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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리뷰/신앙서적

[책리뷰] 루이스 스미디스 - 용서의 미학(어떻게 용서해야 할지 모를 때)

by 카리안zz 2020. 6.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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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낀 점

 지난 주 설교 주제가 '용서'였다. 설교의 제목은 '용서 없이 하나님 나라 없다'. 데즈먼드 투투의 <용서 없이 미래 없다>를 참조한 제목이었다. 왜 용서를 설교 주제로 잡았냐면 큰 이유는 없었다. 일전에 N. T. 라이트의 <예수와 하나님의 승리>를 리뷰하면서 파월이 쓴 <예수에 대한 다양한 이해> 라이트 편을 본 적이 있었다. 그때 파월이 라이트의 책을 정리하며 산상수훈의 역설이 십자가로 이어진다고 말했다. 페이지(323)까지 적어놨다. 그 글을 읽고 하나님 나라와 용서를 주제로 설교를 하면 좋지 않을까 싶었다. 그래서 그걸 실행에 옮기고 6월달 설교문을 작성했다. 

 

 설교에 참조하려고 쌓아논 책들이 있다. 리처드 헤이스의 <신약의 윤리적 비전>, 본회퍼의 <나를 따르라>, 채영삼의 <긍휼의 목자 예수>, 데이비드 터너의 <마태복음>, R. T. 프란스의 <마태신학>이 있다. 이건 주해를 할 때 참고하려고 한 책들이다. 결국 위의 책말고 스캇 맥나이트의 <산상수훈>, 톰 라이트의 <모든 사람을 위한 마태복음>, R. T. 프란스의 <TNTC 마태복음>을 주해로 참조했다. 오늘 리뷰 책인 <용서의 미학>은 다 읽었지만 니콜라스 월터스토프의 <사랑과 정의>는 원래 다 읽을 생각도 없었지만 읽어야 할 분량도 채우지 못했고, 토르디스 엘바, 톰 스트레인저의 <용서의 나라>도 읽을 예정이었지만 손도 대지 못했다. 그렇다. 나는 내가 준비한 책들을 읽고 설교문을 작성하려던 것을 거의 못했다. 왜 그랬을까. 

 

 다 말하진 못하겠지만 집안 문제가 생겼다. 아버지의 건강 문제도 있고 하던 사업을 다 정리해야 했다. 그 사이 나는 아버지가 시술때문에 입원하고 몸을 추스리고 있는 몇 주간(오늘도) 사업터 사무실에 아버지의 빈 자리를 채우고 있다. 그래서 지금 내가 계획한 모든 일들이 틀어졌으며 자칫 내년에는 사역을 그만두고 돈 벌러 가야할 처지가 될 뻔 했다. 다행히 지금은 그정도는 아닐 것 같다. 그러면서 멈춰있던 아버지에 대한 분노가 터진 시간이기도 했다. 내 모든 분노를 쏟아놓고 이 책 <용서의 미학>을 봤을 때는 뭔가 했다. '용서'에 대해서 뭔가 실존적으로 다가왔다. 마치 이 책을 봤을 뿐이지만 하나님이 나에게 '너 정말 용서할 거니'라고 묻는 듯했다. 아 왜 이 타이밍에 나는 용서를 주제로 설교하려고 했을까. 왜 이 타이밍에 감춰졌던 분노와 원망과 상처가 터져나왔을까. 솔직히 말하자면 이번 설교만큼 기도하면서 준비한 경우도 없었던 것 같다. 모두 자료를 읽고 뭔가 인사이트가 터져나오면 그때 글을 쓰는 식으로 설교문을 썼지 지금처럼 기도와 괴로움으로 설교문을 작성한 경우는 없었다. 하나의 작품으로 썼다가보다는 발버둥치는 삶으로 설교문을 썼다. 

 

 하지만 이 책. 하나도 인용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내 설교 마지막 부분에는 이 책이 알려준 내용과는 전혀 다르게 말하기도 했다. 대강 나는 '우리에게 용서는 나 자신을 위해서 하는 것이라기보단 예수님께서 그렇기 했기 때문에 우리가 해야 하는 거라고. 예수님은 나를 따르라고 했다고. 그래서 우리는 용서 앞에서 씨름해야 한다'는 것이 마지막 정리였다. 그렇다면 이 책 내용은 별로였다는 건가? 아니다. 그건 아니다. 참 좋았던 부분들이 제법 있었다. 

 

용서의 미학? 

 이 책의 제목은 <용서의 미학>이다. 원저를 보니 'The Art of Forgiving'이다. The Art를 미학으로 번역한듯 싶은데 차라리 '기술'로 번역했으면 어땠을까 싶다. 아니면 'The Art'와는 거리가 있겠지만 '아름다움'으로 번역했으면 어땠을까 싶다. 아름다움이 좀 오버라면 기술은 번역했음직하다. 솔직히 미학과 이 책의 내용과는 상당히 거리가 먼듯 싶다. 저자도 서문에 이렇게 말했다. 

 

용서는 일종의 기술 즉 실용적인 기술이지만 모든 치유 기술 가운데 가장 경시되는 기술일 것이다. 용서는 다른 사람들의 잘못 때문에 입은 내적 상처를 치유하는 기술이다. (13)

 

 아마 이때 원문에서는 기술을 'The Art'로 쓰지 않았을까 추측해본다. 어쨌든 이 책은 용서의 기술도 알려주고 용서의 유용성도 알려준다. 이 책이 대강 어떤 이야기를 할지 큰 챕터들에서 잘 알려준다. '1부 용서하기 위해서 무엇을 하는가', '2부 왜 용서하는가', '3부 누구를 용서하는가', '4부 어떻게 용서할 것인가'. 

 

용서의 기술!

 이 책은 어설프게 용서를 말하지 않는다. 어슬프게 용서를 말하는 것은 마치 이런 것이다. '용서는 좋은 것이야. 너도 용서해. 용서하면 다 해결 돼!' 마치 이렇게 주문 외듯이 하는 외침이 어슬픈 용서다. 아니 용서가 무엇인지 진정 모르는 것이다. 마치 영화 <밀양>에서 살인자가 전도연(이신애 역)에게 한 것처럼 말이다. 되려 그것은 폭력이다. 

 

누가 용서하는가?

 당연한 상식이지만 용서가 좋은 것이기에 폭력적으로 권유할 때가 있다. 당사자가 아닌데 자신이 용서했다고 하거나 아니면 당사자에게 용서해야 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은 그 부당함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문제는 레이건에게는 단 한 사람의 나치 친위대원도 용서할 자격이 없다는 것이다. 대통령이든 농노든, 본인이 겪지 않았다면 그 상처를 입힌 사람을 용서할 자격이 없다. 아들이 나치 당원이었던 어머니들을 향한 자비심은 훌륭하다. 그러나 나치의 희생자를 빼고는 아무도 나치 당원 아들들을 용서할 수 없다. (64)


용서할 자격은 부당한 일을 당한 사람에게만 있다. (69)

 

 당연한 것이지만 가끔은 이 당연함을 잊고 좋은 것을 권유할 때가 있다. 남의 일이기에 더욱 그러는 듯하다. 나는 지난 주 했던 내 설교가 성도분들께 그렇게 들리지 않았으면 하고 간절히 바란다. 하나님과 단독자로서 철저히 상처와 분노를 대면하는게 먼저라고 본다. 거기서 괴로워하고 고민해야 한다. 씨름해야 한다. 그게 가장 먼저라고 본다. 

 

용서는 재결합이 아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공감했던 내용이다. 맞다! 용서를 한다고 예전의 상황으로 꼭 다시 돌아가야 하는 건 아니다. 용서의 낭만으로 당연히 용서를 했으니 전과 같은 관계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저자의 말처럼 나는 그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용서는 재결합이 아니다. 저자는 철저히 현실적으로 따진다. 

 

용서와 재결합은 같은 것이 아니며, 그 둘을 연결시키면 용서가 용서하는 사람에게 불필요한 위험이 된다. 이상적인 대본이 반드시 최고 대본은 아니다. (45)

 

 용서는 내면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용서를 하면서 우리는 용서받는 사람의 연약하고 부족하고 멍든 인간성을 다시 발견하고, 복수에 대한 생각을 접는다. 우리는 불한당이었던 상대를 동료로 대하게 되고 그의 행복을 빈다. 그런데 이 모든 일은 관계의 회복에 대해서는 전혀 재고하지 않은 채 일어난다."(46) 저자는 용서와 재결합은 그 성격이 다르다고 한다. 이 둘은 어떻게 다를까? 

 

용서하는 데는 한 사람이 필요하다.
재결합하는 데는 두 사람이 필요하다.

용서는 상처 받은 사람 내면에서 일어난다.
재결합은 두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일어난다.

상대방이 미안하다고 말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그 사람을 용서할 수 있다.
그 사람이 정말 정직하게 미안하다고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진정으로 재결합할 수 없다.

우리는 한번 학대한 사람이 다시는 그러지 않을 것을 믿을 수 없을 때도 용서할 수 있다. 
우리를 한번 학대한 사람이 다시는 그러지 않을 것을 신뢰할 때만 재결합할 수 있다. 

용서에는 부대 조건이 없다. 
재결합에는 부대 조건이 몇 개 있다. (48-49)

 

 저자는 현실적인 문제를 말하며 재결합과 용서의 차이에 집중한다. 그 현실적인 이유란 첫째, 재결합이 불가능할 경우다. 예로 이혼한 남편을 용서했는데 이미 이혼한 남편은 재혼을 해버렸다. 이때 재결합 자체가 불가능하다. 둘째, 해로운 경우가 있다. 예로 전 남편이 여전히 알콜중독자여서 아내를 폭행할 여지가 충분할 경우가 있다. 셋째, 상처 받은 사람이 결코 용서하지 못할 정도로 위협될 수 있다. 이 경우는 어설픈 용서로 인해 돌이킬 수 없는 상처가 생긴 경우다. 이렇게 되면 다시는 용서 못할 경우가 된다. 

 

 이 부분만 봐도 용서에 대한 환상을 적은 책이 아닌 것을 알 수 있다. 충분히 괜찮은 책이다. 

 

나가면서

 이 책은 정말로 용서에 대해서 많은 걸 알려준다. 용서가 어떤 것인지. 용서에 어떤 기술이 필요한지. 막연히 용서가 하나님의 은혜나 감동, 아니면 어떠한 돌이킴이 있어서 자동적으로 하게 되는 것이라 생각하기 쉽다. 나 역시 그랬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난 뒤 용서에 대한 갈등을 느낄 것이고 저자의 대답에 동의를 하든 하지 않던 우리는 무엇을 느낄 것이다. 용서를 떠올리거나 용서를 묵상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꼭 읽어보라고 이야기해주고 싶다. 


메모

 

...자비심 때문에 한쪽으로 치우쳐 있는 태도다. 패티는 어떤 벌도 왓슨에게는 충분하지 않다고 주장하는데, 그녀 역시 증오 때문에 한쪽으로 치우져 있는 것이다. 
 왓슨이 사람들에게 위협적인 존재인지 여부를 판단하거나 적정한 벌을 더 받아야 하는지 결정하는 것은, 자비심이나 증오심의 영향을 받지 않는 사람들 몫이다. (59)

- 사랑과 정의의 관계에 대해

 

 

 

용서는 피해자 자신이 없애지 않는 과거의 오래된 고통을 넘어서도록 하는 유일한 길이다. 피해자가 나쁜 과거에 대한 불공평한 속박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결이다. 그래서 내가 처음에 그리고 이후에도, 용서의 유익을 얻는 유일한 사람은 바로 용서를 하는 사람 자신이라고 수천 번 말한 것이다. (93)

- 그러나 유익을 얻기 위해 용서해야 할까? 

 

 

 

용서는 가해자와 함께 거하는 것이 아니다 (216)

- 현실적이다. 

 

 

 

그 사람을 좋아할 필요는 없다 (226)

- 현실적이다. 


책 맛보기

 

상처로 인한 고통에서 회복되는 시기와 그 여부를, 상처를 입힌 바로 그 사람이 결정하도록 해서는 안 된다. (135)


지나치게 빨리 용서하지는 말되, 지나치게 오래 지체하지도 말라. 그런데 얼마나 빠른 것이 지나치게 빠른 것인가? 얼마나 느린 것이 지나치게 느린 것인가? 아무도 우리에게 말해 줄 수 없다. 오직 그 상처 입은 사람만 때가 되었음을 분명히 알 수 있을 뿐이다.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때가 되었을 때 행동할 것이다. (196)


얼마 전 나는 30년 전에 갓난 아들을 묻었던 미시건 주 그랜드래피즈의 어느 작은 무덤가에 홀로 서 있었다. 지금은 캘리포니아에 살기 때문에 한동안 그 무덤에 가보지 못했고, 흙이 돼버린 그 어린 몸을 적시던 눈물도 오래 전에 말랐다. 그러나 그곳에 홀로 서 있는 동안, 거의 잊고 있던 오래된 슬픔이 그 아이를 묻을 때처럼 내 영혼에서 스며 나왔다. 이 무심하고 오래된 슬픔은 도대체 어디에서 나오는 것인가? 일찍이 슬픔의 파도가 썰물과 함께 물러간 후 내 안에 있는 바다의 바닥에 머물러 있던 흉터에서 나온 것이었다. (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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