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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리뷰/인문

[책리뷰] 강유원 - 책과 세계[큰글자 살림지식총서 059](살림출판사)

by 카리안zz 2020. 8.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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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낀 점

 강유원에 대한 말은 많이 들었다. 누군가 서평이나 글을 쓰려면 이 책을 추천했던 기억이 남았고 나는 바로 이 책을 구입했다. 바로 읽지는 않았지만 최근에 최애하는 팟캐스트 <슬기로운 독서생활>에서 강유원의 책을 추천하더라. 그 내용을 듣고 이 책을 집에서 가져와 바로 읽었다. 그리 두껍지 않은 얇은 책이다. 과연, 기대했던 것 이상이었다. 

 다 읽고나니 이 책은 인문학 서적이다. 인문학이 이런 것이겠구나 감이 확 왔다. 무거운 학술서는 아니지만 책과 세계에 관한 지식을 잘 구슬러서 엮어 냈다. 이 책을 읽다가 사사키 아타루의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이 생각났고, 김용규의 <신>을 함께 읽어보면 어떨까 또 생각했다. 사사키 아타루의 책보다 나는 이 책이 더 나았다. 사사키 아타루는 일기형식 느낌이 많이 났는데 이 책은 그런게 전혀 없다. 담백하다. 간결하다. 핵심을 한큐로 정리하고 이해할 수 있게 써놨다. 그래서 이 책이 참 좋았다. 그의 정리된 생각과 하고자하는 말이 나에게 확 느껴졌다. 글을 잘 쓴다는게 이런 거구나 싶었다. 

텍스트와 콘텍스트

 책, 넓게 말해서 텍스트는 본래 세계라는 맥락에서 생겨났다. 즉, 세계가 텍스트에 앞서 있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그것만으로도 만족했었다. 그런데 어느덧 텍스트는 세계를 거울처럼 반영한다는 거짓을 앞세워 자신에 앞서 있던 세계를 희롱하기 시작했고, 어느 순간부터 텍스트는 그것 자체로 일정한 힘까지 가지게 되었다. 이 와중에 세계와 일치하는 점이 전혀 없는 텍스트도 생겨났다. 이것은 인간 의식의 분열인 동시에 세계의 분열이다. 결국 이것은 세계의 불행이며 그 세계 안에 살고 있는 인간의 불행이다. 
 텍스트와 그 텍스트가 생산된 컨텍스트로서의 세계가 어떤 관계에 있는지는 이제 정확하게 알아낼 도리가 없게 되었다. 다만 몹시 뒤엉켜 있다는 것만을 짐작할 뿐이다. (4-5)

 

 이 책은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책과 그 책이 써질 때의 세계를 서술한다. 거기에 대한 내용이 이 책이다. 잡설은 없다. 그 주제를 향해 이 책은 시종일관 나아간다. 

 

파악된 텍스트와 세계

쓸쓸한 세계: <길가메시 서사시>

 "수메르 지역에서 발견되는 최초의 책들은 상인들이 남긴 기록이다"(6) 경제에 대한 내용이 점토판 대다수를 차지한다. 그런데 인류 최초의 서사시로 알려진 <길가메시 서사시>는 일상적이 것이 아니다. 그러나 판타지도 아니다. 수메르 사람들의 세계관을 확실히 담겨있다. 수메르 지역은 지금까지도 분쟁의 지역이기에 너무나 현실적인 곳이다. 이 길가메시 역시 그렇기에 너무나 현실적이다. "길가메시와 그리스의 영웅들은 모두 난폭자요 약탈자들이라는 공통된 모습을 보인다. 이들을 이렇게 만든 것은 그들이 사는 세계의 삶 자체가 품고 있는 비정함이다"(8) 제목처럼 책과 세계에 대해서 간결하게 파악해 준다. 

정지된 영원함: <사자의 서>

 이집트는 어땠을까? 이집트는 안정에 성공했다. 신석기 농업혁명이 성공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안정되다 못해 지루할 정도의 생활세계를 가지고 있었다. 그것이 그들에게 불멸과 영원한 관념을 가져다주었고, 이것이 응축되어 나타난 것이 <사자의 서>인 것이다. "(14) 

 이 <사자의 서>에서 내세의 삶이 나왔는데 그것이 나온 배경에는 그들의 환경이 작용했다는 것이 이 책의 설명이다. 환경이 생각을 만들어 낸다. 이걸 유물론이라고 해야하나?

 여튼, 저자는 이러한 방식으로 인류의 중요했던 책과 세계를 읽어나간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이 적실한 인문서로 느껴졌다. 

해석에 대해

 이 책을 읽다보며 해석이 떠오른다. 그가 이야기한 세계의 맥락을 읽으라는 것도 성경을 해석을 공부하다보면 자연스레 나오는 이야기다. 텍스트와 콘텍스트. 그때 이 단어들을 배운다. 성경의 글과 그 글이 쓰일 때의 배경과 맥락을 알기 위해 보는게 주석이다.  기도와 그냥 성경읽기로는 한계가 있다. 

 그리고 성경 해석을 할 때 주의해야 하는 것. 바로 지금의 관점에서 과거를 읽어내는 것이다. 그걸 저자도 역시 조금은 시니컬하게 말한다. 

이 서사시는 오늘날의 모든 것을 몽땅 무시하고, 살이 찢어지고 뼈가 으스러지고 피가 튀는 날것의 현장으로 우리를 데려다놓는 것이다. 그러니 이 서사시를 현대적인 의미의 권력, 계급, 성 등의 관념에 맞추어 해체하거나 재해석하여 읽는 것은 부질없는 짓일지도 모른다. (18)

 물론, 설교는 재해석을 한다. 그걸 제외하면 현대적인 의미를 맞추어 해체하는 것에 나 역시 반대한다. 이 책의 모든 걸 동의하진 않았지만 가장 수긍되는 지점이었다. 

간결한 설명

 이 책에서 가장 매력을 느낀 건 간결한 설명이었다. 그 간략한 서술에 책을 재미있게 읽었고 전혀 지루하지 않게 읽었다. 그의 호흡이 잘 느껴졌다. 그 간결한 표현들을 메모했는데 그 부분을 나열해 보겠다. 

 전쟁이유

 기원전 1300년을 넘어서면서 지중해 전역은 더욱 심각한 약탈과 불안정의 소용돌이에 빠져든다. 여기에는 인구과잉, 농사의 실패, 가뭄과 기근 등이 작용했을 것이다. 미케네의 왕들은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약탈전쟁에 나서서 전리품과 노예, 보물을 획득하려 했던 것이다. 이 과정의 절정이 바로 트로이 전쟁이었다고 추측해본다. (20)

 

명예가 중요했던 이유

자신이 언젠가는 죽을 운명임을 아는 영웅은 더욱더 명예에 집착한다. 죽어야 하는 인간이 획득할 수 있는 불명성은 명예뿐이기 때문이다. (22)

 성경의 문화가 '수치와 명예'문화로 알려져 있다. 왜 명예를 중시할까? 그 의문이 있었다. 그 의문의 힌트를 간결한 설명을 통해 알게 된 것같다. 사람은 영원히 살고자 하는 욕망이 있고 그게 불명성이다. 육체는 죽어서 불멸하지 못한다. 그러나 명예는 다르다. 명예가 남는다면 그 명예는 육체의 생명보다 더 중요해 질 수 있다. 명예가 엄청나게 중요해 진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순수주의가 등장했던 시기

피타고라스, 파르메니데스, 플라톤 등의 순수주의는 순수형상에 대한 신뢰를 공통점으로 하여 아리스토텔레스에까지 이어진다. 이러한 순수주의는 어쩌면 사회경제적인 여유가 없어지면서 정신이 고도로 추상화되었기 때문에 생겨난 것일지도 모른다. 다시 말해서 피타고라스나 파르메니데스는 몰라도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순수주의가 용납되기 어려운 혼란한 상황을 살면서도 오히려 그 순수주의를 체계적으로 이론화한 현실 거역의 철학자들이었다고 할 수 있으며, 플라톤의 대화편 <국가론>은 그 거역의 집대성일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 저작이 가진 미묘한 자기모순을 짐작할 수 있다. (34)

 순수주의란 모호한 것이 아니다. 예로, "피타고라스 교단은 남성만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그들에게 극닥적인 금욕과 사고의 순수성이 요구"(33)되는 그런 걸 말한다. 정확히는 두 세계에 걸쳐 있는 것은 철저히 배격한다. 대표적인 콩처럼 말이다. 

 그런데 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순수주의가 용납되기 어려운 혼란한 상황이었을까? 그건 그 당시 현실을 봐야 한다. "그리스 지역의 연간 강수량 500mm 정도인데, 이는 자급자족을 위한 농사에는 부족하다. 그래서 그리스인들은 염소나 양을 길렀고, 이것은 이 지역의 삼림 파괴를 초래했다. 일단 살림이 황폐해지면 그것은 치명적이고도 돌이킬 수 없는 위협이 된다. 삼림의 황폐는 농지의 황폐로 이어지고, 농지의 황폐는 아테네 시민의 근간이자 군사력의 중추를 이루는 중무장 보병의 몰락을 가져온다. 플라톤이 살았던 시기인 기원전 400년에서 300년은 바로 이때에 해당하며, 그보다 나중인 아리스토텔레스 시대에 오면 아테네 농민은 완전히 몰락해서 곡물을 수입할 지경에까지 이른다."(32) 

 이러니 그들의 현실은 순수주의가 아니라 혼합된 것을 더 추구했을 지도 모른다. 이렇게 시대상을 읽어주니 이해가 잘 되었다. 

날것 그대로의 세계

 그는 전원에 파묻혀 고요한 질서를 찬양하는 비현실적 궁정 지식인이 아니라, 분열과 반목, 침략과 방어라는 날것의 현장에서 동분서주했던 서기관이었다. 그의 텍스트들은 역사적 현실이라는 컨텍스트에 너무나 철저하게 밀착되어 있어서 어느 것이 현실이고, 어느 것이 그에 대한 텍스트인지 구별하기 힘들 정도이다. 이렇게 텍스트만 보아도 우리는 그가 고대 그리스 비극의 철저한 인식과 로마제국의 단순한 실천이라고 하는 서구의 전통 위에 서 있음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64)

 이 책이 유익했던 것이 사상을 계속해서 보여주는 것이다. 오래 전 교과서에서 배운 대륙전통의 관념론과 영미권의 경험론. 그 틀을 확고하게 말하진 않지만 현실을 중심으로 하는 세계와 그 배후 이면 세계를 중심으로 하는 세계를 자주 말한다. 

 저자는 현실을 중심으로하는 그 세계가 결국 지금 세계를 정복했다고 말하는듯하다. 그리스 신화의 인물에서 마키아벨리, 베이컨, 홉스, 로크, 아담 스미스, 다윈을 나열한다. 결국 자본주의 사회로까지 확장해서 세계를 설명해준다. 탁월했다. 

그 결과 오늘날의 세계는 홉스가 말한 전쟁 상태가 되었고, 세계 어디서나 무제한의 탐욕이 도덕적으로 올바른 것으로 간주되는 태도가 받아들여지고 있다. 현실의 탐욕의 논리가 그대로 도덕적 가치가 되는 오늘날의 냉혹한 세계는 제법 오래전부터 시작된 것이다. (76-77)
베이컨, 홉스, 로크 ,스미스로 이어지는 대영제국의 현실적 텍스트들은 서양사상의 주류인 수학적 세계관을 현실세계에 적용한 결과물이었다. (89)

 

 그런데 저자가 말하는 뉘앙스가 정확히 어떤지 모르겠다. 그 현실적 세계를 중시하는 세계를 비아냥 대는 건지 아니면 치켜세우는 건지 모르겠다. 저자는 이렇게도 썼다. 

이들 나라에서(영국, 프랑스 - 카리안 주) 종교 비판은 더 이상 중요한 주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따라서 새삼스럽게 종교 비판을 거론한 마르크스의 언급은 후진적 독일에서 종교 비판이 그만큼 중요했음을 의미한다 하겠다. (88)

 독일을 후졌다고 한다. 그런데 역사적 예수라는 분야는 독일에서 유행하였다. 영국과 프랑스는 이미 그럴 필요도 없었기에 독일이 후졌다는 것일까. 그것 자체에 의미가 이제 없으니 역사적으로 예수가 어떻든 말든. 저자는 이 책이 끝나갈 때쯤에 이렇게 말한다. 

 다윈은 이러한 설명을 통하여 우선 세계 안에는 아무런 목적도 없을 수 있음을 드러내 보였고, 인간 역시 다른 동물과 다르지 않은 방식으로 진화해왔음을 천명하였다. 자연계와 사회세계는 별개의 것이 아니며, 인간은 세계에 우뚝 선 존재가 아니라, 그 중 하나에 불과한 것이 되고 만 것이다. 목적이 진보라 해도 과정은 끊임없는 투쟁일 수밖에 없다. 자원을 서로 먼저 차지하기 위해 사람들끼리 피 흘리며 싸우는 것은 당연한 일로 간주된다. '만인 대 만인의 투쟁'이 인간 본성과 자연환경에서 너무도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일로 설명된다. 이로써 무한 경쟁에 근거를 둔 근대의 자본주의세계는 확실한 이론적 근거를 가지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이념으로 등장한 사회주의에서도 '투쟁'이라고 하는 방법론을 받아들였다. 인간은 더 이상 도덕의 겉옷을 걸칠 필요가 없게 되었고, 그가 자본주의자건 사회주의자건 맨몸으로 살갗을 찢어가며 쓰라린 투쟁에 나서게 되었다. 이 기반 위에서는 어떠한 처방도 한낱 도덕주의적 대증요법밖에 되지 못한다. 
 먼 옛날의 서서시들은 세계에 대한 과학적 인식 없이도 세계가 쓸쓸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수많은 세월이 지난 다음에도 또다시 같은 것을 알아차리는 건 너무 허망하다. 쓰라린 것이다. (90-91)

 저자는 서두에 "병든 인간만이 책을 읽는다"(4)고 했다. 어찌보면 이는 비꼼이다. 이 책도 그러한 비꼼이 있다. "철학이 없는 시대는 행복한 시대"(47)라는 비꼼. 아니 비꼼이라기보단 저자의 표현대로 쓸쓸함과 쓰라림으로 말하는 게 맞겠다. 저자는 모두 병들었지만 책을 읽지 않는다는 것에 쓸쓸해 하고 있다. 쓰라리고 있다. 에필로그에 답을 제시해줬는데 "이러한 물음에 대한 답은 고전이 보여주는 자아들을 자기 몸에 넣어보고, 다시 빠져나와보고, 다시 또 다른 것을 넣어보고, 또다시 빠져나와본 다음에야 얻을 수 있을 것이다."(92-93) 그러나 그조차도 무의미한 일일 수 있다 말하며 확실하지 않다고 말한다. 철학이 없는 시대가 행복한 시대라고 말하고 그때 철학은 처세술일뿐이다라고 한 것 역시 쓸쓸함과 쓰라림이다. 

 나는 저자의 이러한 이러한 점에서 위의 자본주의세계에서의 싸움이 쓸쓸함과 쓰라림으로 보였다. 저자는 이것이냐 저것이냐 뭐가 더 올바른 것이냐 말하지 않고 그 쓸쓸함에 대해, 쓰라림에 대해 간결하게 서술할 뿐이다. 그가 여러 세계에 들어가서 나와서 나온 다음에야 얻은 것이 바로 이 책 <책과 세계>이다. 

 

매체에 대해서

 이 책에서 흥미로웠던 내용 중 매체에 대한 부분이 있다. 매체란 텍스트를 담고 있는 것을 말한다. 저자의 표현은 "매체는 가장 직접적으로 텍스트를 옮기는 도구", "텍스트를 담고 있는 그릇"(36)이다. 그런데 저자는 매체는 거기에서 끝나는게 아니라고 했다. '매체 네트워크'와 이걸 '누가 어떤 방식으로 운용할 것인가'로도 볼 수 있다.  그러니 매체는 세계를 볼 수 있는 하나의 도구이다. 

 단적인 예로, 점토판을 보자. 

중국의 고대문명은 황하에서 생겨났다고 알려져 있다. 이곳은 황토가 많은 곳인데, 여기서 점토판이 텍스트를 담는 매체로 쓰이지 않는 것은 의아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중국과는 달리 점토한에 글을 써서 그것을 불에 구워 보존했다. 어디에서나 구할 수 있고, 쉽게 보존할 수 있는 매체라는 점에서 보면 점토판은 죽간이나, 중국에서 고급 문서에 간혹 쓰이던 비단을 능가한다. 매체 선택의 이러한 차이가 그것에 쓰여진 텍스트 내용까지도 규정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38)

 매체 자체가 귀한 것에 쓰였다면 그 안의 내용물도 마찬가지다. 중국에서는 값진 내용이 점토판같은 값싼 것에 쓰인다면 그것은 값없는 것이 되어버릴까 염려에 활용하지 않은 것이다. 매체 자체가 메시지가 된다. 

 신약에서도 매체에 대해 나온다. 일단 파피루스에 쓰인 신약이 있겠다. 가장 먼저가 50년대겠고, 예수님에 대한 기록인 복음서는 가장 먼저는 70년대에 기록되었다. 그럼 그 사이의 매체는? 사람이었다. 사람이 매체였다. 그 사람들의 증언이 내용이었다. 매체에 대해서 나와서 신약을 한 번 생각해 보았다. 

 여튼, 저자는 이 매체를 누가 사용했냐에서 지배계급이라고 했다. 고대의 진흙판, 금속 그릇, 거북등껍질, 죽간, 파피루스는 대중적이지 않았고 사람들이 쉽게 사용하고 기록하지 못하였다. 그당시 세계의 일부분만이 기록되었을 것이고 그 일부분만이 지금 우리에게 내려온다. 그렇다면 그 당시 세계를 우리는 온전히 알 수 있을까? 하지만 신약성경은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지배계급이 아니었다. 지배계급이 아닌 목소리가 지금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이다. 우린 그걸 신의 계시, 신이 들려주는 목소리라고 말한다. 

 

나가면서

 유익한 점이 참 많았다. 많은 것을 배웠다. 내용, 내용 외적인 글쓰기도 그렇고. 물론, 동의할 수 없는 점이 있다. 모세 오경에서 야훼는 늘 폭군처럼 굴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늘 겁에 질려 있다는 표현이 그렇다. 물론, 이는 신앙이 있는 자와 없는 자가 바라보는 세계의 차이일 것이다. 신앙심이 충만한 사람들은 이런 표현들이 불편할 수 있겠다. 또, 간혹 저자는 어떤 자료들을 보고 이러한 글을 썼을까 그 내용의 근거가 궁금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러한 의심이 계속 이어지 않았다. 저자의 필력때문이다. 글을 참 잘 쓴다!

 이 책은 읽을 가치가 넘치고 넘친다. 인문서 중에 무얼 추천하라고 한다면 이제 이 책을 추천할 것이다. 이 책은 내 인문서의 교과서가 되어버렸다. 강력히 추천한다. 

 


메모

그리스인들은 아무것도 없는 땅에 도시를 건설하는 데 반하여, 히브리인들은 이미 존재하는 도시로만 이주했다. 그런 까닭에 지중해 세계 곳곳에는 그리스인이 건설한 도시가 널려 있지만, 히브리인이 세운 도시는 하나도 없다. (23)

- 그리스인과 히브리인의 차이 

 

고대 그리스인들은 오이디푸스가 보여주는 상황을 통해서 자기를 되돌아보았다. 그들은 비극이 던지는 물음과 그에 대답하는 코러스를 들으면서 인간의 본질을 더듬어 찾았다. 그들은 안티고네와 크레온의 싸움을 보면서 전자가 지키려 하는 전통적 혈연 공동체의 윤리와 후자가 강요하려고 하는 새로운 시민적 결사체 사이에 대립이 있음을 알아차렸다. 이 물음은 오늘날까지도 완벽한 대답을 얻지 못했다. 그래서 그리스 비극은 고전이다. (28)

- 크~!


책 맛보기

 

역설적이게도 또는 방정맞게도 철학은 어렵고 힘든 시대에만 발언한다. 정말 느닷없다 싶게 나타나 엉뚱한 소리를 해대면서 그렇지 않아도 심란한 사람들의 속을 복잡하게 만들어놓는다. 세상에 정말 쓸모없는 학문이요, 작태가 아닐 수 없다. 거듭 말하지만 철학이 없는 시대는 행복한 시대이다. 그러한 시대에는 철학이 있다 해도 심오한 근본 문제를 탐구하는 대답 없는 학문이 아닌, 처세술로서의 역할을 다할 뿐이다. (47)


심지어는 '국부'가 아닌 개인의 '치부'를 목적으로 삼은 행위를 정당화할 때에도 스미스가 활용된다. 이는 이기심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삶을 살았던 스미스 자신에게는 언짢은 일이겠으나, 그의 위세를 빌려 자신의 이기심만을 충족시키며 행복한 나날을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참으로 고마운 일이겠다. (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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