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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리뷰/역사

[책리뷰] 로저 E. 올슨 - 신학 논쟁

by 카리안zz 2020. 3.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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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낀 점

 이 책 일단 재미있다. 역사신학자의 재미있는 작업이었다. 신학자들의 대화를 통해서 신학을 배운다. 초대, 중세, 근대, 현대까지 아우르기에 신학을 처음 접하는 이들에게는 적격이다. 재미있기까지 하니깐. 긴 호흡이 필요하지만 한 챕터 한 챕터 인내심을 가진다면 현대까지 금방 올 것이다. 
 현대에 와서는 계몽주의 이후 근대의 질문에 대한 답변을 해야 한다. 근대 이후로는 전과 같은 대답을 할 수 있을까 싶다. 단순히 근대를 비판한다고 끝일까. 근대 곧 모던의 한계는 포스트 모던이 잘 지적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걸 수용하지는 않는다(제임스 스미스는 수용한다. <누가 포스트모더니즘을 두려워하는가?> 이 책인데 절판이라 아쉽다. 앤서니 티슬턴의 <성경해석학 개론>에서 티슬턴이 어느 정도 평가를 한다.) 현대의 신학자들이 내놓는 대답은 알겠지만... 여튼 이 비평이라는 도구를 일찍이 맛보아서 다행이다. 우리는 그래도 어느 정도 면역력이 생겼기에 적어도 성서학에서는 조금 다행이랄까 싶다. 나빌 쿠레쉬의 자서전에서도 나왔듯이 이슬람은 이 비평이라는 작업에 훅 갈 수 있을거 같다. 
 여튼, 다른 쓸 말이 있었던 거 같은데 벌써 기억이. 여튼, 신학사에서 꼭 알아야 할 개념들이 잘 나와있다. 비교, 대조까지. 유익한 책이다. (올슨은 아르마니안주의자인데 그가 설명하는 자신의 전통을 한번 유심히 읽어보면 좋을 듯하다.) 

 

 아! 곧 신학기가 시작될 것인데 그때 신학을 처음 접하는 분들은 이 책을 보라고 추천하고 싶다. 핵심과 재미를 함께 잡을 수 있다. 

 

책 활용법

 일 전에 이 책을 가지고 스터디를 한 적이 있다. 나는 25장 "20세기 신학자 불트만과 판넨베르크가 신앙, 신화, 예수 부활에 관해 논쟁하다"를 가지고 썰을 풀었다. 그 작업을 공유하겠다. 

 

 

신학논쟁

(2520세기 신학자 불트만과 판넨베르크가 신앙, 신화, 예수 부활에 관해 논쟁하다)

 

불트만

성경을 신화로 보고자 했고 문자 그대로 해석하기보다는 초월적 실재와 인간 실존에 관한 이야기나 상징으로 해석하길 원했다.(p. 545)(필자 주 - “비신화화는 신화의 색채를 걷어내면 성경이 말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불트만이 자유주의 방법론을 다 받아드렸다면 비신화화는 할 의미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자유주의는 성경의 신화적인 부분을 허구로 보며 의미가 없고 성경의 가치는 윤리적인 부분만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들이 구성한 역사적 예수는 윤리적인 예수일 뿐이다.)

 

(필자 주 - 작년 불트만을 공부할 때 기억을 참조로 서술했음. 그래서 오류가 있을 수 있음. 자료가 집에 있는지라...)

본래적 실존 - 하이데거가 말한 개념이다. 인간은 불안과 죽음을 통해서 한계랄까 인간 본래의 존재를 느끼는 자가 본래적 실존을 아는(?) 겪는(?) 아니면 그냥 본래적 실존이라 볼 수 있다. 그것이 아닌 존재는 비본래적 실존이다.

불트만은 여기에서 본래적 실존을 복음과 연결시켜 그리스도인이라 보고 비본래적 실존을 비그리스도인으로 보았다(김동건 아니면 김균진의 책에서 본 기억이, 554에서 조금 설명해줌). 성경의 비신화화는 신약성경 안에 있는 신화를 인간 존재에 관한 복음으로 해석하려는 데 있다.(546)

불트만은 당시의 계몽주의의 분위기 속에서 복음을 고민한 흔적이 보인다. 올슨의 설명처럼 불트만 당시의 사람들은(불트만 포함) 성경에 나오는 초자연적인 행동을 믿지 않는 시대라고 생각을 했다. 하지만 불트만은 자유주의자들처럼 성경을 난도질하지는 않았다. 그 속에서 성경의 의미를 찾으려고 한 것이다. 그래서 나온 것이 비신화화이며 그 작업을 통해서 성경이 하나님과 인간에 관한 매우 중요한 사실을 말해준다고 생각했다.(546)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

판넨은 불트만의 실존주의적 해석을 반대한다. 특히나 부활을 신화로 보는 그의 견해를 공개적으로 반대한다. 그는 예수의 부활을 역사적으로 입증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는 보편역사를 신적 계시로 간주한다. 하나님은 역사 안에서 유일무이하고 반복적이지 않은 사건들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신다.(547)

 

, 불트만이 복음을 주관화시키면서 복음을 인간 실존에 관한 메시지로 만든 것을 비판한다. 인간의 실존의 중심에는 개인과 개인의 자기-이해가 있다. 그것은 내적 역사즉 역사학에 의해 연구되지 않는 개인의 역사에 관한 것이다. 반면, 판넨은 복음을 객관화한다. 복음을 외적 역사(게쉬테, 사실로서의 역사,와 히스토리에) 안에서,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자신을 계시하는 하나님에 관한 메시지다. 그러므로 복음은 공식 기록에 관한 문제지, 단순히 믿음에 관한 문제만은 아니다.(547-8)

(필자 주 - 불트만과 판넨은 이렇게 확연히 차이가 난다. 주관을 극단적으로 밀어붙여 믿음 역시도 온전히 개인만 남게 되는 반면에 판넨은 계시 역시 객관적인 역사가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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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존주의에 관해서(548-549)

불트만: 과학과 역사적 연구가 발달한 근대다. 실존주의는 이 시대를 극복한다.(549)

 

판넨: 실존주의 신학은 믿음을 지나치게 주관화시켜 세상과는 전반적으로 무관하게 되었다.(549)

 

불트만: 요한복음을 비신화화하면 그 의미를 가장 잘 알 수 있음.(549)

 

판넨: 노노, 그런거 아님.(549)

 

요한복음에 관해서(549-550)

판넨: 성서 전체는 미래와 역사가 예견하는 사건. 하나님 나라는 궁극적인 미래가 우리의 현재에 임하도록 함. 성서는 약속, 성취, 하나님의 권능에 관한 것.

 

불트만: 하나님의 권능은 마치 실제로 역사 안에서 역사하셨다고 믿는 거기 때문에 틀림. 왜냐하면 우주는 닫힌 체제임(필자 주 - 전형적인 근대의 세계관). 성경은 전근대적 세계관이기에 그 요소들(신화)를 다 발라내야 함. 그리고 너처럼 말하면 하나님이 자연 과정을 위해한 거고 또, 사람들 아무도 안 믿음꺼임.

 

판넨: 그건 복음 아님.

 

계시(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관해서(550-552)

불트만: 하나님은 개인의 내적 역사에서 역사하심. 외적 역사(X). 우리가 계시에서 정말로 필요한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십자가의 의미뿐임.(550)

 

판넨: 내적, 외적 그게 뭐임? 그리고 하나님 행동 부인하면서 행동에 대해서 왜 말함?(551)

 

불트만: 노노, 기적을 통한 행동은 부정함. 그러나 그리스도를 통해 행동하심(필자 주 - “그리스도 안에 계셨고 또 그렇게 하심으로 세계를 그와 화해시키셨습니다바꿔 표현함).(551)

 

판넨: 근데 십자가는 하나님의 행동 아님?(551)

 

불트만: 거기에 기적이 없음. 완벽히 자연스러운 사건이었음.(551)

 

판넨: 그러면 부활은? 너님 부활 안 믿을 거임. 바울은 그런 사람 제일 비참하다 했음.(551)

 

불트만: 아니, 난 부활 믿음. 이래 봬도 나 그리스도인임. 근데 그거 기적 아님.(551)

 

판넨: ? 몸의 부활이 기적이 아니라고?(551)

 

불트만: ㅇㅇ. 너님이 이해하는 부활은 시체에서 되살아난 것과 빈 무덤이 말하는 부활임. 그거 신화임. 그 신화를 통해 제자들의 마음과 삶에서 일어나는 믿음임. 부활은 객관적 역사가 아닌 실존적 역사의 일부임.(필자 주 - 불트만, 그는 뼛속까지 실존주의자였다... 부활을 개인의 의미 속에서 찾는 부활로 불트만은 이해한다.)(551-552)

 

역사에 대한 구분

판넨: 님의 역사에 대한 구분은 일반적인 거랑 좀 다른거 같음. 님의 구분법은?(552)

 

불트만: 객관적 역사(히스토리에)는 자연법칙의 다스림을 받음. 실존적 역사(게쉬테)는 사건 속에 있는 하나님의 행동이 숨겨진 역사임. 하나님은 이 실존적 역사를 통해서 역사하심. 실존적 역사는 의미로 가득차 있음.(552)

 

판넨: 말도 안됨. 그건 하나님을 과학과 역사가 건드릴 수 없는 영역으로 옮겨버림. 그건 믿음과 학문 사이에서 도피하는 거임.(552)

 

케리그마에 대해

불트만: 맘대로 생각하삼. 십자가는 케리그마에 필수적인데 이 십자가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과 우리가 회개하고 우리의 안전을 위해 그를 전적으로 신뢰하면 우리를 용서해주신다는 것을 말해줌(철저히 개인 중심이고 내면 중심이다.)(552-553)

 

판넨: ㄴㄴ. 완전 틀렸음. 신약성서의 케리그마는 미래의 하나님 나라가 현재에 도래하는 일을 말함. 그건 역사의 주체로서의 하나님과 그의 통치에 관한 것임. 십자가와 부활은 그렇기에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이 완성될 때,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시고 모든 것을 자신과 화해시키신다는 약속임.(553)

 

불트만: 20세기 대학 교육 받은 사람이 그거 믿을 거 같음? 미친.(553)

 

판넨: 부활은 증명해 보일 수 있음. 합리적인 의심의 여지를 넘어서는 사실임. 증거 보여주면 믿음.(553)

 

불트만: 증거 있을 수 없음. 그건 환영임. 믿음은 새로운 자기-이해를 받아드리는 거임.(553)

 

판넨: 오키. 받아주겠음. 새로운 자기-이해는 뭐임?

 

불트만: 우리는 절망에 직면한 존재임. 죽음이 우리를 둘러싸 있고 삶이 무의미하게 느껴짐. 그래서 우리는 밖에서 우리를 안전해줄 무언가를 찾음. 쾌락, 긍지, 정치 등 그런게 되면 바로 우상이 되어버림. 그렇기에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 부활에서 찾아야 함. 그게 본래적 실존.(554)

 

판넨: 역시, 실존주의 헛소리. 그건 기독교가 아니라 실존주의임. 현실을 도피하지 마삼. 내가 보기엔 그건 영지주의 같음. 과학과 역사로부터 보호하는건 좋은데 진리를 희생시키면서까지 그러지마삼.(554)

 

불트만: 너님은 역사적 탐구에 의존해있음. 그걸 믿음이라고 할 수 없음.(필자 주 - 근데 왠지 올슨은 판넨을 편드는 거 같음ㅋㅋ)

 

판넨: 믿음은 이성이 참이라고 말해주는 걸 믿는 거임. 증거 있으면 믿어야 함. 믿음은 자신의 삶 전체를 사실 앞에 굴복시키는 것임. 그 사실이 자기희생과 하나님에 대한 순종을 요구하더라도.(554-555)

 

불트만: ㄴㄴ. 증거가 없더라도 믿어야 함. 믿음은 모험인. 예수님이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이 복되다고 했음.(555)

 

판넨: 히브리서 저자는 믿음이 바라는 것들의 증거라고 말했음. 증거!!

 

불트만: 자꾸 반복하는데 그거 신화라니깐. 하나님의 통치권을 고대적이고 원시적인 방법으로 표현한 거라니깐. 당연히 비신화화해야 하지 않음?! 그러니깐 종말론적 상징주의는 의심과 염려(필자 주 - 실존주의의 냄새가 자꾸 난다) 극복하기 위해,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영원한 삶의 선물을 받기 위해 애쓰는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육과 영 사이의 전쟁을 표현하는 하나의 방식임.(555-556)

 

판넨: ? 너님 죽음 이후의 삶을 믿는 거임?(필자 주 - 헬라사상을 믿는 거냐고 따지는 거다)

 

불트만: 우리는 모르는게 많음. 그러나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건 믿음. 성서의 묘사는 지금의 삶, 그리고 본래적 실존 대 비본래적 실존에 대한 거임.

 

판넨: 그건 소망이 없음. 내 장례식에 오지 마삼. 우리의 신앙에서 소망이 제일 중요함.

 

불트만: 소망은 시간과 역사 속에 있는 게 아니라 우리의 내면에 있음. (556)

 

판넨: 그럼 소망은 그저 심리적인 것뿐임?

 

불트만: ㄴㄴ. 자기-이해에 관한 거임.

 

판넨: 그게 그 말 아님? 너님은 신정통주의 비슷함. 거기도 바르트와 변증법적 신학도 주관적이기 때문. 역사 안에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한 줄기 숨겨져 있는데 역사가들은 그거 발견 못함. 변증법적 신학자들은 용기 부족, 너님은 과학과 역사를 두려워하고.

 

불트만: . 그럼 너님은 고고학 책에서 그리스도를 알아가니?

 

판넨: . 잠깐 나 질문 있음. 십자가 사건은 역사적 사실에 의존한다고 했는데 왜 그건 비신화화하지 않음? 일관성 없는거 아님?

 

불트만: 내 좌파 제자들이랑 비슷한 말을 하는군. 걔네들은 모든 걸 실존주의로 환원하길 원하거든. ... 그건 비신화화할 수 없음. 십자가는 시공간 안에서 하나님이 행하신 단 한 번의 불가피하고 절대적인 행동임. 그니깐 기적도 아니라서 비신화화할 필요 없음.(557)

 

판넨: 근데 너님의 전제는 자연주의 철학이 기본 틀인거 같음. 그런 생각을 어디에서 얻게 됨?

 

불트만: 노노. 틀림. 과학과 철학은 신약성서의 참된 의미를 재발견하도록 해줌. 너 사도행전 1장 어떻게 볼 거임. 그것도 문자 그대로 볼래?(557)

 

판넨: 물론 아님.

 

불트만: 그게 바로 제자들과 신약성서의 저자들이 믿었던 거라고 ㅇㅈ(인정)?

 

판넨: 아마도...?

 

불트만: 그게 확실한 거임. 예수의 승천을 신화로 간주해야 함. 우리 가운데 계속되는 예수의 실재에 대해 말해주는 신화!

 

판넨: 승천 사건을 그렇게 축소하고 싶지 않음. 1세기 사람들이 그걸 어떻게 알았겠음?

 

불트만: ㅇㅇ. 그들은 죽음 사람이 부활할 수 없다는 것도 마찬가지.

 

판넨: 아님. 그건 알고 있었음. 신약성서를 보면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기 위해서는 기적이 일어나야 한다는 것을 기록하고 있음. . 근데 승천은 부활사건처럼 중요하지 않은 거같음. 승천기록 없어서 복음에 큰 영향 없음(필자 주 - 이 지점에서 복음주의자들과 갈리는 것 같다)

 

불트만: 내 말은 너님도 과학과 철학으로 무엇을 믿을지 결정한 걸 보여줌.

 

판넨: 승천은 맞지만 부활은 아님. 사과와 오렌지를 비교하는 거임?

 

불트만: 근데 빈 무덤에 대한 증거가 어디에 있음?

 

판넨: 증거는 초기 교회와 기독교 선교에 있음. 만일 예수가 부활하지 않았고 무덤도 비어 있지 않았다면 초기 제자들은 그들이 그랬던 것처럼 세상을 뒤엎을 만한 힘이 결코 되지 못했을 거임.(필자 주 - 판넨은 실제로 예수님이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제자들이 부활에 대한 설교를 못했을 거라고 봄.)

 

불트만: 복음서에 상반된 부활 기사는 어떻게 할 거임?

 

판넨: 난 사건 자체의 실재를 지지. 오히려 만일 복음서가 똑같이 서술했다면 의심했을 거임.

 

불트만: 너님 근본주의 같음.

 

판넨: . 장난침?

 

불트만: 확실성이 아닌 개연성에 기초해서 복음을 믿어야 하는 당신과 당신 추종자들은 근대인이 아님. , 너님은 과학이 당신 몰래 당신의 믿음을 왜곡하지 못하도록 항상 뒤를 살펴봐야 하는 거같음. 불쌍. 나는 이미 면역되어 있음.(560)

 

판넨: 쩝쩝;; 그건 가장 중요하고 독특한 걸 내버린 댓가임. 그런 면역 버리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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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

 

불트만과 판넨은 철저히 구분된다. 오히려 올슨의 작업에서는 불트만의 사상이 잘 드러나는 것 같다. 그는 하이데거의 실존주의를 받아드려 <본래적 실존/비본래적 실존>을 성경에 적용했다. 철저히 성경을 자신의 주관적인 내면으로만 만들었다. 그렇기에 성경의 초자연적인 부분은 전근대인의 설명이기에 그것을 비신화화해야 했다. 그래야 자신의 실존주의 해석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가 성경을 접근하는 태도는 철저히 어떤 틀로(불트만은 실존주의의 틀) 성경을 보는 것이다. 그의 실존주의 해석을 보면 조금 오늘날의 현대인들이 해석하는 거랑 비슷하다는 것을 느꼈을 것이다. 성경을 철저히 내면화 시키고 사적인 영역에서 붙잡아 두는 것에서 말이다.(552)

하지만 여기에서 판넨의 주장이 필자는 더 바르다고 본다(553). 그렇지만 판넨 역시도 성경에 관해서는 비평을 수용하기에 복음주의권에서 비판적으로 수용해야 할 듯하다.(562)

물론, 불트만은 이미 극복(?)이 되었지만 신약을 하기 위해서 넘어야 할 산이긴 하다. 역사적 무탐구도 양식비평도 그보다 더 설득력 있는 논지들이 많이 나오고 있는 터다. 우리가 지지난 시간에 살펴보았듯이 양식비평이 주장하는 바보다 라이트가 제시한 논증이 더 설득력이 있었고 복음서 전승과 관련해서도 리처드 보캄과 케네스 베일리의 연구가 상당히 설득력 있다는 것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어느 수업때 불트만, 판넨, 바르트를 한 쌍으로 실존주의 신학이라고 주장했는데 위의 올슨의 내용에선 사실이 아니라는 걸 볼 수 있다. 판넨은 누구보다도 실존주의로 무장한 불트만을 비판했다. , 불트만을 자유주의자로 알고 있지만 당시 자유주의자들이랑은 달랐다. 그는 성경을 하나의 문서로 취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역사적 예수를 단지 윤리적인 예수로 서술하지 않았다. 물론, 그는 역사적 예수를 알 수 없다고 보았긴 하지만.(김동건은 이에 대해서 불트만은 무탐구를 주장하기 않았다고 말함)

 

이렇게 대화를 통해서 두 사람의 차이를 알게 되었고 오해할 수 있는 부분들을 나름 정리하게 되어서 좋았다.

 


메모

 

브루너:      대화를 마무리합시다. 우린 그저 지상에서 있었던 의견 차이를 반복했을 뿐입니다. 저는 하나님의 신학 개론 수업에 수강 신청을 했습니다. 성령이 수업을 가르치실 겁니다. 그분이 가르치시는 모든 것에 동의할 거라 확신하고 있지만 열린 마음으로 수업에 가려고 합니다. 혹시나 제가 배울 게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바르트: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모든 중요한 진리는 제 책 <교회교의학> 어딘가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저는 그냥 천국 도서관에 가서 그 책을 다시 읽어봐야겠습니다.
슐라이어마허      저는 성령이 가르치시는 영성 형성 수업을 신청했습니다. 그 수업과 교리는 거리가 멀어 보이네요. 교리는 지상에서서도 대개 필요악으로 간주됐죠. 
(474)

- ㅋㅋㅋㅋㅋ

 

 

틸리히:     그러나 저는 부활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재해석할 뿐이죠.
바르트:     그러니까 잘못 해석하셨다고요.
(514)

- ㅋㅋㅋㅋㅋ


 


책 맛보기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 본성에 관해서는 지나치게 비관적이었다면, 은혜에 관해서는 매우 낙관적이었다. 펠라기우스는 인간 본성에 관해서는 지나치게 낙관적이었다면, 한 인격을 변혁시키는 그리스도와 성령의 능력에 관해서는 매우 비관적이었다. (205)


이 책의 목적은 가르치거나 설득하기 위한 것이 아닌, 정보를 제공하고, 바라기는 즐거움을 주는 데 있습니다. 이런 "대화"를 읽은 결과로 (그리고 일부를 연기하면서), 여러분은 20세기 동안 이어져온 기독교 사상의 다양성을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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