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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리뷰/역사

[책리뷰] 유해무 · 김헌수 -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역사와 신학

by 카리안zz 2020. 4.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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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낀 점

 올해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서로 공부를 해야 해서 여러 책 중에 이 책을 구입했다. 이 책이 좋았던 이유는 역사적 배경이 있어서다. 이 책 내용을 가지고 배경을 설명했는데 한 번 여기에 나눠보겠다. 이 책 말고도 다른 책들을 보고 인용한 것도 있을 텐데 그걸 각주처리 안 해서 어디인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대부분은 이 책에 있는 내용을 중심으로 했다. 

 

하이델베르크 배경

 

 하이델베르크는 어느 나라에 속한 도시일까? 독일이다. 독일하면 뭐가 가장 떠오르나? 여튼, 역사가 오래된 도시다. 인구 14만명에 학생이 2만명, 400만 명의 관광객들이 찾는다고 한다. 그 유명한 괴테, 간트, 헤겔, 하이데거가 산책했던 철학자의 길이 유명하다. 그런데 이 하이델베르크는 종교개혁으로 유명한 곳이다. !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을 말하려면 먼저 종교개혁을 이야기해야 한다. 종교개혁은 어떤 일일까? 종교개혁에 대해서 아는 거 있으면 다 말해보라.

 

1. 종교개혁

 

 종교개혁은 어마어마한 사건이다. 지금 우리에게도 영향을 준다. 이 민주주의도 종교개혁의 영향 아래 있다. 흔히 중세 이후 근대라는 시기를 앞당긴 것이 종교개혁이다. 단지 종교에서 일어난 개혁이라고 한다면 조금은 아쉽다. 정치와 종교가 분리되지 않은 세상에서 종교의 개혁은 세상을 뒤집는 것이다. 세상을 뒤흔든 사건이었다. 이것에 영향을 받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다.

 자, 그렇다면 종교개혁은 왜 일어났을까? 왜 일어났을 거 같나? 종교개혁은 중세 교회의 타락 때문에 일어났다. 중세의 모든 시기가 잘못된 시기는 아니었다. 그러나 마지막 시기는 교회의 타락이 극에 달했던 시기였다. 중세교회가 타락한 것을 알리는데 유명한 것이 뭐가 있을까? 면죄부, 성직을 사고파는 일 등이 있다. 그런데 이런 일들의 원인이 있다. 바로, 사제주의. 사제주의가 뭘까? 사제를 반대로 돌려보라. 제사. 맞다 제사랑 관련 있다. 제사장이 하나님과 일반 성도들 사이에서 역할을 했듯이 이 사제들도 하나님과 일반 성도들 사이에서 중간자 역할을 해주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도 가톨릭을 보면 고해성사를 사제에게 하는 것이다. 개신교인 우리는 우리가 직접 죄를 하나님께 고한다. 여기에서도 알 수 있듯이 개신교는 성도 개개인이 사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을 만인제사장이라고 한다. 그러니 모두가 성직자인 셈이다.

 이 사제가 모든 것을 관리하니깐 막강한 권력집단이 된 것이다. 교황은 그 사제의 정점이니 어마어마한 힘을 가진 사람이다. 하나님의 것을 관리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얼마나 막강한 권력자인지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사제가 타락한 것이다. , 면죄부. 왜 판매했을까? 돈 때문이다. 정치가와 성직자들이 혈연으로 맺어져 있는데 그래서 가문이 실세를 차지했다. 메디치 가문 다 들어봤는가? 그 가문이 정말 힘이 쌨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 팔아서 돈을 번 것이다. 나름 머리가 좋은? 그리고 그 부로 교회를 짓고 권력을 누리고 그렇게 당시 세상이 돌아갔다.

 이런 세상 속에서 드디어 한 사람이 등장하게 되었다. 그는 누구일까? 누구일까? 아는 사람? 바로 루터다. 루터가 바로 세상의 정점이었던 교황과 로마교회에게 대들었다. 대단하지 않은가? 사실, 로마와 싸운 사람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존 위클리프, 얀 후스가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대들다가 사형을 당했다. 불에 타 죽었다. 하지만 드디어 루터 때에 와서 새로운 세상이 열릴 조짐을 보였다. 비텐베르크 교회에 95개조 반박문을 붙인 것이다. 그런데 이때 새로운 기술이 등장해서 루터도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 기술이 무엇이었을까?? 바로 인쇄술이다. 구텐베르크로부터 발전된 인쇄술 때문에 이제는 한 지역에서의 일이 요기에서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나라 전역에 소식이 전해지게 되었다. 그러니깐 루터의 이 행동이 교황과 로마교회의 귀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이제 이때부터 루터의 인생이 꼬이기 시작을... 당연히 세상의 가장 큰 권력자와 맞붙으려니까 힘들 수밖에...

 이렇게 해서 이제 개신교라는 다른 종교의 분파가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 종교의 자유가 대두된 것이다. 이제 의무적으로 모두가 로마 가톨릭 교인이 아니라 개신교로 선택을 할 수 있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우리가 그토록 주장하는 정교분리와 종교의 자유는 바로 이러한 전통 가운데 등장한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것이 정착되기까지 많은 피흘림이 있었다. 한 지역이 가톨릭으로 있다가 개신교인들이 차지하게 되었을 때 개종을 하지 않으면 다 죽였다. 반대로 개신교 지역에서 가톨릭인들이 차지하게 되고 개종을 하지 않았을 때는 학살이 일어났다. 죽고 죽이는 피의 학살 속에서 종교의 자유와 정치와 종교의 분리가 일어난 것이다. 흔히 이것을 근대국가의 출현이라고도 한다.

 

2. 하이델베르크

 이렇게 루터가 엄청나게 힘든 길을 가게 되었지만 조력자들도 많이 얻게 된다. 정치인 중에서도 루터를 돕는 사람이 생겼는데 독일의 선제후 중에 루터의 지지자들이 있었다. 선제후라 함은 신성로마제국 황제를 선출할 권한을 가진 사람을 말한다. 이 선제후는 총 7명이 있었는데 영토를 다스리는 사람은 4명이었다. 4명 중에 가장 큰 지역이 팔츠라는 곳이다. 우리로 따지면 경상도가 아닐까 싶다. 그 팔츠에 하이델베르크가 속해 있었고 그 곳의 선제후가 바로 루터를 지지했다.

 그런데 이제 종교개혁의 불이 온 유럽에 일어났을 때 분파들이 생겨났다. 크게는 루터파, 개혁파, 재세례파가 대표적이다. 루터파의 대장은 누구일까? 당연히 루터이다. 그렇다면 개혁파의 대장은 누구일까? 칼뱅이다. 칼뱅은 우리 장로교의 정신의 토대가 된 사람이다. 아주 중요한 사람이다. 루터에서 시작된 이 종교개혁이 이제는 분파가 생겨서 서로 경쟁하는 지경까지 왔다. 그러니까 대외적으로는 로마교회와 대적을 하지만 내외적으로는 루터파와 개혁파와의 싸움이 있었다. 여기 하이델베르크에서도 로마파와 개혁파의 싸움이 이어져 내려왔다.

 자세히는 말하지 않겠지만 팔츠의 선제후가 로마 교회에 눈치를 보다가 이제 프리드리히 2세 때에 완전히 개신교 쪽으로 넘어오게 되었다. 프리드리히 2세는 루터파와 가까웠다. 루터의 후계자인 멜란히톤이랑 가까워서다. 그를 하이델베르크 대학으로 모셔오기까지 했다. 그러니 아무래도 이 하이델베르크 대학은 루터파 쪽에 가까운 신학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다 프리드리히 2세의 다음 후계자인 하인리히가 오게 되었는데 이 사람은 루터파 사람과 개혁파 사람을 같이 섞여서 대학 교수진을 짰다. 그러다 이제 하이델베르크의 삼대장이 등장하고 나서부터는 개혁파가 실세를 잡게 되었다...

 이 삼대장은 쓰리 P로 불린다. 프린스(군주), 프리쳐(설교자), 교수(프로페서). 이 쓰리 P가 바로 우리가 공부하게 될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을 만든 사람들이다. 첫 번째 P. 군주. 그의 이름은 하인리히 3. 하인리히 3세의 아내가 루터파여서 자신이 개신교로 오는데에는 영향을 끼쳤지만 개혁파 넘어오기까지는 방해를 했던 아내였다. 어쨌든 그는 개혁파가 더욱 성경적으로 옳다고 믿었기에 개혁파로 넘어오게 되었다. 두 번째 P, 프리쳐, 설교자. 그의 이름은 올리비아누스. 뭐든지 정신적 지주가 중요하다. 설교자는 정신적 지주에 해당한다. 이 말이 칼보다 강하다는 말도 있으니 잘 알 것이다. 아가리를 잘 놀리면 돈을 갚기도 하고 죽빵이 터지기도 한다. 너희들은 어느 쪽인가?? 이 올레비아누스와 하인리히 3세의 인연이 깊다. 하인리히 3세에게 아들이 있었는데 이 아들과 올레비아누스가 친구였다. 그런데 군주의 아들이 보트를 타다가 그만 물에 빠지게 되었다. 이때 강변에서 그걸 보고 있던 올레비아누스가 강으로 뛰어들어 아들을 구하려고 했다. 그러나 수영 솜씨가 좋지 않았던지 구조는 실패하고 같이 허우적 거리는 신세가 되었다. 이걸 보고 있던 군주의 하인이 뛰어들어서 구조를 했는데 그만 아들이 아니라 올레비아누스를 구했던 것이다. 이 소식을 들은 하인리히 3세는 올레비아누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아마 이후로 자신의 양아들로 생각했던 것은 아닐까. 올레비아누스가 감빵에도 갔다. 그때는 자신의 신학이랑 맞지 않으면 감빵도 보내던 시절이었다. 그때 돈주고 빵에서 빼낸게 하인리히 3세였다. 또 대학이랑 교회에도 취직시켜주고 잘 해주었다.

 자, 이제 마지막 P가 남았다. 마지막 P, 프로페서, 우르시누스이다. 군주로 장학을 하고 설교자로 공감대까지 이루었다. 이제 이성적인 뼈대 작업을 한다면 아주 좋지 않았을까? 교수인 우르시누스가 아주 적격이다.

 이렇게 세 명의 사람이 하이델베르크에서 교리문답서를 작성하게 된다. 이들은 철저히 개혁파 신학에 영향을 받았다. 이 교리문답의 첫째가 바로 위로의 문제다. 종교개혁의 시대부터 지금까지 엄청난 일들이 일어났다. 옆에 있던 사람이 죽고, 자신도 죽을 뻔하고 감옥에 가고 집에서 핍박을 받고 아주 죽을 지경의 세상이었다. 그런 시대를 겪은 사람들이 위로를 말하는 것이 아주 당연한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나가면서

 배경을 읽고 나니까 왜 하이델베르크인지 조금 이해가 될 듯하다. 칼뱅주의 교리서는 웨스트민스터 대소교리문답서를 가장 중요시 여기는데 이 하이델베르크도 중요시 여긴다. 왜 그런지가 조금은 이해가 된다.  바르트 역시도 이 하이델베르크의 영향을 받았고 고백교회도 그렇다고 하는 논문을 본 적이 있다. 물론 전체를 다 본 것은 아니고. 그만큼 하이델베르크는 뜨겁게 하는 무언가가 있나보다. 현대의 사람들이 볼 만큼. 간략하게라도 요약한 저 배경이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메모

p. 15의 메모

- 종교개혁시기 성경에 대한 무지. 왜 무지? 1) 가톨릭은 라틴어(불가타 성경)로 예배 드림 2) 형상을 더 중시 3) 문맹률이 높음

 

 

 

'하이델베르크에 온 세 사람'은 개혁 신앙과 신학을 말로만 배운 것이 아니라 온몸으로 살면서 표현한 사람들이다. 하이델베르크에 '온' 그들은 그곳에서 나그네로서 살았고, 비참한 생활 가운데서 그리스도만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온몸으로 참된 위로를 맛보면서 위로의 복음을 아름다운 말로 고백했고, 팔츠의 교회들은 그것을 자기의 고백으로 받아들였다. (98)

- 그들이 가장 먼저 위로를 구했던 이유가(하이델베르크 1문이 "사나 죽으나 당신의 유일한 위로는 무엇입니까?"이다) 사람들이 피를 너무 많이 흘렸고 상처입을 수 밖에 없는 시대에 태어나서 그런게 아닐까? 


책 맛보기

 

팔츠의 통치자는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를 선출할 권한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선제후'라고 불린다. 황금칙서(1356) 이후에 교권을 가진 제후 3명과 속권을 가진 제후 4명이 황제를 선출하였는데, 가장 크고 비옥한 영방을 다스리던 팔츠의 선제후는 선제후 모임에서 중앙에 앉아서 사회권을 행사하였다. (52)


정치와 종교가 분리되지 않은 그 당시의 시대적인 상황에서는 통치자의 결정이 매우 중요하였다. (52)


그 수도사는 올레비아누스에게 '어느 시대에서나 하나님의 백성은 그들의 유일한 위로를 살아서나 죽어서나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제사에서 찾았다'고 말하였다고 한다. (75)


신학자 네빈의 지적처럼, "교회의 신앙적 삶이 신조보다 앞서서 있어야 하고, 교회는 스스로 사용하기 위하여 신조를 산출해 내는 것이다. 그렇게 산출되는 신조는 우선 한 사람을 매개로 하여 표출될 수도 있다. 그러나 한 사람은 언제나 그가 속하여 있는 교회의 일반적인 삶의 기관이요 그 삶을 짊어지는 사람이어야 한다." (98)


인간적으로 볼 때, 한국 교회의 이런 전반적인 상황이 갱신될 가능성은 보이지 않는다. 그 대안은 성경의 내용을 주지주의적으로 암기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보혈로 우리를 구속하셨을 뿐 아니라, 자기의 성신님으로 우리를 새롭게 하여 자기의 형상을 닮게 하신다(86답). 참된 믿음은 교리를 암기하여 나열함에 있지 않고, 그 교리를 가지고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선하게 살아가는 데에 있다(91답). 곧 우리가 지식과 삶에서 삼위 하나님의 형상으로 변하여,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온 세계에 충만하게 하는 것이다. (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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