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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사도행전

[설교문] 사도행전 21장 17-26절(행 21:17-26, 행 21:17~26)

by 카리안zz 2020. 5.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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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2117-26

 

드디어 바울 일행은 예루살렘에 도착합니다. 바울은 선교여정을 다니면서 참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안디옥에서 일어난 폭동, 루스드라에서 돌을 맞은 일, 빌립보에서 매질당한 일, 데살로니가에서 일어난 폭동, 베뢰아에서 도망 나온 일, 고린도에서 당한 소송과 반유대교 폭력 사태, 에베소에서 이교도 25천 명이 구호를 외쳤던 사건이 대표적으로 있었습니다. 바울은 예루살렘의 지도자들 앞에서 섰고 위에 있었던 선교 여정을 낱낱이 말했습니다. 야고보를 포함한 많은 지도자들은 그 일을 듣고 감동을 받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런데 좋은 소식으로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다 함께 오늘 본문 20절을 읽어보겠습니다.

 

20: 그들이 듣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바울더러 이르되 형제여 그대도 보는 바에 유대인 중에 믿는 자 수만 명이 있으니 다 율법에 열성을 가진 자라

 

여기에서 예루살렘의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는 단어가 있습니다. ‘열성이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를 열심당이라고 볼 수 있는데 이들은 로마로부터 독립을 위해 무력적으로 저항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단도와 같은 시카리로 로마의 부역자들을 암살하기도 했습니다. 그렇다면 예루살렘에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지금 열심당이라는 말일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바울 자신도 갈라디아서 114절에 이 열성이라는 단어를 썼습니다. 그렇지만 마냥 이 단어를 율법에 열심이 있는 자들로 이해하기도 조금 애매합니다. 누가가 이 단어를 아마도 예루살렘의 분위기가 어떻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함이었을 겁니다. 기름이 뿌려져 있는 예루살렘에 바울이라는 불이 던저질 위기랄까요? 일촉측발의 긴장감이 이 구절에서 느껴집니다. 많은 사람들이 화났고 단단히 벼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많은 사람들은 화가 났을까요? 다같이 21절을 읽어보겠습니다.

 

21: 네가 이방에 있는 모든 유대인을 가르치되 모세를 배반하고 아들들에게 할례를 행하지 말고 또 관습을 지키지 말라 한다 함을 그들이 들었도다

 

요즘도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가짜 뉴스가 당시 예루살렘에서도 퍼지고 있었습니다. 요즘도 한국에 가짜뉴스를 만드는 사람들이 기독교인들이고 제일 잘 나르는 사람들이 기독교인인데 사도행전에서부터 시작되었나 싶습니다. 바울의 선교를 다니면서 일어났던 이야기들을 누군가 왜곡하여서 이곳 예루살렘에 퍼트렸습니다. 이방인 회심자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해 유대인이 될 필요가 없으므로 할례를 받을 필요가 없다는 것과, 유대인들도 조상의 전통과 관습을 버려야 한다는 말은 전혀 다른 이야기입니다. 바울은 억울합니다. 이 억울함을 어떻게든 풀어야 했습니다. 바울은 유대인에게는 유대인이 되었다고 고린도에 편지를 보냈는데 이 사본이 있다면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심정이었을 겁니다. 열심이 있던 사람들을 불러서 강하게 말하고 싶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역사에서도 봤듯이 내가 아무리 공산주의자가 아니고, 주사파가 아니라고 말해도 상대방은 믿지 않습니다. 그래서 정치기술 중에 프레임 전환이라고 있습니다. 상대방이 빨갱이라고 말하면 친일파라고 받아치는 겁니다. 상대가 나쁜 이슈를 덮어씌우면 그걸 해명하기보다는 다른 더 나쁜 이슈를 상대방에게 씌어버리면 됩니다.

하지만 현대의 정치기술을 바울이 보이지 않습니다. 바울은 분열을 원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충분히 헬라파 유대인이나 이방인들을 데리고 자신을 중심으로 초기 교회를 시작했을 수도 있습니다. 바울이 진정으로 회심하지 않았다면 말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이때, 예루살렘 지도자들은 좋은 방법을 생각했습니다. 그 방법은 이렇습니다. 오늘 본문 23-25절 말씀을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23: 우리가 말하는 이대로 하라 서원한 네 사람이 우리에게 있으니

24: 그들을 데리고 함께 걸례를 행하고 그들을 위하여 비용을 내어 머리를 깍게 하라 그러면 모든 사람이 그대에 대하여 들은 것이 사실이 아니고 그대도 율법을 지켜 행하는 줄로 알 것이라

25: 주를 믿는 이방인에게는 우리가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피할 것을 결의하고 편지하였느니라 하니

 

과연, 바울은 예루살렘 지도자들의 제안을 받아드릴까요? 바울은 받아드립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자신이 좀 더 끌려가고 수동적인 모습을 보입니다. 하지만 여태의 바울을 본다면 그렇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지도자들의 이 제안은 바울이 보였던 행동과 비슷합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할례를 행했던 모습과 오늘 지도자들이 제안한 모습은 유사합니다. 바울은 유연성 있게 각각의 상황에 맞게 필요한 것으로 행동을 합니다. 할례 문제에 유연성있게 행동했기에 이번 일 역시 유연성있게 받아드릴 수 있었습니다.

바울은 민수기 6장에서 말하는 정결의 순서를 그대로 따릅니다. 바울은 이방인들의 땅에 오래 있다가 왔기에 정결의식을 가져야 했습니다. 이 정결의식은 코로나 사태가 발생하여서 우리에게 좀더 와닿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자가격리를 하는 이유와 비슷합니다. 당시는 의학적인 원인이 아니라 종교적인 원인이라는 것에 차이는 있지만 말입니다.

이렇게 바울이 이 정결의식을 따르면 모세가 명령한 그대로 따르고 있다!”라고 어필할 수 있게 됩니다. 물론, 바울은 율법주의적 의식이 아니라, 나를 위해 자신을 다 내어주신 그분에 대한 기꺼운 반응으로서 하는 전적인 헌신으로의 행동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한 가지 궁금한 사안이 있습니다. 과연, 예루살렘 모금을 했던 돈은 어디로 갔을까요? 바울은 자신이 쓴 서신서에서 모금에 대해서 굉장히 강조를 많이 했습니다. 사도행전 2417절에 구제할 것과 제물을 가지고왔다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모금 전달은 오늘 본문에 예루살렘에 도착하고 지도자들이 모여있을 때 전달했을 것입니다. 그 모금의 행방이 오늘 정확히 나타나지는 않지만 그 힌트를 알 수 있는 대목이 있기는 합니다. 24절에 그들을 위하여 비용을 내어에서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비용까지 지급하면 분열로 치닫고 있을 때 화해의 좋은 시금석이 됩니다.

바울의 모금 전달은 단순히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그런 일들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이방인 지역의 교회들과 유대 본토에 있는 교회 사이의 단절이 일어나는 조짐이 있었습니다. 오늘 예루살렘에서 그 모습을 바울은 직접 목격했습니다. 그렇기에 이 모금을 통해 단절된 관계를 회복시키려고 했습니다. 이 선물을 통해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하나님의 한 백성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 행동을 절묘하게 예루살렘 유대인들에게 이방인들의 비용을 대면서 화해의 모습이 일어납니다.

오늘 본문에서 일촉측발 위기의 상황에서 교회 일치를 위한 바울과 야고보, 그리고 지도자들의 마음이 보입니다.

 

이후의 우리 교회들은 수많은 분열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건이 종교개혁이었습니다. 종교개혁시기 2세대에 때였습니다. 루터가 죽고 츠빙글리가 죽고 그 후계자들이 멜란히톤, 블링거가 대표가 되었던 때였습니다. 개신교 분열의 조짐이 일어날 때였습니다. 그때 이 두 사람 사이에 화해를 위해서 이리저리 뛰었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칼뱅입니다. 루터파와 츠빙글리파 사이에서 적절한 신학적 조화를 펼쳤고, 편지에서도 그러한 모습이 많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던 칼뱅의 모습과는 참 거리가 멀어보입니다. 칼같고 절대 타협할 것 같지 않던 그였지만, 오히려 반대였습니다. 교회일치를 위해서라면 자신의 입장을 바꾸었습니다. 그는 종교개혁운동을 위해서 교회일치를 위해서 대의를 위한 합의에 이른다면 기꺼이 양보하고 바뀔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이런 입장 때문에 후에 곤욕을 치루기도 했습니다. 바뀐 입장을 지독하게 물고 늘어져 정치적 타격을 입기도 했습니다. 일치를 위해, 대의를 위해 입장을 바꾼 것인데 정적은 그걸 모순된 사람이라고 정치적인 공격을 퍼부었습니다. 미처 예상치 못한 타격이기에 칼뱅은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칼뱅의 이러한 일치를 위한 운동이 있었기에 후대 개신교는 생명력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어쩌면 지금까지도 말입니다. 비록 본인에게는 불행했겠지만 말입니다.

 

오늘 한국교회에서 교회 일치를 생각해봅니다. 분명 교회가 하나되지 못하고 있다는 위기감은 다들 느끼시리라 봅니다. 대형교회와 중소형교회의 모습을 보면서 위기감을 느껴야 할까요. 진보교회와 보수교회의 모습을 보면서 그 위기감을 느껴야 할까요. 우리가 진정으로 위기감을 느껴야할 때는 우리가 함께 하나님 앞에서 시편을 찬양할 수 없을 때입니다. 우리가 때로는 반목하고 갈등이 있을 수 있겠지만 서로가 하나님 앞에서 함께 찬양의 언어를 보일 수 없을 때 그것이야말로 교회의 근본적인 위기입니다.

우리 교회가 니케아 신경을 고백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이 때문입니다. 모든 그리스도교가 차이가 있지만 이 고백을 하고 있다는 고백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세상에 분열이 아니라 세상을 치유하는 하나의 교회라는 것을 알리는 고백이었습니다.

세상의 분열과 교회의 분열만이 보이는 것 같을 때 우리는 하나되는 교회 일치를 얼마 전에 보았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모금이었지만 우리는 지지난 주 중국에서 온 마스크를 통해 우리가 교회라는 것을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을 보았습니다. 중국 그리스도인들의 그 미안한 마음이 교회 일치의 초석입니다. 세상은 중국인을 혐오하고, 일본인을 혐오하고, 전라도 사람을 혐오하고, 대구 사람들을 혐오하며 미워하는 마음을 키우지만 우리 교회는 서로 미안한 마음과 고마움을 가지며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을 보입니다. 코로나로 인해 강제적인 분열이 생겼지만 그럼에도 그리스도의 교회를 막지는 못했습니다. 이러한 화해와 하나되는 교회의 역사가 앞으로도 계속 OOOOO교회를 통해 이어져 내려가길 소망합니다. 기도 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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