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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사도행전

[설교문] 사도행전 16장 1-10절(행 16:1-10, 행 16:1~10)

by 카리안zz 2020. 2.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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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161-10

 

오늘 본문에서는 바울의 애제자인 디모데가 나옵니다. 자신의 아들이라고까지 표현했기에 둘의 사이가 얼마나 돈독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런 디모데가 바로 오늘 본문에 등장하게 됩니다. 그런데 디모데에게 몇 가지 특이한 점이 있었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유대인이었지만 아버지는 헬라인이였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스쳐가는 의문점이 있습니다. 바로 할례의 문제입니다.

미쉬나라는 유대교 기록에 보면 유대인을 어머니로 두면 자식도 유대인이라는게 미쉬나의 견해였습니다. 물론, 이 미쉬나는 바울이 살았던 시기보다 훨씬 뒤의 기록입니다. 그러나 미쉬나는 바리새파 랍비들의 전통을 기록한 것이기에 바울이 살았던 시기에도 역시 마찬가지였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여기에서 이제 할례의 문제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유대교의 전통으로는 디모데는 할례를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헬라인이었기에 그리스-로마 문화권에 사는 디모데는 할례를 받지 않아도 제 생각에는 그렇게 큰 문제는 아닐 것 같습니다. 유대인들 사이에서는 문제일지 몰라도 말입니다. 그리고 문제를 더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앞장에서 예루살렘 회의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곳에서 이방인들은 할례를 안 해도 된다는 결의를 했었습니다. 할례의 행위가 구원과는 무관함을 말했고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앞장에서 할례를 안 해도 된다고 했는데 16장 시작하자마자 바울은 디모데에게 할례를 해버립니다. 여태 바울은 할례에 대해서 부정적인거 아니었나 싶은 생각이 듭니다. 일관성이 없는가 싶은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바울이 행한 이 할례는 구원의 차원에서 이해하면 안 됩니다. 복음을 전하는 선교의 차원에서 이해를 해야 합니다. 바울은 일관성이 있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복음을 전할 때 꼭 유대인의 회당에서 먼저 전했습니다. 그렇다면 스데반을 데리고 다니면서 선교를 한다면 유대교 회당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요? 복음을 온전히 전달할 수 있었을까요? 아마 복음을 전하기도 전에 심한 거부와 논쟁을 거쳐야 했을 겁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9:12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라그리고 고린도전서 9:19-23에서 자신의 가장 중요한 가치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임을 강조합니다.

그렇습니다. 바울에게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가장 최우선을 두며 거기에서 융통성을 발휘하였습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선교를 출발하면서 중요한 인물이 등장하게 됩니다. 오늘 마지막 장면에서 나옵니다. 먼저 바울, 실라, 디모데 그들은 선교를 출발하는데 아시아로 가려 했던 것 같습니다. 여기서 아시아는 우리 동아시아의 아시아가 아닙니다. 경상도, 전라도같은 그 지역의 지명을 나타내는 곳입니다. 여튼, 이 코스대로라면 중요한 도시인 아가야의 수도 에베소로 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령님께서 막으십니다. 서남쪽이 아니라면 북쪽을 생각해봅니다. 무시아 지역에서 비두니아 지역으로 가려고 합니다. 비두니아 지역은 북쪽이었습니다. 그곳을 왜 가려했나 생각해보면 그 지역에 유명한 헬라 도시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대표적으로 니케아와 니코메디아라는 도시가 있었습니다. 그곳에서의 선교 역시도 대단히 효과적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그렇다면 와중 이제 드로아 해변으로 가는 길밖에 없어집니다. 그리고 그곳에 도착을 합니다. 그곳에서 환상을 보게 되는데 그 환상은 마게도냐 사람이 우리들에게 와서 도와달라는 환상을 보게 됩니다. 이제 길은 점점 분명해 집니다. 처음엔 성령님, 다음에는 예수님의 영, 그 다음 하나님이라 표현하며 점차 분명해지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표현하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주목해 봐야 할 표현 바로 우리입니다. 처음 여행에 표현되었을 때 바울, 실라, 디모데에겐 그들이라고 6절에 표현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10절에는 우리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누군가 함께 여행을 동참하게 되었습니다. 글을 쓰는 사람이 우리라고 표현을 한다면 거기에서 추가된 동행자는 누구라고 보아야 할까요? 바로 지금 사도행전을 쓰고 있는 누가라고 봐야 합니다. 이제 또 새로운 동행자 누가가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하게 되었습니다. 실로 계속해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계속되어집니다.

 

우리의 신앙 여정도 바울일행의 모습일 때가 많습니다. 합리적으로 계획하고 하나님의 뜻일 것같은 목표로 향해 나아가지만 그 길이 꺾일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헤매일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길을 가라고 하시지? 어디로 가야하지?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아무도 섣불리 장담할 수 없습니다.

사역자들은 연말에 이동을 많이 합니다. 그래서 사역자 FA시즌이다라고 우스게 소리로 하기도 합니다. 저한테도 그런 말들을 많이 물어봅니다. 언제까지 사역할껀데? 전임은 언제 나갈건데? 그리고 주변에서 사역자 돈을 얼마나 준다더라 그런 말들을 많이 해줍니다. 특히 저희 아버지가 요즘 그런 말들을 많이 하십니다. 자꾸 옆에서 거기는 얼마 받는다더라 여기는 얼마 받는다더라. 그러면 저는 우와 많이 받네. 우리 담임목사님보다 많이 받네. 그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저는 나의 여정에 합리적인 인생 계획을 세우지 않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구한다지만 그 밑바탕에는 내 욕망으로 그 길들을 바꾸어 나가고 있음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바울과 그 일행들의 행동을 기억합시다. 어디로 갈지도, 어떻게 될지도, 흐를지도 모르는 여정길이었습니다. 그들은 합리적인 계획보다도 먼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우선했습니다. 저도 제 인생의 여정이 어떻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서울도 아니었고, 경기도도 아니었고, 전라도도, 강원도도, 아닌  OO교회로 인도하셨습니다. 그것을 믿고 그리고 앞으로 흐를 그 여정 역시도 그분의 인도하실 것임을 믿고 기도할 뿐입니다.

다같이 잠언 16:9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 우리의 인생 여정. 걸음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믿으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길 소망합니다.


기도 드리겠습니다.

첫 번째로, 교회를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 우리의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 운동이 더욱 빛나며 그 통로로 쓰임받을 수 있도록 기도해주십시오. 그리고 새로운 가정들이 와서 함께 하나님 나라 운동을 펼칠 수 있도록 기도해주십시오.

두 번째로, 이번 주 예배를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 예배 가운데서 그 시간을 통해 정화되고 우리의 계획한 발걸음을 넘어 하나님의 인도를 보는 시간이 될 수 있도록 기도드립시다.

세 번째로,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 “고린도후서 5:19을 통해 주님은 교회에게 화목케 하라는 소명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에베소서 2:14을 통해서는 모든 원수된 것들을 무너뜨리고 화평케 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처럼 주께서 한반도에 평화를 정착시켜주시고, 화해가 꽃피게 해주시기를 기도합시다. 또한, 그 일에 한국 교회가 쓰임받도록 기도합시다

마지막으로 가지고 나오신 기도제목을 위해 주여 외치고 기도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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