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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리뷰/성경신학

[책리뷰] N. T. 라이트 - 예수와 하나님의 승리

by 카리안zz 2020. 4.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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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낀 점

 라이트의 주저 5부작 중 2부작 <예수와 하나님의 승리>다. 지금까지 4부작이 나왔고 번역도 다 되어 있다. 역사적 예수의 제3탐구라는 용어를 붙인 라이트는 과연 예수를 어떻게 그려낼까? 사실 이 책을 다 읽긴 했다. 무려 일 년도 더 전에. 그때 읽으면서 따로 정리라도 해야 됐는데 그걸 못해서 다른 방법을 가지고 왔다. 마크 앨런 파월이 쓴 <예수에 대한 다양한 이해>를 한 번 읽었다. 읽어보니깐 정리가 잘 되었다! 아마 파월의 정리 중심으로 나도 여기에 쓸 것이다. 

 

비판적 실재론

 주저 1권에사도 비판적 실재론에 대해서 어느 정도 설명을 했다. 그렇다면 하나의 틀이라는 가설이 세워질 것인데 이를 검증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에 다우닝, 크로산, 맥은 예수를 견유학파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그 가설을 1세기 당시로 한 번 대입해보자. 어떻게 설명이 가능할 것이가? 라이트는 이를 이렇게 비판한다. 

 

다우닝이 그려낸 예수의 사역 속에서 크로산이 그토록 강조했던 통상적인 주제 활동으로서의 치유, 또는 열린 공생관계 및 그 의미가 진정으로 들어설 여지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것들은 훨씬 더 유대적인 하나님 나라 선포와 잘 부합한다. (132)


그가 전적으로 설명하는 데에 실패하고 있는 것은 견유학파에 속한 이 선생이 견유학파에 속한 사람들 전체 또는 어느 특정한 선생과는 판이하게 다르게 아주 급속하게 전 세계로 퍼져 나간 운동을 왜 시작했는가 하는 것이다. 예수가 왜 처형 당해야 했는지에 대한 설명도 없다; 예수의 첫 제자들이 왜 예수께서 죽은 자로부터 부활하였다고 말하였는지에 대한 설명도 없다. (133)

 

 예수가 견유학파라면 위에서 보는 것처럼 보이는 설명이 깔끔하지가 않다. 예수의 행동과 말들, 더구나 죽음으로까지 가게 된 개연성이 약해진다. 그렇기에 라이트는 더욱 설명가능한 것으로 그 틀에 접근하려고 하는 것이다.

 라이트가 실체에 다가가기 위해 묻는 질문은 여섯 가지이다.

(1) 예수는 어떻게 당시의 유대교와 부합하는가?
(2) 그의 목표들은 무엇이었는가?
(3) 그는 왜 죽었는가?
(4) 초대 교회는 어떻게 탄생되었고, 초대 교회는 왜 그러한 모습을 띠게 되었는가?
(5) 복음서들은 왜 현재와 같은 모습을 띠고 있는 것인가?
(6) 그래서 어떻다는 것인가? (158)

 여기에서 크로산의 주장이 예수는 견유학파라면 위의 질문을 대입했을 때 과연 선명하게 그림이 그려지느냐를 라이트는 묻고 있는 것이고 위의 글이 바로 라이트의 그 대답이다. 

 

번외- 라이트의 크로산 평가

 잠깐 번외로 라이트가 크로산을 어떻게 평가하는지 한 번 보자. 그에 대한 평가를 하는 걸 옮겨 보겠다. 

 

...크로산은 "새탐구"의 새로운 물결 속에서 이루어낸 업적의 절정을 버튼 맥보다 훨씬 더 많이 대변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 책이 거의 전적으로 잘못되었다고 결론을 내릴 수 밖에 없다는 것은 더욱 더 참담하다. (89-90)


사실 크로산의 연대기적 층위들은 어디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것이 아니라 본래 그런 식으로 결론이 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크로산은 이 층위들을 출발점들로 제시하고 있지만, 사실 그것들은 예수 및 초기 기독교에 관한 그의 기본적인 주장으로부터 도출된 결론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들은 더더욱 형편없는 것들이다. 그것들은 그자 제시하고 있는 전체적인 가설들의 일부이고, 앞에서 보았듯이, 그의 모든 가설들은 궁극적으로 순환적이다. (98)


나는 크로산의 저작에 대한 이러한 분석을 크로산은 오늘날 살아있는 신약학자들 중에서 가장 탁월한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으로써 시작하였다. 견해가 날카롭게 대립된다고 해서, 이러한 찬사가 약화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120)


크로산은 슈바이처와 불트만과 마찬가지로 전체적인 그림을 보고 자신의 가설을 끝까지 추적하며, 근본적으로 새로운 개념들을 만들어내고, 그것을 매우 매력적인 방식으로 풀어내고, 그것을 독설 없이 공적으로 토론할 수 있는 용기를 지녔다. (121)

 

 병주고, 약주고 식의 평가여서 참으로 재미있었다. 크로산은 가설에 맞게 자료를 배열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라이트가 받는 비판 중에는 자신의 가설을 위해서 공관복음서를 신뢰할 수 있는 자료로 보았다는 것에 든다. 라이트 자신도 가설에 자유롭지 않은 것 아닌가 하는 것이다. 후에 나오겠지만 라이트의 가설은 예수를 예언자로 보는 것이다. 그렇기에 공관복음서의 어록들은 라이트의 주장에 힘을 실을 수 있는 것들이고 그래서 라이트는 다수의 학자들이 아니라 소수의 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을 취한다고 파월은 말했다. (파월, <예수에 대한 다양한 이해>(대한기독서회), 339)

 그렇다면 라이트는 어떤 식으로 자료에 신빙성이 있다고 판단했을까?

 

이중의 유사성

"상이성의 기준"(카리안 의문 - 비유사성인가?)과 아울러 이중의 유사성(a criterion of double similarity)이 함께 적용적용되어야 한다: 어떤 것이 주후 1세기 유대교 내에서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보아질 수 있고(짙은 전복성향에도 불구하고) 후대의 기독교 속의 어떤 것의 출발점으로 볼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을 때(정확한 복사판은 아닐지라도), 우리가 예수의 진정한 역사와 접하고 있을 가능성이 아주 커진다. (219)

 

 라이트가 자료를 취할 때 쓰는 방법론이다. 비유사성의 원칙이라는 것이 있다. <성서학 용어 사전>(아서 G. 팻지아, 앤서니 J. 페트로타, 알맹e)에서는 이를 이렇게 정의한다. "진정성 판단 기준 중 하나로, 예수의 어록이 "유사하지 않을" 경우 진정한 어록이라고 판단한다. 여기서 비유사성은 초대 교회나 고대 유대교에서 일반적이었던 어록이나 신념들과는 다르거나 독특한 성질을 의미한다."라고 정의한다. 

 그러니깐 복음서는 주후 70년 이후에 써졌는데 그때 당시의 신앙에 맞춰져서 예수가 그려졌다는 것이다. 1세기 당시의 신을 전승으로 또 문헌에 삽입으로 투영한 것으로 본다. 그렇다면 그때 당시의 나올 법한 예수가 아닌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진정한 예수의 모습이지 않겠는가! 이게 바로 비유사성의 원칙이다. 그러나 라이트는 기독교 이전의 유대교와 2세기 교회를 이을려고 한다. 

 라이트는 위의 표현처럼 1세기 유대교에서도 있을 듯한 일과 후기 기독교 속에서 어떤 출발점으로 보이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야 말로 예수에 대해서 진정으로 다가가는 것이 아닌가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라이트가 보는 예수는 예언자의 모습이다. 

 

예언자 예수(마크 앨런 파월의 <예수에 대한 다양한 이해, 9장 N. T. 라이트(308-332) 참고>

 먼저, 역사적 예수를 대하는 두 개의 갈림길이 있다. 하나는 브레데의 <회의주의>의 길이며 하나는 슈바이쳐의 <종말론>의 길이다. 슈바이처는 예수가 종말론적 예언자라고 말했다. 그렇기에 후대에서는 이 길에 대해서 선택한 사람들이 있다. 앞서 비유사성의 원리가 브레데의 <회의주의>에서 나온 것이라고 보면 된다. 슈바이처의 말을 들어보자. 

 

여기에서 길들이 나누어진다. 한편으로는 일관되지 못하고 서로 잘 연결되지 못하는 온갖 것들을 지닌 현재 상태의 마가복음 기사를 진정한 역사로 일거에 승격시키고 있는 종말론적 해법이 존재한다; 그기고 다른 한편으로는, 서로 모순되는 교의적인 요소를 가장 초기의 복음서 기자가 전승 속에 삽입해 넣은 것으로 간주하고, 이에 따라 메시아 주장을 예수의 역사적 삶으로부터 완전히 배제시키는 문헌비평적인 해법이 존재한다. 제3의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Tertium non datur). - Schweitzer 1954[1906], 335, (라이트, <예수와 하나님의 승리>, 143 재인용)

 

라이트는 슈바이처가 말한 종말존적 예언자를 선택한다. 그렇지만 슈바이처의 결론을 다 따르지는 않는다. 라이트는 1세기 유대교를 자신만의 방법론으로 읽어낸다. 그가 제시하는 1세기 유대교는 이렇다.

 라이트가 보기에 1세기 유대교는 자신들이 포로상황에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이집트의 포로생활에서 구출된 기억이 참 소중했다(마가복음을 새출애굽의 관점으로 보는 것도 이러한 맥락이다). 그리고 몇 백년 전에는 바벨론이 성전을 파괴시켰고 자신들은 여전히 지금 포로로 살고 있다. 그렇다면 당시 풍부한 분위기는 새로운 구출이 일어나길 모두 바랬을 것이다. 새로운 출애굽을 말하며 하나님께서 다시 돌아오신다면 마침내 포로기가 끝난다는 생각이 1세기 유대교에는 팽배했을 것이다. 여기에서 마지막에 일어날 것이라는 종말론적 기대는 세상 전체의 끝날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현재의 세상 질서의 종말을 예견했다는 의미에서 종말이다. 

 

 자, 그렇다면 예수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 3:2)의 말씀은 예언자적인 선언이다. 종말론적 소망이 팽배했던 분위기에서 이러한 메세지는 분명 자신의 정체성을 알려준다.

 예수의 메시지는 세 가지 중심 요소가 있다. "(1)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마침내 이 포로 상태를 끝낼 것이다. (2)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적을 패배시키기 위해 결정적으로 행동을 취할 것이다. (3)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다시 그의 백성 가운데 거하기 위해서 시온으로 돌아오고 있었다."(325) 이러한 기대는 1세기 유대인들 모두가 가졌을 기대였고 예수는 이 기대를 전복적인 방식으로 새롭게 정의를 했다.  

 

 예수가 행했던 일들은 바로 이 소망이 일어날 것이라는 신호였다. 예수가 행했던 치유행위와 죄인들에게 용서를 하며 환영해 한 가족으로 삼으신 일들이 바로 그 사인이었다. 그리고 전복인 방식이란 용서를 통한 자신의 길을 걷게 하는 것이다. 그것이 산상수훈의 메세지였다. 로마의 폭정에 저항하라는 당시의 메시지와는 전혀 다른 길이기에 전복적이라는 것이다. 

 

예수는 왜 죽어야 했는가? 

 그렇다면 유대 지도자들이 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서 죽이려고 했는지 더욱 이해가 된다. 예수는 자신을 예언자라고 이해했다. 그런데 신명기 13장에는 나무에 달린 자는 거짓 예언자라고 했다. 나무인 십자가에서 예수가 죽는다면 그것만큼 예수의 말이 거짓이라는 증거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당시 군중들의 환호를 잠재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자신이 죽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알고도 예루살렘에 들어갔던 것이다. 왜 예수는 자신이 죽는다는 것에는 어떤 의미가 있었을까. 

 

 앞서 예수를 예언자라고 소개했다. 더 나아가서 예수는 자신을 메시아라고 생각했다. 또, 메시아를 넘어 자신을 하나님으로 생각했다. 그 근거는 예수의 말에는 성전과 토라에 대한 헌신을 자기 자신에게 헌신하라고 말하였다.(428) 죄용서 또한 성전에서 이루어져야 했지만 예수님은 스스로 죄용서를 해주셨다. 하나님께 돌려져야 하는 것을 예수님 스스로에게 돌린 것이다. 그렇기에 당시 유대지도자들이 예수를 신성모독으로 죽인 것이다. 

 메시아적인 의식이 있었던 예수는 메시아적 고난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포로기에서 구원받을 때 극심한 고난을 수반할 것이라는 생각이다. "의인 한 사람이 당한 고난은 이러한 사고체계 안에서 해석될 수 있었는데, 선지자들은 자신들이 말했던 진리 때문에 고난을 당했을 수 있고 참된 왕은 그의 백성의 고난을 공유하고자 했을 것이다. 다니엘, 시편, 스가랴, 에스겔 그리고 특히 이사야 40-55장에 나오는 많은 성서 본문은 이러한 고난을 표현하고 있다고 해석될 수 있다. 라이트는 이러한 성서에 근거해서 다음과 같은 학설을 세우는데, 예수는 자신이 이스라엘을 대표하여 고난당하도록 부름받았으며, 포로기를 끝내게 하는 신성한 징벌을 짊어지도록 부름받았다고 믿었다는 것이다. 이 견해는 예수의 고난이 이스라엘의 고난이 끝나는 시점을 어떻게든 앞당기게 될 것이라는 것처럼 보인다. 성서에 대한 자신의 이해에 기초하여 예수는 포로기 중에 있는 이스라엘의 운명을 떠맡는 것과 자신이 예루살렘 전체를 향해 선포했던 그 운명을 상징적으로 경험하는 것이 자신의 소명이라고 판단하였다."(파월, 331)

 여기에서 예수가 상정한 적은 단순한 로마가 아니다. 그 뒤에 있는 사탄이다. "예수는 그의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승리는 무장 투쟁을 통해서가 아니라 십 리를 걸어가 주고 다른 뺨을 돌려대는 것을 통해 온다고 가르쳤다. 적들의 무기를 사용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싸우는 것은 원칙적으로 이미 그 싸움에서 패배했다는 것을 의미했고, 실제로 곧 그리고 끔찍하게 패배할지도 모른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것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예수는 오직 자신이 패배당하는 것을 허락함으로써 사탄을 이길 수 있었다. 예수는 악을 이길 유일한 방법은 악이 가장 추한 일을 하도록 허락하는 것이라고 가르쳤다. 예수는 십자가를 지고서 모욕 또는 위협 없이 부당한 죽음을 향해 걸어가 조용히 용서를 말하며 고난을 당함으로 바로 이 악의 정복을 이루어내려고 했다. 라이트가 말하길 이것이 순교자 전승을 놀랍게 변형시킨 것이었으며, 이것이 초기 그리스도교 전체에 반향을 일으켰다. 일반적으로 볼 때, 십자가 처형을 당한 메시아의 추종자들은 그 이후로 의심할 바 없이 자신들이 [경마로 말하자면] 판돈을 잘못 걸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어쨌든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예수가 십자가에서 성취한 일을 악에 대한 결정적인 스일로 간주하게 되었다." (파월, 332)

 여기에서 앞서 말한 라이트는 "유사성과 비유사성의 이중기준"이 들어막게 된다. 1세기 있을 법한 일들이었고,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을 승리라고 말했던 이유가 연결이 되는 것이다. 그 연결점이 종말론적 메시아고난받는 메시아라는 지점이다. 

 

 다른 학자들의 비판점들을 언급하는데 던의 비판이 뼈아프다.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포로기라고 생각했을 수 있지만 팔레스타인 유대인들은 그런 생각을 했다던 증거가 없다는 것이다. 물론, 라이트는 에세네파와 바울을 가지고 증거가 있다고 반박을 한다. 

 라이트의 이러한 썰들을 보며 보수적인 신학생들을 좋아할 수밖에 없다. 왜 보수적인 곳에선 라이트를 경계하는지 이해가 안 된다. 저게 전통적인 그리스도론을 수호하는 거지. 그래서 전통적인 그리스도론을 말하기에 공관복음서를 그대로 신뢰하고 자료로 쓴 것 아니냐고 말이다.

 

나가면서 

 더럼의 주교였단 N. T. 라이트! 솔직히 학자들 세계에선 무시를 많이 받는다고 하더라. A급도 안 되는 신학자다. 그 이유를 파월의 책을 보면서 어느 정도 알게 되었다. 자료 선택에 있어서 그는 그리 공정한 것은 아니다. 공관복음서를 그대로 다 신용한다는 것은 엄밀한 비평을 거친(?) 공부한(?) 학자들이라면 흠칫하는 것이리라. 그 틈을 메우기 위해서 라이트는 보컴과 베일리를 인용하는 것 같다. 예수의 어록은 전승되었는데 그 전승은 초대 교회의 신앙이 투영되어 편집된 것이 아니라 예수가 했던 그대로가 전승되었다는 보컴과 베일리의 주장 말이다. 나중에 이 주제는 에릭 이브의 <예수에서 복음서까지>를 읽고 요약하면 참 좋을 듯하다. 

 나는 라이트같은 신학자가 있어서 넘 좋다. 이렇게 보수적인 주장을 학문의 세계에서 펼쳐보이니 복음주의권에 있는 사람으로서 좋아하지 않을 수가 없다! 라이트옹께서 5월에 한국에 온다고 하던데 코로나때문에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온다면 휴가를 써서 가볼 생각이다. 5월에 뵈어요 라이트 옹!


메모

솔직히 말해서, 예수 같은 그런 인물이 결코 존재하지 않았다고 믿는 것보다 예수의 동시대인인 디베료 가이사가 상상에 의한 허구의 인물이었다고 믿는 것이 더 쉬울 것이다. (19)

- ㅋㅋ팩폭

 

 

 

불트만은 예수는 역사적으로 주후 1세기의 유대인이었지만 예수가 지닌 주후 1세기의 유대인이라는 성격 속에서 예수의 "의미"를 찾아서는 안 된다고 단호하게 말하였다. 새롭게 등장한 갱신된 "새탐구"는 이러한 노선을 따라서 흔히 예수가 지닌 유대인 특유의 특징들을 경시했고, 그 대신에 지중해 세계의 다른 문화들과 그가 공유하였다고 생각되는 것들을 강조하였다. (151)

- 보편적으로 이해되어야 하기에? 역서성은 방해가 되니까?(왜 그렇게 생각했을까?)

 

 

 

버미스의 예수는 매우 유대적 인물로 상정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꽤 철저하게 실존주의적인 자유주의적이고 무시간적인 형태의 유대교를 설파한다. (160)

- 그래서 p. 66에 불트만 쪽으로 기울었다고 했구나. 

 

 

 

바빌로니아는 이스라엘 백성을 포로로 잡아 갔었다; 바빌로니아는 멸망했고, 이스라엘 백성은 본향으로 되돌아 왔다. 그러나 예수 시대에, 대부분은 아니지만 많은 수의 유대인들이 포로생활이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고 여겼다. 백성들은 지리적 의미에서는 귀환한 것이지만, 위대한 회복의 예언들은 아직 성취되지 않았다. (210)

- 이것은 많은 학자들이 반대한다. 청어람 김선용 교수님 수업 증에서도 말하더라. (앞서 위에 던이 여기에 대한 증거가 없다고 말하고 라이트는 에세네파와 바울을 통해 반론을 했다.)

 

 

 

우리는 초대 교회에 속한 그 누구도 예수의 가족이 예수가 미쳤다고 말했다는 내용을 창작해 내지 않았을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다. 초대 교회에 속한 어느 누가 예수가 귀신들의 왕과 손을 잡고 그런 일을 행하였다는 고소를 만들어 내었을 가능성은 거의 전무하다. 우리는 여기서 확고한 역사적 토대 위에 서 있는 것이다. (675-676)

- 비유사성의 원칙 out(?)

 

 

 

야훼께서 재판장과 구속자로서 시온으로 돌아오시는 것에 관한 이야기를 말하고 나서 예루살렘 도성으로 눈물을 흘리며 나귀를 타고 들어간 것과 성전의 파괴를 상징한 것과 최후의 출애굽을 기념한 것을 통해서 그것을 구현한 한 젊은 유대인 예언자에 초럼을 맞춰라. 나는 역사의 문제로서 나사렛 예수가 소명을 인식하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이스라엘의 성서 속에서 하나님이 스스로 그 모든 것을 이루겠다고 약속하셨던 것을 자기 속에서 몸소 실행으로 옮길 소명. 그가 "아버지"로 알고 있었던 바로 그분에 의해서 그에게 주어진 소명. 예수는 새로운 출애굽의 백성을 위하여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될 것이었다. 예수는 자기 자신 속에 계약의 하나님의 돌아오심과 구속의 행위를 구현할 것이었다. (987)

- 도발?(신약학계에?)

 

 

 

슈바이처의 예수는 백성들에게 몇몇 과제들을 수행하라고 촉구한 행동의 사람이었던 반면에, 불트만의 예수는 백성들에게 생각하라고 강력히 권고했던 말씀의 사람이었던 것이다. 슈바이처의 예수는 슈바이처로 하여금 의료 선교사가 되도록 이끌었다. 불트만의 예수는 불트만으로 하여금 "신약성서 신학"을 쓰게 이끌었다. (992)

- ㅋㅋㅋ


책 맛보기

 

관념론과 가현설적 견해의 위험성들을 알아차린(그의 모든 연구에서처럼) 케제만은 예수를 역사 속에 정초시키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예수를 어느 방향으로나 자기 마음대로 끌어다 쓸 수 있고, 그 어떤 신학적 또는 정치적 프로그램의 주인공으로도 삼을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59)


예수는 이스라엘의 소망의 성취를 이해하는 새로운 방식을 자세하게 설명한 것이다. 예수는 전승을 근본적으로 개혁하였던 것이다. 바로 이것이 최근에 자주 논의되는 것과 같이 이야기들이 작용하는 방식이다. 이야기들은 청중들을 새로운 세계로 초대하고, 그들로 하여금 그 세계를 자신의 것으로 삼아서 그들의 통상적인 세계를 이제부터는 이 격자망, 이 렌즈를 통하여 바라보도록 권장한다. 비유를 이해하고자 씨름하는 것은 새로운 세계를 탄생시키고자 씨름하는 것이다. (280-281)


묵시론에 대한 초기 기독교의 재정의는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가 부활하신 예수가 이 묵시론적 드라마 속에서 중심인물이라는 것이 밝혀졌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었다. (343)


예언자들은 통상적으로 "회개하다"라는 용어를 회복, 포로생활에서의 귀환을 가져올 야훼께로 돌아오는 것을 지칭하는 의미로 사용하였다. (388)


"죄사함"은 단순히 개인적인 축복일 수 없었다 - 물론, 개인적인 축복을 포함하는 것이었음은 분명하지만, 개개인의 상황을 포괄적으로 감싸고 있었던 것은 민족 전체의 운명이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이교도들의 통치하에 남아 있고, 토라가 완전하게 지켜지지 않고, 성전이 적절하게 회복되지 않는 한, 이스라엘은 하나님에 의해서 약속된 위대하고 반복될 수 없으며 종말론적이고 민족적인 축복으로서의 "죄사함"을 갈망할 수밖에 없었다. ... 그것은 "죄사함을 위한", 달리 말하면, 이스라엘이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구속을 가져올 세례였다.
...
 핵심은 예수가 포로생활에서의 귀환, 갱신된 계약, 종말론적 "죄사함" - 달리 말하면, 하나님 나라 - 을 제시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는 공식적인 구조들 바깥에서 모든 어그러진 사람들에게 자기 자신의 권세에 의거해서 이러한 최종적인 종말론적 축복을 제공해주고 있었다. 이것이 예수가 범한 진정한 죄였다. (425)


예수에게 비난이 쏟아진 것은 예수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면서 죄인들을 환영했고, 이러한 환영을 하나님 나라의 결정적인 한 부분으로 여겼기 때문이었다. ... 문제는 사람들의 반감을 불러일으켰던 하나님 나라에 대한 재정의에 관한 것이었다. 예수는 성전과 토라에 대한 충성을 예수 자신에 대한 충성으로 대체하고 있었다. 회복과 정결은 통상적인 통로들을 통해서가 아니라 예수를 통해서 얻어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428)


이 모든 것을 감안했을 때,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피할 수 없다: 예수는 예루살렘에 왔을 때에 예루살렘에 대한 심판을 예언적 상징 행위를 통하여 몸으로 보여주었다 - 예수가 이 사건 이전과 이후에 행위 및 말로써 알려왔던 바로 그 심판. 이스라엘 민족 전체의 삶의 중심 상징이었던 성전은 하나님의 위협 아래에 있었고, 만약 이스라엘이 회개치 않는다면, 성전은 이교도들에게 멸망당하고 말 것이었다. 게다가, 예수는 이러한 주장을 이런 식으로 행함으로써 스스로를 단순히 성전의 파국을 선포한 예레미야 같은 예언자가 아니라, 하스모네 오아가나 헤롯 왕가가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였던 바로 그러한 권세를 지닌 진정한 왕으로 인식하였다. 예수는 이런 식으로 행동함으로써 "수신감도가 그 절정에 달해 있던 바로 그 순간에 민족의 가장 중요한 전승들을 살마들의 뇌리 속에 불러내었다." 즉, 구경꾼들, 야훼의 나라에 대한 생각으로 꽉 차 있었던 유월절 순례자들이 예수의 행위의 다중적인 상징적 의미들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었던 바로 그 순간에 말이다. (638-639)


그는 심판을 상징하는 행위를 보여주고 있었다. ... 예수의 행위는 야훼는 시온으로 돌아와서 성전에 좌정하지 않을 것이고, 주후 1세기 유대인들의 상징 세계 속에서 성전이 차지하고 있던 위치와 기능, 그리고 그 성전의 현재적인 운용을 정당화하지 않을 것이라는 자신의 믿음을 상징하는 것이다. (648-649)


나는 성전에서의 예수의 행위는 성전의 임박한 파괴에 관한 극적인 상징으로 의도된 것이었고, 이것은 스가랴서의 예언의 암묵적인 맥락과 이사야서 및 예레미야서로부터의 인용문들에 의해서 밑받침되며, 탁자를 뒤엎고, 성전을 지름길로 사용하는 것을 금하고, 무화과나무를 저주한 예수의 구체적인 행위들도 마찬가지로 모두 하나님 나라의 도래와 하나님 나라를 거부한 예루살렘 도성 및 성전의 파국을 보여주는 예언적 및 종말론적 상징으로 의도된 것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649-650)


성전에 대하여 궁극적인 권세를 지니고 있었던 것은 왕이었다. 앙은 성전의 개혁자, 성전을 재건하는 자가 될 것이다. 예수의 행위는 이 가장 중심적인 상징에 대한 심판과 재구성을 목적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사건 전체는 명시적인 메시야적 주장으로 가득 차 있다고 보아야 한다. 이것은 이 사건 자체의 상징적 실천, 그리고 그 것이 상기시키고자 한 서사 세계에 속한다는 것을 우리는 강조해 두어야 한다. ... 예수가 행하였던 것을 행하는 사람은 이스라엘 역사가 결정적인 파괴와 재건의 시점에 도달하였고, 그의 행위들은 그러한 순간을 구체화하고 있는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749)


따라서 예수의 수수께끼 같은 말씀 속에서 (a) 현재의 성전은 참된 성전과 반대되는 것으로 보아지고 있고, (b) 현재의 성전은 참된 성전에게 길을 내어주기 위하여 파괴되 것이며, (c) 예수는 재건될 성전의 모퉁잇돌이 되어서 그 성전을 완성시킬 참된 기름 부음받은 자이다. 여기서 다시 한 번 성전 행위는 왕권에 대한 주장을 보여준다. (753)


"그는 죄인들과 함께 먹으러 들어갔다"(눅 19:7)는 말은 이제 "그는 반역자들과 함께 죽으러 나갔다"라는 말로 바뀌게 될 것이다. (918)


예수는 예루살렘으로의 그의 여행을 시온으로의 야훼의 돌아오심에 대한 상징이자 구현이라고 보았다. (966)


슈바이처의 분석이나 불트만의 분석이나 그 어느 쪽도 타당하지 않다. 불트만의 탈신화한된 예수는 주후 1세기와는 상관이 없다. (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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