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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공부흔적

[강의] 소예언서 - (3) 호세아 2장 1절 - 3장 5절(바알종교와 천민자본주의[에릭식톤 콤플렉스], 호 2:1~3:5, 호 2:1-3:5)

by 카리안zz 2020. 3.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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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시간에 호세아서의 역사적 배경과 종교적인 배경을 살펴봤습니다. 바로 직전 시간에는 종교적 배경을 살펴봤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의 마음을 빼앗았던 종교가 바알종교였습니다. 이 바알종교는 폭풍과 비를 내리기 때문에 풍요로움을 약속해 주는 신이었습니다. 그렇기에 바알을 예배하면 당장의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고 더욱이 호화로운 생활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 호세아가 등장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2절을 본다면 너희 어머니와 논쟁하고 논쟁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논쟁하다라는 단어를 히브리어 원어로 보면 고소하다, 소송을 제기하다와 같은 재판용어로 번역될 수 있습니다. 지금 맥락에서도 고소하다로 쓰는 것이 더 합당합니다. 지금 상황은 말로 다투는 논쟁의 문제가 아니라 법정으로 가야 할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남편과 아내의 관계가 깨어졌기에 재판의 문제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 둘의 사이가 깨어졌을까요? 그 이유는 음란때문입니다. 호세아서에서는 이 음란을 바알 우상숭배를 가리킵니다. 호세아와 고멜의 결혼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결혼과 대비하여서 봐야 합니다. 고멜이 다른 남자에 마음을 둔 것이 음란이었듯이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아닌 바알에게 마음을 둔 것이 바로 음란이요 우상숭배였습니다. 본문 2절에는 음행을 제거하라고 합니다. 그 음란한 행동이란 13절에 귀고리와 패물로 장식한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지금처럼 단순히 자신을 표현하기 위해서 꾸미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당시 귀고리와 패물은 바알을 예배하러 갈 때 쓰여졌던 것입니다. 더욱이 문제는 바알을 섬기는 이 행위가 여호와를 섬기는데 역시 혼합 되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여인은 도대체 왜 다른 사람에게 마음을 빼앗겼을까요? 왜 이스라엘 백성은 바알에게 마음을 빼앗겼을까요?! 8절입니다. 다 같이 8절을 읽어보겠습니다.

 

8: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은 내가 그에게 준 것이요 그들이 바알을 위하여 쓴 은과 금도 내가 그에게 더하여 준 것이거늘 그가 알지 못하도다

 

 이 여인이 그들을 따른 것은 그들이 빵과 물과 양털과 삼과 기름과 술을 준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의 생활에 가장 중요한 것들을 준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풍요와 번성을 약속했던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들은 하나님께서 주셨던 것이었습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의 가장 큰 위기는 바로 하나님이 누구인지 잊은 것입니다.

오늘 본문 13절을 보면 더 확실해 집니다. 한 번 13절을 읽어보겠습니다

13: 그가 귀고리와 패물로 장식하고 그가 사랑하는 자를 따라가서 나를 잊어버리고 향을 살라 바알들을 섬긴 시일대로 내가 그에게 벌을 주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지금 이스라엘은 여호와 하나님을 잊어버렸습니다. 이렇게 여호와를 잊으니 여호와 신앙과 바알신앙이 혼합됩니다. 다같이 11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11: 내가 그의 모든 희락과 절기와 월삭과 안식일과 모든 명절을 폐하겠고

하나님께서 이 절기들을 다 폐하시려는 이유는 바알신앙과 여호화신앙이 혼합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절기들은 여호와를 위한 절기들이었고 여호와를 기억하는 절기들었지만 그들의 마음에는 바알이 들어왔습니다. 형식적 절기는 지키지만 그 내용은 바알을 사랑하는 것으로 가득 찼습니다.

 

 이스라엘의 이 마음을 빼앗은 종교는 바알 신앙이었습니다. 그들의 생존과 번영을 약속한 신이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과 지금의 교회를 완전히 겹쳐서 볼 수는 없지만 오늘 우리의 마음을 끄는 건 어떤게 있을까 고민이 되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한 사회학자의 책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현대인들도 그렇게 교회들도 그렇고 이들이 사랑하는 것은 돈이라는 것입니다. 제가 거기에 대한 설명을 조금 해보겠습니다.

 

 오늘날의 사회를 자본주의 사회라고 합니다. 자본주의는 인류가 시작되었을 때부터 있었기에 오늘날만 자본주의 사회라고 말하면 조금 이상해 집니다. 그래서 근대 자본주의 시대라고 이름을 붙입니다. 이 근대 자본주의는 과거의 자본주의와 무엇이 다른가? 근대 자본주의는 금융이 있고 은행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합리적이죠. 은행을 통해 거래를 한다는 것이 근대의 자본주의의 핵심 중에 하나입니다. 전에는 그러한 기능은 없었습니다. 이런 자본주의의 형태에 그 정신을 불어넣은게 있는데 바로 프로테스탄티즘입니다. 좀더 대중적으로 말하자면 청교도 정신이며, 신학적으로 말하면 칼빈주의, 즉 개혁주의러고 볼 수 있습니다.

 청교도라는 말은 다들 익숙하실 겁니다. 저희가 장로교의 신학을 보통 개혁주의 신학이라고 합니다. 다른 말로는 칼빈주의 신학이죠. 이 칼빈주의자들을 지역마다 좀 다르게 표현했습니다. 네덜란드에 있는 칼반주의자를 고센’, 프랑스는 위그노’, 잉글랜드는 청교도라고 불렀습니다. 그렇다면 스코틀랜드의 칼빈주의자들을 뭐라고 불렸을까요? 바로 장로교입니다.

 이 근대의 자본주의를 누가 만들고 그 정신을 작동시켰는가? 바로 칼빈주의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교과서에 자본주의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써져 있습니다. 이들은 직업 소명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부름받은 직업이다. 이것이 곧 성직이다. 그러니 내가 이 직업을 통해 헌신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강했습니다. 하나님께 부여받은 직업이기에 정말로 성실하고 양심적으로 일을 하겠죠. 그리고 구두는 만드는 장인이라면 상대가 누구라도 최고의 구두를 만들려고 노력을 했습니다. 이렇게 생기는 이윤으로 자신의 쾌락이나 낭비를 하지 않고 사업에 재투자를 합니다. 그 일터가 더욱 번성케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그런 생각을 그들을 했었습니다. 이게 막스 베버의 분석입니다. 중요한 건 그들은 자본주의에서 굉장히 윤리적이었단 말입니다.

 

 문제는 한국의 자본주의는 다르다는 것이 김덕영 교수의 주장입니다. 근대의 서구 자본주의는 칼빈주의자라는 시민계층이 형성했는데 한국의 자본주의는 국가가 만들었습니다. 일본이 패망하여 대한민국을 떠날 때 남겨진 재산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이 재산을 미군정에서 이승만정권으로 다 양도를 했습니다. 그러면 이 정권은 대한민국에 남아 있는 일본의 재산들 그러니깐 공장이라던가 땅들이라던가 그걸 팔아야 겠지요. 그걸 적산불하라고 합니다. 이 재산을 받으려고 기업들이 로비를 많이 했습니다. 그리고 그 재산을 받은 기업들은 재벌의 기초를 닦게 되었습니다. 이것 뿐만이 아니라 국가가 기업인들에게 줄 수 있는 것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엄청나게 많은 미국 원조금도 있었고 관광서 공사부터해서 막대하게 기업들에게 줄 수 있는 것이 많았습니다. 그러면 기업들은 그것을 따내기 위해서 무수히 많은 로비를 감행해야 겠지요. 그래서 성장의 발판을 마련한 것이 재벌이었다고 김덕영 교수는 말합니다.

 문제는 이 한국의 자본주의 정신은 무엇인가?입니다. 책 제목이기도 한데 김덕영 교수는 에리식톤 콤플렉스라고 합니다. 먹어도 먹어도 배가 고픈 그리스 신화인물이 에리식톤입니다. 그 모습이 바로 한국 자본주의 정신이라고 봅니다. 제가 왜 이런 세상 이야기를 교회에서 하냐면 개신교도 그 지분의 상당수가 있어서입니다.

김덕영 교수의 분석으로는 국가가 이 한국식 자본주의를 만들어 냈고 재벌이 구현해 갔으며 개신교가 이를 신성화했다고 말합니다. 곧 이를 하나님의 것으로 뒤바꿨다고 주장합니다. 국가의 메시지와 재벌의 메시지와 개신교의 메시지가 하모니를 이룹니다.

 

 1960년대의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가난을 해결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가난만 해결하면 다른 부차적인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는 것이 당시 국가 지도자의 생각이었습니다. 당시 독재 시대이기에 국가 수장의 생각이 바로 그 국가의 생각이죠. 그래서 그는 경제가 성장만 하면 나머지 정치, 사회, 문화적인 문제들이 다 해결될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 먹고사는 문제가 다 해결되었는데도 끊임없이 성장을 갈구합니다. 1인당 GDP 만달라, 2만달라, 3만달라를 향해 달라나갑니다. 끊임없이 성장을 향해 나아갑니다. 만족은 없고 늘 배가고픕니다. 재벌은 이를 받아드리고 실천을 했습니다. 밤새도록 일하고 쉬는 날이 거의 없습니다. 당장 가난을 해결해야 할 때는 몰라도 가난을 어느 정도 해결했을 때도 마찬가지 였습니다. 근로자라는 말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죠. 노동자에게 근면성실을 요구하는 것은 사주의 입장이 아닌가 하고? 어쨌든, 재벌은 세계적인 기업이 되기 위해 지대한 성장을 추구합니다. 서민들의 영역까지 침범을 하여 그 규모를 키웁니다. 그런데 성장 그 자체가 문제는 아니지요. 문제는 다른 좋은 것들보다 성장을 가장 우선시 한다는 게 문제입니다. 성장하면 다 문제가 없게 되는 것. 이게 가장 문제죠. 만약 그 기업이 비윤리적으로 성장을 해서 커졌더라도 성장을 했다는 것만으로 당당해집니다. 가장 중요한 게 성장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국가와 재벌의 관계를 대단히 간략하게 설명했는데 관심있으신 분들은 책을 읽어보시면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이제 저희가 집중적으로 봐야할 것은 바로 개신교입니다. 제가 책의 모든 내용에 동의하는 것은 아닙니다. 개신교가 성장이라는 것을 신성시했다고 저자는 주장하는데 조금 의문은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 개신교에서 보여지는 여러 모습들은 우리가 무엇을 사랑하고 있는지 한 번 짚어봐야할 문제라고 봅니다.

 제가 교회론에 대해서 참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렇게 관심가지는 중에 이 말이 참 맞는 거 같다는 문장이 있었습니다. 어떤 문장이냐면 한국교회는 교회론은 없고 교회 성장론만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도 성장을 향해 달려갑니다. 그 이유를 말하면 보통 사도행전을 예로 들거 같습니다. 그러나 모든 교회가 성장을 하기 보다는 내 교회의 성장이 중요합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성장만 하면 우리 세계에서는 끝입니다. 우리는 이게 내면화 되어 있습니다. 당장에 교회를 물어보면 거기 몇 명인데를 물어봅니다. 저도 교회를 물어보고 그러면 꼭 인원수를 물어봅니다. 거기 몇 명인데? 인원수를 말해서 좀 크면 우와하죠. 도대체 나는 왜 그렇게 생각하는 걸까? 교회의 숫자가 많은 거랑 교회의 모습을 나타내는 거랑 뭔 상관이 있을까 고민을 참 했습니다. 사실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이미 저의 내면 안에는 사람이 많은 교회 적은 교회 은연 중 나눠서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또 큰교회가 좋은 교회, 작은교회는 안 좋은 교회라고 은연 중 생각합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교회 목사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작은 교회가 아름답다는 말을 믿지 마라. 목회에 실패한 이들이나 하는 변명이다. 주님 보기에 큰 교회가 아름답다당장 이 말을 들었을 때 열받지만 더 열받는 것은 내 자신 안에서도 이런 생각이 내면화 되었다는 것입니다.

 

 성장을 하기 위해서는 대단히 실용적이여야 합니다. 저는 재작년에 교회들을 다닐 때 대형교회들이 참 좋았던게 주차장이 커서였습니다. 이마트와 홈플러스가 좋은 이유와 유사합니다. 편합니다. 대형교회 주차장을 가시면 마트와 비슷하게 되어있습니다. 예배는 어떨까요? 대단히 간소화 됩니다. 예배 안에 차례의 각 요소들이 대단히 신학적으로 의미가 있는 것들인데 교회 성장 앞에서는 무의미해 버립니다. 하나님 앞에서 드리는 예배의 고민보다는 교회를 성장시키고 효율적인 방법들을 더 우선시 합니다. 예배는 하나님께 드리는 것일까요? 교회 성장을 위해 있는 것일까요? 이런 질문을 한다는 것 자체가 참 우수은 일입니다.

 작년 어떤 대형 교회가 한국교회를 위해 한 가지 혁신을 준비하고 있다고 대대적으로 광고를 하더라구요. 그게 뭐냐면 토요일 예배를 드리고 주일날에는 교회 봉사를 자유롭게 하는 것입니다. 이런 황당한 사고 방식에 대단히 놀랐습니다. 교회 주보에도 예배는 단지 담임목사님의 설교제목만 있었습니다. 과연 이 교회는 예배를 무엇이라고 생각할까? 들었던 생각입니다.

 

 저도 우리교회 오고 내 안에 실용적 성장에 묻어있는 때를 발견했습니다. 제가 사역한 교회들은 1, 2, 3부예배가 있었습니다. 기억을 더듬어 보면 1부 예배는 730, 2부 예배는 930, 3부 예배는 1130분에 시작을 합니다. 보통 1부 예배는 사역자 예배, 2부는 교사 예배로 합니다. 그리고 1130분에는 주일학교 예배와 대예배가 시작됩니다. 저희는 중고등부를 포함해서는 거의 모두 함께 예배드리지만 다른 곳은 그렇지 못합니다. 교회 성장에 별로 좋은 방법은 아닌 거 같습니다. 저도 마음속에 중고등부를 좀 더 많게 하려면 전의 교회들처럼 예배 따로 드리게 하면 좀 되지 않을까? 하는 욕망이 스멀스멀 피어오릅니다. 왜 그런 마음이 들었냐면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보다 성장해서 오는 것을 더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호세아서의 상황과 우리의 상황이 묘하게 겹쳐보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다른 것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여호와를 잊고 바알이 가져와 줄 수 있다는 것을 사랑했던 것처럼 우리는 우리가 예배드리는 대상을 잊고 규모를 키워 우리가 누리게 될 것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붙들어야 할 것은 우리의 지금 현실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 후반부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우리는 다른 것들을 사랑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음행을 저지른 자들은 원래 돌을 맞아 죽어야 되는데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시지 않습니다. 14절 그분은 우리를 타이르십니다. 14절 말씀입니다. 다 같이 읽겠습니다.

 

14: 그러므로 보라 내가 그를 타일러 거친 들로 데리고 가서 말로 위로하고

 

31절 말씀도 읽겠습니다. 31절입니다.

: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이 다른 신을 섬기고 건포도 과자를 즐길지라도 여호와가 그들을 사랑하나니 너는 또 가서 타인의 사랑을 받아 음녀가 된 그 여자를 사랑하라 하시기로

 

하나님께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비루한 우리의 모습에서 언젠가 보일 그 날을 약속해주십니다. 오늘 본몬 호세가 216-20절 말씀입니다. 다같이 읽겠습니다.

 

16: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 날에 네가 나를 내 남편이라 일컫고 다시는 내 바알이라 일겉지 아니하리라

17: 내가 바알들의 이름을 그의 입에서 제거하여 다시는 그의 이름을 기억하여 부르는 일이 없게 하리라

18: 그 날에는 내가 그들을 위하여 들짐승과 공중의 새와 땅의 곤충과 더불어 언약을 맺으며 또 이 땅에서 활과 칼을 꺾어 전쟁을 없이하고 그들로 평안히 눕게 하리라

19: 내가 네게 장갈 들어 영원히 살되 공의와 정의와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네게 장가 들며

20: 진실함으로 네가 장가 들리니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

 

 자본으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세상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그러한 영향속에 한국교회도 소용돌이에 휩싸였습니다. 부디 우리의 교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기 원합니다. 오늘 이 약속을 믿으며 우리에게 거짓 증언을 하는 것들에 저항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시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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