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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리뷰/역사

[책리뷰] 야로슬라프 펠리칸 - 성서, 역사와 만나다(민족의 경전에서 인류의 고전으로)

by 카리안zz 2020. 6.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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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낀 점

 먼저, 보수적인 분들에게 왜 성경이 아니라 성서라고 말하는 것에 불쾌함을 느낄 수 있다. '서'가 아무래도 '경'보다 낮춰부르는 느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서'와 '경'은 그런 차이가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이사야'서', 고린도전'서' 등 성경 안에 있는 책들은 다 경으로 불러야 하지 않겠나. 이사야경, 고린도전경, 빌립보경처럼 말이다. 자세한 건 대한성서공회의 글(https://www.bskorea.or.kr/bbs/board.php?bo_table=society1&wr_id=10)을 참조하길 바란다. 여기에서는 '경'과 '서'의 차이를 중국 전통과 일본 전통이라고 말한다. 그러니 너무 성서와 성경을 표시하는 글자를 의식하지 않길 바란다. 그 단어가 뜻하는 바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는가 아닌가다. 그게 어떻게 표기되어도 의미를 달리 말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래서 지금 이 글에서는 성경이라고도 성서라고도 마음대로 쓸 예정이다. 

 

 인류 역사상 여지껏 가장 많이 팔린 책이 성경책으로 알려져 있다. 그렇게 많이 팔린 이 책은 어떤 내용일까? 이 책은 거기에 대한 그림을 그려준다. 그리고 더 깊이 있게 성경이 역사를 통해서 어떻게 번역되고 어떻게 해석되었는지 그 역사를 탐구한 책이기도 하다. 저자인 펠리칸에 대한 소개는 이재근 교수님의 글을 공유하려고 한다(http://www.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226504) 그냥 미국 안에서도 역사학으로 쟁쟁한 분이라고 한다. 단순히 신학교 안에서 가르치는 역사학자가 아니다. 그걸 보여주는 게 2005년 미국 의회 도서관이 수여하는 존 W. 클러지 상을 수상했다. 여튼, 그만큼 신뢰할 만한 학자다. 

 

 나는 사실 이 책을 읽었던 이유가 성경이 어떻게 형성되었는가하는 부분을 보려고 했다. 거기에 대한 내용이 이 책의 주제인줄 알았다. 하지만 정말 성경에 대한 역사 속 중요한 스토리들을 나열한 성경의 역사에 대한 책이다. 인문학에 관심이 있거나 신학도들에게 추천한다. 아니면, 성경이 그저 어떤 내용인지 알려고 한다면 1장, 2장, 6장 정도만 보면 되지 않을까 싶다. 배경 내용이 이해가 안 되서 재미가 없을 수 있다. 신학에 대해 특히나 성서 해석에 대한 배경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재미있다. 

 

타낙(Tanakh), 구약, 첫 번째 언약, 히브리 경전

 먼저, 여기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 중 하나가 타낙이다. 이는 흔히 개신교에서 말하는 구약성경을 말한다. 가톨릭 구약과는 차이가 있다. 그 차이는 외경을 포함했느냐 안 했느냐의 차이다. 개신교의 구약과 가톨릭의 구약은 다르다. 가톨릭 성경에는 외경이 포함되어 있어서 몇 권 더 많다. 그런데 '타낙'은 개신교의 성경 목록과 같다. 왜 타낙이냐면 

 

토라(Torah)

느비임(Nevi'im)

케투빔(Kethuvim)

 

의 앞 글자를 따서 붙인 게 타낙(Tanakh)이다. 토라, 느비임, 케투빔은 구약성경을 구성하는 세 부분이다. 모세오경인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를 토라라고 한다. 예언서 그러니깐 이사야서, 에스겔서, 예레미야서, 소예언서(호세아 등) 등을 느비임이라고 한다. 케투빔은 잠언, 시편, 욥기 등을 포함하는 성문서를 말한다. 

 

 위의 세 부분의 내용을 펠리칸은 이렇게 요약한다. 

 

토라에 해당하는 모세오경과 여호수아기(카리안 주 - 여호수아서는 예언서에 해당한다)는 어떻게 이스라엘 민족이 형성되었으며 약속된 땅을 차지했는지를 설명한다. 느비임, 즉 예언서는 왕정의 설립과 발전, 백성을 향한 예언자들의 메시지 선포 등을 서술하며 약속된 땅에서 일어난 이스라엘 민족의 이야기를 다룬다. 케루빔, 즉 성문서에는 악과 죽음을 고찰하는 문학 작품(욥기, 전도서)과 시가 문학(무엇보다도 시편), 몇몇 역사서가 있다. (59)

 

신약성서 정경의 형성

 이 책에서 내게 제일 재미있는 부분이 신약성경 형성된 부분이다. 흔히 성경에 대해서 말할 때 가장 많이 언급되는 본문이 디모데후서 3장 16절이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딤후 3:16)

 

 여기 성경이라는 단어가 바로 번역서의 한계가 담겨 있다. 신약성경이 형성된 것은 훨씬 후대의 일이다. 그러니까 바울이 디모데후서를 쓸 당시에는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성경책은 없었다. 단순히 생각해봐도 요한계시록은 써져 있지도 않았다. 물론, 후대에 성경이 될 것이기에 그냥 퉁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 저 구절은 어떻게 봐야할까? 그건 일전에 래리 허타도의 <처음으로 기독교인이라 불렸던 사람들>의 리뷰(출처: https://kuyrian.tistory.com/258)를 참조하길 바란다. 

 

 그렇다면 신약성경에 대한 형성 부분을 잠깐 요약해 보겠다. 

 

 지금 모든 그리스도교가 공통적으로 보고 있는 신약성경은 4세기 중반 즈음에 합의로 이뤄졌다고 아타나시우스의 글에 써져 있다. 대략의 역사는 이렇다. 

 

물론 아타나시우스의 서간 이후에도 몇몇 신앙 전통들은 나름의 목록을 고수했다. 공동서신 중 안티오키아에 모인 학자들과 신학자들이 정경으로 인정했던 문헌은 세 편(야고보의 편지, 베드로의 첫째 편지, 요한의 첫째 편지)뿐이었다. 당대 가장 저명한 신학자였던 몹수에스티아의 테오도루스는 공동서신 전체를 정경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서방교회는 아타나시우스를 따랐다. 382년, 다마수스 교황이 로마에서 공의회를 열었는데, 이때 아타나시우스의 목록과 일치하는 히에로니무스의 목록이 정경 목록으로 채택되었다. 그리고 이 목록은 5세기 말 겔라시우스 교황이 비준했다. 이와는 별도로 393년 아프리카 속주의 히포의 레기우스에서는 주교 아우구스티누스의 지도 아래 정경 목록을 확정했고 397년과 419년 카르타고에서도 동일한 목록을 확정했다. 692년 제2차 트룰로 공의회(교회법학자들에게는 퀴니섹스툼 공의회로도 알려져 있다)에서는 공식적으로 동방교회와 서방교회 모두를 위해 신약성서 정경 목록을 확정한 것으로 보인다. (199-200)

 

382년 로마에서 공의회에서 다마수스 교황이 아타나시우스의 정경 목록 채택

393년 아우구스티누스의 지도로 정경 확정

397년, 419년 카르타고에서 목록 확정

5세기말 겔라시우스 교황이 비준

692년 제2차 트룰로 공의회에서 공식적으로 동방, 서방 신약목록 확정

 

논란이 되었던 책 목록

 종교개혁시기 루터는 야고보서를 지푸라기 서신이라고 말했다. 아마도 루터가 초기 기독교에 있었다면 야고보서를 정경 목록에서 빼려고 했을까? 아마도 야고보서에 행위가 강조되어서 지푸라기 서신이라고 했지 싶다. 그런데 이 말에 대한 배경을 얼핏 들은 거 같은데 찾지를 못하겠다. 루터처럼 성경을 깊이 읽은 사람이 왜 저런 말을 했을까 궁금하긴 하다. 단순히 자신의 신학과 어울리지 않는 서신이기에 거절한 거라면 루터답지 않다. 

 

 루터도 이런데 초기 신약성경 목록을 확정하려 했을 때 갈등은 없었을까? 일단 당시 모두가 동의한 책을 종합해보면 이렇다. 

 

1. 마태복음

2. 마가복음

3. 누가복음

4. 요한복음

5. 사도행전

6. 로마서

7. 고린도전서

8. 고린도후서

9. 갈라디아서

10. 에베소서

11. 빌립보서

12. 골로새서

13. 데살로니가전서

14. 데살로니가후서

15. 디모데전서

16. 디모데후서

17. 디도서

18. 빌레몬서

19. 요한일서

 

 지금 신약은 총 27권이다. 그렇다면 19권을 뺀 나머지 8권이 논란이 되었던 책이다. 

 

1. '히브리서'는 동방교회에서는 인정되었지만 서방교회에서 논란이 되었다. 그래서 무라토리 단편(기원후 200년경 로마 교회에서 읽었던 신약성서문헌들. 발견했던 루도비코 무라토리의 이름을 따서 무라토리 단편으로 불린다)에서도 히브리서는 빠졌다. 

 

2. '야고보서'는 더 큰 의심을 받았다. 

 

3. '베드로전서'는 모든 교회가 인정했지만 무라토리 목록에는 빠져 있었다. 

 

4. '베드로후서'는 베드로전서에 비해 정경성을 의심 받았다. 그래서 거부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5. '유다서'는 무라토리 목록에는 있었지만 다른 목록들에는 포함되지 않았다.

 

6. '요한이서' 7. '요한삼서'는 요한일서와 함께 정경 목록에 있기도 했지만 다수가 요한일서만큼 정경으로 받아드리지는 않았다. 

 

8. '요한계시록' 가장 정경성 의심을 많이 받았던 책이다. 왜냐하면 이단적이고 교회 분열적인 운동과 엮였기 때문이다. 요한복음의 저자와 다르기 때문에 정경으로 거부하기도 했다. 하지만 '훗날 정경으로 인정받은 문헌들은 이런저런 방식으로 사도의 이름과 연결되었다. 유다의 편지가 정경에 포함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198) (그런데 유다복음과 도마복음은 사도들의 이름이 붙었는데 왜 정경 목록에서 빠졌지?) 히브리서는 사도의 이름이 붙진 않았지만 그 내용 때문에 정경으로 인정되었다. 

 

 

나가면서

 70인역에 대한 내용도 참 재미있다. 신학을 처음 접하는 분들은 70인경에 대한 배경이 궁금할 터인데 이 책을 참고하면 좋을 듯하다.

 이슬람 경전인 코란에 대해서도 종종 언급하는데 새로운 부분이 있다. 그 새로운 건 마냥 중세때 이슬람을 적대시한 것만 했던 것은 아니라는 부분이었다.(228)

 역사를 통해 성경이 번역된 이야기도 이 책에서 유익하고 재미있게 읽을 부분이다. 특히 종교개혁 이후 성경 번역이 눈에 갔다. 그리스어 성경을 직접 번역하니 카톨릭 성경이었던 불가타를 자연스레 본문비평할 수밖에 없었다. 그 작업 이후 교황수위권에 대해서 베드로의 고백에 대해서 다시 살펴보게 되었고 삼위일체에 대한 본문 삽입이 필사본의 오류라는 걸 밝혀 냈다. 가톨릭을 공격하던 이 비평이라는 무기는 후에 계명주의 시대에 개신교와 가톨릭 전체를 위협하게 되는데. 그 내용도 참 흥미로웠다. 이 비슷한 내용이 비아 출판사에서 나온 로완 윌리엄스의 <과거의 의미>에서도 나왔다. 뭔가 <과거의 의미>가 자꾸 생각났다. 그냥 같은 출판사에서 나온 책이라서 그런걸까, 아니면 편지자의 의도였을까? 나는 비아에서 내는 책처럼 큰 그림을 그려주는 책들이 참 좋다! 

 

 성경에 대해서 관심있는 분들이라면 추천하고 싶다. 성서가 우리가 사는 세계에 던져졌다. 그리고 그 반응들과 일들이 이 책에 담겨 있다!

 

 


메모

 

신약성서는 천사를 다루면서 70인역 구약성서를 인용했고 오늘날에도 그리스도교 전례는 이 같은 관점으로 천사를 대한다. 히브리어 원문 내용과는 전혀 다른 해석을 낳은 것이다.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며, 그가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할 것입니다"(이사 7:14)라는 구절의 히브리어 본문은 본래 "젊은 여인"이라고만 되어 있을 뿐 별다른 정보는 담고 있지 않다. 그러나 70인역 번역 과정에서 번역자들은 히브리어 '젋은 여인'에 대응하는 말로 그리스어 '파르테노스' 즉 '처녀'를 뜻하는 단어를 선택했고 복음서를 이를 인용하면서 "이 모든 일이 일어난 것은, 주님께서 예언자를 시켜서 이르시기를 ···· 하신 말씀을 이루려고 하신 것이다"(마태 1:22~23)라는 문구를 덧붙여 예수가 처녀에게서 태어났다고 보도했다. (103-104) 

- 신약성경 저자들은 70인역으로 번역된 걸 인용하였다. 

 

 

 

이러한 성서의 금지 규정(카리안 주 - 출 20:4~5)에 교회는 성상이 '문맹인의 성서'라고 해명했다. 그리스도나 마리아의 이콘(특히 동방) 혹은 성상(특히 서방)은 성서를 요약한 것으로 그리스어나 라틴어, 혹은 어떤 언어로도 성서를 읽지 못하는 많은 이를 위해 만든 것이었다. 이를테면 안드레이 루블레프가 비잔티움 전통을 따라 그린 러시아 삼위일체 이콘은 신성 안에서 나누어지지 않는 성부, 성자, 성령의 내적 관계라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초월적인 신비를 시각화한 것일 따름이다. 다른 이콘과 마찬가지로 이 이콘 역시 성서가 말하는 구원의 역사 가운데 한 장면을 묘사한다. '한 분이신, 그러나 세 분이신 주님'이 마므레에서 아브라함을 만난다. 이로써 유한한 인간은 신비를 깨닫는다. (223-224)

- 성상과 이콘을 사용한 이유.

 

 

 

서양사에서 통상 '중세'리는 개념을 가장 먼저 쓴 이들은 '황금기'였던 고대와 자신들의 시대 사이를 퇴보와 쇠락의 시기로 보았던 르네상스 인문주의자들이다. 그들은 중세의 예술 작품들을 야만족이었던 서고트족과 동고트족의 이름을 따 '고트적'(고딕)이라고 말했으며 이후 이 표현은 중세 예술 작품의 전반적인 특징을 가리키는 말로 굳었다. (232)

- 고딕의 어원. 

 

 

 

사람들은 르네상스 당시 인문주의자들이 사용했던 반스콜라적, 반교회적 수사를 보고 르네상스를 고전 이교의 부활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 심지어 에라스무스를 계몽주의 이전에 등장한 볼테르로 묘사할 때도 있다. 그들은 이 르네상스 운동이 18세기 합리주의에 바탕을 둔 계몽주의 운동을 예견한다고 생각하며 르네상스 시기에 일어난 그리스도교, 성서에 대한 관심은 도외시한다. 그러나 르네상스 시대에 나온 수많은 출판물은 이와 같은 일방적인 해석이 잘못되었음을 보여준다. (241-242)

- 사람들은 르네상스의 한 축인 그리스도교, 성서를 무시한다. 아마 우리 교과서에서도 그리 적혀 있엇던 기억이 난다. 

 

 

 

수백 년간 교회가 사용하고 전례와 긴밀하게 연결된 성스러운 책이었음에도 불가타 라틴어 성서는 기본적으로 '번역문'이었다. 다른 책과 마찬가지로 이 라틴어 번역문은 그리스어 원문과 대조해야 하고 필요하다면 원문에 근거해 수정되어야 한다고 그는 생각했다. 발라는 '콜라티오'(대조라는 뜻을 갖고 있다)라고 부르는, 성서 인용구와 신약성서 문단을 라틴어와 그리스어로 대조할 수 있게 만들어진 책을 활용해 수많은 오류, 적어도 라틴어 불가타 역본만 보는 경우 잘못 이해할 수 있는 부분들을 발견했다. (246)

- 본문비평을 통해 가톨릭이 수정되다. 

 

 

 

에라스무스의 성서 이후 나온 인쇄된 성서 중 가장 중요한 책은 1550년 파리에서 인쇄된 성서다. 로베르 에티엔이 출간한 이 성서는 최초로 최대 15개에 달하는 필사본 전승을 표시한 기초적인 비평 장치를 포함했다. 그는 에라스무스보다 더 많고 더 좋은 필사본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러한 형태의 책은 인쇄된 성서가 이룩한 커다란 성과였다. 에티엔이 출간한 성서가 역사에 남긴 족적은 이뿐만이 아니다. 이 성서는 오랫동안 성서를 구분하던 '정'을 최초로 '절'로 또다시 구분했다. 이후 나온 1557년 '제네바 성서'를 비롯한 여러 토속어 번역 성서들도 이 방식을 채택했다. 이후 성서를 인용할 때는 (오늘날 사람들이 흔히 본문을 인용할 때 사용하듯) '장과 절' 사용이 정착되었다. (248-249)

- 궁금했던 점을 알게 되었다. 장을 나눈건 얼핏 에라스무스로 알고 있었는데 절까지 나눈건 다른 사람으로 알고 있었다. 그 사람이 로베르 에티엔인 걸 알게 되었다! 

 

 

 

증언자가 셋 있습니다. 아버지와 말씀과 성령이시요, 이 세 분은 하나이십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 즈언하시는 이가 셋인데, 곧 성령과 물과 피입니다. 이 셋은 일치합니다. (1요한 5:7~8)

여기서 짙게 처리된 부분은 그리스어 필사본에는 없으며 중세 시기 라틴어 신약성서에 삽입된 것으로 추정된다(본래는 주석이었으나 필경사의 부주의로 본문에 포함된 것 같다). 에라스무스는 첫 판본에서 이를 삭제했는데 많은 이는 이러한 행위가 (변형이 생기기 훨씬 이전에 만들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삼위일체 교리를 위협한다고 반발했다. (249)

- 본문비평

 

 

 

루터의 번역본 때문에 사람들은 이전에 나온 독일어 성서, 또는 히브리어, 그리스어, 라틴어를 사용하지 않는 지역에서 번역한 토속어 성서의 존재를 잊어 버렸다. 오늘날 이러한 사실은 기껏해야 학자들이 역사적 공정함을 가하기 위해 언급할 뿐이다. (266)

물론 오늘날 역사학자들은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전 중세 후기에 대중을 위해 교회에서 성서를 바탕으로 한 설교가 급증했으며, 스테인드글라스와 프레스코화를 통해 신구약성서 이야기를 대중에게 전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또한 <헬리안트>로 거슬러 올라가는 성서 서사시 전통, 이와 유사한 목적으로 대중을 위해 쓴 작품 등 중세에는 다양한 경로로 (중세에는 대중이 성서를 접할 수 없었다고 주장한 프로테스탄트 프로파간다와는 달리) 성서에 대한 지식이 광범위하고 깊이 전달되었다. 종교개혁이 실질적으로 고취한 것은 '성서를 중심에 둔 신심'이다. (267)

- 루터가 번역한 성경말고도 토속어 성경이 있을줄은 몰랐다. 의외였다. 또, 성경의 이야기를 대중들이 잘 알고 있었다는 점도 의외다. 왜냐하면 신부들이 라틴어로 미사를 드려서 성경에 대해서 전혀 무지한 줄 알았다. 

 

 

 

중세에는 교회와 성직자의 지도 없이 혼자 성서를 읽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심지어 위험한 일인지 경고했지만 종교개혁 시기에는 개인이 성서를 주중에 읽는 것을 적극적으로 권장했다. 종교개혁가들은 사람들에게 성서를 매일 읽고 교회로 가져오라고 권했다. 결과적으로 개인이 토속어 번역문을 읽고 날므대로 해석함에 따라 새로운 그리스도교 종파가 끊임없이 발생했다. 중세의 경고가 암시했던 위험이 현실로 드러난 것이다. (267)

- 내가 조심스레 지적하는 지점. 가톨릭의 지적에 동의한다. 

 

 

 

루터와 그의 동료 개혁가들이 교황의 수위권 주장이나 성사제도 등 중세 교회가 소중히 여기던 전통과 교리에 갖다 댄 도구와 동일한 도구를 역사비평가들은 교회가 시작된 시기에도 갖다 댔고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사도적'이라고 불렸던 1세기조차 그들에게 예외가 될 수는 없었다. (301)

- 가톨릭에 대항했던 그 무기(비평)가 이제 초기교회에 들이대기 시작했다. 

 

 

 

'원숭이 재판'(카리안 주 - 쉼표 오타부분)이라 불리기도 하는 스콥스 재판은 '바이블 벨트' 지역, 그리고 그 훨씬 너머까지 퍼져 나간 '근본주의'라는 현상을 보여 준 대표적인 사건이기도 하다. 이후 대중과 세속매체가 종교적인 정통성이나 권위를 가진 전통이라면 무엇이든 '근본주의'라는 딱지를 붙임에 따라 오늘날 이 말은 거의 아무런 의미도 없는 말이 되어버렸지만 '근본주의'라는 말은 본래 1910년에서 15년까지 나온 소책자 <근본>에서 유래한다. <근본>은 성서의 문자적인 해석을 옹호하는 이들이 전열을 정비하기 위해 만들었다. (326-327)

- 근본주의의 유래

 

 

 

본래 성서는 상처 입은 이에게 위로를 주는 만큼이나 가진 자, 곧 회당이나 교회 회중석에 앉아 '말씀을 듣는' 모든 이에게 통렬한 비판을 가했다. (349)

- 성서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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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이슬람교의 꾸란은 유대교 및 그리스도교의 성서와 대단히 유사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현저하게 다르다. 즉 유일신 하느님에 대한 신앙과 그 계시의 최고 권위에 순종한단느 점에서는 같지만, 그 계시를 매개하는 역사적인 서사가 부재한다는 점에서는 다르다. (227)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모든 문제의 기원을 애써 과거로 소급하지 않더라도 지하드나 집단 학살이 중세를 대변한다고 여기는 것은 부적절하다. 일시적으로나마 그리스도교, 유대교, 이슬람교가 서로의 정체성을 유지하되 서로의 차이를 넘어 조화를 유지하려고 노력했던 때가 있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228-229)


종교개혁이 강조했던 "말씀의 힘"이란 결국 교회와 전통이라는 억압적 권위에서 해방되어 인간의 정신과 삶에 직접 작용하는 "성서 메시지의 힘"을 뜻하고 '해방'은 루터와 같은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가가 아니라 에라스무스와 같은 성서 인문주의자들이 성서를 원어로 복원하고 배급해 사람들이 성서 메시지에 접근할 수 있게 했기에 가능했다. (258)


성서는 교회와 전통에 대항하는 무기로 쓰였지만 실제로 그 무기를 보관한 무기고는 '교회'였으며 이를 보존하고 보호한 것은 '전통'이었다. (283) 


타낙과 신약성서에 대한 역사적 탐구, 본문비평, 문학적 연구, 문헌학적 조사를 통해 나온 결과는 되돌릴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그러나 우리는 이를 넘어설 수 있고 또 넘어서야 한다. 타낙은 박물관에 전시된 유물, 현존하는 근동 부족의 종교 문헌, 현대 히브리어 부흥을 위한 사전으로 쓰일 수 있는 유일한 히브리어 문헌 그 이상의 것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신약성서를 그저 또 하나의 헬레니즘 신비 종교의 문학적 침전물, 신화적 세계관의 잔재, 예수가 약속한 재림의 희망이 철저하게 좌절된 후 자신들의 정체성을 재정립하기 위해 어느 묵시 공동체가 몸부림친 결과 나온 문서로 한정하여 기술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344-345) 


'개신교' 역사가였던 하르낙에게 그리스도교 역사가 신약성서의 메시지가 시간이 흘러 여러 문화를 만나게 되면서 '왜곡'되고 '굴절'되는 과정, 그러므로 궁극적으로 지양해야 할 과정이었던 반면 '그리스도교' 역사가였던 펠리칸에게 그리스도교 역사는 이스라엘이라는 소집단을 통해 나온 '복음의 빛'이 여러 문화와 만나 새로운 활력을 입고 끊임없이 스스로를 갱신해 나아간 풍요로운 과정이었다. (옮긴이의 글, 407)


누군가의 역사에 관심을 둔다는 것, 그녀 혹은 그가 살아온 길을 찬찬히 살펴본다는 것은 그 사람을 사랑하고 있다는 증거다. 오직 사랑에 빠진 사람만이 그런 일을 한다. 연인의 탄생, 성장 과정, 옛사랑, 그 혹은 그녀의 행복한 경험, 비루한 경험, 때로는 쓰라린 경험 모두를 살피고자 하는 이유는 과거의 그 사람마저도 끌어안고 싶은,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이를 온전히 사랑하고 싶은 열망 때문이다. (옮긴이의 글, 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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