고 한다. 인간의 이성적 영역에서도 충분히 신앙을 변증할 수 있다고 믿는다. 곧 이재근 교수가 정의한 대로 “20세기 복음주의자는 근본주의의 반지성, 반문화적 성격에 저항하고, 자유주의의 반성경적 태도에 저항하여 성경에 근거한 신앙을 붙드는 동시에, 근본주의의 고립주의를 탈피해서 지성과 문화영역에서도 그리스도의 주권을 지켜 내려는 신앙인을 의미한다.” 정확한 정의다.
우리 시대에서는 신학하기가 참 좋아졌다. 왜냐면 복음주의권 학자들이 수준급의 학술서들을 내기 때문이다. 19세기말이나 20세기 초 무렵이었다면 필자 역시도 신앙을 위해 근본주의로 눈을 돌렸을 것이다. 특히나 존 스토트를 위시하여 요즘은 영국의 학자들에게서 복음주의는 많은 빚을 진다. 대표적으로 N. T. 라이트(대중적으론 톰 라이트)의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논증이나 리처드 보컴의 목격자들에 대한 이론으로 성경의 권위가 지켜지고 있다. 성경은 과연 믿을 수 있는 내용인가로 논증할 수 있겠지만 그 이야기를 하려면 많은 시간이 필요하기에 이는 생략하기로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성경을 읽어야 할까? 그건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며 하나님을 믿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우리가 알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없다.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는 진정 하나님을 알 수 없다. 하나님이 스스로를 보여주시지 않으시면(계시) 우리는 하나님을 알 수 없다. 물론, 인간이 하나님의 존재를 인식할 수 있도록 피조 세계에 남겨진 창조주의 흔적이 있기도 하다(일반계시). 그러나 이보다 하나님께서 자신이 누구신지를 성경을 통해서 구체적으로 알려 주셨다(특별계시). 하나님을 알고 이해하고 깨닫는 근원적인 출처가 바로 신구약성경인 것이다. 그렇기에 그리스도인이라면 성경을 읽어야 하며 하나님을 알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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