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은 크게 1-7절, 8-15절 두 단락으로 나눠집니다. 그 기준은 각 단락의 시작인 1절과 8절에서 예언자들이 선포할 때 명령이 있다는 점에서 기준을 삼습니다. 히브리어 원어로 보면 명령형이라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그 뒤로는 각각 마찬가지로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죄악에 대한 고발이 있고 심판을 선포하는 수순을 이어갑니다. 한 번 1절부터 본문을 살펴보겠습니다.
1절에 미스바와 다볼은 북왕국 전체를 가리킨다고 보면 됩니다. 또, 여기서 언급되는 장소들은 전쟁의 장소를 연상시키는 곳이기도 합니다. 앞서 처음 제가 호세아서의 배경이 말할 때 팽창하고 있는 앗수르와 전쟁을 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후에 8-15절에 내용이 그 배경에 대해서 자세히 말해 줍니다. 그런데 지금 1절을 보면 전쟁에서 패배한다는 뉘앙스가 읽힙니다. 그 원인이 왕족들과 제사장들이라고 1절은 언급을 합니다. 4장에서도 나타나듯이 당시는 왕족들과 제사장들이 결합을 하고 아주 부패하고 있는 실정이라고 말했습니다. 1절에서도 그 모습을 알 수 있는 절입니다. 그런데 왕족과 제사장들은 이스라엘 사회의 상류층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런 그들을 벌할 수 있는 사람이 있었을까여? 잘못을 조사하고 처벌해야 하는 사람이 잘못을 했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마치 우리나라로 치면 검찰이 잘못한 거는 어떻게 처벌해야 할까요? 검사가 잘못을 한 경우가 있는데 이를 경찰이 수사를 못합니다. 어디 감히 경찰이 검사를 수사하냐고 검찰은 말합니다. 그리고 기소를 해야 범죄를 처벌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기는데 이 기소를 검찰이 하지 않으면 어떤 죄를 저질러도 처벌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지금 검사가 잘못을 저지른 경우에 선택적 기소를 하고 있다는 비판을 많이 받습니다. N번방의 현실판인 김학의 별장사건이 대표적인 예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추악한 잘못을 보였는데도 아무런 제재를 할 수 없습니다.
지금 이스라엘의 상황이 딱 그런 실정입니다. 아니, 훨씬 더 심각한 상황입니다. 정부와 종교권력이 손을 잡았다는 것은 이 당시로는 훨씬 더 심각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가만히 계시지 않는다는 것이 바로 이 선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건데 그 누구도 이 심판을 피해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2절 다 같이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2절: 패역자가 살육죄에 깊이 빠졌으매 내가 그들을 다 벌하노라
3절에는 계속해서 음란한 마음이 등장합니다. 음란한 마음이란 우상숭배를 말합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은 부부인데 신부인 이스라엘이 다른 신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음란한 것이지요. 왜 음란한 마음이 있어서 하나님을 알지 못할까요. 다른 신을 사랑하고 있기에 하나님이 마음에서 멀어지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스라엘은 다른 사랑을 하고 있습니다. 다른 존재를 사랑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랑을 하고 있다는 것은 다른 존재를 더 알고 싶어 하는 겁니다.
6절을 보도록 합시다. 이들은 지금 양 떼와 소 떼를 끌고 하나님을 찾으러 가고 있습니다. 제물의 값이 상당히 나갑니다. 마치 이렇게 비싼 제물을 하나님께 드린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여삐 보실 것라는 행동입니다. 그래서 더 크고 더 웅장한 모습을 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거라고 착각을 합니다. 4장에서 제사와 의례가 넘쳐났듯이 이번에는 값비싼 제물을 통해 이들이 얼마나 종교적 열심히 강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모습에 하나님께서 5절에 교만하다고 했습니다. 5절입니다. 다같이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5절: 이스라엘의 교만이 그 얼굴에 드러났나니 그 죄악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과 에브라임이 넘어지고 유다도 그들과 함께 넘어지리라
지금 이스라엘은 부유한 상황입니다. 엄청난 부귀영화를 누리는 시점이기도 합니다. 이 부귀영화를 하나님 앞에서 뽐낸 것이었습니다. 자신들의 성취와 풍요로 인해 교만함이 얼굴에 다 드러났습니다. 이 값비싼 제물을 드렸던 것도 사실은 다 뽐냈던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바알 신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세상의 값진 것을 내놓는다고 해서 만날 수 있는 분이 아니십니다. 알 수도 없고요. 만약에 교회당 건물을 크게 짓는게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면 오늘 본문을 근거로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그 건물의 크기와 웅장함이 하나님께서는 교만하다고 보실 수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찾았다기 보다는 자신들의 번영과 풍요를 예배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변영과 풍요를 예배했던 그것이 이제 심판을 받을 것이라는 것이 7절에 내용입니다. 7절에 새 달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 새 달은 ‘월삭’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 이스라엘의 절기로 볼 수 있죠. 그렇게 열심히 지켰던 절기들이 결국은 그들과 그 기업을 삼킬 것이라는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이제 내용은 좀더 확장이 됩니다. 이제 남유다와 북이스라엘로 심판은 확장이 됩니다. 일단 배경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앗수르가 내부적으로 결속을 다진 이후에 이제 팔레스타인으로 넘어오게 됩니다. 이때 북이스라엘은 반 앗수르파가 베가가 왕이 됩니다. 그렇기에 오랫동안 앗수르랑 싸워온 아람 왕과 힘을 합칩니다. 그런데 남유다는 힘을 합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북이스라엘과 아람을 손을 잡고 유다와 전쟁을 벌입니다. 이 전쟁이 바로 수리아-에브라임 전쟁입니다.
이런 배경을 기억하신다면 8절에 뿔나팔을 불었다는 것에 대해서 전쟁이 곧 시작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뿔나팔은 전쟁시 위협과 기세를 알리는 신호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베냐민의 뒤를 따르겠다고 합니다. 나머지 북이스라엘의 지파들이 이 뒤를 따르며 전쟁을 하겠다는 의미입니다. 때마침 장소도 기브아입니다. 사사기에서 레위인의 첩을 너무나 잔인하게 죽였던 장소가 바로 기브아였습니다. 다시 참혹한 일이 시작된다는 말일까요?
10절과 11절은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의 실상을 알려줍니다. 남유다는 경계표를 옮기는 자 같다고 했습니다. 경계표는 어떤 의미일까요? 제가 성경에 나온 경계표의 의미를 한 번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신명기 19장 14절: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어 차지하게 하시는 땅 곧 네 소유가 된 기업의 땅에서 조상이 정한 네 이웃의 경계표를 옮기지 말지니라
신명기 27장 17절: 그의 이웃의 경계표를 옮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잠언 15장 25절: 여호와는 교만한 자의 집을 허시며 과부의 지계를 정하시느니라
잠언 22장 28절: 네 선조가 세운 옛 지계석을 옮기지 말지니라
잠언 23장 10절: 옛 지계석을 옮기지 말며 고아들의 밭을 침범하지 말지니라
잠언에 나오는 지계석이 바로 경계표인데 대표적으로 이렇게 5구절을 볼 수 있습니다. 바로 이 경계석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언약을 말합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약속을 한 내용이 바로 경계석이라는 것이지요. 자신들의 탐욕으로 하나님이 정한 이 땅의 경계를 흐리지 말라는 내용입니다. 하지만 남유다는 지금 이것을 어겼습니다. 왜냐하면 북왕국을 침범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남유다도 땅을 넓히려는 탐욕과 욕망에 사로잡힌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지 않고 어긴 것이지요.
11절은 조금 번역하기 어려운 구절입니다. 특히나 ‘명령’이라는 단어가 그렇습니다. 이 명령이라는 단어보다는 ‘헛됨’으로 번역하는 것이 맥락을 더 잘 살리는 번역이기도 합니다. 곧 북이스라엘은 사람의 헛된 것을 뒤따른다고 볼 수 있습니다. 확실히 호세아 1장에서 5장까지 북이스라엘은 사람의 헛된 것을 계속해서 따르고 있다는 걸 보았습니다. 물론, 어떤 것으로 번역을 해도 북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따르고 있다고 말합니다. 헛된 것을 따르니 이들에겐 올바른 재판같은 것은 뒷전입니다. 이런 건 하나님이 소중하게 여기시는 것이지 헛된 것들은 불필요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니 북이스라엘는 불의한 재판으로 학대를 받고 압제를 받고 있는 현실을 꼬집고 있습니다.
12절은 그들이 이렇게 소중히 여기는 것이 결국은 썩는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소중히 여겼고 아끼고 보관까지 했지만 한순간의 쓰레기가 됩니다. 그들이 소중히 여기는 것으로는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이 구원받지 못합니다.
그런데 13절을 보면 이들은 자신들이 병들고 상처 입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이들이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어쩌면 계속된 전쟁 속에서 자신들이 상처입고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꼈을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병들고 상처입었다는 것을 알지만 이들이 자신을 구해줄 대상이 누구인지는 모릅니다. 에브라임은 앗수르가 자신을 구해줄 것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로 돌아가자는 것이 아니라 앗수르로 가서 앗수르를 의지합니다. 앗수르 왕은 그들의 상처를 싸매어 주실 수도 없고 그들의 병을 낫게 해줄 수도 없습니다. 오히려 악화를 주면 더 주는 존재입니다.
14절 하나님은 사자가 되십니다. 그리고 사자가 데려 간다고 했는데 사자는 동물을 찢은 다음에 데려 갑니다. 곧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찢으실 것입니다.
15절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처소로 가십니다. 에브라임이 앗수르로 가니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처소로 가십니다. 과연, 이후에는 호세아 예언자는 어떤 말을 전할까요. 이후의 이야기가 기다려집니다.
그럼에도 15절에는 언제든 돌아와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면 하나님께서 돌아오실 거라는 힌트를 남깁니다. 신명기 4장 29-31절 말씀을 제가 읽고 오늘 말씀을 마무리 하도록 하겠습니다.
신명기 4장 29-31절
그러나 네가 거기서 네 하나님 여호와를 찾게 되리니 만일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그를 찾으면 만나리라. 이 모든 일이 네게 임하여 환난을 당하다가 끝 날에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와서 그의 말씀을 청종하리니, 네 하나님 여호와는 자비하신 하나님이시라. 그가 너를 버리지 아니하시며 너를 멸하지 아니하시며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잊지 아니하시리라.
호세아서는 계속해서 너의 마음이 어디에 있느냐를 묻습니다. 오늘 같이 우상이 범람하는 시대에 내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 묻기를 원합니다.
김근주의 <소예언서 어떻게 읽을 것인가 1>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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