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낀 점
예전 인간이 얼마나 악할까 싶어서 산 책들이 있다.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 랭던 길키의 <산둥수용소>, 프레스 레모 예전 인간이 얼마나 악할까 싶어서 산 책들이 있다.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 랭던 길키의 <산둥수용소>, 프리모 레비의 <이것이 인간인가> 그리고 엘리 비젤의 <나이트>이다. 길키의 책을 제외하면 모두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이야기이다. 인류 역사상 가장 비극이 벌어진 그곳에서 인간의 악함을 볼 수 있을까 싶었다. 과연, 어땠을까?
수용소에서
수용소에서의 끔찍한 일을 이곳에서 자세히 볼 수 있다. "1789년에 어렴풋이 나타나 계몽주의와 과학적 발견 덕분에 1914년 8월 2일까지 점차 뚜렷해진 꿈은 열차에 가득 신린 그 아이들 앞에서 사라졌다." 이 책을 여는 첫 글 프랑수아 모리아크의 글에서 가장 똑똑하고 엄청난 발전을 이룩한 시대 인간의 처참함을 담담히 기술해 낸다. 물론, 종교의 근원이 악이 아니듯이 과학과 계몽의 근원이 악이 아니다. 종교도, 과학도 그것을 사용하는 자가 누구인가가 중요하다. 다카노 가즈아키의 책 <제노사이드>의 문장이 떠오른다.
"무서운 것은 지력이 아니고, 하물며 무력도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그것을 사용하는 이의 인격입니다."
다카노 가즈아키, <제노사이드>
종교도 과학도 다른 어떤 것도 마찬가지다. 그 인격이 어떤가에 따라 결정된다.
주인공 엘리 비젤의 시선으로 이 책은 전개된다. 엘리 비젤은 중학생 나이다. 어른이 아닌 청소년의 시각으로 이 책은 전개된다. 죽음은 일상이었다. 몸이 온전하지 못하면 죽음이다. 불필요한 존재도 죽음이다.
무언가가 그곳에서 불타고 있었다. 트럭 한 대가 다가오더니 짐을 부려놓았다. 작은 아이, 아기들이었다. 아기들이 불길 속으로 내던져졌다.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그 후로 잠을 못 이루게 된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74)
몸뚱이가 고요한 하늘 아래 연기로 화해버린 어린이들의 얼굴을 결코 잊지 않으리라.
내 믿음을 영원히 불살라버린 그 불꽃을 결코 잊지 않으리라.
살고자 하는 마음을 영원히 앗아간 밤의 침묵을 결코 잊지 않으리라.
하나님과 내 영혼을 죽이고 내 꿈을 잿더미로 만들어버린 그 순간들을 결코 잊지 않으리라.
하나님만큼 오래 산다 하더라도 이것들을 결코 잊지 않으리라.
결코 잊지 않으리라. (77)
그는 힘이 셀 것 같아 뽑히는 바람에 자기 아버지 몸뚱어리를 용광로에 던져 넣어야 했다고 말했다. (78)
선별을 통해 불필요해진 존재는 용광로 속에 던져진다. 그게 수용소였다.
교수대에 매달린 하나님
엘리 비젤의 책에서 교수대에 매달린 하나님을 내용이 있다. 이게 어떤 맥락에서 등장한 이야기인줄 몰랐는데 원 책을 보니깐 확실히 알겠다. 내용은 대략 이렇다.
수용소에서는 기강을 잡듯이 사람들을 다 모아두고 한명씩 처형을 했다. 이번도 평소대로 처형식이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교수대가 세 개가 세워져 있었단다. 수감자 세 명의 한 명은 어린아이였다. 사형집행관들도 그날은 달랐다. 사형을 집행하는 카포가 교수형 집행을 거부할 정도였다. 그 장면이 보자.
사형수 세 명이 의자 위로 올라갔다. 그들의 목에 일제히 올가미가 걸렸다.
"자유 만세!"
두 사람이 소리쳤다.
그러나 소년은 말이 없었다.
"자비로운 하나님은 어디에 있는가? 하나님은 어디에 있는가?"
누군가 내 뒤에서 물었다.
신호가 떨어지자 의자 세 개가 넘어졌다.
수용소는 물을 끼얹은 듯 조용했다. 지평선 너머로 해가 지고 있었다.
"탈모!"
소장이 외쳤다.
그의 목소리가 조금 덜렸다. 우리는 모두 흐느끼고 있었다.
"착모!"
우리는 희생자 앞을 지나갔다. 두 사람은 이미 숨이 끊어졌다. 그들의 혀는 축 늘어진 데다 부풀어 오르고 푸르스레했다. 그러나 세 번째 밧줄은 아직 움직이고 있었다. 너무 가벼운 그 아이는 아직도 숨을 쉬고 있었다.
소년은 우리가 보는 앞에서 30분 넘게 몸부림치며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들었다. 우리는 가까이서 소년을 보아야만 했다. 내가 지나갈 때도 소년은 살아 있었다. 혀는 아직도 붉었고, 눈도 여전히 감기지 않았다.
내 뒤에서 아까 그 사람이 다시 묻는 소리가 들렸다.
"하나님은 어디에 있는가?"
그때 내 안에서 어떤 목소리가 대답하는 것을 들었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 여기 교수대에 매달려 있지."
그날 저녁 수프는 시체 맛이 났다. (123)
이 일을 겪고 나서 그는 독실한 유대인에서 무신론자로 돌아선다. 그는 "나는 고발자였고, 고발당한 쪽은 하나님이었다. 나는 두 눈을 뜬 채 혼자 있었다. 하나님도 없고 사람도 없는 이 세상에 정말 나 혼자 있었다. 사랑도 없고, 자비도 없었다. 나는 잿더미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내 삶을 오랫동안 지배한 전능자보다 강하다고 느꼈다. 기도하러 모인 사람들 틈에서 내가 관찰자, 이방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128)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처형 당하셨다. 몰트만의 고백처럼 그날 하나님은 십자가에 계셨다. 십자가에. 유대인의 시선에선 전능하신 하나님이 십자가에 못박힌다는 것이 말도 안 되지만 그리스도교의 신은 그런 신이다. 진실이다. 하나님이 어디에 있냐고? 여기 교수대에 매달려 있지. 그것이 우리의 신이다.
수용소는 사람을 변화시킨다
나는 꼼짝도 않고 아버지가 맞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사실은 그 모습을 보지 않으려고 슬그머니 자리를 피해버릴까 생각하기도 했다. 더구나 그때 화가 치밀었다 해도 그건 카포 때문이 아니라 아버지 때문이었다. 왜 아버지는 이데크의 발광을 피하지 못했을까? 수용소 생활이 나를 그렇게 변화시켰다. (107)
수용소에서 사람은 변한다. 아버지가 맞고 있어도 때리는 그 대상에게 분노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에게 잘못을 돌린다. 아이들을 학살한 헤롯에서 잘못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태어난 예수님에게 책임이 있다고 돌리는 것처럼. 사람이 변한다. 끔찍한 환경이 끔찍한 사람을 만든다.
잔인하게 죽는 것도, 무분별하게 사람이 죽어가는 것도 충격이었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이것이었다. 엘리아후와 그 아들의 이야기다. 연합군이 점점 나치군을 몰아내고 있었다. 수세에 몰린 나치군은 수용소에 사람들을 이동시켜야 했다. 그 이동 중에 이야기다. 전쟁에 지고 있기에 원래도 악독했지만 더욱 악독하게 소용소 사람들을 이주시킨다. 그때의 이야기다.
랍비 엘리아후가 자신의 아들을 찾는다. 같이 가던 아들이 사라졌다. 자신이 지쳐서 후미에 처진 사이에 아들이 사라졌다. 엘리 비젤은 아들을 보았다. 자신의 옆에서 그의 아들은 달리고 있어서. 또 아버지가 뒤쳐지는 것을 그는 보았는데도 계속 선두에 달렸다. 끔찍한 생각이 엘리 비젤에게 들었다. 그는 혹시 아버지가 없어져버리길 바란 것 아닐까? 하는 그 생각. 지옥의 끝이 보이는데 아들은 아버지와 헤어지면 자신의 생존 가능성을 줄일지도 모르는 아버지라는 짐을 덜 수 있다고 생각한 것 아닐까. 이런 끔찍한 생각이 머리에 스쳤다.
엘리아후의 아들만이 아니었다. 한정된 빵이었기에 빵을 겨우 가진 한 아버지가 아들에게 빵을 주려고 했다. 그런데 갑자기 누군가 자신을 덮쳤다. 맞은 아버지는 누가 자신을 때린지 본다. 자신의 아들이 자신을 때렸다. 아들은 다시 아버지를 덮쳤고 아버지는 죽었다. 그러나 잠시뒤 두 사람이 아들에게 달려들었고 다른 사람들도 달려들어 아들도 죽게 된다. 그걸 목격한 엘리 비젤은 16살이었다.
엘리 비젤도 이런 유혹에 빠진다.
"뭘 좀 드셨어요?"
"아니."
"왜요?"
"줘야 먹지. 아파서 곧 죽을 사람이니 줘봤자 식량만 낭비할 뿐이라고 하더구나. 난 이제 끝났어."
남은 수프를 아버지에게 주었다. 그러나 내 마음은 한없이 무거웠다. 내가 마지못해 그렇게 한 것을 알고 있었다.
랍비 엘리아후의 아들처럼 나도 그 유혹을 이겨내지 못했다. (187-188)
그리고 자유인이 된 뒤 살아남은 사람들의 행동을 말해준다.
자유인으로서 우리가 맨 먼저 한 행동은 음식을 찾아 달려든 것이었다. 그 생각밖에 없었다. 복수를 해야 한다는 생각도, 부모 생각도 없었다. 오로지 빵 생각뿐이었다.
...
어느 날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맞은편 벽에 걸린 거울 앞에 섰다. 게토를 떠난 후 처음으로 내 모습을 보았다.
거울 속에는 시체 하나가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 눈은 언제까지고 나를 떠날 줄 몰랐다. (200)
수용소는 사람을 이렇게 변화시켰다. 살아남은 자들에겐 인간성을 빼앗아 버렸다. 이게 악이다.
나가면서
인간이 얼마나 악할 수 있을까. 극적이거나 애절한 문장은 없다. 담담하다. 그래서 더 충격적이었다. 이것이 바로 악이다. 악을 목도하고 싶은 이들은 이 책을 읽으라.
메모
몇 년 후 아덴에서 비슷한 광경을 목격한 적이 있다. 배에 탄 승객들은 '원주민'들에게 동전을 던지며 즐거워했다. 원주민들은 동전을 주우려고 뛰어들었다. 우아한 프랑스인 숙녀가 이 모습을 보며 매우 즐거워했다. 두 아이가 물속에서 뒤엉켜 필사적으로 싸우고 있었다. 한 아이가 다른 아이의 목을 졸라 죽이려는 모습을 보고 나는 그 숙녀에게 말했다.
"동전 그만 던져요!"
그 숙녀가 말했다.
"왜요? 난 자선을 베푸는 걸 좋아하는데." (177)
- 악한
책 맛보기
금니는 언젠가 빵이나 생필품을 사거나 목숨을 연명하는 데 유용할 터였다. 당시에는 수프그릇과 딱딱한 빵 조각 외에는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았다. 빵과 수프는 바로 내 목숨이었다. 나는 몸뚱어리뿐이었다. 굶주린 배는 훨씬 졸아들었을 것이다. 배만이 시간을 재고 있었다. (104)
물도 없고, 담요도 없고, 빵도 수프도 더 적게 나왔지. 밤엔 거의 알몸으로 잤소. 영하 30도까지 내려가는 추위 속에서. 매일 수백 구의 시체를 모았소. 작업도 힘들었고. 지금은 낙원인 셈이오. 그 당시 카포들은 매일 일정수의 수감자를 죽이라고 명령했지. 그리고 매주 선별이 있었소. 그 무자비한 선별. 정말이지 당신들은 운이 좋소." (131)
종이 울렸다. 이제 뿔뿔이 흩어져 자러 가야 할 시간이었다. 종은 모든 것을 통제했다. 종은 나에게 명령했고, 나는 그 명령에 무조건 복종했다. 나는 그 종을 미워했다. 더 나은 세상을 꿈꿀 때마다 종이 없는 세상을 상상했다. (135)
우리는 이런 소문에 익숙했다. 거짓 예언, 곧 전쟁이 끝났다든가 적십자사가 우리를 해방시키기 위해 협상을 벌이고 있다든가 하는 황당한 말이 수도 없이 전해졌다. 그런데도 우리는 매번 그런 말을 믿었다. 그것은 모르핀 주사 같았다. (145)
그날은 무척 추웠다. 우리는 잠자리에 들었다. 부나에서 보내는 마지막 밤이었다. 또 마지막 밤을 맞았다. 집에서 보낸 마지막 밤, 게토에서 보낸 마지막 밤, 가축 수송용 열차에서 보낸 마지막 밤, 그리고 이제 부나에서 보내는 마지막 밤. 얼마나 더 오래 '마지막 밤'에서 또 다른 '마지막 밤'으로 전전해야 하는 걸까. (149)
아들들은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아버지의 유해를 버렸다. (163)
나는 화가 나서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그렇게 오랫동안 참고 목숨을 부지해왔는데 여기서 아버지가 죽도록 내버려둬야 한단 말인가? 이제 곧 뜨거운 샤워를 하고 누울 수 있는데도? (184)
문득 이대로 아버지를 찾지 못했으면 하는 생각이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이 책임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그러면 나 자신을 돌보고 나의 생존을 위해 싸우는 데 모든 힘을 쏟아 부을 수 있을 텐데. 바로 죄책감이 엄습했다. 숨을 쉬고 살아 있는 한 영원히 이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 없으리라. (186)
인원 점검이 끝나고 침대에서 내려와 보니 아버지는 입술을 달싹이고 있었다. 무언가 중얼거리고 있었다. 아버지의 얼굴 위로 몸을 구부린 채 한 시간 넘게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피 묻고 상한 얼굴을 마음에 아로새기며. (194)
중립은 가해자만 도울 뿐 희생자에게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습니다. 침묵은 결과적으로 괴롭히는 사람 편에 서는 것입니다. 고통을 받는 사람 편이 아닙니다. 때로는 간섭해야 합니다. 인간의 목숨이, 인간의 존엄성이 위협받을 때는 국경을 초월해 나서야 하고 소극적인 태도를 버려야 합니다. 남녀를 불문하고 인종이나 종교, 정치적 견해 때문에 박해받는 사람이 있는 곳이, 언제든 우주의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203-204)
살 타는 냄새가 진동하는데도 꽃이 모심히 피어 있고 살을 태운 연기가 하늘을 뒤덮는데도 하늘에 저녁놀이 붉게 물든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똑같은 극한상황에서 가해자보다 더 피해자를 못살게 군 피해자가 있는가 하면 남을 도와줄 수 있는 데까지 도와준 피해자가 있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사람을 짐승으로 만들어놓고 온갖 몹쓸 짓을 한 사람이 종전 후 버젓이 거리를 활보하는데도 생지옥에서 살아남은 사람이 동료와 함께 죽지 못했다고 양심의 가책을 받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과연 신의 뜻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공자는 나이 오십에 천명을 알았다고 하건만 나는 여전히 신이 있는지 없는지조차 알지 못한다. (212, 옮긴의이 글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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