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낀 점
N. T. 라이트의 주저 1권이다. 깨알같은 글자로 무려 823페이지다. 물론, 참고문헌이 포함된 쪽수이자만 어머어마한 분량임은 틀림없다. 이런 주저가 3권이나 더 있다(바울은 원래 한권이지만 두권으로 나눠나왔음). 주저 2는 읽었고 주저 3을 도전해야 한다. 올해 안에 도전이 완료되길 바란다.
일단 이 거대한 책을 요약하며 봐야겠지만 그건 무리다. 넘 많다. 그리고 이건 백과사전식으로 봐야할 부분이 있기 때문에... 음 그렇다. 일단 N. T. 라이트의 방법론을 한 번 보자.
N. T. 라이트와 기독교 세계관
이 책 서문에 이렇게 라이트는 말하고 있다.
많은 점에서 이 프로젝트 전체에서 및 지난 10여 년 동안의 나의 신학적, 특히 해석학적 사고에 없어서는 안 되었던 한 분의 부분 건축자는 토론토 대학의 브라이언 월시 박사다. 그가 1991년 여름 6주 동안 시간을 내서 나로 하여금 본서에서 아주 중요한 처음 다섯 장을 철저하게 다시 생각하고 다시 설계하도록 도운 것은 이 작업에 대한 그의 열정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었다. (21)
브라이언 월시가 기독교 세계관에서 유명한 브라이언 왈시다. 카이퍼리안이기도 하다. 그런 그의 방법론에 라이트가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혹자는 N. T. 라이트를 카이퍼리안이라고 하기도 한다. 분명, <마침내 드러난 하나님 나라>를 읽었을 때 영역주권의 냄새가 많이 났는데 아마도 이 영향때문이 아닐까 싶다.
성경신학자들 중에는 본인을 역사학자로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과거의 기록들을 살피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분은 신학자라기 보다는 역사학자라서 신학은 잘 모른다고 하시는 분도 있다. 심지어 그분은 해외신약저널에 기고를 하시는 분이신데도ㅎㄷㄷ. N. T. 라이트도 본인을 역사학자라고 지칭한다. 그렇다면 역사를 어떻게 살펴볼까? 비평적 실재론이란 방법론을 택하는데 비평적 실재론은 아래에 설명을 따로 하겠다. 먼저 세계를 파악하려고 한다.
1세기의 세계를 파악하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이 방법에서 세계관을 파악하려는 방법을 가져온 것이다. 브라이언 왈시의 방법론 말이다.
우리는 초기 유대교 및 기독교 문학에 대한 연구와 그 문학들을 토대로 역사를 쓰려는 시도를 포함하는 이 프로젝트의 주된 작업을 지탱해 줄 만큼 튼튼한 토대들을 놓았다고 나는 믿는다. 나는 관련된 사람들 및 사회들의 세계관들, 사고방식들, 목표들, 의도들, 동기들에 적절한 주의를 기울이면서 역사를 비판적 실재론에 의거해서 읽는 것은 적절하고, 원칙적으로 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논증했다. (205)
다른 것들에서와 마찬가지로 제2성전시대 유대교에 대한 연구에서 중요한. 우리는 이 시기의 유대인들이 그들이 누구이고, 그들의 신이 어떤 분이며, 이 모든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관하여 서로서로 및 그들 자신에게 말한 이야기들을 추적하여 이해할 필요가 있다. (207)
신학은 세계관들을 내포하고 있는 이야기들, 세계관과 관련된 근본적인 질문들에 대한 답변들, 세계관을 문화 속에 표현하게 해 주는 상징 세계, 세계관이 발생시키는 실천적 과제들 속에서 본질적인 구성요소다. (224)
이제 세계관을 알기 위해서 그는 근본적인 질문 네가지를 던진다.
(1) 우리는 누구인가?
(2)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3)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4) 해법은 무엇인가? (227)
라이트는 이 질문들을 계속해서 사용하며 자신의 논지를 강화시켜 나간다.
비판적 실재론
강영안: ... 제가 이야기하는 비판적 실재론은, 실제하는 현실을 전제하면서도 이를 탐구해서 지식을 생성하는 지적 노력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 지적 노력에는 우선 개념의 틀이 개입합니다. 경험이 하나의 자료로 주어지지만 개념을 통해 파악하는 것이죠. 그런데 그 개념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변화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끊임없는 해석의 과정을 동반합니다. 그래서 비판적 실재론은 주체와 대상 사이의 단순한 만남이 아니라, 이해하고 해석하고, 다시 오류를 수정하는, 인간의 끊임없는 주체적 활동입니다. (강영안·우종학, <대화: 철학자와 과학자, 존재와 진리를 말하다>(복있는사람), 159
여기 강영안 교수님의 설명에서 "개념의 틀"이 나온다. 이 "개념의 틀"을 파악하려고 하는 것이 N. T. 라이트의 작업이다. 라이트는 이렇게 말한다.
비판적 실재론(내가 제안하고 있는)은 특정 대상에 관한 지식이 세부적인 관찰 내용들 또는 "감각 자료들"이나 외부의 실재에 대한 확신 있는 진술들로부터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세계와 관련된 관찰자의 존재 방식의 토대를 형성하는 이야기(스토리) 또는 세계관이라는 좀 더 큰 틀 내에서 일어나는 것으로 본다. (76)
그러니 이 틀을 알아내기 위해 다양한 자료들을 라이트는 설명한다.
그런데 세계를 파악하려는 개념 중에 "소박한 실재론"이 있다. 라이트는 이를 이렇게 설명한다. "사람들은 계몽주의 시대 이후의 실증주의 시대 속에서 자기들이 사물들을 "곧이곧대로" 알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상식적인 수준이라고 생각하는 이러한 입장"(70)으로 말한다. 위의 <대화>에서 강영안 "소박한 실재론이란 우리가 보고 듣거나 만지거나 하는 지각 행위와 우리가 사용하는 개념과 상관없이 실재가 내 바깥에 존재하고 그것을 아무런 매개없이 있는 그대로 경험한다는 입장"(<대화>, 159)이다. 그러니 있는 그대로의 역사를 그려낼 수 있다고 본다. 객관적인 역사가 가능하다고 볼 수 있다고 말할 거 같다.
이 반대에 있는 개념이 "현상학"이다. 이는 철저히 주관적인 것이다. "현상학을 신봉하는 이들은 자기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눈을 보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말이다. 후자의 입장의 한 가지 논리적 결과는 물론 유아론, 즉 나 그리고 오직 나만이 존재한다는 신념이다. 나 외에 그 어떤 다른 증거를 내가 가질 수 있겠는가?"(74) 라이트는 객관과 주관 그 사이를 오가는 비판적 실재론을 택한 것이다.
이러한 두 가지 입장에 맞서서 나는 비판적 실재론이라고 부를 수 있는 입장을 제시하고자 한다. 이것은 인식 대상이 인식 주체와는 다른 존재로 존재한다는 것, 즉 인식 대상의 실재를 인정하지만(그러므로 "실재론"), 우리가 이 실재에 접근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인식 주체와 인식 대상간의 적절한 대화라는 나선형 방법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하는(그러므로 "비판적") 것이라고 "인식" 과정을 설명하는 방식이다. ... 달리 말하면, 지식은원칙적으로 인식 주체로부터 독립적인 실재들에 관한 것이기는 하지만, 지슥 그 자체가 인식 주체로부터 독립적이지는 않다는 말이다. (74)
나는 완전한 실재론도, 완전한 현상도 없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객관적으로 세상을 완전하게 파악하지 못하고 그렇다고 세상을 파악하려는 것이 내 마음과 머릿속에서만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세상도 그리고 그 세상 속을 살아가는 개인도 함께 파악해야지 실재를 가장 잘 파악하는 것이라고 본다. 라이트의 방법론이 더 맞지 않을까?
바울은 힐렐 학파인가, 샴마이 학파인가?
바리새인들 중에는 두 학파가 있었다. 힐렐 학파와 샴마이 학파다. 힐렐 학파는 유연한 집단이고, 샴마이 학파는 과격한 집단이다. 바울은 가말리엘 학파라고 사도행전 22장 3절에서 말했다. 그런데 가말리엘의 스승은 힐렐이다. 바울 당시 힐렐 학파는 정치에서 경건을 강조하는 쪽으로 옮겨 갔다(337). 반면 샴마이는 정치적인 것에 힘을 쏟았다. 그래서 과격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바울은 참 과격했다. 물리적 폭력을 가했고 결국 스데반을 죽이는데 기여하기도 했다. 이 모습은 샴마이 학파를 연상하게 한다. 그럼 바울의 학파는 어떻게 된 것인가?
라이트는 일단 "바리새파 운동 내부에 여러 분파들이 존재했음"(322)이라고 말한다. 또, "지금까지 살펴보았던 다른 모든 증거들과 완전히 부합하고, 실제로 힐렐(그리고 사도행전 5:33-9에 나오는 가말리엘)이 이 문제를 이스라엘의 신에게 맡기는 방향으로 더 기울었던 반면에, 샴마이(그리고 다소의 사울)는 그런 시의 개입의 도구로서 행동하고자 했다는 것에서 볼 수 있듯이, 바리새파 운동 내부에서의 이후의 논쟁을 암시해 준다."(337) "바울은, 일부 학자들이 그가 힐렐 학파에 속하였음을 입증하려고 시도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샴마이 학파의 "열심"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회심 후에 바울은 몇 가지 중요한 점에서 분명히 힐렐과 더 가깝게 바뀌었다는 것은 별로 이상한게 아니다. 그의 일차적인 관심은 이제 이방인들이 이스라엘 신의 계약의 백성 속으로 들어올 수 있게 하는 것이었고, 그의 주장은 이교의 타당성이 결국 밝혀질 것이라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로 개종한 이방인들은 더 이상 이교도들이 아니라는 것이었다."(339)
라이트의 이런 설명에서 명확하게 답을 못 찾겠다. 그는 "바리새파는 여전히 복잡하고 파악하기 힘든 집단"(340)이라고 말을 한다. 아마 이 문제는 주저 4권 <바울과 하나님의 신실하심>에서 자세히 말하지 않을까 싶다. 앞으로 바울과 관련한 서적들을 공부할 예정이다. 이때 여러 바울에 대한 탐구점들이 많지만 이 주제 역시 생각하면서 바울에 관한 책들을 읽으면 재미있을 것 같다.
나가면서
5월에 N. T. 라이트가 온다고 알고 있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5월이라면 올 수 있지 않을까? 한국은 영국보다 안전한 편이니깐. 아마 그쯤에 라이트에 대한 소개를 적어봐야 겠다. 스티븐 커트의 <목회, 톰 라이트에게 배우다>와 마를린 바틀링의 <톰 라이트는 처음입니다만>을 중심으로 소개해 보려고 한다.
N. T. 라이트는 보수적인 신학생이라면 정말 좋아할 만한 사람이다. 교리적 틀을 잠시 벗고 라이트가 하려는 말에 공감하려고 노력해 보라! 그는 멀리 있는 사람이 아니다. 공감한 이후에 공격적으로 읽어도 늦지 않다!
메모
그러나 사실 해체주의가 제시하는 해석 모형은 (폭넓게 얘기해서) 경건주의 전통 속에서 암묵적으로 채택되어 왔던 많은 해석 모형들과 대단히 유사하다. ... 이러한 해체주의의 경건한 선구자는 성경이 지금 나에게 말씀하시는 것이 성경 본문의 의미의 전부이자 최종적인 것이라고 주장하는 읽기, 복음서 기자의 의도, 초대 교회의 삶, 심지어 예수께서 실제로 어떤 모습이었는지에 관하여 알고자 하지 않는 읽기이다. 문학 인식론의 세계에는 종종 낯선 동침자들이 끼어 있다. (113)
- (전형적인 한국인들의 큐티 방법이다. 포스트모던을 위험시하지만 성경 읽기는 포스트모던 방식으로 성경을 읽는 아이러니)
이스라엘은 극심한 고통을 통과할 것이다; 이 일 후에 이스라엘은 죄 사함을 받고, 세상은 치유될 것이다. ... 그러나 확실한 것은 "민족의 죄에 대한 대가로서의 공동체적인 고난은 전통적인 사상이었고, 주후 1세기에도 여전히 살아 있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상은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혼란과 혼돈의 시기 가운데에서 유대인들의 민족적 자기 이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초기 그리스도인들(그리고 아마도 예수 자신)은 이 사상을 받아들여서 재해석하였다. (461-462)
- 고통의 시간을 겪는게 죄사함의 순간, 희생제사의 제물이 되었다고 생각. 과연, 1세기 유대인 모두가 이렇게 생각했을까?
저스틴도 십자가에서 처형당한 인물을 숭배한다는 것이 곧 미친 놈 소리를 들을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 그리스도인들은 이 이야기를 조금도 누그러뜨리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이 역설적인 진리가 세상을 구원할 것이라고 믿었다. 순식간에 십자가는 그리기 쉽고 한 번 들으면 잊혀지지 않으며 예수를 가리킴과 동시에 그를 따르는 자들에게 여러 가지 의미를 지닌다는 점에서 풍부한 의미를 지니는 기독교의 중심적인 상징이 되었다. (609-610)
- (마틴 헹엘의 <십자가 처형>을 읽으면서 왜 십자가라는 이미지를 그대로 착용했을까 의문이었다. 라이트는 여기에서 그 이미지가 "그리기 쉽고 잊혀지지 않으며"에 강조를 둔다. 하지만 십자가의 이미지는 단순히 그러한 쉽고, 잊혀지지 않는다는 것에서 쓸 수 있는 이미지였을까? 오히려 나는 인간의 죄와 결부하여 십자가의 이미지를 끌고 온 것은 아닌가 짐작을 해본다. 따로 그러한 가 연구를 해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바울서신에서 십자가를 명시한 본문에서 죄와 단어적으로 연결을 얼마나 시키는 지 등의 연구 말이다.)
다윗이 죽은 후에 그의 아들 솔로몬이 등극하였고, 세상은 그에게 와서 지혜를 들었으며, 그에게 열방들이 순복하였다. 이제 다윗의 참된 아들 예수의 죽음과 부호라 후에 참된 다윗의 나라는 세워졌고, 열방들은 그 나라에 복종하게 될 것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사도행전 끝 부분에서 이스라엘의 신의 나라가 로마에서 공개적으로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전파되고 있는 장면을 그림으로써, 누가는 자신의 그림을 완성한다. (631)
- 사도행전 1:6에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을 말하는 게 제자들이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 게 아니라, 사무엘서와의 병행읽기로 보아야 하는가? (사도행전에서는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을 이후에 사용하지 않는다. 복음서는 모르겠다. 그런 표현이 있는지. 그러나 오순절 이후 하나님 나라 회복은 사용하지만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은 말할까?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은 어떻게 보면 민족적 정체성을 그대로 가지고 가는 뉘앙스를 품지 않을까?)
예수는 대중 매체의 도움을 받지 않고 일하여야 했기 때문에 이곳저곳으로 끊임없이 옮겨 다녔다. 따라서 예수는 동일한 이야기들을 약간씩 다른 말들로 여러 번 말하였고, 비슷한 질문들과 문제들에 직면해서 그러한 것들에 관하여 비슷한 얘기들을 했을 것이며, 마을들마다 약간씩 다른 축복문들으 전하였고, 비유들과 말씀들을 각기 다른 상황 속에서 각색하여 여러 차례에 걸쳐 전하였으며, 사로 다른 상황 속에서 강조점을 달리하여 경구들을 반복해서 말하였을 것이다. (700-701)
- 크~ 타이센이 이렇게 말했구나.
퀘벡 주의 농촌 지역에서 로마 가톨릭의 공동체로 단단하게 결속되어 있는 공동체의 한 회원이 침례교로 개종한다 ~(743)
- 라이트의 강점. 현실 적용.
책 맛보기
조지 티렐이 말했듯이, 이것이 바로 19세기 자유주의자들이 쓴 "예수 전기들"이 오직 깊은 우물 속에 비친 자신의 얼굴만을 보는 데 성공했던 이유이다. (178)
구체적으로 유대적인 세계관의 이야기화된 구조를 파악하게 되면, 우리는 주후 1세기의 유대교와 기독교 사이의 논쟁들 속에서 무엇이 당면문제였는가를 파악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도구를 소유하게 된다. ... 그 당연문제는 훨씬 더 근본적인 차원에서 이스라엘의 신, 그의 백성, 세계에 관한 이야기를 서로 다르게 하는 것을 둘러싼 논쟁이었다. 그리고 원칙적으로 이러한 서로 다르게 말한 이야기들을 우리가 방금 사용했던 것들과 같은 그러한 격자망들 속에 위치시키고, 그 이야기를 언급되고 있는 방식들을 자세하게 표시해서, 주후 1세기에 진정으로 무엇이 문제가 되고 있었는가를 파악하는 것이 가능하다. 이런 유의 작업들이 본서의 나머지 부분과 이 프로젝트 전체의 한 특징이 될 것이다. (139)
어떤 사람이 사고 작용을 통하여 자료를 조직하고 배열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은 역사를 "위조하는" 것이 아니다. 바로 그것이 역사다. (151)
신약성서 독자들은 무엇이 초기 그리스도인들을 움직였는가를 발견하는 것을 포함하는, 주후 1세기의 사건들의 "이면"을 연구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신약성서 독자들은 신학을 연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
성서학에 신학이 필요한 이유는 성경을 읽는 독자들은 당시 문화에 대한 전적으로 신학적인 분석의 도움을 받아야만 그들 자신의 질문들, 전제들, 목표들, 의도들을 알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아무런 전제 없이 성경을 읽을 수 있고, 자기들이 던지는 질문들은 "중립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사람들은 세계관들과 신학에 대한 연구를 통해서 그러한 미몽에서 깨어나야 한다. (235)
성전은 이스라엘의 신학과 열망 전체를 묶는 끈이었다. 예루살렘의 제사장들, 특히 고위 제사장들에게 성전은원칙적으로 위애서 말한 모든 것이었지만, 그 외에도 몇 가지 의미가 더 있었다: 성전은 그들의 권력기반이자 이 나라의 경제적 · 정치적 중심이었다. 그들이 현재의 모습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성전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성전은 그들이 로마인들과 헤롯 아래에서 부여받았던 지위를 종교적으로 강력하게 합법화시키는 역할을 했다. (352)
좋든 싫든, 유대 민족의 삶의 심장부에는 성전이 있었다. 그 주변에는 계약의 신이 이스라엘에게 주기로 약속하였고, 따라서 권리와 약속에 의해서 이스라엘의 것이었던 땅이 그 중심인 성전을 바라보고 놓여 있었다. 성전과 땅은 둘 다 토라에 의해 규율되었는데, 토라는 이스라엘의 모든 것에 대한 계약 헌장으로서 땅과 성전으로부터 지리적으로 멀어질수록 그 중요성이 커졌다. 이 세 가지 모두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던 것은 유대인이라는 민족이었다: 이 작은 민족은 포로생활과 디아스포라에 의해서 분열되었지만, 그 스스로를 모든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 정체성을 유지해야만 했던 하나의 가족으로 알고 있었다. 성전, 땅, 토라, 인종적 정체성은 일상 생활 속에서 주후1세기 유대인들의 세계관이 정초했던 핵심적인 상징들이었다. (373)
예수는 유대인들의 신념에 대한 통상적인 해석에 의문을 제기하는 방식으로 이스라엘의 소망을 다시 정의하였고, 바울은 이렇게 다시 정의된 소망이 실제로 예수를 중심으로 하고 있다고 봄으로써, 신념에 대한 재정의 작업을 원칙적으로 완성하였다. 그리고 두 사람은 각자 나름대로 할라카, 즉 삶의 길이라는 차원에서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나타내 보였다. 그러므로 신념과 소망을 가능한 한 주의 깊게 검토하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 단순히 근본적인 전체들을 이끌어내는 데 관심을 갖는다. (408-409)
회복 후 이스라엘은 새로운 창조와 같을 것이기 때문에, 백성들은 다시 한 번 자기 땅에서 생육하고 번성하게 될 것이다. 선지자들이 그린 그림은 모두 동일하였다: 이스라엘은 한 분 하나님의 참된 백성이 될 것이고, 이스라엘의 운명은 세상 전체의 운명의 열쇠가 될 것이다. (437)
이스라엘의 신이 자기 백성을 포로생활로부터 건져 내시려면, 이스라엘이 포로로 끌려가게 만든 문제, 즉 이스라엘의 죄라는 문제를 어떤 식으로든 신이 해결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을 어떻게 해야 하느냐라는 문제는 이스라엘의 삶, 문화, 제의의 여러 다양한 측면들 속에서 아주 크게 부각되었기 때문에, 죄를 다루는 방법(개개인에 초점이 맞춰진)을 유대교의 중요한 초점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세계관 전체의 구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그 세계관을 전체적인 시야 속에서 바라보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은 이 문제를 위에서 설명한 계약 신학이라는 좀 더 큰 문제 속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452)
이것을 좀 더 일반적으로 표현해 보면, 희생제사 제도는 마치 출애굽과 같은 위대한 구속 역사들을 소급적으로 가리키는 일종의 지시봉, 마찬가지로 장차 도래할 위대한 구속을 가리키는 지시봉 역할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말이다. 희생제사는 이스라엘과 그 신과 화해를 말하고 있기 때문에, 역사적 또는 역사적/종말론적 현상을 주기적으로 일깨워 주는 역할을 할 수 있었다. (455)
"신의 나라"(카리안 주 - 하나님의 나라)라는 표현은 이 시기의 텍스트들 속에 오직 산발적으로만 등장하지만, 이 표현이 등장하는 대목에서는 이스라엘의 신 이외의 다른 통치자들이 이스라엘을 다스릴 수 없다는 것, 신은 반드시 현재의 정치적 상황을 뒤집어엎고 이스라엘, 성전, 땅, 토라를 다시 세우실 것이라는 것 등과 같이 그 밖에 다른 다양한 방식들로 말할 수 있는 개념을 간결하게 표현한 촌철살인의 어구로서의 기능을 한다. 이 복합적인 개념은 이 시기의 유대인들의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 경제적 열망 전체를 한데 결합시킨 것으로써, 거기에 유대교의 주류 사상이 항상 지니고 있었던 종교적 · 신학적 차원을 부여한 것이다.
이스라엘의 신이 왕이 되실 것이라는 사상은 이스라엘의 역사적 기대 전체의 맥락 속에서 만유에 대한 신의 통치라는 구약에 표현된 소망에 의거하여(그들 자신의 전승들의 중요성을 확고하게 의식하고 있던 백성 속에서) 보아야 한다. (502)
"부활"은 분명히 개개인들이 그들 자신이나 그들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소망할 수 있는 것이긴 하지만, 우리가 이제까지 살펴본 부활 신앙은 언제나 현세의 끝과 다가올 시대의 시작점에 있을 전체적인 부활에 그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것을 나는 아주 강력하게 지적해 두고자 한다. 그 부활은 온 이스라엘(각 사람의 관점에 따라 예외는 있을 수 있다)이 공유하게 될 생명으로의 부활이 될 것이다. 어떤 시각에서 보면, 그 부활은 이스라엘의 구원이 될 것이다: 기나긴 압제와 버림받음의 세월 후에 이스라엘은 마침내 구원받을 것이다. 또 다른 시각에서 보면 그 부활은 이스라엘의 신원(또는 "칭의")이 될 것이다: 이스라엘 역사 내내 자기들이 창조주 신의 백성이라고 주장해 왔던 그들에게 부활은 마침내 그 주장이 옳음을 입증해 줄 것이다. 창조 및 계약의 유일신 사상과 그것들이 낳은 종말론은 종종 "유대적 구원론"이라 불리는 것, 즉 유대인들이 구원에 관하여 지녔던 신앙들을 정확하고 효과 있게 파악할 수 있게 해 주는 맥락을 이룬다. (554)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단순히 (샌더스의 범주들을 사용하면) "들어가는 것"(계약의 지체가 되는 방법)과 "머무는 것"(계약의 지체를 유지하는 방법)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이스라엘의 상징들이 위협 아래 놓였을 때 - 유대인이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관한 문제가 도처에서 제기되고 어느 곳에서도 해결이 되지 않고 있을 때 - 이 위기의 때에 유대인으로 머무는 것이다. (557)
나는 무엇보다도 이 시기와 관련하여 "유대교들"이라고 말하는 것을 정당화해 주는 강조점, 실천, 문헌의 광범위한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당시의 대다수의 유대인들이 공유하고 있었던 "주류"로 생각될 수 있는 세계관과 신념체계의 개요를 추적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고자 하였다. 역사로부터 시작해서 우리는 그 역사를직접 살아낸 유대인들이 한 이야기들, 그러한 이야기들을 한 사람들에게 공통적이었던 상징들, 그러한 상징들과 보조를 같이 했던 실천으로 옮겨갔다. 이러한 것 및 우리가 지니고 있는 문헌에 의거해서 우리는 주후 1세기의 유대인들의 기본적인 신념체계를 살펴보았고, 특히 그들이 품었던 소망, 즉 상징, 이야기, 신념을 통합하여 그것을 예배, 기도, 행동으로 변화시켰던 소망을 살펴보았다. 설명을 위한 원은 이제 완성되었다. 우리가 이 소망을 발견한 것은 바로 이 역사 속에서였다; 이 역사가 그러한 모습을 지니게 된 것은 바로 이 소망 때문이었다.
요단 광야에 한 선지자가 나타나서 백성들에게 회개하고 "죄 사함"을 위한 세례를 받으라고 외치면서 그들에게 이스라엘을 곧 격렬한 심판을 받게 되고 그 가운데에서 아브라함의 새로운 백성이 만들어질 것이라고 경고했던 것은 바로 이러한 소망을 품고 긴장과 열망이 뒤범벅이 된 상태 속에서 살아갔던 한 백성들을 향해서였다. 또한 또 다른 선지자가 나타나 갈릴리의 여러 마을들에서 이제 마침내 이스라엘의 신이 왕이 되시려고 한다는 것을 외친 것도 바로 이 백성들을 향해서였다. 우리는 그 다음에 일어난 일에 대하여 의외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561)
한 분 참 신에 대한 동일한 충성이 그 중심에 자리잡고 있었지만, 그 어떠한 민족적 또는 인종적 뉘앙스는없었다. (605)
모든 다양성보다 더 깊게 초기 그리스도인들을 하나로 묶어 주었던 것은 그들이 예수에게서 절정에 달했고 그런 다음에 성령을 수여받은 새로운 삶과 과제를 낳았던 이스라엘의 이야기의 한 형태를 말하고 살았다는 것이었음이 아주 분명하게 드러난다. (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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