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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리뷰/성경신학

[책리뷰] 존 H. 월튼 - 창세기 1장과 고대 근동 우주론

by 카리안zz 2020. 4.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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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낀 점

1. 창세기 1장을 이야기할 때 꼭 과학을 이야기해야 할까? 물론 나는 단칼에 그 가능성을 짤라낸다.
일단 내가 과학을 몰라서이기도 하고 본문에는 진화론이니 빅뱅이니 오래되거나 젊은 지구같은 이론들을 본문의 저자들과 당시의 사람들은 모르기 때문이다.
물론, 신학에서 특히 해석학을 조금이라도 배운다면 이런 초보적인 실수는 하지 않을 것이다. 

1-1. 일례로 유치부 사역할 때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약속한 땅으로 가는데 엄청 오래 걸렸다는 이야기를 하니깐 아이들 중에 한 명이 왜 차타고 안 갔냐고 물었다. 당근 그때 차가 없어서 못 타고 갔다고 했다. 이렇게 쉽게 티가 나는 것은 없다는 단언할 수 있다. 하지만 개념은? 현대인들에게 생긴 개념을 가지고 본문에 투영하는 실수라면? 그게 진화론이든 젊은 지구론이는 빅뱅이론이든 양자역학이든 창세기에는 그런 얘기는 없다. 그렇다면 본문이 무엇을 가르키는지에 해석자는 집중해야 하고 읽어내야 한다.(물론 후대의 개념으로 본문을 해석하는 것 자체가 무조건 다 틀린 것은 아니다. 가령 삼위일체라든가)

다양한 이념을 일정한 맥락 속에 두려는 다른 모든 시도와 마찬가지로, 인지 환경을 비교 및 대조하는 작업은 똑같이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런 과정에서 생겨나는 가장 분명한 위험성 중 하나는 우리가 현대의 인지 환경을 고대에 부과하는 것이다. 이는 우리 자신의 범주가 고대인들의 사고방식과 무관하다는 점을 깨닫는 데 실패하기 때문에 일어난다. ... 따라서 우리가 염두에 두어야 할 첫 번째 중요한 지침은 그들의 세계를 우리의 용어로 이해라려 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30)

 

2. 그렇다고 과학의 시대에 손놓고 있어야 하나? 나는 존 폴킹혼과 같은 접근이 맞다고 생각한다. 굳이 창세기 본문으로 과학 얘기 안 해도 된다고 본다. 어차피 신의 존재유무는 과학의 영역이 아니다. 형이상학이지. 대체로 과학자들은 우주가 미세 조정(본문에는 미세 조율)되었다고 동의하지만 여기에서 “그 사실을 어떻게 이해하는지”에 대해서 답이 갈릴 뿐이란다.(난 사실 미세조정 vs 다중지구론의 구도로 봤는데 아닌듯)그래서 존 폴킹혼 같은 경우(또는 여러 변증가들이 흔히 하듯이) 기독교 유신론이 더 설득력 있다고 논증한다. 요즘 나야 이런 변증의 영역이 쓸데가 없는건 아니지만 믿음은 선언에서 나와야하는 믿는 자들의 영역(?)이랄까로 생각하고 있기에 땡기지는 않는다. 

3. 여튼 그래도 학생들 시험기간에 자기 배운거에서 시험에 나올거 발표했는데 고1때 통합과학인가 거기에서 내가 많이 배웠다. 빅뱅에서 3분 동안에 시간에서 양성자니 원자니 전자니 핵융합이니 수소니 탄소니 뭐시기까지 난 분명 15년 전 고1때 배웠나 싶었을 내용이지만 첨듣는 내용이었...ㅜ 근데 그 내용이 폴킹혼 챕터에 그대로 나온다. 여튼, 폴킹혼 정도만 되어도 과학과 신앙의 설명이 어느 정도 되진 않을까 싶다. 

4. <창세기 1장과 고대 근동 우주론> 여기에는 과학이 읍다. 그래서 고1 통합과학보다 훨씬 쉽다ㅋㅋㅋ 여튼 여러 사람들이 아쉬워하는 것처럼 성경에 지구연대를 추정 못해서 아쉽고 양자역학이 없어서(하다못해 고전역학도 없네ㅜ) 아쉽고 암흑물질에 대한 설명이 없어서 아쉽고 나중에 더욱더 먼 미래에 밝혀질 과학적 지식이 없어서 참 아아아쉬웁다잉. 성경책이 과학책이 아니여서 아쉬운 분들이 참으로 많겠다아. 난 과학에 약해서 넘나 좋다!ㅋㅋ

5. 아참 2학년 설교 실습시간에 창세기 1장부터 순서대로 설교실습을 해야 됐는데 내 본문은 아담과 하와과 선악과를 먹고 눈이 밝아진 장면이었다. 난 아담의 선악과 먹는 장면을 그리스도론 중심적으로 충실하게(?) 톰 라이트라는 아주 보수적인 학자의 도움을 받아 누가복음에서 그 장면을 에코삼은 (70인경을 보면 눈이 밝아졌다는 단어배열이 같다) 본문으로 연결했는데 교수님께서는 본문중심적으로 하지 않았다고였던가 성경신학적이지 않다였던가. 여튼, 난 그래도 그럴 수 있다고 봤지만 창세기 1장에 창조를 성경신학적으로 잘 말했던 같은 반 동생 설교에(설교를 참 잘했다!) 본문중심적으로 창조론을 말하면서 진화론을 배격하는 설교를 했어야 하는 안타까움을 보이시던.....ㅜㅜ 
이 기록은 순전히 나의 뒷끝작렬이다ㅋㅋㅋ

 

고대 근동

 창세기처럼 고대의 기록을 알려면 당시의 문헌들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이 책에서도 그러한 작업을 한다. 물론 저자가 지적했듯이 많은 사람들은 창세기 1장을 "고대 세계로부터 생겨난 문헌들의 맥락 속"에서 이해하며 "창세기 1장을 고대 전승의 공통 줄기로부터 빌려온 또 하나의 신화적 우주론으로 여긴다."(24) 그러니깐 내가 봤을 땐 당시 고대 문헌들의 맥락 속에서 읽으려는 것은 맞지만 단순히 창세기 1장이 그저 비슷한 고대 근동의 문헌이라는 견해는 반대하는 듯하다. 그러니 고대의 맥락 속에서 창세기 1장이 가지는 차이점을 살펴 보는 듯하다. 앞서 고대 근동의 맥락 속에서 읽는 것은 유사점이고 반대하는 것은 차이점을 살펴 보는 것이다. 아마도 종교학자들은 유사점을 탐구하는 것이고 차이점을 탐구하고 싶은 분들은 복음주의 신학자들일 것이다. 월튼도 역시 복음주의권 학자이기에 차이점에 중점을 둔다. 물론, 근본주의자들은 유사점도 거부를 하기에 이야기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여튼, 월튼처럼 고대 근동의 유사점과 차이점을 살펴보려면 일단은 "고대인의 인지 환경"(24)을 살펴봐야 한다. 이 책은 그 작업을 하는 책이다.

 월튼은 일단 유사점과 차이점에 도움이 되는 범주들을 만들어 낸다. 

이제는 다양한 문헌 곧 성서 안에 있는 문헌과 고대 근동 문헌의 다양한 차이점과 유사점을 규정하는 데 도움을 주는 범주들을 광범위하게 만들어낼 수 있다. 나는 부정적인 측면, 곧 히브리어 성서가 고대 근동 문헌에서 발견되는 이데올로기를 완전히 무시하면서 매우 다른 견해를 제시하는 측면에서 시작하고자 한다(예컨대 신들의 출생에 관한 일부 개념을 배척하는 경우 말이다). 반대쪽 범주를 향해 조금 시선을 옮겨보면, 히브리어 성서가 적어도 흐릿하게나마 고대 근동의 이념을 잘 알고 있음을 입증해주는 주제들이 발견된다. 예를 들어 다른 나라의 신들을 풍자하거나 조롱하는 경우가 그렇다(이를테면 신들이 낮잠을 잘 수도 있다는 고대 근동의 개념과 접촉이 있었음을 바녕ㅇ하는 언어 같은 것 말이다.) 세 번째 범주의 경우, 히브리어 성서는 고대 세계에 널리 퍼져 있던 관점들을 상세하게 알고 있음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면서도, 주의 깊게 잘 형성된 대안을 선호하기에 이를 거부하고 있다(예컨대 히브리어 성서는 다신교를 잘 알고 있지만 이를 분명하게 거부한다.) 이외에 더 추가할 수 있는 또 다른 범주로는, 고대 근동에 널리 퍼져 있는 견해 중 히브리어 성서가 대놓고 거부하지는 않지만 논쟁적인 진술을 통해, 또는 대안이 되는 관점을 제시함으로써 이견을 표현하는 쟁점이 있다(예컨대 창조된 인간의 역할). 다섯 번째 범주는 이스라엘 저자들이 자기에게 맞도록 변형시킨 어떤 개념을 분명하게 알고 있었음을 보여준다(예컨대 인간이 땅의 티끌로부터 만들어졌다는 개념). 여섯 번째 유형은 히브리어 성서가 고대 세계에 널리 퍼져 있던 개념들을 의식적으로 모방했던 영역에서 발견된다(예컨대 신전의 구조와 이데올로기에 관한 묘사). 마지막으로 많은 쟁점 중에서 히브리어 성서가 고대 근동의 인지 환경에서 비롯된 공통의 유산을 무의식중에 반영한다는 생각을 뒷받침하는 증거가 있다(예컨대 신이 신전에 머문다는 개념). (28)

나가면서

 이 책의 유익한 점은 창세기 1장과 고대근동에서 유사점과 차이점을 살펴보는 것과 당시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세상을 어떻게 생각하고 보고 느끼고 사고했는지(고대 우주론적 인지 환경)를 살펴 본 것이 참으로 유익했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성경이다. 이 성경을 이해하려면 당시의 사고 방식을 이해해야하는 것이 성경을 읽는 사람들이 가장 유의해야 할 점이다. 그래서 내가 쓴 성경에 관한 리뷰에는 그러한 이야기가 꼭 들어가 있다. 이것이 우리가 주화입마에 빠지지 않는 것이며 신천지같은 엉뚱한 성경해석에 빠지지 않는 방법이기도 하다. 물론 그것이 다는 아니지만. 

 

 


메모

과연 우주 전체가 신전으로 묘사된 적이 있을까? 레벤슨은 창세기 1장에 반영되어 있는 제사장 계열 신학, 즉 성전을 세계로 보는 신학과 제3이사야서의 시각, 즉 세계를 성소로 보는 시작 사이의 차이에 주목했다. 창조된 세계를 성소로 보는 후자의 개념은 고대 세계에서 보편적으로 발견되는 것일까? 레벤슨은 우주와 신전이 고대 세계에서 동종이자 상동이라고 주장했다. 그의 결론은 앞선 논의에서 살핀 대로 고대 근동 지역에서 참임이 드러났다. 우주와 신전은 서로의 기원이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동종에 속한다(예컨대 마르두크는 세계를 창조한 후에 자신의 신전을 건축한다). (200)

- 성전과 성소?!

 

 

 

마찬가지로 우주 발생 이전의 환경은 고대 세계 전반에 걸쳐 태고의 물들과 어둠을 포함한다고 묘사된다. 이는 물질이 없는 세계가 아니라 기능이 없는 세계다. 창조에 관한 고대 근동의 이야기들은 목적론적이다. 최종 목표가 명료하게 확인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그 이야기들의 특징은 신적인 원인과 목적이다. (340)

- 아무런 기능을 하지 않는.


책 맛보기

 

이 단원에서 나는 고대인이 우주를 구성하는 요소에 관해 생각할 때 ... 물질보다는 기능에 초점을 맞췄음을 구체적으로 보여주고자 한다. 고대인들이 인과관계를 숙고할 때, 그들의 사고는 물체가 자연법칙에 따라 움직이는 세계를 반영한 것이 아니라 신들의 활동이 대상을 움직이는 세계를 반영했다. (83)


온 세계가 신들의 활동에 의해 다스림을 받는다는 사실은 고대 세계의 인지 환경을 구성하는 필수 요소지만, 철저하게 무목적론적 경향을 보이는 현대의 지배적인 범주와는 반대되는 것이기도 한다. (84)


인간의 역할은 독립적인 주제가 아니다. 고대 근동의 인지 환경에서는 신의 역할과 관련해서만 이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인간이 창조된 환경, 만들어진 재료(예컨대 몸의 성분), 기능 및 인간의 전파 과정 같은 것이든 무엇이든 간에 우주 안에서 이간의 역할에 관해 언급된 모든 이데올로기는 신과 관련된다. (158)


우주의 핵심 기능들이 우주의 질서를 유지하는 우주의 조종실이라 할 신전에서 실행에 옮겨진다는 점을 전달한다. 이를테면 비옥함이 이런 우주적인 중심부에서 흘러나와 주변 지역으로 흘러들어간다. 이런 개념은 물이 흘러나오는 항아리를 들고 있는 신에 대한 묘사가 담긴 그림으로 자주 표현된다. (193)


... 우리는 창세기 1장이 어떤 기능 지향성을 보인다는 증거를 발견했다. 기능 지향성이란 "무언가를 창조하기 위해" 거기에 어떤 기능을 부여한다는 뜻이다. (249)


이런 견해는 이 책 123-6쪽에서 제시했던 관찰, 즉 고대 근동에서는 신들이 우주의 체계 안에 있다고 여기지만, 창세기에는 야웨가 우주의 체계 바깥에 계신다고 묘사했다는 관찰과 일치한다. 따라서 메소포타미아의 신들이 "메"에 예속된 반면에, 야웨는 이를 통제하신다. 이는 이스라엘에서는 야웨가 율법의 근원이지만,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샤마쉬가 율법의 수호자라는 개념과 비슷하다. (295-296)


창조 이야기의 핵심에는 우주의 구성 요소들이 제자리에 놓인 주요 목적을 자세히 이야기할 뿐 아니라 제자리에 맞는 적절한 기능 주체들을 공식적으로 임명함으로써 우주가 제 기능을 수행하기 시작했음을 밝히는 내러티브가 있다 이 내러티브에서 우주 전체는 인간을 위해 기능하도록 고안된 성전으로 간주된다. 그리고 하나님이 이 우주적 성전 안에서 안식을 취하실 때, 이는 그분의 임재에 힘입어 "(기능적) 현존으로 여겨지게 된다"(이는 고대인들의 사유에서 말하는 진정한 현존을 가리킨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성취하고 즐기시는 안식은 그가 질서를 세우신(현대적 용어로 표현하자면, "그가 창조하신"이라는 뜻이 되겠다) 우주를 통치하기 위해 개입할 수단을 제공함으로써 그의 우주 통치를 용이하게 해준다. (332)


사실상 우리는 창세기 1장을 고대 근동의 신전 건축이라는 맥락에서 읽음으로써, 히브리어 성서나 기독교 성서 전체의 정경적인 흐름이 한층 분명하게 보인다고 주장할 수 있다. (334)


우주 발생 이전의 상태에 관한 창세기의 묘사가 그런 상태에 관한 이집트 문헌의 묘사와 더 비슷한 반면에, 7일 간의 질서 확립은 메소포타미아의 개념에 더 가깝다는 데 주목하는 것은 매우 흥미롭다. 창세기 1장이 보여주는 인간의 역할은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모두와 몇 가지 접촉점을 보여주지만, 이스라엘 신학이 가장 뚜렷하게 차이는 보이는 주제이기도 하다. 만약 오래된 은유를 빌려온다면, 창세기에서는 자동차의 바퀴가 다시 만들어진 것이아니라 다른 차축(신전 봉헌식?)이나 다른 자동차(유일신 신앙)에 부착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하는 과정에서 몇 개의 바퀴살이 교체되었다.
창세기의 해석을 위한 이 연구의 가장 중요한 결과는, 창세기 이야기가 물질 기원보다는 기능 기원에 속하며, 신전 이데올로기가 창세기 우주론의 기초를 형성한다는 점을 인식하는 데있다. (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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