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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리뷰/신앙서적

[책리뷰] 오지훈 - 희생되는 진리(르네 지라르와 무라카미 하루키, 기독교를 옹호하다)

by 카리안zz 2020. 5.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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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낀 점

 르네 지라르를 정일권 박사를 통해서 알게 된 것같다. 하지만 이 책은 정일권 박사가 쓴 책보다 지라르를 더 잘 소개한다. 솔직히 정일권 박사는 글을 너무 딱딱하게 쓴다. 이건 그가 극우 말들을 해서 비호감이 되기 전부터 그랬다. 그래서 르네 지라르에 대해서 정일권의 글보다는 이 책을 보길 바란다. 이 책은 참 재미있게 잘 썼다. 

 

버트런드 러셀, 비트겐슈타인, 괴델

버트런드 러셀

 이 책은 기독교 변증서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의 반대편 상대방을 언급해주는데 대략 이렇다.

크리스천에게 무신론자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 중 한 사람이 영국의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일 것이다. 그는 무엇보다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라는 반기독교 에세이의 저자로 유명하다. 무신론의 계열은 편의상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영미권의 경험론 철학과 계몽사상, 특히 진화생물학을 토대로 하는 증거주의 혹은 과학주의 무신론이며, 다른 하나는 역사학 혹은 사회학 이론을 토대로 하는 혐의론적 무신론이다. 전자는 흄과 러셀이 대표적이고, 후자는 마르크스, 니체, 프로이트가 대표적이다. ...
오늘날 가장 호전적이면서도 기독교에 극히 적대적인 도킨스나 데닛 같은 신무신론자들은 대부분 전자, 즉 러셀의 계열에 속한다. 그런데 요즘 도킨스와 데닛은 신학자들만이 아니라 온건한 무신론자들에게서도 비판받고 있기에, 이들보다 앞서며 나름대로 사회적으로 존경받았던 버트런드 러셀의 무신론을 다시 짚어 보는 것이 의미가 있을 것이다. (17)

 버트런드 러셀은 금수저다. 영국 수상을 두 번이나 한 존 러셀의 손자이여서다. 자라면서 러셀은 할아버지의 서재에서 유클리드의 <기하학>을 보고 "수학의 논리와 이성, 증명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논리적인 수학에 비해 신에 대한 믿음을 비논리적이고 매력이 없는 것으로 간주하게 된다"(21). 결국 러셀은 "논리적이고 과학적인 증거가 필요하다는 '증거주의 무신론'이 논의의 핵심을 이루게 된다"(21). 

 러셀은 이러한 생각을 하고 있었기에 수학의 확실성을 확고하게 만들고 싶었다. 그런데 러셀의 역설이라는 것을 발견한다. 그 역설이라는 것은 이렇다.

러셀은 이를 이발사의 역설로 표현했다. "어느 마을에 단 1명뿐인 이발사는 스스로 수염을 깎지 않는 모든 이의 수염을 깎고 그 외의 사람의 수염은 깍지 않는다. 이때 이 이발사의 수염은 누가 깎아야 되는가?" 하는 문제였다. 잘 따져 보면 이 이발사는 자신의 수염을 깎을 수도 없고 깎지 않을 수도 없는 모순된 상황에 처하게 된다. 이 역설의 발견으로 러셀은 수학계에 일약 유명한 인물이 되었지만, 그것은 역설적으로 수학이라는 학문 자체가 위기에 처했다는 인식을 확산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24)

 

러셀의 무신론

러셀의 무신론에 세 가지 기본 축이다.

① 기독교는 비과학적이고 비논리적이다.
② 기독교는 역사 속에서 수많은 죄악을 저질러 왔다.
③ 신이 없어도 도덕은 가능하다. 오히려 기독교의 성도덕과 금기는 인간의 자유와 행복을 억압하고 왜곡된 결과를 야기했다. (29)

 저자도 비판을 하듯이 2번과 3번에 대해서 러셀은 깊이 숙고하지 못했다. 2번에서 말하듯이 기독교는 역사 속에서 수많은 죄악을 저질렀다. 그러나 그것이 기독교 본유의 주장인가? 아니 기독교가 있는 곳에서는 모두 저런 현상이 발견되었는가? 아니다. 오히려 기독교가 있든 없든 저러한 악행은 어느 곳에서나 일어났다. 무신론자가 일으키면 무신론의 잘못이 되는 건 아니다.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전라도, 경상도과 같은 지역이나 직업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 전에 그 인간이 잘못된 것이다. 

 3번은 러셀 자신의 삶에서 반박된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는 "프리섹스와 전통적인 결혼으로부터의 해방이 그 자신과 주변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지는 못했다."(30) 보니 러셀의 주변 사람들은 참 불행했다. 저자는 그의 자유로운 성과 자유로운 도덕이 원인이라고 말하는데 어느 정도 일리가 있는 듯하다. 러셀의 딸은 기독교로 회심을 하는데 이렇게 썼단다. "아버지는 삶의 기쁨을 앗아가고 반대자를 박해하는 맹목적 기독교인들, 냉혹한 도덕주의자들을 너무 많이 보았다. 아버지는 그들이 가리고 있는 진리를 볼 수 없었을 것이다."(31) 

 이외에도 러셀은 "믿음에는 과학적 증거가 필요하다", "진리는 증명되어야 한다. 증명 가능한 것만 믿을 수 있다", "우주가 존재하는 원인이 있다고 가정할 근거는 없다" 이렇게 정리할 수 있을 듯하다. 이러한 논지를 비슷하게 이어받은게 도킨스이고 이는 무신론 진영에서도 비판받는 내용이 된다.

 

 러셀의 논리주의를 궤멸시키는 사람이 비트겐슈타인과 괴델인데 이들에 대해서 간략하게 살펴보자. 

 

비트겐슈타인

 비트겐슈타인도 칸트와 유사한 면이 있다. 다른 점은 비트겐슈타인이 '언어'를 문제 삼았다는 것이다. 우리는 언어를 도구로 사유하는데, 그러한 언어체계가 형이상학적인 문제들을 사유하는 데 근본적으로 불완전하다는 것. 칸트는 이성의 불완전성을,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의 불완전성을 나타냄으로써 서양의 형이상학을 비판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칸트도 비트겐슈타인도 그러한 형이상학 자체가 쓸모없는 것이라고 하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형이상학적인 문제의식은 중요하지만 그것을 이성을 통해 사유해서 체계화하려 하거나, 언어로 그것들을 표현하려 할 때 불완전하다는 것이다. (51-52)


'신', '존재' 등 형이상학 문제들은 비트겐슈타인이 보기에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삶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나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말하는 것이 아니라 보이게 하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이 보기에 형이상학은 '사랑', '아름다움', '존재', '신'과 같은 개념들을 불완전한 언어로 정의하고 다루려는 데 문제가 있었다. 즉, 언어로 표현하기 어려운 것을 언어의 틀에서 사유하려 할 때 오류에 빠질 수밖에 없다는 것, 그것이 비트겐슈타인의 주장이다. ... 말할 수 없는 것에는 입을 다물고 말할 수 있는 것들, 즉 객관적으로 관찰하고 실험하여 검증할 수 있는 지식을 추구하는 것만이 가치 있는 것이라고 이해했다.
... 비트겐슈타인에게 중요한 것은 그 책에서 말해진 것이 아니라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비트겐슈타인에게 그런 것들은 경외의 대상이었다. 따라서 침묵은 '경멸'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경외와 겸허'를 뜻한다. 그런 것들을 언어로 개념화하여 사유하는 전통적 형이상학이 그것들의 진정한 가치를 훼손하는 것을 우려했지, 형이상학적 문제의식 자체를 무시한 것은 아니었다. 비트겐슈타인에게 논리학보다 중요한 것은 종교와 윤리였으며, 경계를 넘어서 말하고자 하는 논리적 언어의 충동에 일정한 한계를 설정하려던 것이 그의 진정한 의도였다. 그리고 그는 책에 쓴대로, 말할 수 없는 그것을 스스로의 삶으로 드러내고자 했던 것이다. (58-59)

 

 대강의 비트겐슈타인의 요약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전기와 후기로 구분되는데 후기에서는 어떻게 표현되는지 한 번 보자. 

 

비트겐슈타인은 <논고>에서 세계는 사물의 총체가 아니라 사실들의 총체라고 선언했고, 언어는 그러한 사실들을 재현해주는 그림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비트겐슈타인의 초기의 언어철학을 '그림이론'이라고 칭하기도 한다. 하지만 초등학교 교사 경험을 통해 어린이들의 언어습관을 지켜봤던 비트겐슈타인은 언어가 단순히 세계의 그림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세계에서 일할 수 있게 해주는 도구가 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비트겐슈타인은 과거에 명료하지 못하다고 폄하했던 '일상언어'에 대한 생각을 바꾼다. 일상언어는 그 자체로 온전하며, 일상언어가 어떻게 오해되고 잘못 사용되는지를 밝히 드러내는 것이 철학의 과제라고 생각하기에 이른 것이다.
...
... 종합하면 비트겐슈타인은 후기 철학에서 <논고>에서 주장한 많은 내용을 스스로 폐기했다. 그렇다고 오해해서는 안 된다. 비트겐슈타인이 포기한 건, <논고>가 명료화한 '세계에 대한 그림이론'으로서의 언어체계이지, 종교와 미학, 형이상학에 대한 경외의 태도를 폐기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비트겐슈타인은 후기 철학에서 '말할 수 있는 영역'에서조차 기존의 명료하고 이상적인 언어체계보다 일상언어의 중요성, 발화 내용과 발화 맥락을 함께 고려하는 언어철학으로 나아감으로써 기존 <논고>의 생각을 완화한 것이다. ...
... 종합하면 비트겐슈타인 전 · 후기 철학을 통틀어 그의 주된 문제의식은 '이성'과 '논리' 중심의 언어의 적용, 나아가 그러한 언어의 폭력에 한계를 긋는 것이었다. 그것이 전기에는 "말할 수 없는 것에 침묵"이라는 명령으로, 후기에는 일상언어를 존중함으로써 삶의 형식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으로 이어진 것이다. 바로 이 부분이 러셀의 철학적 경향과 근본적으로 대립하는 지점이다. 그런데 비트겐슈타인의 이러한 철학은 그의 종교적인 삶, 윤리적 태도와 깊은 관계가 있다. (61-64)

 

 그리고 평소 내가 말하고 있는 바를 비트겐슈타인이 이미 백여년도 전에 말했다는 것에 역시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는 기독교 이상으로 기독교적인 인물이었다. 그랬기에 제도적 종교, 가톨릭이나 신교의 기존 교리는 그의 신앙을 소화해내기에 단순하고 협소했다. "러셀과 목사들이 힘을 합쳐 해악을 끼치고 있다"는 비트겐슈타인의 말을 새겨 보자. 과학으로 신의 존재를 반박하고자 하는 러셀이나 도킨스는 물론, 과학으로 신의 존재를 입증하려는 '창조과학'을 하는 사람들 모두 동일한 오류에 빠져 있는 것이다. 과학으로 그것을 가릴 수 있다고 보는 과학중심적 사고방식 그 자체가 문제인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이것을 우려했다. 이러한 문제인식은 발화되는 언어와 그 사용 맥락을 동시에 살피고 복수의 삶의 형식을 인정해야 한다는 그의 후기철학과 밀접하게 연관된다. (68-69)

 평소에 창조과학을 비판할 때 내가 주로 하는 말이었다. 과학으로 성경을 증명하려는 저 시도가 이미 과학이 가장 진리라고 전제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과학으로 성경을 반박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어쩌나 성경은 과학책이 아닌데. 저런 모습은 마치 내겐 성경책을 보면서 아이폰 제조법을 찾는 것처럼 보인다. 바보들. 

 

 

괴델

괴델이 증명한 불완전성정리는 두 가지다. 제1정리는 모순이 없는 산술의 형식체계에서 참이지만 증명불가능한 명제가 반드시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제2정리는 형식체계가 무모순일 때, 그 형식체계 내에서 무모순성을 입증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제1정리가 말하는 것은 진리가 증명보다 크다는 것이다. 제2정리는 어떠한 모순 없는 체계를 구성한다 하더라도 그 체계는 항상 불완전하다는 것이다. 체계는 시스템이다. 즉, 형식적으로 완전한 시스템은 없다. (86)

 위의 내용은 괴델의 업적인데 그 전에 괴델이 활동했던 시대를 한 번 살펴보자. 수학의 위기가 세 번 있었다고 한다. 첫 번째, 피타고라스가 발견한 무리수, 두 번째, 비유클리드 기하학, 세 번째가 집합론에서 발견한 러셀의 역설이다. 기하학과 집합론의 위기는 수학이 정말 확실한 기초가 될 수 있는지 의심하게 된 계기라고 한다. 이것이 왜 위기냐면 수학이야 말로 자연과학에서 가장 신뢰할만한 도구이기에 이 기초가 불안하다면 과학에 대한 불신으로까지 이어지기 때문이다.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등장한 이론이 러셀로 대표되는 논리주의, 힐베르트로 대표되는 형식주의, 브라우베르의 직관주의가 있다. 괴델은 논리주의와 형식주의를 무너뜨렸다. 

 

불완전성정리

1930년에 증명을 마치고, 1931년에 공식적으로 발표한 괴델의 불완전성정리는 다음과 같다.

제1불완전성정리: 산술을 포함하는 형식체계가 무모순일 때, 그 체계 안에 참이지만 증명불가능한 명제가 반드시 존재한다. 
제2불완전성정리: 산술을 포함하는 형식체계가 무모순일 때, 그 형식체계는 체계 내부로부터 자신의 무모순성을 증명할 수 없다. 

...
괴델의 제1정리는 쉽게 말하면 진리는 증명보다 크다는 것이다. 즉, 증명될 수 없는 진리도 있다. ... 자연과학은 관찰과 실험을 통해 가설을 검증하는 방법으로 자연의 숨은 진리를 발견한다. 수학도 마찬가지다. 수학도 공리를 기반으로 일련의 논리적 규칙을 따라 새로운 수학적 진리를 증명한다. 이것이 정리다. ... 엄밀한 논리에 의해 증명된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수학의 모든 진리는 곧 증명가능하다는 선입견을 갖는다. 
그런데 괴델은 어떤 명제는 분명히 참이지만 증명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이다. 즉, 수학적 증명의 그릇으로는 수학적 진리를 다 담아낼 수 없다는 것이다. ... 따라서 이 산술의 형식체계를 논리학으로 환원할 수 있다면, 수학의 모든 법칙은 논리학에서 연역해 낼 수 있다. 그리고 그게 가능하다면 그 체계 내의 모든 수학적 진리는 증명가능하다. 이것이 러셀의 '논리주의'다.
그런데 제1정리에서 괴델은 논리주의를 궤멸시켰다. 괴델은 특히, 러셀의 <수학원리>를 불완전한 형식체계의 예로 들었다. (95-97)

 괴델의 이 증명으로 인해 러셀의 '논리주의'는 격파되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확실히 산술의 형식체계를 논리학으로 환원할 수 있다면 수학의 모든 법칙을 논리학으로 연역해 낼 수 있다는 것은 매력적이다. 수학이야 말로 궁극의 학문이 될 것이다. 하지만 괴델은 이를 반박하는 증명을 해낸 것이다. 

 

느낀점 정리

 확실히 러셀의 '논리주의'는 당시의 분위기이지 않을까 싶다. 근대의 최절정기이며 의심과 관찰, 증명의 집대성인 과학이야 말로 가장 우선되는 진리라는 생각이 팽배했으니 말이다. 현대철학에서 이러한 점을 극복했다고만 알고 있었지만 비트겐슈타인과 괴델에게서 이러한 전환이 일어났는지는 처음 알았다. 사실 철학을 전공하지도, 수학을 전공하지도 않아서 이 말들의 내용을 완전히 이해는 못했지만 저자의 친절한 설명으로 그래도 어느 정도 대략적인 이해는 하고 넘어갔다. 

 

르네 지라르

 르네 지라르에 대해선 저번에 김두식 교수의 <욕망해도 괜찮아>에서 살짝 살펴보았다. 이 책에서 좀더 심도있게 살펴보도록 하자. 지라르는 공부를 하다가 기독교로 회심한 사람이다. 가톨릭 교도였다. 그리고 그의 이론은 기독교를 구했다고까지 평가를 받는다. 그래서일까? 네덜란드 자유대학에서 최초로 명예박사를 받기도 했다. 네덜란드 자유대학은 신칼뱅주의자 아브라함 카이퍼가 교회로부터 자유를 원했기에 그 취지에 맞게 설립된 대학교이다. 칼뱅주의자들에게 있어선 주요한 핵심이 되는 대학이기도 하다. 과연 그는 무엇을 주장했기에 이러한 평가와 대우를 받을까 한 번 살펴보자. 

 

나의 진정한 욕망이란 없다. 언제나 타인의 욕망을 모방할 뿐.(욕망이론)

지라르는 1961년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에서 '삼각형의 욕망'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무언가를 원할 때, 우리는 그 대상을 직접적으로 욕망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쉽다. 주체-대상의 직선 모델이다. 하지만 지라르는 중개자를 더한다. 즉, 주체가 대상을 욕망할 때, 그 욕망의 근원은 주체 자신의 것이 아니라 중개자의 것이다. 다시 말해 당신은 누군가의 욕망을 모방하고 있다. (122-123)

 이 욕망의 삼각형 이론은 수능에서도 나온다고 한다. 우리가 누군가의 욕망을 모방하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새롭다. 주변의 욕망에서 우리는 자유롭지 못하다. 왜 우리가 그 큰 집을 원하는가? 왜 그 큰 집을 가지고 싶은가? 나는 세상을 보는 눈총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보단 타인의 욕망들의 집체인 사회의 욕망 시스템의 한 발로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 욕망은 자주 경쟁관계에 놓이게 되고 이로 인해 갈등이 발생한다. 

매력적인 장난감을 앞에 둔 아이들을 보면 그 장난감을 차지하기 위한 싸움이 곧 일어날 것 같다는 느낌을 쉽게 받을 수 있다. A(주체)가 B(중개자)의 욕망대상을 보고 동일한 대상을 욕망할 때, 그 모방에 의해 B(주체)는 A(중개자)가 모방한 자신의 욕망을 더욱 강하게 욕망한다. 이렇게 A와 B가 서로를 모델 삼아 동일한 대상을 욕망할 때, 이 관계를 지라르는 짝패라고 명명한다. 그런데 어디선가 새로운 C가 나타나서 A와 B의 욕망을 또 모방하여 동일한 대상을 욕망한다. 이로 인해 모방적 경쟁관계가 가열되는 것이다.
... 이제 A, B, C, D, E가 동일한 대상을 욕망하기에 이르렀다. 이를 두고 지라르는 '스캔들의 수련현상'이라고 부른다. (124)

  이 욕망현상을 분석하면서 지라르는 기독교에 메세지에 집중하게 된다. 원죄와 십계명을 이 욕망으로 해석하고 예수님 닮아야 된다는 것은 새로운 욕망으로 이끄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본받고 모방하게 되면 예수처럼 겸손해지는 것이다. 그리하여 원죄로서의 모방욕망을 극복하는 유일한 방법은 결국 그 예수를 믿고 따르는 것이 된다. 그것이 구원이다."(128) 지라르 이론에서 신학을 발견하게 된다.

 

스캔들, 희생양 메커니즘

 모방 욕망이 이러나면 결국에는 스캔들(갈등이라고 봐도 되지 싶다)이 생긴다. 이를 모방적 경쟁관계라고 한다. '일인에 대한 만인의 반대'로 향해 간다. 

초기의 무질서는 이 단 하나의 반대 앞에 질서를 잡게 된다. 긴장이 최고조에 이르는 이 순간, 단 하나의 스캔들이 되는 모델은 희생양이 된다. 이 희생양에 대한 만장일치적인 집단폭력, 즉 집단 구성원 전체의 린치가 일어나고 그 희생양은 죽음을 맞으며, 이로 인해 공동체는 질서와 평화를 회복한다. 
하지만 이 평화는 오래 지속되지 못하며, 이내 무질서해지는데, 다시 똑같은 메커니즘에 의해 다수의 스캔들은 단 하나의 스캔들로 수렴된다. 그리고 여기서 선택된 하나의 희생양은 전체주의적인 폭력 앞에 노출되고 공동체는 질서를 회복한다. 이렇게 모방욕망의 경쟁에 의해 무질서와 질서가 순환되는 메커니즘, 다수의 스캔들이 하나의 스캔들로 수렴되는 이 메커니즘이 바로 지라르가 말하는 희생양 메커니즘이다. 그리고 이 메커니즘의 반복이 공동체의 문화적인 형태로 진화하여 주기적인 종교적 의식을 낳았고, 그로 인해 희생양 제의가 탄생한 것이다. (131)

 이 희생양 메커니즘에서 성서와 신화의 차이가 부각된다. 지라르는 이 희생양 메커니즘을 찾아내며 그리스 신화의 신들은 희생양들이었다고 말한다(정일권은 불교의 보살들이 희생양이라고 박사논문을 썼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 역시도 희생양 메커니즘에 희생된 제물이고 신으로 격상된 것일까? 그리고 계속해서 그러한 희생양 메커니즘이 일어나게 될 것일까? 지라르에 따르면 아니다. 

즉, 폭력을 가한 박해군중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것이 신화인 반면, 그 폭력의 부당함을 폭로하는 것은 성서다. 성서는 희생양을 옹호하고 그에게 폭력을 가하는 박해군중의 죄를 고발하고 있다. 이것이 신화와 성서의 결정적인 차이점이며, 바로 이 차이가 기독교가 참된 종교임을 말해 주는 핵심이라고 지라르는 역설한다. 성서 이전의 어떤 신화도 이 점을 주목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134)

  십자가는 이 희생양 메커니즘을 폭로한 것이었다. 지라르의 문화인류학적인 관점에서 살펴보는 성서는 참으로 독특하다. 기존 신학적 담론에서 볼 수 없는 점을 지라르 이론에서 살펴볼 수가 있다. 물론, 지라르 이론이 완전히 다 맞다는 것은 아니다. 신학을 전공한 나에겐 조금 어색한 지점이 있다. 너무 지라르의 이론으로 성경을 보는 느낌이 들어서다. 그러니깐 지라르의 욕망이론과 희생양 메커니즘에 맞춰서 성경을 짜맞춘다는 느낌이랄까? 그럴 수밖에 없겠지만 그래도 약간 어색한 점이긴 하다. 그럼에도 그의 이론은 새로운 통찰들을 준다. 큰 틀이 이렇게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건 대단하다. 식상할 따름이지만 지라르를 알게 된지 몇 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나에겐 매력적이다. 일반 대중들에게도 설득력 있게 다가 올 수도 있겠다 싶다. 

 

 

아쉬운 점

 3부는 쓰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 같다. 지라르 이론으로 교회를 보는 것도 아니고 걍 없는 편이 책의 퀼리티가 더 높았을 것 같다. 딱히 왜 3부가 있는지 모르겠다. 
 굳이 하용조와 김규항을 연결 시킬 필요가 있을까. 어쩜 3부가 나이브하달까 순진하달까 그런 생각이든 이유는 내 생각의 변한거에 있는 걸까. 진보교회, 보수교회. 솔직히 그 분류가 되게 지겹다. 또 늘 하는 말이듯 보수교회는 사회에 관심을, 진보교회는 내면에 관심을 정도를 이야기해서 그런가. 
요즘 것보단 성경-예배에 집중해서 그런진 모르겠다. 별로 관심이 없어져서 그런거 같다. 여튼, 몇 년 전에  읽었더라면 좋아했을듯.

 

 물론, 동성애에 대해 도덕적 논증을 했는데 평소 생각했던 질문이었고 거기에 대한 내 답변이 넘 허술했는데 저자는 잘 다듬은 대답을 해주었다. 나도 동성애=수간=아동취향을 같은 선상들이라고 생각해 봤지만 거기에 대한 반론들이 도덕에 근거한 것인지를 미처 생각지 못했다. 저자의 잘 다듬은 대답을 수용하게 되었다. 지라르를 보다 더 실용성있게 배운 부분이다. 

 

나가면서

 글을 참 잘 썼다. 설교자는 이런 글을 써야지 싶다. 흐름이 매끄러웠다. 3부가 전체적인 그림에서 어색했지 글을 읽다가 보면 그런 느낌이 들지는 않는다. 기본적으로 목회자는 이런 글쓰기를 해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 

 

 이 책은 기독교 변증서다. 그러나 기존의 기독교 변증이라고 한다면 신앙심에 투철하여서 전투적인 모습을 보이는 책들이 있는데 이 책은 그렇지 않다. 저자가 공부를 제법 많이 했고 열린태도를 보이고 있다. 이정도 기독교 변증서라면 비종교인들에게도 괜찮게 소개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정말 재미있게 잘 읽은 책이다!

 


메모

<2014년 문창극 논란,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에 대하여> 챕터 끝 p. 75

- 음... 이 논지는 너무 뭉텅거려 논증하려는...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에게는 상반되는 두 사유를 함께 고찰하는 태도, 가라타니 고진이 말하는 '시차적 관점'이 필요하다. 기독교 복음과 예수의 가르침을 중심으로 하면서 니체와 그 후계자들의 현대철학적 담론을 방기하지 않는 것. 이 둘을 함께 고려하면서 성서와 현대사회를 읽어 내는 것. 그렇게 함으로써 현대사회의 복잡성을 꿰뚫어 보고 성경적으로 바른 관점을 굳건히 세워 가는 것은 그동안 지성의 중요성을 간과하던 기독교에 꼭 필요한 일이다. (204)

- 책을 읽으며 뭔가 설교의 느낌이 물씬 난다.(나쁜 의미에서의 설교가 아니라)

 

 

 

그런데 윌리스가 제안한 것처럼 제4의 선택지가 존재한다면 어떨까? 정책적 이슈에서는 진보적이면서도 문화적 이슈에서는 보수적인 가치를 지향하는 선택지 말이다. 사실 이것이 진정한 복음주의가 지향할 선택지이다. (367-368)

- 왜 자유주의 진영은 있지만 그 정반대의 진영은 세력화되지 않는 걸까?(아마도 이 말은 자유주의도, 근본주의도 세력화되어 있지만 중간층은 세력화되지 않는걸까 하는 물음인듯하다.)

 

 

 

오히려 3.1운동 이후에도 미국 선교본부는 일본 당국의 감정을 거스르지 않으려 노력했고, 조선의 성도들에게도 복음이 요구하는 핵심가치로서의 하나님의 공의는 외면하고 개인 내면의 윤리에 복음의 능력을 제한하려 했던 것이다. (406-407)

- 인용이 없음. 신뢰할 만한 자료를 근거로 제시했으면 좋겠다. 

 

 

 

그러다가 1930년대 들어 신사참배 문제가 불거지자 더는 타협할 수 없다고 판단한 다수의 선교사가 일본에 항의를 표했다가 강제로 추방되기도 했지만, 미션스쿨과 교회의 존속을 위해 신사참배에 타협한 선교사도 많았다. (407-408)

- 아쉽게도 이 책 이후 나온 강성호의 <저항하는 그리스도인>을 봤더라면 그들이 왜 이런 결정을 해야 했는지 나온다. 그리 쉽게 생각할 문제가 아니다. 누군가의 생존과 인생이 달린 문제였다. 

 

 

 

3장 끝페이지(p. 421) 메모.

- 마지막 챕터는 순질하달까! 갈수록 그냥 그저 하는 말을 던진다. 뻔한 말이라도 그것에 퀼이 낮다. 본인이 목회자가 아니여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깊은 고민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이도영 목사님의 글보단(진보, 보수 분석에서) 나을 듯. 3부는 없었으면 더 좋았을 책.

 

 

 

가끔 접하던 신학자 정일권 박사님이 (424)

- 확실히 정일권에 글보단 훨씬 이해가 잘 되었다. 


책 맛보기

 

물론, 오랜 기간의 연구를 통해 학자로서 갖게 되는 형이상학적 신념같은 것이 있게 마련이다. 그리고 자신이 얻은 교훈과 깨달음을 종합적으로 풀어내고 싶은 욕망이 생기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 수 있다. 다만 이들의 문제는 자신들의 무신론이 논리적으로 도출된 결론이라고 판단하는 데 있다. 그 결론은 자신들의 직관이자 믿음일 뿐인데, 논리적 연구를 거듭하다 보니 자신의 인지체계에서 일종의 형이상학적 신념으로 작동하는 것조차 논리적인 결론으로 착각하는 것이다. 어쨌든 러셀 역시 그런 착각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28-29)


신화와 종교를 동일시하고, 찻주전자와 신을 동일시하며, 기독교인들의 신앙을 요정이나 산타클로스를 믿는 어린아이들의 순진한 환상과 같은 것으로 본다. (45)


하지만 함석헌은 뒤에서 이렇게 말했다. 
고난의 짐을 지는 것은 우리가 잘못해서냐? 하나님이 그렇게 만든 것이냐? 그렇게 묻는 이가 있을지 모른다. 나는 이때까지 혹은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고, 혹은 우리들의 잘못이라고 하였다. 모순이라면 모순이다. 그러나 나는 그 이상 말할 수 없다. 사실이 그런 것을 어떻게 하나? 하나님이 그렇게 예정했다고 하면 그것은 미신이다. 반대로, 그것은 다 우리 잘못이라고 하면 독단이다. 비과학적이다. 하나님도 없고 우리 죄라는 것도 없다고 하면 그것은 억지다. 사람이 아니다. 설명할 수 없다. 그것을 설명하자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우리가 말하는 것은 뜻이 있다는 말뿐이다. (72)


지라르는 '사탄'을 단순한 악령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사탄이란 결국 희생양 메커니즘을 통해 질서를 유지하는 공중의 권세 잡은 자이며, 군중의 인지불능을 획책하는 거짓의 아비다. 사탄은 모방욕망의 경쟁관계를 이용해 스캔들의 수렴현상을 만들어 내고 무고한 희생양을 죽이는 군중의 카타르시스를 통해 질서를 유지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권력인 셈이다. (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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