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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리뷰/인물

[책리뷰] 브루스 고든 - 칼뱅(프랑스식은 칼뱅, 미국식은 칼빈이다. 칼뱅은 프랑스 사람이어여 칼뱅으로 한다.)

by 카리안zz 2020. 4.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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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낀 점

 칼뱅. 이제는 칼뱅이 칼빈보다 더 익숙해지는 것 같다. 개혁주의를 강조하는 대학을 가서 나는 20살 때부터 개혁주의라는 단어가 참 익숙해졌다. 신학과는 아니었지만 교양과목으로 모두 개혁주의를 들어야 했기에 더 가까워 질 수 있었다. 그리고 내가 속한 교단이 개혁주의 노선을 따르는 교단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개혁주의 교단에 있지만 엄밀히 말하면 여기의 성향은 근본주의라고 할 수도 있다. 그렇기에 남을 이해하려는 태도가 너무나 부족한 개혁주의(칼빈주의)자들에 대한 반감은 나날이 들어났다. 신학을 본격적으로 공부하면서 반감은 더 심해졌다. 그래서 칼뱅(칼빈, 앞으로 칼뱅으로 통일하겠다)에 대한 반감 역시 더더욱 늘어났다. 

 절정에 달하고 조금씩 근본주의 성향에 개혁주의 진영에 익숙해졌을 때 문득 내가 칼뱅에 대해서 알고 있는게 뭐지? 란 생각이 들었다. 난 칼뱅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데 그에 대한 적개심과 반감은 어떻게 된 걸까. 그저 칼뱅이 아니라 칼뱅주의'자'에 대한 반감일 뿐이었다. 그렇게 칼뱅에 대해서 괜찮은 전기가 없을까 싶었는데 그에 대해 괜찮은 전기가 딱 나왔다. 브루스 고든의 <칼뱅>이다. 번역도 이재근 교수님께서 해주셨다. 물론, 이재근 교수님 때문에 이 책이 번역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ㅋㅋ

 브루스 고든은 예일대학교 신학부에서 교회사를 가르치고 있는 사람이다. 보니까 예일대학교 교회사들 중에 대가가 많더라. 대표적으로 야로슬라브 펠리칸이 있단다. 요즘 그의 책이 비아에서 번역되고 있다. 신학생들에게 유명한 교회사가인 후스토 곤잘레스도 펠리칸의 제자란다. 곤잘레스가 예일에서 박사를 최연소로 받았다는데 지도 교수가 펠리칸이었지 싶다. 

 그런 예일대학교 교회사 교수이기에 그의 학자로서의 역량은 충분히 짐작할 만하다. 그는 16세기 스위스 종교개혁에 관련된 문헌을 거의 다 읽었다고 하는데 그렇기에 칼뱅의 맥락을 누구보다 더 잘 보여주었다. 이 책을 읽는 내내 그 맥락을 보여주니 참으로 놀라웠다. 

 

목회자 칼뱅

칼뱅은 신학자로 더 익숙하다. 그가 집대성한 <기독교 강요>가 있어서 그런지 몰라도 대표적으로 그를 학자로 인식했다. 하지만 이 전기를 읽고나니 나는 그가 목회자로서 치고박고하는 모습에 괜히 짠한 모습이 느껴졌다. 특히 제네바에서 그랬다. 칼뱅의 전기에 대한 간력한 요약은 2020/03/08 - [공부흔적] - [강의] 《신앙을 읽다》세 번째 시간: 칼뱅[칼빈](생애, 목회자 칼뱅[칼빈], 세르베투스 논쟁)을 참조하라. 대강의 칼뱅에 대한 요약해 놨다. 

 목회자 칼뱅의 진정성이 느껴지는 대목이 있었다. 바로 스위스에 전염병이 휩쓸 때였다. 1542년에 스위스에 전염병이 나돌았다. 그래서 저명한 종교개혁자들이 많이 죽기도 했다. 프랑스군이 제네바를 통과한 적이 있는데 아마 그일이 연관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어쨌든 1년 후 도시는 완전히 전염병으로 마비가 되었다. 그러니 스위스 제네바 의회는 희생자들을 돌볼 목사 한 사람을 요청했다. 이는 거의 죽으라는 소리였다. 이때 지원한 사람이 칼뱅과 세바스티앙 카스텔리오였다. 그러나 두 사람의 지원은 모두 거절당했다. 칼뱅의 경우는 교회에 절대적으로 필요했기에 제외를 시킨 것이다. 칼뱅과 카스텔리오 외에는 아무도 열의를 보이는 이가 없어서 의회는 목사들을 비난하며 그들을 모두 전염병 병원에서 봉사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당시 이 내용을 읽었을 때는 죽음을 각오하고 교인들을 돌봤구나 싶었는데 코로나 사태가 터진 이후 이 일이 그냥 막연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피부에 와닿았다. 나는 코로나 바이러스가 걸린 환자에게 다가가서 봉사할 수 있을까? 물론, 현대의학의 발달로 죽지는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렇게 긴장되는데 그 당시 목숨이 달린 일에 칼뱅은 뛰어가고 싶어 했을까. 단순히 학자가 아니라 이 사람이 목회자구나 싶었던 대표적인 대목이었다.  

 

 후대의 칼뱅주의자들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칼뱅이라고 하면 고리타분하고 강직한 인물이며 유연성이라고는 전혀 없는 인물로 생각한다. 하지만 칼뱅은 종교개혁 시기에 교회 일치를 위해서 자신의 생각을 때론 버리는 사람이기도 했다. 교회 일치를 위한 그의 움직임은 너무나 힘겨웠다. 이리치이고 저리 치였다. 교회 일치를 위해서라면 본인이 한 의견을 한발 물렸는데 되려 그 틈을 베스트팔은 강력하게 공격했다. 옛날 입장과 다르다고! 모순이라고. 개신교 일치라는 대의를 위해서 유연해진 칼뱅은 저 공격에 맥을 못추렸다(밑에 메모를 보시면 더 잘 이해가 될거다). 더군다나 세르베투스의 화형 책임이 칼뱅에게 있었다는 오명을 뒤집어 쓴 시기여서... 크ㅠ 그리고 존 녹스가 제네바 교회의 모델에 찬사를 했지만 칼뱅은 자신의 교회 조직을 강조하지도 절대적 기준으로 보지도 않았다. 이 모습들은 내가 알던 칼뱅의 모습이 아니다. 강직한 교수 포스를 내뿜는 사람이 아니라 교회에서 목회를 하며 이리저리 치이는 목회자의 모습이다. 칼뱅은 종교개혁 시기 목회를 한 것이다. 

 

세르베투스

 칼뱅을 가장 공격하는 것 중에 세르베투스를 사형시킨 것이라 할 수 있다. 간단하게 말하겠다. 칼뱅은 제네바시에서 그정도의 권한이 없었다. 사형 권한은 관원들의 몫이었다. 힘이 있는 자가 투표권도 없이 오래 지냈겠나? 그는 어디까지나 프랑스 난민이었다. 그렇다고 그의 영향력을 너무 축소해서도 안 된다. 어쨌든, 당시 출교 문제로 의회와 싸우고 있었기에 칼뱅이 의회를 이용하여 세르베투스를 죽기에 했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 고든의 글을 보겠다. 

 

칼뱅을 반대하는 이들은 숫자상으로는 소수였지만, 출판사와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엄청나게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오포리누스, 페르나 같은 이들의 지지를 받아 출판물로 자기 견해를 밝힐 수 있었고, 칼뱅의 주장과 다른 이야기를 할 수도 있었다. 처형은 심각한 불의라는 것이 이들 사이의 지배적인 분위기였는데, 비난의 대상은 제네바 의회가 아니라 칼뱅이었다. 실제 사실과 달리, 이들은 칼뱅이 세르베투스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었다고 믿기로 한 것이었다. 바젤에 거주하던 칼뱅 지지자는 다수가 칼뱅이 사형 집행인이라도 되는 양 행동했다고 주장한다며 10월 28일 불링거에게 알렸다. (406)

 

 이런 시선은 500년이 넘게 지났는데도 지속되고 있다. 여러모로 칼뱅에게 연민이 느껴진다.

 

재미났던 점

기욤 파렐과의 조우

 웃겼던 점도 있다. 파렐과의 만남이 그랬다. 칼뱅이 제네바로 가게 된 이유가 바로 기욤 파렐 때문이다. 파렐은 칼뱅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는 이토록 필요가 긴급한 상황에서 내가 한발 물러서 도와주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내가 일선에서 물러나 원했던 공부를 하는 평안을 저주하실 것이라며 위협을 퍼붓기 시작했다. 나는 공포에 질려서 진행하려던 여행을 그만두었지만, 타고난 수줍음과 소심함 때문에 어떤 특정 직무를 수행하는 의무는 무엇이든 맡지 않으려 했다."(135-136) 그러니 첫만남에서 "교회를 섬기는 일에 헌신하지 않으면 영원한 저주를 받게 된다고 위협하"(136)던 사람이 파렐이었고 결국 칼뱅은 운명의 제네바로 가게 된 것이다. 그것에서 정말로 힘겨운 시간을 보내게 되는데 파렐의 강력한 말이 아니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도 종교개혁은 상당히 다른 모습을 보였을 것이다. 

 

마르틴 부처의 소개팅

 칼뱅도 종교개혁자들과 마찬가지로 목회자의 결혼을 강력하게 주장을 했다. 그래서 마르틴 부처는 칼뱅에게 여성을 소개시켜 주려 했다. 

(마르틴) 부처가 선택한 여성이 칼뱅의 마음에 들지 않았고, 이 프랑스인은 겁에 질렸다. 부처가 실패하고 파렐이 과제를 이어받았는데, 5월이 되어 다른 여성이 후보로 물망에 올랐다. 칼뱅은 결혼을 해야 한다는 압박감 때문에 점점 짜증이 난다고 밝혔다. “나는 외모가 훌륭한 사람을 보고 첫눈에 반해서 그 사람의 단점까지도 사랑하는 얼빠진 사람이 아닙니다. 내 마음을 끄는 여인은 정숙하고 너무 까다롭지 않으며 온화하고 검소하고 인내하며 내 건강에 신경을 써 줄 것이라 기대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당연히 그런 여자는 없었다. (171-172)

 빵터졌다. 칼뱅의 의외의 모습이여서 그랬다. 그래도 후에 만난 과부와 결혼을 했고 그녀의 자녀들도 충실히 돌봤다. 칼뱅, 멋있다!

 

나가면서

 칼뱅은 근대 이전의 사람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중세와 근대 과도기인 종교개혁시기의 인물이었다. 칼뱅은 근대라는 시대를 연 사람 중에 한명이면서 그의 후예인 칼뱅주의자들은 자본주의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기에 근대에 미친 칼뱅의 흔적은 무시하지 못한다. 자본주의를 만든게 칼뱅은 아니지만 현대 자본주의 시스템을 만든 것은 칼뱅주의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경제학과 인문학을 좋아했더라면 이런 점에서 칼뱅을 더 탐구하고 싶었겠지만 성경신학을 좋아하는 나에겐 칼뱅은 그저 구닥다리 인물이었을 뿐이었다. 성서비평 이전의 인물이기에 거리가 멀게 느껴졌고 그의 글에 무슨 배울 점이 있을까 의문시 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 책을 읽고 칼뱅을 보는 시선이 달라졌다. 그는 현장과 뗄레야 뗄 수 없는 인물이기에 그의 성경해석도 마찬가지다. 그는 어디까지나 목회자로서 성경을 바라본 설교자다.

 그는 또 난민이었다. 프랑스 난민이기에 같은 난민들을 목회할 때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기라고 하기도 했다. 그런 마음이 있었는데 다시 제네바로 돌아가야 한다는 걸 알았을 땐 얼마나 마음이 무거웠을까. 제네바는 한 번 실패한 곳이고 쓰다쓴 맛은 본 곳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그 지옥같은 곳을 간 것이다. 

 여튼, 그에 대한 선입견을 벗기는 아주 좋은 책이다!

 

인물후계도


메모

책 맨 앞 표지에 

- 각자의 입장 차이로 분열과 반목, 때론 화해까지. 종교개혁의 풍경.

 

 

왕이 교회와 맺은 관계가 르네상스 정치 이론들, 법제 개혁, 인문주의자가 자극한 종교 사상을 수용하고 있던 프랑스 지성계를 장악했다. 왕권을 가장 강력하게 지지한 인물은 클로드 드 세셀과 기욤 뷔데였다. ... 데시레우스 에라스무스와 마찬가지로, 뷔데에게도 문학, 역사, 언어에 대한 인문주의적 연구는 단지 엘리트 계층의 개인적 취향이 아니었다. 이들은 바로 이 연구를 통해 사회가 신성해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뷔데는 프랑스가 로마의 영예로운 법 전통을 수용하도록 하는 새로운 길을 하나 놓았다. 그의 작업은 새로운 세대에 영감을 주고 이들을 매혹시켜, 젊은 장 칼뱅을 비롯한 수많은 학생이 법학부로 몰려들었다. (46)

- 칼뱅이 법학부로 갔는 이유를 당시 맥락에서 추정한다. 

 

 

 

 법학의 왕자들과 보낸 시간 (p. 59)

- 후에 성경주석을 쓰는데 큰 도움이 됨. 

 

 

 

상원 의원 피에르 티소는 1545년에 칼뱅이 도시 내 "아이들" 700-800명의 목을 매달아야 한다고 주장했다면서 소요를 일으켜 체포되었다. 여기서 "아이"라는 용어는 칼뱅에 반대하는 당파에 속한 이들뿐 아니라 이 군주급 주교를 타도하려던 제네바 사람들을 지칭하는 표현이었다. 1546년에는 칼뱅이 제네바 사람들을 "잔혹한 짐승"이라고 노골적으로 묘사한 후 또 다른 소요가 일어나 체포되는 이들이 줄을 이었다. 1549년에 그가 제네바 사람들을 발정기 암캐를 쫓아다니는 수캐로 비유하는 은유를 사용했을 때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두 경우 모두 칼뱅은 관원들 앞에서 설교 내용을 해명해야 했고, 주의를 들었다. 특히 제네바 통치자들을 모욕하지 말라는 경고를 받았다. (259)

-후덜덜한 시대... (설교때문에 도시 소요가 일어나다니...)

 

 

 

로마의 부패와 도덕적 사악함을 무자비하게 비난한 카토는 고집스럽고 굽히지 않으며 흠잡을 데 없는 인물이었다. 그는 자기 권력 내에서 모든 가능한 수단을 다 동원하여 로마의 삼두정치를 무너뜨리려 했고, 이것이 진노를 샀다. 르네상스 문학에서는 그를 애정 어린 마음으로 기억했지만, 칼뱅의 글은 날카로웠다. 타란학 세상에서 적응할 줄 모르는 것은 오직 실패와 파괴를 낳을 뿐이다. (281)

- 크~!(내가 왜 이런 감탄을 했는지 모르겠다...)

 

 

 

칼뱅은 조심스럽고 치밀하게, 심지어 눈속임까지 쓰면서 이를 진행했다. 독일 루터파를 의식하여 쓴 1545년 고린도전서 주석은 그가 노골적으로 밝히지 않으면서도 암묵적으로 한 진영을 지지했던 방식을 보여 준 탁월한 예다. 그는 츠빙글리파의 성찬론은 틀렸다고 강조했지만, 루터의 성찬 교리에 접근할 때는 더 미묘한 차이를 보였고, 언어도 신중히 골라 썼다. 편재 교리를 싫어하기는 했지만, 루터나 그 지지자들의 이름은 언급하지는 않았고 오히려 중세 스콜라 신학자들의 거짓된 가르침이라고 비난했다. 이는 탁월한 수사적 전략이었다. 동시에, 그리스도 임재의 실재성에 대한 주장에서도 루터의 글과의 분명한 유사성이 보이는데도 루터의 저작을 인용하지는 않았다. (305-306)

- 정치적인 노련함. 

 

 

 

그는 스위스, 특히 취리히를 고립에서 벗어나게 하고 싶었고, 더 넓은 종교개혁 운동의 일부가 되게 하고 싶었다. 그가 생각하기에 이를 가능하게 할 유일한 길은 일치를 위해 유연해지는 것이었다. ... 칼뱅은 일치라는 대의를 위한 합의에 이를 수 있다면 기꺼이 바뀔 준비가 되어 있었다. (325)

- 칼뱅이!!!(모두 칼뱅이라고 하면 타협할 수 없는 강직한 성격의 소유자로 생각할 텐데 그는 대단히 유연함과 노련함이 생겼다.)

 

 

 

칼뱅은 이런 비판을 참을 수 없었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서 핵심인 교리 하나가 새로 만들어진 것이라거나 인간의 어리석음을 드러낸 너무 앞서 나간 행위라는 식의 주장에 칼뱅은 자극을 받아 분노의 답장을 써 보냈다. (372)

- 문득, 이 시대에 SNS가 있었다면...

 

 

 

격앙된 채 작성한 이 편지는 그의 의도보다는 인격을 보여 준다. 칼뱅은 서로 간에 이룬 합의를 지키기 위해 위험을 무릅썼으나 불링거가 무관심하다고 여겨 상처를 입었고, 인간적으로 서운함을 느꼈다. 물론 취리히의 지지가 필요했기에, 포기할 마음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체 프로테스탄트의 일치를 위한 계획이 스위스의 지지를 계속 지켜 내야 한다는 당위 때문에 교착 상태에 있다는 것이 더 분명해졌다. (441)

- 교회 일치를 위한 칼뱅의 움직임ㅠㅠ 짠하다. 

 

 

 

1550년 중반 프랑스에서 프로테스탄트에 대한 핍박이 격해지자, 칼뱅은 프랑스 왕에 청원하기 위해서 일치된 프로테스탄트 전선을 형성해야 한다고 확신하고 이 일에 더 열심을 냈다. 그러나 극히 어려운 과업이었다. 베스트팔을 무찔러야 했고, 모든 프로테스탄트가 모이는 회담이 가치가 있다는 블링거와 멜란히톤을 두 사람을 모두 설득해야 했다. 칼뱅은 프로테트탄트 세계가 한 목소리를 내기 원했고, 이를 성취하기 위해 어느 정도는 신학적으로 유연한 태도를 보이면서 소로를 관용하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그가 보기에 더 큰 대의는 바로 일치였다. 베스트팔 사례가 보여 주었듯, 교리는 필수불가결한 것이지만 그럼에도 스위스 교회들과 멜란히톤을 따르는 이들 간의 큰 차이는 별로 크지 않다고 믿었다. (443)

- 오히려 대의를 위해 자신의 것을 양보한 사람은 칼배이다. 

 

 

 

그는 완전히 얕잡아 봤던 베스트팔과의 싸움에서 패했다. (445)

- 일치를 위해 유연한 입장을 펼쳐야 했던 칼뱅이었다. 그런데 베스트팔은 그 약점을 잘 이용했다. 처음 입장과 다른 모순이라고.(p. 424- 자세히)

 

 

 

그는 자신의 견해를 교회 조직에 강요한 적이 없으며, 녹스의 찬사에도 불구하고 제네바를 절대적인 기준으로 인식하지도 않았다. 칼뱅의 국제 사역은 가시적 교회는 외형으로가 아니라 교리로 일치되어야 한다는 변치 않는 믿음에서 비롯되었다. 칼뱅은 살아생전에 그런 일치를 거의 보지 못했지만, 그가 쓴 작품이 엄청나게 인쇄되었기 때문에 죽어서도 이 일치를 위해 일한 가장 두드러진 변호자로 남을 수 있었다. (490)

- 크~ 이것이 칼뱅이다. 

 

 

 

1558년, 거의 35년의 우정을 쌓은 기욤 파렐과 관계는 비극적 종말을 맞았다. 69세의 파렐은 그의 집에서 안식처를 제공받아, 과부가 된 어머니와 남자 형제와 함께 살던 16살 소녀에게 청혼했다. 이 추문을 들은 칼뱅은 충격을 받고, 친구들에게 파렐의 정신이 불안정하다고까지 말했다. (500)

- 그럴만 했네...

 

 

 

16세기 설교는 선술집에서 말하는 것과 비슷했다. 설교자는 짖고 있는 개, 울고 있는 아기, 잡담, 계속 왔다 갔다 이동하는 사람, 심지어 주먹 다툼과도 경쟁해야 했다. 이들은 참석한 이들에게 설교자를 존중하라고 요청해야 했고, 이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수단은 목소리였다. ... 그는(칼뱅) 원고가 거의 없거나 아예 없이 설교했고, 주로 성경 한 권만 앞에 두고 설교했다.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의 삶의 순간에 적용했듯이, 순전한 즉흥성이 경험의 본질적 일부이기도 했다. 또한 시간의 문제이기도 했다. 끊임없이 밀려드는 수많은 일을 감당해야 했기에, 칼뱅은 시간을 두고 설교를 준비하는 사치를 누릴 수 없었다. 그래서 즉흥 설교를 할 수밖에 없었다. (516-517)

- ?!(칼뱅이 즉흥 설교를 했다. 완전 준비 철저히 해서 설교할 사람 같은데. 그리고 이 당시에는 설교를 이렇게 들었다니. 목소리가 작은 나같은 사람은 정말 목사를 못했겠다. 그리고 지금은 앉아서 조용히 듣고 계시는 성도님들께 참 감사드린다. 주무시는 것도 감사할 따름이다.) 

 

 

 

따라서 정부는 부당하게 폭리를 취하는 행위를 막기 위해 개입해야 한다. 칼뱅은 신용 대출에 5퍼센트의 세금을 매겨애 한다고 주장했고, 공립은행 설립을 지지했다. 그러나 이와 더불어 음식 가격 통제, 공정한 노동 임금, 더 나은 작업 환경을 위한 활동도 벌였다. (526)

- 크 ~ 칼뱅의 공공정책!

 

 

 

칼뱅이 가장 두려워하며 경계한 개인숭배의 징조가 도시에 빠른 속도로 나타났다. 이를 저지하기 위해 칼뱅의 시신은 다음 날 아침 플랭팔레 묘지에 매장되었다. 수의를 입힌 시신을 나무 관에 넣고, 칼뱅이 요청한 대로 아무 표시도 없는 무덤에 안장했다. 베즈가 언급한 대로, 이 모든 것은 "건전히 못한 호기심"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매장 당시 고위관료와 시민 다수가 현장에 참석했고, 장례식은 적당히 간소했다. (589)

- 칼뱅다움

 

 


책 맛보기

 

세네카 주석은 실패했지만 <기독교강요>는 정반대였다. 출간 즉시 성공을 거두었고, 프로테스탄트 세계 전역에서 찬사가 잇따랐다. <기독교강요>는 칼뱅의 자아 인식에 거대한 변화를 가져왔다. <영혼의 잠>에서 칼뱅은 성경의 언어, 무엇보다도 바울의 언어로 말하는 법을 배웠다. 이제 그는 자신을 교회를 고치는 의사라고 표현했다. 또한 말씀에 대한 학식이 풍성한 해석자로서 믿는 이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131-132)


부처는 협상과 타협을 통해 개혁 성향의 가톨릭 신자들을 복음으로 이끄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었다. 칼뱅은 바로 이 생각을 위험하게 여겨서, 이런 말장난에 신물을 느끼고 보름스를 떠날 무렵 스트라스부르식 접근법과 결별하기 시작했다. 그에게 정말 많은 것을 베푼 도시를 떠날 시간인 것 같았다. 종교개혁자들 간에 주고받은 모든 멋진 말 안에서 쓰라린 진실이 일부 드러나고 있었다. 회의에 계속 참석하고 있던 칼뱅은 그가 쓴 것으로 알려진 유일한 시 구절을 통해 울분을 토로했다. '승리의 노래'라는 제목의 긴 시는 1541년 첫날 쓰인 것으로, 전쟁의 이미지를 사용해 그리스도가 복수하신다며 로마 가톨릭교회에 대한 증오를 무시무시하게 표현하고 있다. (195)


인간이 하나님을 움직여 그들에게 생명을 가져오는 은혜를 베푸스게 만들 수는 없지만 수동적으로 머물러서도 안 된다. 받는다는 것은 곧 반응하는 것이다. (216)


하나님을 아는 것은 구원에 필수적이지만, 과도하면 헛되이 사람을 끌어들이고 호기심에 해를 입힌다. 적절한 균형이 필요한데, 칼뱅은 성경에 계시된 것을 받아들이는 데서 균형이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 외에 [예정에 대해] 아무것도 알고자 하지 않는 것을 거룩한 원칙으로 삼자. 즉 주님이 거룩한 입을 닫으시면, 우리도 더 이상 가지 말고 멈추자. 그러나 우리는 사람이므로 어리석은 질문들이 자연스럽게 떠오를 때는 이 질문들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 바울에게 들어 보자." 그럼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이 신자를 택하신다는 것, 그분의 선택 없이 구원은 없다는 것, 인간의 공로는 선택과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 하나님은 결코 부름받은 자를 버리지 않으신다는 것은 알 수 있다. (220)


그는 프랑스인이었기 때문에 지위가 약했고 많은 이로부터 경멸도 받았지만, 이 사실을 너무 과장해서도 안 된다. 제네바의 모든 사람이 강단에 선 칼뱅의 청중이었고, 이들은 분명 칼뱅이 하는 말에 귀를 기울였다. (266)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공통의 대의가 공유되기만 한다면, 우정에는 의견 차가 허용되었다. (323)


그렇다면 칼뱅 개인은 어떠했을까? 중형 선고를 지지해 달라고 스위스 동료들에게 요청함으로써, 재판 과정에서 분명 중요한 역할을 했다. 뼛속까지 세르베투스를 혐오했다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칼뱅은 이 사람을 이기려고 결심했고 논쟁에서 그를 괴멸시켰다. 세르베투스가 기소되기를 원했고, 아마도 결국에는 죽기를 바랐을 것이다. 재판은 상호 적대감만 키웠다. 그러나 칼뱅이 세르베투스를 처영할 수는 없었다. 이는 의회의 일이었는데, 의회는 칼뱅에게 호의적이지 않았고 출교 문제로 칼뱅과 분쟁 중에 있었다. 세르베투스 사건으로 관원들의 권위가 칼뱅보다 강하다는 것이 드러났고, 사형 선고를 받은 세르베투스를 칼로 처형하자는 칼뱅의 요청이 거부된 것은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401-402) 


유언에서 칼뱅은 자신의 약점에 주목했다. "... 이제 나는 내 존재와 행동이 모든 면에서 불완전하다는 것을 잘 안다." ... 이는 칼뱅의 분열된 자아였다. 즉 그에게는 현재 자신의 무가치함에 대한 인식과 불만족, 그와 대조되는 예언자 및 사도로서의 부르심에 대한 확신이 있었다. ... 교회의 일치를 추구하며 위험한 길을 끊임없이 돌아다니게 한 것이 바로 이러한 분열이었다. (590-591)


1583년 제네바는 사부아 공의 군사적 위협 아래 있었다. 그때 베즈는 잉글랜드에 대표단을 파견해서 재정 지원을 요청했다. 엘리자베스는 칼뱅에게 냉담했지만 모금된 액수는 경이로울 정도로 많았는데, 한때 피난처를 제공하고 기독교 신앙을 가르쳐 준 한 도시와 한 사람에게 한 나라가 보이는 뜨거운 감사의 표시였다. (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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