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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리뷰/인문

[책리뷰] 오찬호 -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괴물이 된 이십대의 자화상)

by 카리안zz 2020. 5.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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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낀 점

 중고등부 사역을 하면서 가장 많이 듣는 단어가 '페미니즘'이었다. 페미니즘. 나는 그 단어를 고2였나 고3때 사회문화 교과서를 보면서 알게 되었다. 문단 옆 각주에 'Feminism'에 대한 설명이 있었다. 단어가 특이해서인지 이 단어를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단어가 십 몇 년을 지난 뒤에 인터넷 상에서 엄청나게 이야기되고 있다. 2015년 쯤인가 그 때 사그러들겠지 했는데 보니 여전히 지금도 그렇다. 그래서 누군가는 이 현상을 보고 '20대 남성'을 이야기 했다. 그 사람은 천관율 기자이고 그가 30분 가량 강의한 내용에서 왜 아이들이 페미니즘에 대해서 저렇게 악의적인 반응을 보일까 그 단초를 본 듯했다. 

 처음에 아이들이 페미니즘이라는 단어를 자꾸 언급하는 이유를 대구라는 지역 문제로 생각했다. 쉽게 대구는 대단히 수구적인 도시니깐 아이들이 그 영향으로 저러는 거겠지 싶었다. 그러다 가짜뉴스를 때려패는 헬마우스의 하CP 이야기를 듣고 이건 단순히 지역적인 문제가 아니라 20대 남자들의 문제인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 10대 중후반인 아이들도 그 영향 아래 있기에 페미니즘에 대한 답습을 그대로 한 것이다. 

 일단 아이들이 페미니즘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일화를 통해 말해보겠다. 아이들은 문재인 대통령을 엄청나게 씹어댄다. 엄청나게 비아냥댄다. 그 이유는 문재인 대통령이 페미니즘이라고 선언했기 때문이다. 문재인 대통령을 왜 싫어하냐니 애들은 '페미잖아요'라고 답했다. 그래서 나는 '너희들 페미가 뭔데?'라고 물었다. 내가 원한 답은 68혁명이니 포스트모던이니 가부장적이니 그러한 이야기를 할 줄 알았다. 근데 전혀 뜻밖에도 '유튜버 중에 자칭 페미를 내세우는 베리X'라는 사람이 페미니스트라고 말했다. 나는 그때 20대 남성들 사이에서 오가는 페미니즘은 흡사 '빨갱이' 프레임과 비슷한 것은 아닐까 싶었다. 그들에겐 페미니즘은 여성우월주의이며 이상한 짓을 하는 사람들이며 메X같은 극단적인 인간들이었다. 그러니 대통령이 페미니스트라고 말했을 때 그들의 타겟이 된 것이다. 60대 이상 남성이 페미니스트라고 하면 나는 박수를 처주고 싶다. 가부장적 문화에 찌든 문화에 여성을 존중한다는 말이니깐. 그런데 그들에겐 페미니즘이라는 단어는 그렇지 못하다. 단어가 오염된 것이다. 페미니즘을 비판을 한다고 읽는 것조차 그들은 혐오할 것이다. 마치 빨간책을 읽는 그 자체로 위험했던 그 때처럼 말이다. 물론, 그땐 훨씬 심하게 물리적인 처벌이 있어서 비교 자체가 안 되겠지만 말이다. 

 그런데 20대 남성이 이해되는 부분이 있다. 나는 30대 초중반으로 솔직히 남자로서 혜택이랄까 그러한 걸 많이 누렸다. 또, 나는 아버지가 너무나도 가부장적 문화에 젖어들어서 어머니에게 한 행동 때문에 가부장적 문화에 환멸을 느끼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여성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페미니즘 담론을 환영한다. 그 자체로 의미가 있으니까. 하지만 지금의 20대 남성들은 남자로 태어나서 윗세대가 누렸던 걸 많이 누렸을까? 전혀 그렇지 않다. 그들은 정말 공평하게 자랐다. 그런데 그들에게 여성이 억압을 받았다느니 눌려 있다느니 손해를 받고 있다느니 그러한 말들이 용납이 되지 않는 것이다. 기성세대는 실컷 누릴 껀 다 누리고 왜 지금에 와서 그러느냐고 화를 내고 있는 중이다. 이걸 과도기라고 할 수 있을까? 이 억울한 마음을 극우 유튜버들이 슬며시 어루만지고 있는 판국이기도 하다. 이건 다른 얘기니깐 패스.

 그래서 중고등부 사역을 하고 있기도 하고 20대 남성 현상에 대해서 외면하고 있기에는 너무나 실질적인 문제이기에 나는 20대에게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만난 책이 바로 이 책이다. 오찬호의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책 이야기를 해보자. 아쉽게도 내 기대와는 다른 책이었다. 이 책은 2013년에 나온 책이다. 7년 전이기에 나는 20대 중반이었다. 딱 내 세대 이야기였다. 신기하게도 그즈음 내 친구와 이야기를 하면서 느꼈던 내용이 이 책의 줄거리였다. 

 

욕망

"정규직은 비정규직을 보며 기뻐하고, 비정규직은 미취업자를 보며 안도한다. 이런 구조에서는 누구라도 비교를 통해 비루하기 그지없는 쾌락을 찾게 마련이다. 그리고 우리가 현재 하는 공부는 우리 사회의 모습과 동일한 구조를 지니고 있다."
 
-이원석, 공부란 무엇인가(책담,2014), p.168
 
몇 달전 친구와 이야기 한게 생각난다.
그 친구는 대구의 K대 학생이다. 전부터 약간 그런게 있었지만 
그는 K대 밑의 학교를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 때도 그래도 나름 K대 자신의 과면 괜찮다며 
고등학생 때 다른 K대를 내보라던 선생을 무지막지하게 비난한다. 
어디 그런 머 같은 학교에 보내려고 했다며.
물론 그의 화냄에는 일리가 있다. 응당 이해해야 할 부분이 없는 건 아니다. 
 
그리고 그 친구는 나와 함께 공장에서 알바를 같이 했었다. 
그와 나는 그 당시 같은 경험을 했지만 다른 느낌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왜 공부를 열심히 해야하는지 깨달았다고 한다. 
이런 곳에서 일하지 않기 위해서란다. 
민중을 사랑하는 민중이자 노동자를 지향했던 나로서는 불쾌하기 짝이 없는 말이다. 
어쩌면 그것은 사회의 통념일 수도 있다. 
 
그러면서 나는 그에게 한마디 했다. 
"야, 너는 너보다 잘난 놈들이 무시해도 별말 없겠네." 
"어쩔 수 없지 머."
"너 만약에 그 시험 떨어지고 공장 들어가면 어쩌려고 그러냐."
"어쩔 수 없지 머." 
 
그 때
나는 우월감이 열등감의 다른 면이라는 걸 보았다. 
 
나보고 스타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사역자는 주목 받는 자라 화려해야 한단다. 
그래야 사람들이 많이 모이지 않겠냐고 말한다. 
화려한 스포트라이트 아래에 선 배우처럼 나도 그래야 할까. 
 
몇 년전 다른 한 친구는 한 번 남자가 꿈을 품었으면 큰 교회를 해야지라는 포부를 말했다. 
어중간한 목회는 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나는 기독교인이다. 
나는 전도사이기 전에 기독교인이다. 
맨 먼저 말했던 친구에 이야기나 끝에 말한 다른 친구이야기나 
그건 다 예수님 답지 않다. 
 
욕망에 밀려난 예수님을 
다시 모셔 오는게 이리 힘들까. 
모두가 작정을 하니 힘든걸까. 
 
어쩜 여기에 지친 이들이 가나안 성도가 되는 걸까. 
교회가 교회답지 않아 나가지 않는다는 
소설가 김은국이 생각난다. 
 
이젠 교회를 나가지 않는 기독교인들이 세삼스럽지 않다. 
놀랍지 않다는 말이다. 
어쩔 땐 나도 모르게 반갑기 마저 하다. 
 
사실 전자의 이야기와 후자의 이야기는 다른 맥락에서 이야기 될 수 있다. 
두서 없이 편하게 쓰는 장소라서 마구 쓴다. 
우월과 열등 사이에서 
욕망 사이에서
어쩜 여자친구를 결혼전까지 지켜주겠다는 
연약한 촛불 같은 남자처럼.
흔들리지만 끝없이 타올라라!
심지가 다 태워질 때까지. 

-14. 5. 23

 

 20대 중반병이 느껴지는 글이긴 하다(ㅋㅋㅋ 부끄러움). 위의 내용을 이 책에서는 사회학자답게 끊임없이 추적해 나간다.  

 

저자가 이 책을 쓴 이유

 저자는 대학에서 강의를 하는 강사이다. 그는 여러 대학을 강의하는데 어느 날 비정규직 이야기를 하다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반응에 바보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한다. 그때 그 바보가 된 사건이 이 책을 쓰게 된 계기이다. 왜 이들은 비정규직의 문제에 이리도 격하게 반응할까. 왜 이해가 아닌 격한 반응일까. 일단 그들의 반응은 이렇다. 

 

즉, 공정한 경쟁을 통해서 주어진 결과가 싫으면 그만두든지 더 노력해서 더 나은 결과를 얻어내든지 할 것이지, 지금처럼 취업하기 힘든 세상에 그런 도둑놈 심보 가진 사람들 때문에 우리의 밥그릇이 줄어들어 더 힘들어지는 건 불공정하거니와 싫다! 뭐 이런 얘기인 셈이다. (20)

 

 저자가 이런 반응에 황당한 이유가 있다. 비정규직의 상황은 20대가 이야기이기에 그들이 당연히 공감해 줄거라 생각한 것이다. 

 

이십대가 힘든 사회구조적 이유는 비정규직 노동자가 그렇게 힘들어하는 이유와 이렇게 별반 다르지 않다. 그래서 이십대들이 그들에게 동병상련해주길 바랐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반응은 나타나지 않았다. 사회구조적 측면에서 이십대와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피차 마찬가지 처지인데, 이십대들의 일상적인 현실에서는 마찬가지가 아니었던 것이다. (25)

 

 저자는 그들이 왜 이런 공감을 하지 못한 원인을 추적해 나간다. 저자의 원인은 바로 이것이다. 

 

자기계발서

 자기계발이 한참 유행했다. 나야 인문학책을 많이 읽어서 자기계발서들은 완전 개무시하는 사람이다. 그래도 요즘은 내가 자기계발서들을 안 읽어봤는데 개무시할 수 있나 반성 중이다. 물론, 자기계발의 시조가 되는 <긍정의 힘>은 내가 고3때인가 열심히 읽고 감동에 빠진 적이 있었다. 그리고 군대에서 <꿈꾸는 다락방>이었나 거기에서 긍정적인 생각을 하면 뭐시각 작동해서 우리 삶이 윤택해진다나 소원이 이루어 진다나 개소리를 해서 학을 떼었다. 나는 그 뒤로 그런 책들은 취급을 하지 않았고 나중에 그런 책들이 자기계발서라는 것을 알았다. 

 

따라서 비정규직 노동자 처우가 좋아져야 한다는 목소리, 특히 정규직 전환과 같은 노동자 삶의 기본권을 보장해달라는 요구를 지지해주는 게 이십대 자신들의 미래를 위해서도 당연히 좋은 일이다. ...
오히려 이십대들은 이런 분위기에 대해 "핑계대지 말고 스스로를 계발하라!"는 말로 깔끔하게 퉁 치고 만다. (26-27)

그리고 이렇게 희박한 성공의 가능성이 표면화될 때, 목표에 도달하지 못한 수천수만의 사례는 '노력 부족'이라는 말로 간단하게 정리처분 된다. (33)

 

 자기계발서들은 그들이 취업에 실패하고 좌절하는 이유가 노력부족이라고 말한다. 노력이 부족해! 그러니 이런 현실은 다 너가 노력이 부족해서 생긴 좌절이야! 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 그들은 비정규직을 정규직하라는 그들의 말에 뿔이 날 수밖에 없다. 왜 노력하지 않고 무임승차하려느냐는 것이다. 또, 내가 들어갈 수 있는 자리를 뺐길까봐 하는 불안이 작동한다. 

 

 저자는 여기에서 한츰 더 말한다. 개인의 노력 부족이라기엔 보여주는 데이타가 너무나 명확한 점이 있다고. 

사람이 실패하는 데 있어서 '노력 부족'이란 개인적 변수가 결정적이라면, 왜 그런 부족 현상이 경제력 층위별로 정확하게 구별되어 나타나느냔 말이다. 왜 집안의 '소득'과 개인의 '성공'이 탄탄하게 비례하는 지표들이 수두룩하냔 말이다. 취업 실패 이유에 개인이 감당해야 할 몫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게 아니다. 다만, 성공의 요인이 100% 개인적 역량 때문은 아닌 것처럼, 실패 역시 마찬가지란 얘기다. (34)

 

 저자는 진정한 자기계발이 "한 단계씩 도전해나가는 과정이 말 그대로 자기계발이라"(52) 말한다. 하지만 20대에게 자기계발이란 취업준비요, 외국어공부, 학점관리, 자격증 취득, 인턴, 봉사활동, 공모전 참가, 체력관리, 외모 가꾸기(심하면 성형도 불사), 자기소개서 작성 연습, 프레젠테이션 및 스피치 훈련 등을 말한다(52). 

 이렇게 고생을 해서 살아가는데 "나보다 '덜' 노력한 사람은 그만큼 '덜' 대우받아야 한다. 이렇게 '엄격한 시간관리'만이라도 평가받길 원하는 것이다"(82). 그리고 이제 그들은 "타인을 평가하는 애꿏은 집착으로 변질된다"(83).  

 

학벌사회와 수능

  이러니 공감 능력이 떨어지며 편견은 강화된다. 이 모습은 여과없이 학벌에서 드러난다. 딱 내 친구에게서 느꼈던 내용을 저자도 말한다. 

 

지연이는 상대방의 대학에 따라 우월감과 열등감 사이를 시시때때로 넘나드는 것이다. 그리고 그 넘나들이의 '기준'에는 수능점수라는 성과가 존재했다. 지연이는 수능점수에 근거한 대학서열을 기준으로 자신과 타인을 비교하며 쾌감과 비감을 느낀다. 그래서 '서강대 경영'이라는 타이틀이 타인에게 수능배치표의 그 위치로서만 이해되기 전에 어떻게든 부연설명을 하고자 하는 것이다. 자신을 서강대 경영학과 정도의 실력으로만 보지 말라고 미리 방어막을 치는 것이다. 이는 일반적인 고정관념으로 이해하는 대학 진학의 이유로 자신을 평가하지 말아달라는, 일종의 '공감의 호소'다. '학교 이름'만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일들을 많이 겪다보니 생겨난 일종의 자기방어라고 할 수 있다. (105)

 

 앞서 자기계발서에서 언급되었듯이 수능점수는 "자신이 노력한 만큼 얻어낸 성과에 해당한다"(106). 수능의 공정성을 저자는 거의 신념수준이라고까지 표현한다. 신념수준으로 보니 철저히 모든 건 개인적인 문제며 여러 사회적인 요인들의 변수는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공감은 없어지고 고정관념만 확대생산된다. 

 이후로 쭈욱 저자는 자신이 가르친 학생들과의 대화를 말한다. 참 수도권대학은 저런가 싶었다. 

 

연세대는 서강대를, 서강대는 성균관대를, 성균관대는 중앙대를, 중앙대는 세종대를, 세종대는 서경대를, 서경대는 안양대를, 안양대는 성결대를 '무시'한다. 행여나 후자가 전자를 '비슷한 대학'으로 엮기라도 할라치면 그 순간 전자들은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냐"고 난리가 난다. (125)

 

 이런 가해와 피해가 공존하는 탄탄한 구조가 이렇게 탄생하는 것이다. 이후 내 친구와 대화했던 내용을 말한다. 

 

이처럼 대학서열이 남을 판단하는 절대적 기준으로 되면서, 이는 양날의 칼이 되어 필연적으로 우월감과 열등감을 동시에 갖게 만든다. 낮은 대학에 다니는 사람들을 상대로 우월감을 가졌을 때는 "공부 안 한다, 게으르다, 머리가 나쁘다, 천박하다, 천성이 안 좋다" 등의 말을 서슴지 않지만, 한편으로 더 높은 서열의 대학에 다니는 누군가에게는 자신이 바로 그런 말의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걸 잘 알고 있다. 그런데도 그런 무시와 멸시 자체가 잘못됐다고는 문제제기를 하지 않는다. 이들의 생각으로 그건 따질 수 없는 일이며 그렇게 당하는 것도 어쩔 수 없다는 거다. 그러면서 항상 이렇게 조용히 읊조릴 뿐이다. "제가 수능을 좀 망쳐서요·····." (140)

 

원인

1. IMF

 저자는 20대가 이렇게 생각하게 된 원인을 몇 가지 말한다. 먼저는 IMF의 추억이다. 나 역시 IMF때 아버지 사업이 망해버려서 고생을 했던 기억이 있다. 그때 20대였던 이들의 부모는 IMF의 피해자였다. "직장에서 단칼에 내팽겨진 아버지, 혹은 그럴수 있다는 공포감에 짓눌린 아버지를 어릴 때부터 봐왔다"(174). 영화 <국가부도의 날> 마지막 장면이 생각난다. 나는 이 영화의 음모론에 동의하지 않는다. 금모으기 운동도 다 이유가 있었고, 당시 기재부인가 그 집단도 그런 음모론적 행동을 하지 않았다고 본다. 그래서 영화는 별로 였지만 마지막 허준호씨의 모습이 참 기억에 남는다. 그리도 선한 사람이었던 그가 IMF 이후 악독한 사장으로 변했다. 그렇다. IMF는 정말이지 우리를 지독하고 악독하게 만들었다. 우리의 속을 완전히 뒤봐꾸었다. 우리의 가치관도. 

 그 변형이 바로 지금 저자가 지금껏 지적한 것이다. 

'인생 막장 구렁텅이'로 가지 않기 위해서는 해야 될 일이 명확했다. 이들은 자녀들에게, 학생들에게 어떻게 하면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지를 절절하게 설명했다. 좋지 않은 조건을 가졌지만 악착같이 살아 물질적 혹은 명예로운 성공을 한 유명인들의 에피소드는 반드시 물려주어야 할 교훈으로서 안성맞춤이었다. 지금의 이십대들은 당시 '자기계발=성공'이라는 식의 설명을 수도 없이 들으면서 자랐을 것이다. 따라서 성공하지 못한 원인을 이 과정의 부족으로 이해하는 것은 너무 당연해져 버렸다. (175-176)

 

2. 경영학과의 사회학

 대학은 기업화 되었다. 마사 누스바움의 <학교는 시장이 아니다>에서 언급한 내용이 여기에서 나온다. 우리 나라도 역시 대학은 자본주의 상품이 되었다. 대학은 오직 취업률로 평가를 받는다. 이제 대학은 경영학과 위주로 학제를 개편한다. 그렇기에 경영학 전공자가 많이 배출되며 기업이 원하는 인간을 배출해 낸다. 대학은 인문학의 끝판인데 대표적 인문학 교육이 '비판'이다. 비난은 아니고ㅎㅎ. 그러나 이러한 태도는 기업에겐 정말 마이너스이다. "주어진 명제를 이해하고 문제를 푸는 것이 중요하지 이를 의심하는 비판적 사고력은 위험하다. 그렇게 기존의 고정관념이 규지될 최적의 조건이 형성된다."(180-181)

 

3. before/after의 덫

 저자는 "이십대가 결국 자기계발이란 개인적 수단에 집착하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성형이 '필수'가 된 세상의 풍토와도 흡사"(181)하다고 본다. "외모를 차별하던 숱한 가해자와 그 가해자를 양성한 사회의 외모지상주의가 얼마나 문제인지에 대한 논의는 없다. 오로지 외모가 변하면 문제가 보란 듯이 해결되는 모습만 부각된다. 외모 변화가 고통을 사라지게 만드니, 역시 원인은 얼굴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게 된다. 이제 성형은 어떤 문제가 있을 때 하는 게 아니라, 어떤 위기를 예방하기 위한 관리의 차원에서 이해된다. 이 순간 '평범한 사람' 모두가 '잠재적 환자'가 되어버린다."(181)

 취업 등 위험이 도사리고 있지만 노력한 이후에는 성공이 보장된다고 구라가 계속된다. 그러나 20대는 그 구라 속으로 빨려들어갈 수밖에 없다. 더욱 자기계발에 몰두할 수밖에 없다. 

 

대책은?

 저자는 이후 대책을 명확하게 말하지는 않는다. 문제를 분석하는데 온 힘을 쏟은 듯하다. 하기사 저자가 그 해결방법을 고민하고 대책을 세우는 사람은 아니니. 그러나 그는 꿈을 꾼다. 

 

비록 평범한 목표를 가지고 살더라도 인간다움이 지켜지는 그런 사회를 우리는 꿈꾼다. '닥치고 성공!'이라는 논리에 근거하여 세상만사를 판단하는 오류만이라도 줄이려 노력한다면, 굳이 '탈출'을 권할 필요도 없는 건강한 사회에 보다 가까이 다가가지 않겠는가. 그렇게 '힐링'이라는 단어가 굳이 필요 없는 세상이 등장할 때, '아픈 청춘'의 수는 서서히 줄어들 것이다. 그러니 이십대를 향한 어쭙잖은 '감성팔이 위로'의 말은 당장 거둬들여야 한다. 진심으로 이십대를 사랑한다면 말이다. (234)

 

내가 조국에게 부정적이었던 이유

 작년 조국 사태가 벌어졌을 때 나는 그에게 부정적이었던 마음이 다시금 떠올랐다. 조국은 대한민국에서 부당한 일들에 정의로운 말들을 참으로 많이 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강남좌파가 그런 말을 해도 되냐고 비아냥 대었다. 나는 강남에 살아도 좌파가 될 수 있다고 본다. 강남에 살면서 좌파가 안 될 건 뭐람. 그렇지만 그때 나는 조국을 참 비아냥 대었다. 그 후 그가 민정수석으로 발탁이 되었다. 일처리를 하는 것을 보고 약간의 생각이 조금 바뀌기도 했다. 윤석열과 조국은 콤비가 되어서 검찰개혁을 잘 해갔다고 한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 둘의 사이가 틀어졌다고 한다. 이건 주진우 기자가 나중에 기사화할 거라는데 나는 주목하고 있다. 그리고 국정감사였나 그때 임종석과 조국이 방어를 참 잘하더라. 그때 조금 그에 대한 부정적인 마음이 사그라 들었다. 

 그러나 조국사태 이후 나는 그 부정적인 마음이 다시 되살아 났다. 정의를 외치는 사람이라면 학벌사회를 모를 수가 없다. 이런 사회에서 자녀의 학벌에 대해서 무관심했다고? 아내에게 다 맡겼다고? 그것이 의도였던 의도하지 않았던 그는 정말로 내로남불의 전형이다.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 강남좌파라고 그리도 비아냥을 들었으면 한 번쯤은 되돌아 봐야 할 것이 아닌가. 그는 이제 어떠한 정의로운 말을 이어서 할 수 있을까? 

 물론, 조국에 대한 과도한 수사와 압수수색을 했던 검찰에 대해선 엄청나게 부정적이다. 조국의 가정사는 내로남불에 대한 비난을 받아야할 일이지 법원으로 갈 문제는 아니기 때문이다. 2000년대 후반과 2010년대 초중반 대한민국 부모들의 전반적이 입시관련 일들을 모조리 조사하고 기소할 수는 없지 않는가. 

 이제 조국은 끝이 났다. 나는 그가 조용히 물러나서 학자로서의 업을 계속 이어나가길 바란다. 자신을 되돌아보며 정의로운 말들을 실행하면서 말이다. 그가 이 일에 사과를 하고 이런 구조적인 일에 행동들도 한다고 했으니 기대해 보겠다. 정치면에서 보지 말자. 

 

나가면서

 저자는 서울권 학교만 이야기를 해서 그런지 지방 사람인 나에겐 먼 나라 이야기인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나야 신학을 전공했으니 이 구조에서 한 발 물러서 있는 것 때문인 거 같기도 하다. 그러나 나의 세계에도 이러한 저자가 지적한 문제가 왜 없겠는가. 학벌 사회에서 수능은 가장 정확한 잣대요 평생을 가져가는 것이다. 그걸 아는 부모들이니깐 미친듯이 사교육을 시키는 것 아닌가. 고작 19살의 수능이 나머지 인생에서도 평가를 받는다니. 참으로 슬프고 무섭다. 이 세계의 모습은 이렇지만 나는 이 세계의 모습을 소망하지 않는다. 물론 쉽지 않지만. 나에게도 자기방어적인 행동이 있긴하다. 신대원을 3번 시험친 것이다. 이 책에서 서강대 경영학과를 간 친구나 20대 청년들이 입에 달고 사는게 "수능을 망쳤다"는 말인데 나는 신대원 공부를 하지 않았다고 자기방어를 한다. 실제로 그랬고 내 나름의 사정은 있기도 했다. 하지만 이 글을 읽고 다짐한다. 다시는 그런 언급을 내가 먼저 말하지 않겠다고. 누가 자세히 물어보지 않는 이상 말이다. 

 내 20대 중반 시절의 친구들 이야기다. 지금도 통용될까? 이 책을 추천한 분들은 지금도 충분히 들어맞고 오히려 더 심해지지 않았을까 말한다. 20대의 자화상이라기 보단 대한민국의 자화상이 아닐까 싶다. 많은 공부가 되었다. 

 


메모

"핑계대지 말고 스스로를 계발하라!" (27)

- 피로사회와 비교(자가착취)

 

(피로사회 리뷰

"불가능은 없다. 할 수 있다. 하지 못하는 것은 니가 행동하지 않아서다.

그럼에도 우리가 할 수 없을 때, 좌절 되었을 때, 

저자는 그 때 우울증이 우리에게 온다고 말한다. 

자신이 자신을 착취하는 시대. 

규율사회에서 성과사회로."

한병철의 현대는 타인이 아니라 스스로가 자기를 착취하기에 피로하다고 했는데 그보단 오찬호의 분석이 더 적실히 우리 사회에 맞는 것같다. )

 

 

 

개인이 시간을 어떻게 사용했느냐를 기준으로 모든 세상사를 보게 만드는 것이다. 자기계발을 수행해야만 하는 상황이 세상을 바라보는 이십대의 눈을 만들어버렸고, 그 이십대의 눈은 곧 자기계발서 자체가 되어버렸다. 문제는 이십대 스스로 그 시각에 갇혀, 결국은 다시 자기계발에 집착할 수밖에 없는 악순환에 빠진다는 것이다. (83-84)

- 성경에 포도원 주인을 20대는 어떻게 생각할까? 

 

 

 

자기계발서의 저자들은 타인의 상황을 늘 자기 기준으로 평가하곤 한다. 그 근거로서 저자 자신, 혹은 유명 인사가 주인공으로 설정된다. 당연히 이 주인공이 겪는 고통의 총량은 무지막지하다. 고생도 그런 고생이 없다. 그런데 성공한다. 청소부를 했던 사람이 대통령이 되었고(이명박), 빈농의 자식이 세계적인 기업가가 되었고(정주영), 비닐하우스 집에 살면서 올림픽 금메달을 땄다는(양학선) 식이다. 자기계발서의 저자는 그런 스토리 안에서 아파하는 이십대를 질타한다. (91-92)

- 가슴이 뜨겁지 않다면 명석한 이성을 쓸 기회는 있겠나. / 교회 안의 수많은 간증도(위의 사례와 비슷한게 많다. 성공!)

 

 

 

하지만 저렇게 사는 건 가난이 제공한 결과이지, 한 개인의 가난을 만들어낸 원인이 결코 아니다. 좋은 데 못 살고, 좋은 음식 못 먹으며 힘들게 살다 보니, 사람이 구질구질해지는 거지 그 반대가 아니다. (94)

- 봉준호의 <기생충>에서 '우리가 부자였으면 더 착하지'라는 대사가 생각난다. 

 

 

 

때로는 강의시간에 이십대들이 사회적 약자에 대한 연대의식이 부족하다는 식의 이야기를 하면 "정치적으로 편향된 수업을 한다"는 불만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기도 한다. 그것이 정말 '편향'된 이야기일까? 경쟁이 내면화된 세상에서 개인의 공동체의식은 약화될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는 사회학자로서 별 문제없이 할 수 있는 발언이다. 하지만 학생들 중에는 이를 학문적 경향으로 이해해줄 수 없다는 이들이 적잖다. (97)

- 누가 그걸 편향이라 생각하게 만들었는가. (월터스토프의 <샬롬을 위한 교육>의 문장과 비교)

 

“어느 누구도 철학 교수가 학생들에게 토마스 리드의 철학이 데이비드 흄의 철학보다 우월하다는 자신의 확신을 드러내는 것이 불법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 누구도 음악 교수가 학생들에게 베토벤의 음악이 보케리니의 음악보다 탁월하다는 자신의 확신을 드러내는 것이 불법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만약 누군가가 어떤 과목에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권리를 옹호한다면, 갑자기 객관성을 지켜달라는 애처로운 호소가 터져 나온다.”

니콜라스 월터스토프, 샬롬을 위한 교육, 7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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