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낀 점
1. 저자는 십자가를 말할 때 성경의 저자들은 은유를 사용한다고 강조한다. 은유에는 “공유 지식, 즉 공통된 문화적 이야기가 있는 문화 내에서만 효과가 있다. 문화가 바뀌면 은유도 새롭게 변해여 하고 개념화와 소통의 방식도 달라져야 한다”(42)
저자는 은유에 대한 자세한 정의나 설명을 하지 않지만 성경에서 은유가 사용된 방식은 설명한다.(베드로전서 2:21 ‘발자취를 따른다’는 이미지)
2. 저자가 이 책에서 가장 강조하는 점은 한 가지 은유만을 사용하지 말라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형벌대속론’을 두고 말한다. 안셀무스의 보상설이 당시 봉건주의 사회의 바탕에서 설명되었듯이
안셀무스의 속죄론이 당대에 어떤 의미가 있었기 때문에 우리 시대에도 의미가 있을 것처럼 그의 속죄론을 차용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 그는 예수의 죽음을 오늘의 서구인들이 공감하지 못하는 문화적 이야기속에서 이해했다. 당대는 봉건 제도 사회였다. 지주와 농노는 서로 책임과 의무를 다함으로써 평화롭게 지낼 수 있었다. 지주는 농노에게 토지를 주고 농노를 보호했고 농노는 지주에게 명예와 충성 지대를 바쳤다. 봉건 제도는 농노의 충성을 담보로 유지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안셀무스는 주님을 지주에, 인류를 농노에 빗대어 속죄를 이해한 것이다 서구의 대다수가 이해할 수 있는 문화적 이야기는 사뭇 다르다. 우리의 형사 사법 제도에서 '보상'은 죄인을 체포해서 처벌하는 것이지만 안셀무스와 당대 살마들은 충성과 명예에 관련된 의무를 이행하는 것을 보상이라고 생각했다. (43)
형벌 보상론의 바탕에는 서구의 개인주의와 기계주의가 있다고 저자는 보았다.
원인과 결과가 무엇이든 형벌 보상론이 유행하는 까닭은 해석과 역사 신학보다는 개인주의와 기계주의를 강조하는 서구의 문화적 이야기와 관련이 깊다.
우리가 말하는 '개인주의'란 찰스 테일러가 서구 현대인의 정체성을 심도 깊게 분석하면서 제시한 개념이다. 테일러는 <자아의 근원>에서 개인의 정체성이란 것이 사람은 자율적이고 자유롭고 자족하고 주도적이라는 확신에서 나왔다는 것을 보여 준다. ... 문화적 개인주의라는 토양에서는 사람의 상태를 어떻게 이해할까? 구원을 어떻게 이해할까? 몇 가지 필연적인 결론만 보기로 하자. 첫째, 제도적인 악은 거의 인정하지 않고 죄를 자연스럽게 개인의 일로 돌린다. 둘째, 사회적인 정의를 인정하기보다는 개인적인 정의에 초점을 맞춘다. 셋째, 사람은 자유의자가 있을 뿐 아니라 자율적이다. ... 결과는 내 결정에서 나온 것이다. 상이든 벌이든 내가 받아 마땅한 것에 지나지 안는다. 그런 세계에서는 형사 사법 제도만이 타당하다. 우리가 예수의 죽음을 형벌의 범위에서, 구원은 하나님 앞에서 개인의 신분을 따지는 법률 용어로 이해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다.
우리가 말하는 '기계주의'란 대학자 르네 데카르트가 물려 준 유산이다. ... 의학 역사학자 스탠리 핑거가 주장했듯이 "물질세계의 놀라운 기계적 얼개를 목격한 사람이라면 당연히 사람의 몸도 시계같이 정확한 기계 작용으로 움직일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
요컨대, 현대의 문화적 영향력은 최소한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을 기계주의와 개인주의로 축속시키고 있으며, 형벌 보상론이라는 속죄론 모델이 그러한 현대의 문화적 영향력을 충분히 비판하고 있는지는 불분명하다. (45-47)
3. 그럼에도 성경의 저자들이 당시 로마 문화권의 이미지를 차용했듯이 오늘날 역시도 지금의 이미지를 잘 차용해야 한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그 일례를 7장에서 잘 소개하는데 일본 문화에서 십자가를 적실하게 소개했다. 나 역시도 같은 수치문화권 안에 살기에 잘 와닿았다.
4. 그렇다면 형벌대속론은 잘못되고 버려야 하는 것인가? 아니다. 저자는 모든 대속론의 이론은 완벽할 수 없고 다만 한가지 이론만이 완전하다는 주의에 경계하라고 한다. 형벌대속론 역시도 케빈 벤휴저의 모델을 저자는 강추하는데 그것은 서구의 재판장의 바탕이 아니라(하지, 맥아더, 슈라이너를 비판) 벤후저가 잘 나타냈듯이 구약에서 오는 성경의 큰 이야기 속에 두어야 한다고 말한다.
어느 그림이 저 설득력 있고 성경적인지는 서로의 주장을 잘 살펴보면 될 듯하다. 난 아직 하지-맥아더-슈라이너의 글을 읽어보지 않아서 유보.
5. 저자는 이 이미지를 선교적 차원까지 넓힌다. 물론 그것은 성경의 이미지와 결부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6. 재미있고 유익했다. 김기현 목사님이 알라딘에서 이 책이 이 가격에(지금도 그렇게 판매함) 판매된다고 놀라기에 나도 구입을 했는데 재미있고 유익하게 읽어서 뿌듯하다! 막 어렵지도 않고 하고자 하는 말이 분명해서 좋다~
7. 오늘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기억하는 날이기에 십자가에 대해서 몰랐던 부분들을 배워서 참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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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가.
성경학자답게 성경을 주해해서 각 가지 이미지들을 잘 설명해 준다. 따로 정리를 해놔서 공부해두면 좋을 듯하다. 이어서 교부들의 십자가에 대한 이론들을 이야기한다. 성경을 말하고(복음서, 바울, 베드로) 그 후대의 교부들을 이어서 말하니깐 흐름이 참 좋다.
메모
이레니우스와 이후의 그리스도인 몇 세대는 당대의 권력과 대립하는 상황에서 십자가를 고찰했다. 당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셨기 때문에 가이사를 주로 모시는 지배 사회의 압박을 받았다. 교회나 제국이나 절대적인 충성을 요구했다. 교회 역사의 첫 300년 동안 그리스도인들은 각지에서 박해를 당했다. 사람들은 당대의 우주론의 영향으로 지상의 대립이 천상의 대립의 연장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과 악한 세력의 우주적 대립 구도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죄와 마귀, 악한 권세를 이기셨다는 관점에서 십자가와 부활을 논의했다. 오늘날 신하자들은 흔히 구스타프 아울렌의 관점을 따른다. 그는 1930년 일련의 강연에서 이를 '승리자 그리스도' 속죄론이라고 소개했다. (179)
- 속죄 이론이 당시 상황과 맥락에서 발전한다는 좋은 예시(로마제국)
성경이 말하는 구원 개념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과 제자의 공동체에 소속되는 것을 더 강조한다. 안셀무스의 죄 개념이 어느 정도 관계적인 것은 사실이다. 법정 배경과 법률 위반에 초점을 두는 이후의 형벌 대속론과는 대조적으로, 안셀무스에게 있어서 중세의 죄는 영주와 봉신의 관계에 집중되었다. 그러나 안셀무스는 명예에 집중하면서 결국 성경에서 매우 중요하게 다루는 죄의 관계성을 간과한다. 영주의 실추된 명예 회복이 강조되면서 관계의 중요성은 사라지고, 하나님과 관계를 회복한 사람은 다른 사람과도 관계를 회복할 수 있다는 점은 부각되지 않는다. (195)
- 신약시대도 명예와 수치의 문화가 아닌가? 중세와는(중세도 명예와 수치를 말하지만) 다른 결이려나.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간단히 용서하실 수 없다는 안셀무스의 결론은 성경이 아니라 당대의 관습에서 나왔다. 예수는 인자가 죄를 용서할 권한이 있다는 것과, 보상이나 희생 없이도 그 권한을 쓸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예: 막 2:1-12). 성경이 아닌 사회 규범에 따르면, 봉신이 진 빚을 묵과하거나 용서하는 것은 봉건 영주에게 어울리지 않는 행동이었다. ... 안셀무스가 그 제도에서 차용한 개념 - 이를테면 잘못에 대한 정당한 지불과 공덕을 쌓을 수 있다는 가능성 - 에 너무 의존한 것이 바람직한 것인지 검토해야 한다. (197)
- 안셀무스는 시대적 한계를 벗어나지 못함을 논증.
하나님은 사람을 사귀며 천국에서 영원히 함께 살기를 바라셨지만 사람의 죄에 가로막히셨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기 때문에 죄인을 곁에 두실 수가 없다. 사람은 스스로 완전무결함에 이를 수 없으므로 공의로운 하나님은 죄를 지은 우리를 벌하실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해법을 찾으셨다. 성부 하나님은 성자 하나님을 지상에 보내 십자가에서 죽게 하심으로 우리가 받을 벌을 대신 받게 하신다. 예수가 우리가 받을 형벌을 대신 받으셨으므로 하나님은 우리를 의인으로 여기실 수 있다. 만일 우리가 마땅히 지옥에 갈 죄인이라는 것을 믿으면, 그리고 예수가 우리를 대신해 죽으셨다는 것을 믿으면,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천국으로 갈 수 있다. (210-211)
- 익숙한 논리
정작 안셀무스는 열차 비유도 프라이팬 비유도 인정하지 않을 텐데, 이 두 비유는 보상설의 기본 사상을 추려내 전혀 다른 시대의 사법 제도에 알맞게 고쳐 쓴 속죄 사상 속에서 자라고 있다. 봉건적 책무의 자리에 형법이 들어서자 그리스도가 마련하신 보상의 성격도 크게 변했다. (212)
- 우리 문화 상황에서선 형벌 대속론으로 대체 됨.
<속죄의 네 가지 관점>에서 형벌대속론을 설명했던 신약학자 토머스 슈라이너는 다음과 같이 썼다. (224)
- 오오. 이 책(<속죄의 본질 논쟁>, 새물결플러스)을 봐야지 싶었는데 <십자가와 구원의 문화적 이해> 다음에 나온 책이구나.
하지만 이것은 단순히 포스트모던 운동이 아니라 속죄 신학을 중세 사회나 서구의 법정이 아닌 이스라엘의 이야기에 뿌리 내리려는 시도다. 벤후저는 이스라엘의 이야기와 그 이야기 안에 있는 예수의 이야기에서 다양한 은유와 다층적인 의미를 발견했던 것이다. 형벌 대속론을 이런 맥럭에서 찾는 것은 기존의 이론에서 찾을 수 없는 복합적인 성격을 가지게 한다. 또 형벌 대속론을 과거와 현재, 미래를 아우르는 살아 있는 역사의 일부로 설명함으로써 실천의 요소들은 통합적으로 이론에 들어맞게 된다. (236)
- 라이트... 그는 진정...(벤후저의 책을 인용했지만, 이스라엘의 이야기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은 라이트 옹의 주된 주장. 239페이지에 "라이트(N. T. Wright)도 골격에 관해 비슷한 말을 한다. 그는 성경이 말하는 ... 올바로 이해하려면... 구약 성경의 세계, 이스라엘의 이야기를 이해의 근거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
북미인들은 미국에서 공부하던 한 일본 학생이 자기는 "용서한다"라는 말을 결코 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을 듣고 깜짝 놀란 일이 있었다. 그러나 크라우스는 그것이 일본의 정서라고 말한다. "용서가 문제가 되는 이유는 '용서한다'라는 말이 다른 사람의 허물을 인정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으며, 따라서 용서란 상대방의 수치를 재확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고백하고 용서하기보다는 묵인하거나 봐주거나 잊어버리는 편이 더 쉽다. 실제로 '용서'라고 번역되는 일본어 '유루수'는 봐주다, 제멋대로 하게 받아 주다, 허락하다라는 뜻이다" (250)
- 동양정서...?(일본만의 정서는 아니라 나에게도 대한민국 사람에게도 이러한 정서가 있다.)
우리는 한 가지 이론이나 은유가 '우리를 위한' 예수의 죽음이 갖는 의미의 전체성을 전달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았다. 우리는 일본인에게 자기도 모르는 뿌리 깊은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도록 요구하는 대신, 일본 문화에서 자명한 죄와 소외의 문제를 십자가의 메시지로 해결할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한다. 사실 문화 인류학과 사회 심리학의 성과를 성경에 적용한 최근 연구에 따르면 성경 메시지는 서구 사회보다 일본 문화에 더 어울린다. 한 가지 이유를 들자면 명예와 수치는 신구약 성경이 배경으로 삼는 문화의 핵심 가치이기 때문이다. 즉 일본 문화에 알맞는 복음을 연구하는 것은 전혀 '타협'이 아니며 오히려 일본인을 위한 십자가의 의의를 묻는 물음을 통해 신약 성경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다. (253)
- 한국 사회도?!
책 맛보기
안셀무스는 <인간이 되신 하나님>(한들출판사 펴냄)에서 명예를 회복하는 방법은 명예를 더럽힌 사람이 먼저 보상을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사람의 힘으로는 죄의 깊이와 너비를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사람이 보상을 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43)
그러나 차후에 논하겠지만 성경이나 기독교 전통에서 속죄를 '한 가지' 관점으로만 본다는 생각에는 근거가 없다. 신약 성경에서 예수의 죽음이 갖는 구원의 효력은 주로 고대 지중해의 생활 환경에서 빌려 온 다섯 가지 은유, 즉 법정(칭의의 예), 상업(변상의 예), 인간관계(화해의 예), 예배(제사의 예), 전쟁(악을 이긴 승리의 예)에 빗대어 나타난다. 이런 은유의 범주에 포함된 용어들을 보면 예수의 죽음의 의의는 한 가지 개념이나 이론으로 설명할 수 ㅇ벗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 (45)
우리는 다음 장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전하는 신약 성경의 증언의 일치와 차이를 여러 가지 점에서 더 깊이 살펴볼 것이다. 지금은 바울의 견해든 베드로의 견해든 어느 누구의 견해든 어떤 견해도 '유일하게 성경적인 견해'는 없다는 것만 알아 두자. 우리가 보았듯이 베드로가 예수의 죽음의 중요성을 부각시킨 방법은 한 가지 이상이었다. 그럼에도 그가 사용한 모든 십자가와 구원의 이미지와, 또 우리가 앞장과 이 장에서 조사한 모든 이미지는 예수의 죽음이 갖는 대속 의의에 대한 신약 성경의 더 큰 증언에 포함된다. 예수의 죽음은 깊이를 알 수 없는 역사적 사건이기에 그 의미를 한 가지 해석에 가두거나 한 가지 해석에만 권위를 둔다는 것은 도리어 그 의미를 해치는 것이다. (134-135)
속죄 신학에서 은유가 차지하는 중요성을 고려해 몇 가지 덧붙일 말이 있다. 에코가 강조한 문화적 공유 지식과 문맥은 매우 중요한데, 해석에 대한 관심사를 조금 더 확대한 필요가 있다. 모든 언어가 문화를 내재하고 있다는 점에서 말로써는 우리가 소통하고자 하는 것을 명쾌하게 전달할 수 없음이 분명하다. 언어를 이해하려면 사전적 언어 이상의 것, 즉 맥락, 문화 배경, 역사 등을 알아야 한다. 따라서 사람의 소통 능력은 말 이면의 것을 이해하는 능력에 달려 있다. 우리는 언어를 이해하는 능력뿐 아니라 맥락을 이해하는 능력도 필요하다. ...
... 우리의 말은 일상 행동에서 나오며 사고체계에 의존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매우 중요한 것인데, 우리가 이미 말했듯이 신약 성경에 기록된 속죄에 관한 은유는 사고 체계에 의존하고 일상 행동에서 나오는 함축적인 비유이기 때문이다. 해석의 중요한 열쇠는 사고 체계를 올바로 이해하는 것이다. (147-148)
우리가 성경에 충실하려면 오늘날 다양한 세계에 효과적이면서 구체적으로 소통할 수 있는 옛 은유와 새 은유를 끊임없이 찾아야 한다. 우리가 신약 성경 저자들의 길을 따르려면 친숙한 은유를 찾아서 쓰되 우리의 상황에 너무 익숙한 은유는 버려야 한다. 그들이 추구했고 우리가 추구하는 은유는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것뿐 아니라 우리 주위의 사람들과 사회 제도에 영향을 주는 것이어야 한다. 더욱이 우리는 옛 이론이나 그 이론에 담긴 진실을 버리지 않고 예언자와 사도들뿐 아니라 모든 시대의 교회의 안내와 대화를 통해 건설적인 연구로 이어갈 것이다. (173)
2세기에서 4세기까지 대립과 승리라는 모티프는 속죄 문헌의 공통주제였다. 그러나 여러 저자는 다양한 이미지와 은유로 속죄를 설명했으므로 그들이 한 가지 이론으로 속죄를 설명했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이다. 게다가 대립과 승리라는 공통된 틀 안에서 속죄를 해석하더라도 방식은 각자 달랐다. (179)
가까운 사이에서는 동료의 심각한 잘못을 묵인하고 심지어 변명까지 해 줌으로써 무분별한 행동을 받아 주어 내부 집단의 결속을 다지는 일이 흔하다. (250-251)
예수가 십자가에서만 특별히 수치와 배척을 당하신 것은 아니다. 십자가는 예수가 수치에 빠진 우리와 자신을 동일시하신 것의 전형이다. 그러나 이런 동일시는 예수의 생애 전반에서 나타난다.
예수는 '가난한 자'들과 자기를 동일시하셨다. ... 그분은 사회가 배척하고 멸시하는 자들과 자기를 동일시하시고 열등감의 수치를 함께 나누어 지셨다.
이런 동일시 때문에 크라우스는 일본인, 그리고 수치심 때문에 무력해진 여러 사람에게 예수는 그들이 두려워하는 수치스런 배척을 다 아신다고 말할 수 있었다. 그러나 크라스우는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그는 예수가 우리를 자기와 동일시하셨기 때문에 우리도 그분과 우리를 동일시할 수 있고 수치를 이길 수 있다고 선언한다. (255)
우스나우의 관점을 배운 사람이라면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점에서 문화를 비평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알 것이다. 첫째, 현재 하나님 나라가 도전하고 심판하는 부분이 무엇인지 알 수 없게 만드는 현실 앞에서 '새 하늘과 새 땅'이라는 하나님의 목적을 지킨다. 둘째, 하나님의 목적을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말로 전하려고 노력한다. (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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