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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사도행전

[설교문] 사도행전 26장 24-32절(행 26:24-32, 행 26:24~32)

by 카리안zz 2020. 6.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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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2624-32

 

바울이 긴 변론을 했고 이제 베스도의 반응이 보일 차례입니다. 베스도는 바울이 헛소리하는 것 같으면서도 뭔가 있어보이는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아 보입니다. 이방인 베스도 입장에서 헛소리라고 느꼈을 대목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대목에서 그렇습니다. 당시 널리 퍼져있던 그리스 철학에서는 이런 말이 있었습니다. 그리스의 비극 시인 아이스킬로스가 아폴로의 입을 빌려서 한 말이랍니다. “먼지가 사람의 피 속으로 흘러 들어가, 죽게 되면 부활이라는 것은 없다 그러니 이방 문화에서는 부활에 대해서는 생소한 개념입니다. 오히려 부활은 그들 입장에서는 말도 안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베스도는 바울이 그저 미친 사람으로만 보지는 않습니다. 바울의 웅변이 예사롭지는 않았나 봅니다. 베스도는 바울이 너무 많이 알기 때문에 미쳤다라고 본 것입니다. 어찌보면 바울 자체에게 너무 많이 알고 있는 사람이라고 띄워준 것이기도 합니다. 엄청나게 많은 양의 구약성경인데 바울은 그걸 막 인용하는 것입니다. 그때는 장과 절도 없었을 때입니다. 그러니 베스도 입장에서는 이해를 못하겠지만 무언가 대단한 포스는 느꼈기에 높은 학문이라고 치켜 세워 준 것이기도 합니다.

바울은 베스도가 그렇게 나올지 알고 있는 듯합니다. 마치 처음부터 타겟은 베스도가 아닌 것처럼 말입니다. 자연스레 26절에 왕에게로 시선을 돌립니다. 26절 다같이 한 번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26절입니다.

 

26: 왕께서는 이 일을 아시기로 내가 왕께 담대히 말하노니 이 일에 하나라도 아시지 못함이 없는 줄 믿나이다 이 일은 한쪽 구석에서 행한 것이 아니니이다

 

마치 준비한 듯이 바울은 아그립바 왕에게로 말합니다. “당신은 내 말 다 알아 듣지?”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사실이 그렇습니다. 아그립바는 헤로데 가문 출신이기에 유대와 바리새인적인 것에도 친숙하게 알고 있는 인물이엇습니다. 부활이 낯설지 않았고, 예수님에 대한 일들도 예루살렘 한복판에서 일어났던 일이기에 아그립바가 모를 리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여기에서 강력한 한 수를 놓습니다. 27절 말씀입니다. 다 같이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27절입니다.

 

27: 아그립바 왕이여 선지자를 믿으시나이까 믿으시는 줄 아나이다

 

바울은 조금 신이 난 것 같기도 합니다. 상황은 총독이랑 왕, 군인들 등 지금 자신의 편이 되어줄 사람이 없는데도 긴장한 기색은 전혀 느껴지지 않습니다. 변론하기 바쁠 텐데 바울은 역으로 질문까지 던집니다. 그런 이 질문은 아그립바 입장에서 상당히 골치아픈 질문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믿지 않는다고 말하면 자기 백성의 상당수의 지지를 잃어버릴 것입니다. 그렇다고 믿는다고 말하면 바울이 그 말을 붙잡고 결말을 지을려고 했을 겁니다. 바울은 그러면 부활을 믿으시는군요. 그렇다면 왜 예수를 믿지 못하십니까?”라고 말할 테니까요. 실제로 8절의 늬앙스가 그랬습니다. 아그립바 입장에서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질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아그립바도 보통은 아닌 듯 싶습니다. 조금 당황했겠지만 아그립바는 나를 그리스도인으로 되게 하려느냐고 되받아칩니다. 바울이 놓은 덫을 나름 잘 헤쳐나가는 대답입니다. 그의 반문에 바울은 재치있게 받아칩니다. 바울은 네, 맞습니다. 나는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믿는 나처럼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합니다. , 발목에 채워져 있는 족쇄는 빼고 자신처럼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합니다. 농담과 함께 받아칩니다.

그리고 심문은 끝났고 베스도 일행은 자리를 옮겨 바울에게 사형이나 결박들 당할 죄가 있는지 회의를 합니다. 아그립바는 의견을 내는데 바울의 주장에는 그러한 죄가 없다고 말합니다. 가이사에게 상소만 하지 않았더라면 지금 석방시켰을 것이라는 정보를 줍니다. 왜냐면 심문 도중 피고인이 무죄하다는 걸 알게 되면 석방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황제에게 상소를 올렸기 때문에 그럴 권한이 사라진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 황제에게로 가야했습니다.

바울은 그 유명한 네로 황제에게로 가야했습니다. 네로가 황제로 올랐을 때 초반에는 나름의 황금시대로 열었다고 평가를 받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는 망가질 대로 망가져 갑니다. 자신의 어머니가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것 같아 먼저 선수를 쳐서 자신의 어머니를 죽게끔 합니다. 어떻게 죽였는지는 자세히 모르지만 네로가 깊이 연루되어 있는 것만은 확실합니다. 네로는 이 일 이후 환청이 들리고 먼 언덕에서 나팔소리가 들렸다고 합니다. 이렇게 미쳐가는 네로 황제에게 바울은 점점 다가가고 있습니다. 과연 바울은 어떻게 될지 그 끝부분이 궁금해지기도 합니다.

 

바울이 이런 위기에 쳐해 있는지 아마도 몰랐을 겁니다. 바울은 녹록치 않은 삶을 살았습니다. 그건 사도행전을 보고 듣고 읽은 우리가 가장 잘 압니다. 그럼에도 그 인생에서 고통과 좌절과 힘듬과 기쁨과 행복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는 오늘 날 같이 행복을 위해서 살았던 사람은 아닙니다. 어찌보면 사서 고생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오늘날처럼 행복을 위해서 사는 것이 목적이 되는 사람들에게는 쉽게 이해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렇기에 바울의 삶은 오늘 우리 시대 성도들에게 중요합니다. 그는 무엇을 위해 살았던 사람입니까? 이에 대해서 가장 귀감이 되는게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1문입니다.

 

1: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1: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웨스트민스터의 가르침처럼 바울의 모습이 그렇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했고 하나님을 통해 즐거워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우리의 상황이 어떻든 중요하지 않습니다. 어려울 수도 행복할 수도 기쁠 수도 불행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상황에도 하나님의 자녀로 살려고 하는가. 하나님에게서 즐거움과 기쁨과 행복함을 느끼며 하나님을 통해 내 존재가 살아있음을 느끼고, 그분만이 나의 피난처가 된다는 것을 맛보시길 바랍니다. 진정으로 우리의 신앙생활에 이러한 고백들이 가득 울리는 교회가 되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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