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낀 점
엘빈 토플러는 굉장히 유명한 사람이다. '제3의물결'은 다들 한 번쯤 들어봤을테니. 나는 이걸 초, 중등학교에서 들었던 거 같은데 아니면 TV나 이런 데에서 들었지 싶다. 어쨌든 그의 논의는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한 번 쯤 들어봤을 것이다. 그렇다면 자끄 엘륄은 들어봤나? 사실 나야 신학을 전공했으니까 그의 이름을 자주 들었고 그의 개론서 같은 책과 그의 책을 몇 권 샀다. 특히 기독교 출판사 중에 '대장간'이라는 출판사가 엘륄의 책을 많이 번역했다. 그리고 총신신대원의 진정한(?) 칼뱅 전공자인 박건택 교수님 역시도 엘륄의 책을 몇 권 번역하셨다. 대장간에서 나온 자끄 엘륄 책과 박건택 교수님께서 번역하신 <자끄 엘륄의 생애와 사상>을 구입했다. 이 책의 목차를 보고 살짝 보니까 '기술'에 대한 평가가 있더라.
나는 몇 년 전 자끄 엘륄을 그저 기독교 사상가로 알고 있었다. 어느 날 제레미 리프킨의 <엔트로피>를 읽고 있는데 왠걸 자끄 엘륄을 인용하는 것이 아닌가! 대표적인 제레미 리프킨의 책에 말이다! 그 때 엘륄이 기독교 사상가 뿐만이 아니구나 싶었다. 그리고 이 책을 보면서 토플러와 언급될 정도로 엘륄이 기술에 대해서 말했구나 싶었다. 이 책은 기독교 출판사에서 나온 것이 아니니 기독교적인 그런건 전혀 없어서 신뢰해도 될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왜 이 책을 구입해서 읽었는가? 기술에 대한 전망때문이다. 코로나19로 인해 예배조차도 기술에 의존한다. 실시간 라이브와 각 장소에서 영상 예배. 솔직히 교회가 지금의 모습을 유지한데에는 신학적 이유보다는 기술적 활용이 더욱 크다. 왜냐하면 마이크와 같은 음향기기들이 발명되어 수 백명에서 많게는 수 만명이 한 장소에서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마이크 하나라도 없다면 이것은 어려울 것이다. 물론, 몇몇 초대형 극장과 같은 교회말고는 말이다. 설교의 왕자라고 불렸던 스펄전의 교회가 (그는 1834-1892년을 살았던 19세기 인물이다) 대형교회라고 알고 있다. 이유는 당시 지금과 같은 마이크가 없었지만 교회 건축을 잘 울리게 했고 스펄전 역시 목소리의 성량이 대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나같이 목소리가 잘 안 나오는 사람도 많지는 않지만 수십명의 사람 앞에서 소리를 내어서 말할 수 있게 되었다. 다 마이크 덕분이다.
이처럼 기술은 교회에도 지대한 영향을 준다. 그런데 어디 교회뿐일까? 이 세상에서 기술이 적용되지 않는 범위가 있을까? 그렇다면 현대 사회에서 기술은 어떤 모습과 전망을 보일까? 그러던 찰나 손화철 교수가 에그버트 스휴르만의 <기술의 불안한 미래>를 번역했다는 걸 보고 손화철 교수를 검색했다. 그러더니 이 책이 딱 나오더라. 기술의 빛과 그림자. 내가 찾고 있던 그 책이었다. 그리고 짬짬이 읽다가 오늘에야 다 읽었다.
엘빈 토플러(1928~2016)
제1, 2, 3의 물결들
엘빈 토플러하면 가장 먼저 무엇이 떠오르나? 다들 제3의물결이 떠오를 것이다. 물론, 지금은 4차산업혁명이니 이런 말들이 들려서 오래된 옛 이야기 같지만. 자, 다시 보자. 물결이 무슨 의미일까? 그는 "인간의 삶에 근본적인 변화를 일으킨 사건들을 물결이라 표현"(54)했다. 그 첫 번째 물결이 농업혁명이다. 사람들이 이제 한 곳에 정착하여서 작물을 키우기 시작했다. 유목생활이 아니라 정착했기에 촌락과 마을이 생겨났다. 새로운 생활 형태가 생겨난 것이다. 기원전 8000년쯤 농업혁명이 일어났고 이를 제1의 물결이라고 본다. 제 1의 물결은 1750년까지 이어졌다.
그럼 제 2의 물결은 뭘까? 당연히 산업혁명이다. 이건 저자의 직접적인 설명을 보자.
18세기경 일어난 산업혁명은 이전 농경 사회의 쇠퇴를 야기했고 사람들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생활 방식을 채택하게 된다. 자급자족 형태의 경제에서 생산자와 소비자가 분리되고, 소량생산에서 대량생산으로, 대가족 중심에서 핵가족 중심으로, 농촌 중심에서 도시 중심으로 삶의 모든 측명이 큰 변화를 겪었다. 산업화라고도 불리는 제2의 물결은 민주주의와 사회주의,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를 막론하고 전 세계로 퍼져 나갔다. 제2의 물결을 상징하는 것은 굴뚝 위의 검은 연기가 솟아오르는 커다란 공장이다. 석탄과 석유를 이용해 상품을 대량으로 생산하고 그것을 다시 세계 시장으로 실어 나르는 것이다. 대량생산을 위해서는 상품의 원료를 대량으로 공급해야 한다. (55)
그러나 점점 제2의 물결도 잠잠해 갔고 석유와 석탄이 줄어갔으며 1970년대 두 차례의 오일쇼크를 통해 담합의 위험도 봤다. 새로운 에너지원을 찾으려는 움직임과 전기전자 기술 및 통신 기술과 컴퓨터의 발달이 제2의 물결을 둔화시킨 원인이 되었다.
제3의 물결은 어떤 물결일까? 새로운 미디어, 컴퓨터를 통해 접속하는 엄청난 양의 정보, 주문식 생산 등 이러한 변화들이 쌓여 물결을 이룬다. 이 물결이 바로 제3의 물결이다. 그리고 이 시대에는 지식과 정보가 권력 및 부의 원천이 된다. 이제 "물리적인 힘(폭력)과 경제적인 힘(돈)이 권력의 원천이었던 그 이전 시대와는 극명하게 비교된다."(57-58)
물결의 충돌
물결이 큰 충돌을 이르킬 때마다 세계 역사와 사회의 흐림이 달라진다. 대표적으로 미국의 남북전쟁과 러시아의 공산혁명이 있다. 이 두 사건은 토플러의 말에 따르면 제1의 물결과 제2의 물결이 충돌해서 일어난 일이라고 본다. 이유는 "그는 남북전쟁이 노예제 폐지를 위한 것이었다는 소박한 주장에는 별 의미를 두지 않는다. 그보다는 주로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하는 농업에 종사하며 노예가 필요했던 남부가 산업을 통해 부를 축적한 북부에게 졌다는 측면에 더 초점을 맞춘다. 북부에서 필요한 것은 농장에서 일하는 노예가 아니라 공장에서 일하는 값싼 노동력이었던 것이다."(61)
제2의 물결과 제3의 물결 충돌은 어떤 모습을 보일까?
이러한 변화 때문에 생기는 충돌은 우리 사회 곳곳에서 찾아 볼 수 있다.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한국 회사의 회식 문화는 회사 중심, 상급자 중심이었다. 같은 부서에서 일하는 사람들끼리 결속을 다지는 것이 회식의 의미였고 어디서 무엇을 하며 즐길 것인지는 전적으로 상급자의 기호에 의존했다. 평생 한 직장에서 일할 가능성이 많았기에, 하급자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괜히 눈에 띄어서는 회사 생활이 어려워질 것이고,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자기도 상급자가 되어 위세를 부를 수 있었기 때문에 굳이 마다할 이유도 없었다. 그러나 제3의 물결 시대에는 이런 모습이 점차 사라지고 있다. 위계에 대한 존중은 이제 그다지 중요하지 않고, 평생 직장의 개념도 유효하지 않기 때문이다.
제3의 물결이 갖는 개인주의적 특성을 잘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어느 부서에서 회식을 하기로 했다. 새로운 시류에 적응하기 위해 노력하는 부장은 노래방에 가서 부를 최신 가요도 준비하고 회식 메뉴도 신입사원이 정하도록 했다. 그런데 신입삼원이 부장에게 오더니 "부장님, 그냥 회식비 나눠주시면 안 돼요?"라고 말했다. 신입사원 입장에서는 업무 시간 외에 회사 사람들, 특히 나이도 많은 상급자와 어울릴 이유가 없는데, 기왕 회식을 하라고 돈이 나왔으니 나눠 갖자고 한 것이다. (62-63)
이 예화를 보면서 딱 <90년생이 온다>가 떠올랐다. 손화철의 책은 2006년에 초판이 나왔는데 <90년생이 온다>는 2018년에 나왔다. 12년 간극의 이 차이에서 90년생들이 놀랍다는 반응인데 손화철이 쓴 저 시기에 예화는 솔직히 너무 급진적이지 않을까 싶다. 내가 공장을 다닌 2010년만 해도 회식에 저런 말을 할 사람도 없었는데 말이다. (물론, 2판 3쇄는 2017년에 나왔기에 이 내용은 업댓된 내용일 수도 있다. 그래도 너무 앞서나갔...)
여튼, 제2의 물결과 제3의 물결의 충돌은 그다지 1과 2의 충돌보다는 충격이 크질 않아서 다행이긴 하다. 전쟁이 아니니.
엘빈 토플러가 본 기술의 미래
그는 기술의 미래를 긍정한다. 미래가 밝다고 본다. 기술로 인해 살 만한 세상이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물론, 마냥 긍정만 한 것은 아니다. 앞서 충돌에서 말했듯이 부정적인 면이 있다고 토플러도 인식을 했다. 그럼에도 기술에 회의적인 입장을 펼치는 기술반군들 역시 제3의 물결에 흐를 수밖에 없다고 했다. "즉 환경오염이나 극단적인 불평등과 같이 현대 기술이 직면한 여러 가지 문제들을 최첨단의 기술이 해결해줄 것이라고 믿는다. 이런 믿음에 수긍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여지 없이 '비관론자'라는 딱지를 붙인다."(75)
토플러는 미래의 기술이 펼칠 새로운 기회와 가능성들을 믿는다. 수많은 문제들이 생겨날 것을 알면서도 그러한 도전을 그만두어야 할 것이라는 생각은 털끝만큼도 하지 않는다. 어차피 인류의 삶은 거대한 물결들에 의해 지속돼왔다. 그 거대한 물결을 막아보겠다는 생각은 어리석음의 소치일 뿐이다. 문제는 그 물결 위로 어떻게 멋지게 서핑을 하느냐다. 토플러는 한 번 멋지게 떠보고 싶은 개인, 기업, 국가들에게 서핑을 가르치는 선생이다. (76)
자끄 엘륄(1912~1994)
자, 토플러가 기술을 긍정한 사람이라면 자끄 엘륄은 어떻겠는가? 당연히 반대자 입장의 사람이겠지. 그는 기술에 대해서 비관적인 사람이다. 토플러가 기술의 빛에 강조했다면 엘륄은 기술의 어둠을 강조했다. 자, 먼저 대충 그가 어떤 생각으로 시작하는지 보자.
엘륄은 특이한 사람이다. 무엇보다도 그는 딴죽을 거는 것으로 점철된 인생을 살았다. 그는 마르크스의 이론에 깊이 경도되었으나 공산당원이 되지는 않았다. 오히려 소련과 같은 공산국가들이 마르크스의 이론과 무관한 정책을 편다며 강하게 비판했다. 그는 신심이 깊은 기독교인이었으며 신학에도 조예가 깊었지만, 기존의 교회에 대해서는 매우 비판적이어서 나중에는 제도교회에는 희망이 없다고 할 정도였다. 다른 한편으로 그는 전혀 상반된 것 같은 것들을 한데 아우르는 사람이었다. 기독교인이면서 마르크스주의자인 것이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하면서, 마르크스가 인간 삶과 역사의 의미에 대해서는 아무 대답도 주지 않았다고 해서 마르크스의 이론 전체를 부정할 필요는 없다고 주장했다. 평생 학자로 지냈지만, 제2차 세계대전 때에는 프랑스 레지스탕스의 일원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그는 현대 기술 사회에 대해 매우 비관적인 태도를 가졌으면서도, 항상 그 사회를 변혁하기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했다. (80)
산업혁명의 뿌리가 되는 르네상스와 근대의 철학은, 서양 중세의 주어진 환경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다고 할 수 있다. 중세에는 인간의 일생뿐 아니라 정치와 학문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이 신에 대한 믿음이었다. 자연은 인간과 함께 신의 피조물로 인식되었다. 이에 대항해 근대 철학자들은 인간의 이성과 합리성을 최후의 판단 기준으로 삼는 시도를 감행했다. 신은 더 이상 중요한 존재로 여겨지지 않았고, 자연은 인간의 이해와 사용의 대상이 되었다. 이와 같은 인식을 바탕으로 발전한 근대 과학의 이론들은 산업혁명 시대에 와서 새로운 기술들과 결합함으로써 엄청난 위력을 발휘하게 되었다. 요컨대, 산업혁명 이후의 현대 과학기술은 역사가 시작된 이래 인간의 자율성을 최대로 발휘할 수 있게 해준 도구인 것이다. (77-78)
그러나 과학 기술의 엄청난 발전으로인해 과학기술에 의존하게 된다. 그렇기에 기술에 휘둘리는 지경까지 왔다. 인간의 행복과 욕구를 충족하기 위한 기술이 아니라 이제 기술 그 자체가 의미가 있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과학 기술의 발전이 인간의 필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자체의 동력을 가지고 스스로 이루어진다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78) 과학을 지배하려다가 도로 지배당하는 지경이다.
엘륄이 비관적으로 보는 이유 중 하나가 두 차례 세계 대전 때문이기도 하다(참고로 엘륄은 프랑스 레지스탕스였다). 과학기술을 통해 지상낙원을 이룩할 수 있다고 말했고 실제로 최첨단 과학을 가지고 있었던 독일이 세계 대전을 일으킨 것이다. 오히려 기술을 통해 역사적으로 유래가 없는 파괴가 양차 대전에 일어난 것이다. "전쟁은 과학기술이 다른 인간에게 고통을 안겨주는 데 사용될 수 있으며, 그런 목적을 가질 때 훨씬 더 빨리 발전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79) 나치의 유대인 학살과 히로시마 원자폭탄 투하가 대표적인 예이다.
전통적 기술과 현대 기술의 차이
독특한 건 엘륄은 기술의 본질에 대해선 관심이 없다. 대신에 그는 전통 기술과 현대 기술을 세심히 관찰하고 그 차이를 분석했다. 그 분석은 이렇다.
첫째, 전통적인 기술은 다른 상위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 만들어지고 사용되었다. 다시 말해서 기술 자체가 중요시된 경우는 없었고, 대부분 종교적이거나 실용적인 목적이 그 상위에 있었다. ... 기술의 목적이 실용적이었다는 것은 꼭 필요한 기술만 개발되었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 현대에는 기술 발전 자체가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그러다 보니 기술의 발전은 실제의 필요와는 별 상관이 없다. 세계에 시속 130킬로미터 이상으로 달릴 수 있는 도로는 별로 없지만, 여전히 더 빨리 달릴 수 있는 차, 마력이 더 큰 차가 비싸다.
둘째, 전통적인 기술 활동에서는 도구보다 장인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 ... 장인들은 자신의 손때가 묻은 도구들을 함부로 버리지도 않았고, 그 도구들을 개선하려고 애쓰지도 않았다.
현대에는 좋은 기계를 가지는 것이 좋은 결과와 직결된다. ... 최첨단 기계가 없으면 아무리 손재주가 좋아도 정교한 실험을 하기 어렵다. ... 고도로 자동화된 공장에서 실수는 사람만 한다. 기계가 망가지면 원인을 찾아 고칠 수 있지만, 사람의 실수는 예측도 예방도 불가능하다. ...
셋째, 전통적 기술은 그 당시의 문화적, 종교적 환경에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한 지역의 기술이 다른 지역으로 옮겨 가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 이미 존재하는 기술을 개선시키려는 노력을 별로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지역의 기술을 굳이 수입하려 하지도 않았다. ...
반면에 현대 기술은 문화와 종교를 뛰어넘어 빠른 속도로 퍼진다. 개화기를 지나 일제시대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서양의 기술이 급속도로 우리나라에 퍼진 것 역시 일정한 저항의 시기를 지나고 나면 현대 기술은 문화적 차이를 불문하고 무서운 속도로 파고든다는 점을 잘 입증해준다.
넷째, 전통 사회에서는 특정 기술의 사용이 필수적인 것이 아니었다. ...
그러나 현대 기술은 하나의 거대한 시스템을 이루어 거기에 맞지 않는 자를 배척하는 경향이 있다. 최근에 휴대전화나 이메일 등 통신 수단은 모든 사람에게 필수적인 것이 되어서, 그 사용을 거부하는 사람들은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받을 뿐 아니라 상당한 불이익을 받게 된다. 기술이 삶의 많은 부분에 침투한 만큼, 기술에 대한 의존도가 커지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81-83)
현대 기술의 특징들
엘륄은 앞의 전통사회의 기술과 현대사회의 기술을 비교한 것을 중심으로 현대 기술을 여섯 가지로 정리했다. 하나씩 살펴보도록 하자.
첫째, 기술 선택의 자동성
두 가지 기술 중 하나를 선택할 때는 효율성이 유일한 규칙이 되기 때문에 정밀한 계산만 하면 선택은 자동적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좋은 예로 목도장이 있다. 10여 년 전만 해도 길모퉁이나 상점 한구석에서 날카로운 도장칼로 목도장을 파주는 도장집들을 흔히 볼 수 있었다. ... 지금은 도장집도 얼마 남아 있지 않고 보통 문구점 등에서 목도장을 만들어준다. 프린터같이 생긴 작은 기계에 목도장을 고정시키고 컴퓨터 소프트웨어를 조작해 마음에 드는 글자체를 고른 후 클릭하면 몇 분 후 목도장이 완성된다. (84)
둘째, 기술의 자기 확장성
기술의 발전에서 인간의 결정적인 개입이 상대적으로 줄어들고, 한 가지 기술의 발전이 다른 기술의 발전으로 이어짐을 의미한다. (84)
셋째, 일원주의
기술을 악용하는 것과 선용하는 것을 구별해서 생각할 수 없다는 점이다. (85)
넷째, 개별 기술들의 필연적 결합
위에서 말한 기술의 확장성과도 관련이 있다. 모든 기술이 이런저런 방식으로 확장되다 보면 결국 모든 기술은 서로 밀접하게 결합된다. 엘륄은 산업혁명 때 시작된 기계 기술이 어떻게 다른 여러 가지 기술을 필연적으로 나타나게 했는지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런 기술들을 다시 분배와 소비를 조절하는 경제 기술, 시장을 포함한 국가의 전체 시스템을 광장하는 정치 기술, 이러한 기술들이 대중적 호응을 얻게 하는 선전 기술 등으로도 이어진다. (85)
다섯째, 기술의 보편성
현대 기술이 어디 가서나 바로 사용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새로운 기술을 사용하기 위해 굳이 더 많이 배운 사람이거나 문명화된 사람일 필요가 없다. ... 이러한 보편성은 결국 세상의 모든 문화적 차이들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 (86)
'기술은 자율적이다'
엘륄이 파격적으로 한 주장이다. 사실 제일 기억에 남기도 하다. 이 말은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인간의 자율성이 훼손되었다는 말을 의미한다. "기술 발전의 속도와 규모가 너무 커져서 사람의 주체적인 결정이 별로 의미가 없어졌다는 뜻이다."(86) 이런 사회는 참 위험 사회다. 울리히 베크가 주장한 '위험 사회'가 딱 현대 기술 사회랑 맞다. 핵 발전소를 짓는 것은 도박이라고 볼 수 있다. 안전장치가 있기는 하지만 그 안전 장치를 벗어나 대형사고로까지 이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 다른 위험은 이것이다.
베크가 위험 사회 이론을 제시하기 훨씬 전에 엘륄은 '기술의 자율성' 개념으로 이 물음에 답하고 있으니 말이다. 즉 한 가지 기술이 개발되고 나서 예측하지 못했던 문제점이 나타나면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또 다른 기술을 개발하고, 새로운 기술은 다시 그 자신의 문제점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이런 식의 흐름이 기술 발전의 내적 논리가 되고 사람은 그 흐름에 따를 수밖에 없게 되니 기ㅜ술이 자율적이라는 엘륄의 주장은 현실을 가장 잘 파악한 것이 되는 셈이다. (96)
종교가 된 기술
엘륄의 분석으로라면 인간은 기술의 주인이 아니라 종이 되었다. 더 나아가 기술은 예전에 종교가 했던 역할을 맡게 되었다.
과거에 종교가 모든 문제의 궁극적인 해결책이 되었던 것처럼 현대에는 기술을 궁극적인 해결책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질병이나 육체적인 고통의 문제가 기술을 통해 해결될 것이라는 믿음은 물론이고 세계 평화와 인류의 공존을 위해서는 기술의 발전이 필수적이라는 믿음이 널리 퍼져있다. 이러한 믿음은 인류의 진보와 기술의 진보를 동일시하는 데서 비롯된다. ...
...
물론 희귀병 치료 연구를 하는 것이 잘못된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기술의 발전이 세상의 부조리를 해결하는 길이 아니라 그 부조리를 철저히 답습하는 과정이라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기술이 종교가 되었다"는 말은, 조금만 생각하면 명백하게 드러나는 이런 사실을 망각하고 기술 발전 그 자체를 가치 있는 일로 여기는 현대의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98)
그렇다면 대책은??
자, 이렇게 기술에 대한 부정적인 점을 이리도 많이 했으면 대책을 얼마나 잘 내놓을까 싶을 것이다. 그러나 엘륄은 조금 의외의 대답을 한다. 그는 "답은 대책이 없음을 인정하는 것이 최초의 대책"(99)이라고 한다. 그러니깐 현실 파악을 먼저 하자는 것이다. 기술이 이런 면이 있어!라고 말하는 것이다. 즉, 우리가 기술에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그는 현대 기술에는 예측하지 못한 결과가 수반되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 큰 도움이 된다는 뜻으로 '긍정적인 비관주의'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또한 기술 사회의 현실을 개혁할 수 없음을 인정하면서도 그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우리의 자유의지를 발휘하는 유일한 길이라며 이른바 '능동적 비관주의'를 주창한다. 엘륄 자신은 이 원칙에 충실해 세계교회협의회의 일원, 보르도의 시장(카리안 주 - 뒤에 연표에는 보르도의 부시장으로 되어있음), 보르도 대학의 교수, 환경과 청소년 운동가 등 수많은 역할을 담당했다. 따라서 엘륄의 비관주의는 결과에 대한 비관주의이지 우리를 주저앉히는 비관주의가 아니다. 자유로운 이간은 자신의 행동이 좋은 결과로 이어지든 그렇지 않든 옳은 것을 추구할 때만 자유롭다. (99-100)
엘륄의 대답이 참 어이없다고 비난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현대 사회를 살고 있는 사람들이 자신의 처지를 알아내는 것만해도 큰 대책이라고 본다. 언제든 기술이 인간보다 우위에 있을 수 있다는 경보를 매일 울리지 않는다면 우리는 금세 기술의 노예가 될 것이다. 현대 기술 사회로 짜여진 이 시스템은 너무나 편리하고 스마트하며 안락을 주기 때문에 우리는 늘 착각 속에 살아가기에.
장점
이후에 엘륄의 동조자들이 나온다. 하이데거, 마르쿠제, 닐 포스트먼, 보르크만, 랭던 위너, 리처드 스클로브을 언급하면서 다양한 관점과 대책들을 설명한다. 위와 같은 사람들을 알맞게 요약해서 잘 정리되어 있다. 참고할 사람들은 참고하면 참 좋을 듯하다.
그리고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예화라고 생각한다. 자칫하면 어려운 개념을 예화를 들어서 풀어서 설명해준다. 그 점이 이 책을 재미나게 읽었던 가장 큰 이유였다.
그리고 챕터 3이 대화 편이가. 엘륄과 토플러가 가장 대화를 한 것이다. 이때 저자가 참 재미나게 풀어나간다. '복제 배아 줄기세포 연구를 계속 할 것인가, 말것인가'가 주제이다.본다면 재미있을 것이다.
마지막 챕터에선 저자의 생각을 풀어놓는다. 하나의 사설이라고 보면 좋을 듯하다.
이렇게 장점은 쉽게 이해되게 설명해주었고 정리 역시도 잘 되어 있다. 글의 구성 역시도 흥미로운 요소들이 많다. 초대에서 이슈까지 잘 짜여진 책이다. 나같은 기술에 대해서 의견을 살펴보려는 초보자가 딱인 책이다.
나가면서
이 책을 읽고 기술에 대한 다양한 관점을 보게 되었다. 나는 기술의 흐름은 막을 수 없다고 본다. 그렇기에 엘륄의 말들을 새겨야 한다고 본다. 그건 경보기 때문이다. 위기를 알리는. 우리가 늘 그 위기 속에 처할 수 있다는 경보가 없다면 우리는 기술의 노예로 살아야 할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토플러가 했다는 말이 기억에 남는다.
기술반군들의 주장은 제1물결로 돌아가자는 것 같기도 하고 실제 그런 경우도 있다. 하지만 그들도 결국 제3물결의 주역들이다. (176)
그렇다. 엘륄의 말들은 어쨌든 현대 기술사회에 영향을 줄 것이다. 그것은 긍정적인 방향으로. 그렇기에 토플러 역시 기술에 대해서 비관하는 사람들을 멸시하지 않고 주역이라고 말한 것은 아닐까. 그런 비관자들이 있기에 어쩌면 현대 기술사회는 긍정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메모
제러미 리프킨은 수소는 석유처럼 일정 지역에서만 구할 수 있는 에너지원이 아니기 때문에 에너지 공급이 보다 평등해져 민주주의가 더욱 발전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48)
- 지금도 기술력이 부족하지만 14년 전보단 (수소에너지는) 많은 발전이 있다.
중세에는 인간의 일생뿐 아니라 정치와 학문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이 신에 대한 믿음이었다. 자연은 인간과 함께 신의 피조물로 인식되었다. 이에 대항해 근대 철학자들은 인간의 이성과 합리성을 최후의 판단 기준으로 삼는 시도를 감행했다. 신은 더 이상 중요한 존재로 여겨지지 않았고, 자연은 인간의 이해와 사용의 대상이 되었다. 이와 같은 인식을 바탕으로 발전한 근대 과학의 이론들은 산업혁명 시대에 와서 새로운 기술들과 결합함으로써 엄청난 위력을 발휘하게 되었다. 요컨대, 산업혁명 이후의 현대 과학기술은 역사가 시작된 이래 인간의 자율성을 최대로 발휘할 수 있게 해준 도구인 것이다. (77-78)
- 신학이 자연을 대상화랄까, 도구화한 것이 아니라 계몽주의가 한 것이다!(중학생 때였나 고등학생 때였나 인간이 자연을 개발하려는 생각이 성경에서 나왔다는 가르쳤다. 창세기 1장에 땅을 정복하라는 그 구절 말이다. 신학을 전공한 지금은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말이다. 그 선언에는 신학적 해설이 필요한 말이고, 하나님께서는 인간에서 청지기 역할을 맡기셨다. 무분별하게 도구화하지 말라는 거다. 같은 피조물인데 마치 인간이 조물주처럼 자연을 피조물처럼 여긴다면 그것이야 말로 반역이라고 성경은 가르친다. 알래스터 맥그라스의 <신학이란 무엇인가>를 보면 교과서의 주장이 언제 나왔고 누구의 주장이라는게 자세히 나온다. 근데 조금만 생각해봐도 계몽주의 시대의 자연파괴와 중세의 자연 파괴를 비교해 보면 쉽지 않나? 계몽주의 이후 시대는 신이 죽었다고 선언한 시대이기에 그때 창세기를 들먹이는 것은 좀...)
엘륄은 기술 사회에서 인간에게 남은 자유는 "우리가 자유롭지 못하다"고 고백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99)
- 우리가 스마트폰 없이는 살기 힘들어도 (신앙이 있는 사람이) 교회를 다니지 않는 것에 큰 불편함을 느낄까? 물론, 이건 기술의 문제가 아닌 부분도 있지만 스마트 폰이 우리의 삶과 생활을 바꾼 건 맞다. 그렇다면 우리의 예배는 우리의 삶을 바꾸고 있는가?
복제 배아 줄기 세포 연구 계속할 것인가, 말 것인가? 합의회의 (160)
- (현대 기술 사회의 문제점을 고치기 위해 합의회의가 나온다. 저자는 그냥 설명만으로 끝내지 않고 그걸 직접 가상의 대화를 통해서 보여준다.) 직접 상상해서 씀.
그러나 제한된 기능만이 가능한 휴대전화를 구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런 모델이 더 이상 시장에 나와 있지 않기 떄문이다. (183)
- 14년 뒤 2G폰이나 알뜰폰이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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