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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리뷰/인물

[책리뷰] 노무현 재단 엮음,유시민 정리 - 운명이다(노무현 자서전)

by 카리안zz 2020. 3.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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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낀 점

 2009년 5월 23일 노무현 대통령이 서거를 하셨다. 나는 이 당시 군인이었다. 아마 상병이었고, 주말 근무를 서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갑자기 노무현 대통령이 서거하셨다는 뉴스가 속보로 떴다. 사실 군대에 있으면서 광우병 시위가 얼마나 대단한지도 몰랐고,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검찰의 수사가 그렇기 무지막지한지도 몰랐다. 나에겐 그때 그냥 유명한 사람이, 그것도 대통령이었던 사람이 죽은 것이었다. 

 그리고 대학에 복학을 했고 '세상을 이기는 지성'이라는 단체의 사람이 학교에서 리더십 수업 강의를 했다. 거기에서 북한 인권이니 뭐시기를 아주 호소력있게 강의했다. 김ㅅㅇ이라는 사람 역시도 강사로 왔었다. 여러 강연과 토론에 나왔던 사람인데 후에 보니 국정원 끄나풀이라는 의혹이 있다. 여튼, 북한 인권 강의를 듣고 난 뒤 나는 열렬한 극우신자가 되었다. 주사파니 뭐시기 지금 떠도는 레파토리를 당시 강의하던 사람들 중 몇몇이 언급하고 떠난 뒤였다. 종북이라는 단어는 그 당시에 썼는지 기억이 나질 않지만 어쨌던 빨갱이로 몰아갔다. 몇 몇 정치인들의 과거행적을 보여주고 빨갱이라고 하는 거였다. 당시 대학생이던 나는 그 선동에 넘어갔었다. 

 아버지는 열렬한 노빠다. 그러니 나의 이 사상과 충돌이 하였다. 그때 선거기간 아버지가 말다툼을 했던 기억이 난다. 나는 노무현에 대해서 그럼에도 자살은 하면 안 되었다고 막 얘기를 했고 아버지는 자신의 모든 것을 잃은 사람이, 그것도 자존심이 참 강했던 사람이 스스로 목숨을 끊게 된 연유를 살펴봐야 하지 않냐고 말했다. 참 그때 웃겼던 것은 대구 토박이 50대 아버지는 민주당을 지지하셨고 20대 나는 극우를 지지하고 있었다. 물론 다행히 나는 2012년 박근혜를 찍지 않고 거의 무효표로 4번 후보를 뽑았다. 지금은 후회하지만...

 당시 나는 노무현이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전혀 몰랐다. 그가 받았던 수사가 어떤 수사였고 왜 자살에 이르기까지 했는지 나는 전혀 몰랐다. 그에게 사람들이 왜 열광을 했는지 몰랐다. 그가 살아온 삶이 어떤 삶이었는지 전혀 알려 하지 않았고 막연한 비판에 휩쓸려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학교를 편입하고 나꼼수라는 팟캐스트가 한창 유행을 했었다. 나는 그때 리트머스라는 진보 필진의 글들이 참 좋았다. 한윤형의 글이 제일 좋았고 허지웅 역시도 여기에서 이름을 계속 날리고 있었을 때였다. 아마 이때쯤 나는 극우의 말들이 개소리라는 것을 인지하기 시작했고 양비론적인 입장에서 정치를 바라봤다. 지금 민주당빼고 다 찍자라는 선동을 아마 그때의 나였으면 그렇게 주장을 했을 것이다. 나꼼수 김어준의 주장이 터무니 없이 들렸고 리트머스 필진들의 글들이 더 설득력 있게 보였다. 물론, 박근혜 정부 시기를 지나며 나의 생각은 전혀 달라지기 시작했다. 특히 세월호 사건이 결정적이었던 것 같다. 박근혜 정권을 지나오며 나는 나꼼수가 맞았다고 생각을 바꾸었다. 물론, 뉴스공장을 진행하기 전의 김어준은 확실히 음모론자적인 기질이 있었다. 그만큼 감이 좋은 사람이긴 했다. 황우석, 세월호 사건, 투표부정 의혹에서 헛발질을 크게 하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문재인 대통령을 재야에서 정치계로 입문시킨 것은 김어준이었고 이명박, 박근혜 정부에서 그만큼 싸워온 사람도 김어준이었다. 어느 정도 까방권을 줘야...ㅎㅎ 손석희의 시선집중을 2012년에는 거의 매일 들었는데 이후 그가 Jtbc로 가면서 듣는 시사프로는 없어졌다. 뭐 노유진의 정치카페를 즐겨 듣곤 했다. 최근에는 이슈별로 듣는데 김어준의 뉴스공장을 종종 듣는다. 필요할 땐 다스뵈이다까지 본다. 확실히 뉴스공장을 하고 난 후 김어준은 조금 달라지지 않았나 싶다. 나꼼수를 듣지 않아서 김어준을 잘 모르겠지만 진보괴물처럼 자신의 말만 하는 사람은 전혀 아니다. 날카롭다. 이 바닥에서 오래 살아남은 연륜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 

 

 여튼, 노무현 대통령의 일대기를 이이제이편을 듣고 감동을 받아서 이 책을 읽어야겠다고 다짐했었다. 먼저 그 전에 왜 유시민 씨가 어용지식인 선언을 했는지 이 점은 다뤄봐야 할 것 같다. 

 

유시민, 어용지식인 선언?

 문재인 정권이 출범하고 유시민 씨가 어딘가에서(김어준의 다스뵈이다로 기억한다) 어용지식인 선언을 했다. 왜 그랬을까? 이는 참여정부를 알아야 한다. 참여정부는 좌에서나 우에서나 다 까였던 정부였다. 좌파는 좌파대로 우파는 우파대로 깠다. 좌회전 깜빡이 켜서 우회전한다는 비판이 이를 보여준다. 이때 참여정부를 지지했던 사람들의 마음은 이랬다고 한다. 정부가 잘 되기 위해선 비판을 해야한다고. 그래서 서슬퍼렀게 비판을 했다. 그게 다 정부가 잘 되라는 마음에서. 또, 힘을 가진 정부라면 견제도 당연히 필요하니깐. 그런데 보수 일간지의 공격력과 그 반동은 상상을 초월했다. 보수 일간지의 그 공격을 이명박, 박근혜 때는 거의 사라졌다 싶이 했다. 보수 언론의 엄청난 공격을 당시 참여정부 사람들은 이정도일지 몰랐던 것이다. 

 그때의 기억이 유시민과 참여정부를 지지했던 사람들은 가지고 있다. 특히나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이 이들의 마음에 부채의식을 지니게 했다. 노무현을 지키지 못했다는 상처 말이다. 유시민의 어용지식이 발언은 이 맥락에서 있다. 다 욕하고 외면하고 똑바로 기사를 안 써주는데 나라도 지켜야 되지 않겠나. 조국 사태로 인해 벌어진 이 참상들을 보니(나는 조국 자체가 그렇게 깨끗한 인물인지는 모르겠다. 여태 강남좌파라는 비판을 받았는데 본인 역시도 그 비판을 수용하며 자신을 돌아보지 못한 점도 크다. 하지만 이 문제와 검찰이 들추는 일은 전혀 다른 문제다. 검찰이 보이는 형태는 정말이지 자신들을 견제하려는 사람이 오니까 찍어누르기 방식을 보여준다. 온 언론을 동원하여 조국 죽이기에 나섰다. 유시민의 말처럼 그의 도덕적 책임을 묻는 것에서 끝나야할 사안이 자한당과 검찰의 꽃놀이패를 만들어 주었다.) 그의 주장이 옳았다고 생각한다.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들

 나는 그의 삶에 있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먼저 종로구 선거에 나가지 않고 부산으로 출마한 것이다. 정치 1번지 종로구에 나가서 재선에 도전할 수 있었다. 그의 정치 인생에서 그 방법이 가장 위로 올라가는데 현명한 방법이었다. 그러나 그는 부산으로 내려갔다. 왜 그랬을까? 앞으로 지역주의를 타파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보장된 자기 미래를 버리고 그는 부산으로 간 것이다. 가족들이 다 말렸다고 한다. 이제 좀 살만해 졌는데 부산으로 내려간다니. 바보였다. 그렇다. 사람들이 그를 바보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람들이 그에게 감동을 받았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하나님의 일을 집중적으로 한다는 나같은 사역자도 내 미래를 위해 대형교회를 갈까, 어느 교회에서 스펙을 쌓을까, 학위를 해야할까, 그런 고민을 하고 있는데 그의 삶은 나를 참 비참하게 만들었다. 어쩌면 지금 나의 선택은 그의 삶의 이야기에 어느 정도 동했던 영향이 있었다. 문재인 대통령 역시도 마찬가지다. 그는 사법연수원 2등을 해서 자신이 판사, 검사 다 할 수 있지만(이 당시는 대부분 판사를 했다고 한다. 판사 정원이 사법 연수원 인원과 큰 차이가 없어라고 본 거 같다.) 그는 시위 경력때문에 판사도 검사도 되지 못했다. 그래서 당시 대형 로펌에서 그를 스카웃하려고 했지만 그는 거절하고 노무현에게 간 것이다. 두 사람의 그 선택이 참 나를 부끄럽게 했다. 

 

 이 외에도 2002년 대선 레이스 역시도 스펙타클했다. 거의 지지율이 없던 사람이 1등이 되었다. 그 사이에 나온 명언들이 있지 않을가. 상대 후보의 빨갱이 공격이 노무현은 "그럼 내 아내를 버리란 말입니까?" 참으로 달변가가 아닐 수 없다. 나는 그것이 계획된 수사가 아닌 노무현의 마음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러니 많은 사람들이 노무현이라는 사람에게 매력을 느낀 것이다. 

 

 청문회때 정주영 회장을 매섭게 몰아부쳐 청문회 스타가 되었고, 김영삼의 3당합당에선 "이의 있습니다!"로 자신의 정치적 은인인 김영삼이었지만 정의롭지 않은 모습에 반기를 들었던 모습이 있다. 퇴임 후 자전거를 타고 다닌 모습까지 다양한 기억들이 남는다. 그리고 서거. 

 

노무현은 왜 그런 선택을...

 검찰은 노무현만을 판 것이 아니다. 노무현의 주변 인물들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검찰 조사를 받다가 자살하는 사례들을 자주 접한다. 그 심리적 압박이 얼마나 강한지 조사를 받는 사람들은 대단히 긴장을 한다. 자신만 죽이면 되는데 주변 사람들을 죽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윤리적으로 강한 자부심을 가진 노무현 대통령이었지만 자신의 아내가 뇌물을 받았다는 사실에 대단히 큰 충격이었나 보다. 그러한 점들을 하나하나 검찰이 밝혀나가니 노무현 대통령의 심리적 압박을 작정하고 한 것이다. 

 

청와대를 떠난 후 정치인 노무현을 후원했던 기업인들이 숱하게 특별세무조사를 당했다. 검찰 수사까지 받아 회사가 망하는 지경으로 가는 것도 보았다. 다르게 했더라면 이런 사태를 막을 수 있었을까? 내가 과연 잘못한 것일까? 민주주의 교과서가 말하는 그대로 헌법과 법률에 따라 권력을 운용하려 했던 나의 선택이 어리석었던 것일까? 아니다 내가 대통령으로 있으면서 권력기관을 정치적으로 악용했더라도, 영구집권을 하지 못하는 한 언젠가는 마찬가지 수모를 겪었을 것이다. 만약 그랬다면 항변할 자격조차 없었을 것이다. 국세청과 검찰에게 당한 수모보다 더 아프고 슬픈 것은, 올바른 이상을 추구한 행위를 어리석은 짓으로 모욕하는 세태, 그런 현실을 보는 것이다. (294)

 

 그 주변인물들 중 강금원 회장이 참으로 안타까운 피해자였다. 이명박은 지금도 보석으로 잘 풀려나고 박근혜, 이상득이나 힘있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몸이 아파서 밖으로 잘 나왔는데 왜 강금원 회장에게는 유독 날카로웠을까. 뇌종양이 악화되어서 보석을 신청했지만 거부되었다. 그러다 노무현 대통령이 죽자 보석이 받아드려져 수술을 했다. 혹자는 수술의 시기가 늦어져서 그 후유증으로 몇 년 뒤 죽은 것이라고 말했다. 이렇게 주변인들을 건드리니 노무현 대통령은 자신만 죽으면 된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논두렁 시계라는 공격은 심리학자인가가 설계를 했다는데 어쩌면 검찰은 정말 죽일 각오로 덤벼들었던 것일까. 

 왜 지금 정권이 검찰개혁에 목을 매는지 참여정부를 모른다면 이해되지 않을 것이다. 문재인 정권도 앞서 이명박, 박근혜처럼 민정수석을 검찰 총장 다음 자리로 만들었다면 사실 이런 사단은 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검찰도 통제가 되었겠지. 그렇게 하지 않은 이 정권은 후에 역사가 알아줄 것이다. 나는 지금 그 시도를 박수쳐 주고 싶다. 

나가면서

 몇 년 전 강용석이 예능 티비에서 한 말이 생각난다. 좌우의 만남이라는 컨셉이었던 것 같은데 거기에서 강용석은 자시은 노무현을 대통령으로 인정하지 않는다고 했다. 나는 지금보니 이 엘리트(물론, 강용석은 입지전적인 인물이긴 하다. 아버지가 범죄자여서 그는 판사인가 검사인가를 못한 것으로 안다. 혼자 공부하며 서울대 법대와 사법고시를 합격했다)들, 서울대 법대 - 사법고시 합격자들은 노무현이 얼마나 우습겠는가. 고졸 출신의 판사 잠깐한 변호사다. 핵상류층과 상류계층들이 이 낮은 출신의 잡놈인 노무현을 인정하고 싶었을까. 그러나 오랜 시간 시간이 지나고 있다. 노무현에 대한 향수는 더욱 짙어지고 있다. 다시는 이런 대통령을 우린 만나지 못할 것이다. 노무현이라는 사람이 우리 나라 대통령이여서 나는 참 자랑스럽다. 

 

 


책 맛보기

 

아버지는 일본에서 사업을 할 때 기독교 신앙을 얻어 교회에 열심히 다녔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어린 나를 읍내 교회에 나가게 하셨다. (리디북스 아이패드 기준 43)


모든 사람을 책임 있는 주체로 참여시켜야 사회가 건전하게 발전할 수 있다. (59)


"노무현의 친구 문재인이 아니고 문재인의 친구 노무현"이라고 한 것은 그저 해 본 소리가 아니다. 나이는 나보다 젊지만 나는 언제나 그를 친구로 생각했다. 그와 함께 한 모든 일들이 나에게는 큰 기쁨이며 영광이었다. 이 말은 문재인 개인에 대한 것만이 아닌지도 모른다. 부족했던 나를 민주화운동으로 이끌어 주고 내가 정치권으로 떠난 뒤에도 굳건하게 부산을 지켰던, 부산 지역 시민사회의 지도자들, 그리고 그 뜨거웠던 6월의 밤 아스팔트 위에서 독재타도를 외쳤던 부산의 이름 모를 수많은 시민들 모두에게 바치는 헌사이기도 하다. (86)


산재사건 증인으로 법정에 나온 노동자가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하는 일이 있었다. 너무 시끄러운 작업장에서 일한 탓에 난청이 된 것이다. 자기 자신도 산업재해 피해자이면서 그것을 인식하지도 못한 채 다른 사람의 산재사건 증인으로 나온 노동자, 산재사건 재판을 하면서 산재로 난청이 된 증인이 말귀를 알아듣지 못한다고 짜증을 내는 판사와 변호사, 모두가 부조리극에 나온 배우 같았다. 나도 가해자의 한 사람인 것 같아서 참담한 기분이었다. 지금까지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일들이 자꾸 마음에 걸렸다. 변호사로서 쉽게 돈을 버는 것이 죄 짓는 일처럼 느껴졌다. (87)


"국무위원 여러분, 아직도 경제 발전을 위해서, 케이크를 더 크게 하기 위해서, 노동자의 희생이 계속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그런 발상을 가진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겠습니다. 니네들 자식 데려다가 죽이란 말야! 춥고 배고프고 힘없는 노동자들 말고, 바로 당신들 자식 데려다가 현장에서 죽이면서 이 나라 경제를 발전시키란 말야!" (106)


내가 <조선일보>와 벌였던 그 기나긴 '전쟁'의 서막이 열렸다. 그것은 내가 죽을 때까지 끝날 수 없는 싸움이었고, 정치인이 겨코 이길 수 없는 싸움이었다. 그러나 비굴하지 않게, 떳떳하게 살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또한 피할 수 없는 전쟁이었다. 내가 싸움을 건 것은 아니다. 다만 피하지 않았을 뿐이다. (123)


김영상 대통령과 이회창 씨는 원래 서로가 서로를 용납할 수 없는 관계였다. 이회창 씨는 대쪽이라는 이미지로 김영삼 대통령의 초법적 국정운영에 반기를 들어 인기를 얻었던 사람이다. 그런 두 사람이 절묘하게 타협을 한 것이다. 그 두 사람으로 하여금 손을 잡게 만들었던 것은 대구와 충청도와 이반이었다. 지역주의에 기반을 둔 정치를 하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다. 그때까지 조선 건국 이래 600년 역사에서 한 번도 제대로 된 정권교체가 없었다. 권력의 편에 서야만 비로소 권력을 이어받을 수 있었던 역사였다. 권력에 맞섰던 사람 가운데 패가망신하지 않은 사람이 없다. 자손들의 앞길까지도 막아 버렸다. 적어도 무사하게 밥이라도 먹고 살려면 권력이 무슨 짓을 하더라도 시비를 가리지 말고 납작 엎드려 살아야 했던 기회주의 역사가 무려 600년이었다. 결국 이회창 씨도 조순 씨도 권력에 줄을 서야 권력을 잡을 수 있다는 생각으로 그쪽으로 간 것이 아닌가. (146)


그런데 여당이 되고 보니 전혀 다른 과제가 주어졌다. 국가와 국민을 위험에서 보호하는 일, 사회적 대립과 갈등을 조정하고 해결하는 일이었다. 특히 법률과 제도가 미비한 상태에서 처음 겪는 갈등이 생겼을 때, 그것을 합리적으로 풀어 나감으로써 새로운 모범을 만드는 일이 매우 중요했다. 그런 경험이 축적되어야 합리적 갈등 조정 시스템과 문화가 자리 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160)


행사를 마친 다음 조합에 가서 간부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때 어떤 조합원이 계란을 던졌다. 망신을 당한 셈이지만 서운하지는 않았다. 기자들이 소감을 묻기에 이런 취지로 대답했다. "얼마나 절박하면 그렇게 했겠습니까. 그 사람들 심정을 이해합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내가 노조 편만 든다고 불편하게 생각했던 사람들이 그 장면을 보고 생각을 달리 하게 되었다는 말을 들었다. 그 말을 들으니 서글퍼졌다. 꼭 그렇게 편을 갈라야 할까? 노동자에게 계란 맞았다고 나를 좋게 보기보다는 던진 사람의 절박한 심정을 한 번이라도 생각해 줄 수는 없는 것일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167)


다만 눈앞의 이익보다는 멀리 볼 때 가치 있는 것을 선택했을 뿐이다. 당자은 손해가 되는 일이 멀리 보면 이익이 될 수가 있다. 정치하는 사람들 모두 '바보처럼' 살면 나라가 잘 될 것이다. (171)


피의자로 조사를 받은 그 긴 시간 내낸 검찰청사 앞에서 노란풍선을 들고 기다려 주었다. 노무현을 버리라고 간곡하게 부탁했지만, 끝내 내 말을 듣지 않았다. 그들은 내 말에 따라 행동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네가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말하고 행동했다. 그것이 노사모였다. (175)


비가 오지 않아도, 비가 너무 많이 내려도, 다 내 책임인 것 같았다. 아홉 시 뉴스를 보고 있으면 어느 것 하나 대통령 책임 아닌 것이 없었다. (318)


이명박 대통령의 청와대와 검찰, 조중동을 비롯한 보수언론은 나의 실패를 진보의 실패라고 조롱했다. 노무현의 인생만이 아니라 부림사건 변론을 맡았던 이래 내가 했던 모든 것을 모욕하고 저주했다. 민주화운동과 시민운동, 그리고 대통령직 5년을 포함한 정치 20년, 그 모든 것에 침을 뱉었다. 재판이 다 끝날 때까지 그런 일이 끝없이 되풀이 될 것이다. 그들은 나의 실패를 진보의 실패로 만들 것이다. 나는 처음부터 이것이 가장 두려웠다. 그래서 수십 년 동안 나를 도와주고 나와 함께 무엇인가를 도모했던 분들을 향해 말했다. 노무현의 실패가 진보의 실패는 아니라고. 노무현은 이미 정의니 진보니 하는 아름다운 이상과 어울리지 않는 이름이 되었다고. 노무현은 헤어날 수 없는 수렁에 빠졌으니 노무현을 버리라고. (352)


그는 자기 자신 말고는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사람이었다. 물려받은 재산이 없었다. 화려한 학력도 없었다. 힘있는 친구도 없었다. 고통 받는 이웃에 대한 연민, 반칙을 자행하는 자에 대한 분노, 정의가 승리한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려는 열정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3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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