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시간에 호세아 시대의 혼합된 예배를 드렸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바알종교와의 혼합이었는데 거기에 대한 대비로 오늘날은 천민자본주의와의 혼합이 된 것은 아닌가 진단을 했습니다. 사회학자 김덕영의 이론을 가져와서 에리식톤 콤플렉스가 우리 자본주의 정신이라고 했습니다. 에리식톤은 그리스 신화의 인물로 만족을 하지 않고 계속 먹는 인물입니다. 그의 욕구는 끝이 없는 것에 빗대어 우리의 자본주의 정신이 거기에 비슷하다는 것을 사회학자 김덕영은 착안했습니다. 막스 베버식으로 말하자면 천민자본주의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오늘 호세아서의 말씀도 혼합된 예배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전달되는 양상은 조금 직접적으로 변합니다. 1장에서 3장을 보면 비유적이고 상징적인 표현이 많지만 4장부터는 실상을 구체적으로 말합니다.
오늘 본문 1절에서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고 했습니다. 호세아서에서 단 한 번 쓰였던 표현이고 이 표현은 예언자들이 하나님께 받은 말씀을 전할 때 사용되는 도입구였습니다. 그러니 이제 본격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시작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3절
1절에 논쟁이라고 번역되었는데 지난 시간에도 말씀드렸듯이 이 단어는 소송하다로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소송을 제기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 소송의 내용은 진실, 인애, 하나님을 아는 것이 없다고 합니다. 앞서 호세아 2장 19-20에 진실, 인애, 하나님을 아는 것에 대해서 나오는데 그 부분을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호세아 2장 19-20절입니다.
19절: 내가 네게 장가 들어 영원히 살되 공의와 정의와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네게 장가 들며
20절: 진실함으로 네게 장가 들리니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
이 말씀을 본다면 여호와께서는 헤세드, 오늘 본문에선 인애로 번역되었고 19절에서는 은총으로 번역된 헤세드와 진실함으로 언약을 맺으실 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를 통해 여호와를 알게 될 것이라고 20절에서는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에게는 이제 하나님께 행해야 할 의무와 책임이 생겼습니다. 비유에서도 나타났듯이 부부가 서로간에 의무와 책임을 다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1절에 나오는 진실과 인애는 원어로 보자면 ‘에메트’와 ‘헤세드’입니다. 이 단어들과 나란히 자주 등장하는 단어는 정의와 공의입니다. 그러니 정의, 공의, 인애, 진리는 하나님의 성품이면서 자신의 백성들에게 찾으시는 성품이기도 합니다. 이 성품에 기초해 있는 것이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현실은 본문 2절에 나타납니다. 2절에 나오는 저주, 속임, 살인, 도둑질, 간음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이 단어들은 십계명에 있는 내용과 거의 일치합니다. 호세아는 십계명을 의도적으로 언급하며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졌다는 것을 계속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세상은 피가 피를 뒤잇는다고 합니다. 상대를 죽인 피 위에 또 다른 피가 흐릅니다. 본문에서 피가 복수형으로 쓰였는데 보통 복수형으로 쓰일 때는 부당하고 억울하게 흘려진 피, 폭력에 희생당한 피를 의미합니다. 호세아의 세상은 그야말로 힘과 권력이 지배하는 세상, 힘이 조금이라도 센 이가 약한 이를 짓밟고 죽이고 희생시키는 세상입니다. 앞서 호세아 1장 1절에 북이스라엘 왕들이 생략되어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북이스라엘은 여러보암 2세가 죽고 난 후 쿠데타가 많이 일어났습니다. 그야말로 피가 피를 뒤이은 현실을 호세아는 직설적으로 언급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세상은 단지 인간들 세상만 엉망이 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3절에 나타나듯이 하나님의 창조 세계 전체가 신음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삼일기도회 창세기를 꾸준히 들으셨다면 아실 내용입니다. 인간의 타락이 단지 인간에게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 세계 전체가 아픕니다.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우상숭배와 폭력은 세상을 이처럼 파괴합니다. 성경은 끊임없이 이를 말하고 있습니다.
4-10절
4절부터는 이제 본격적으로 이스라엘의 참상을 드러냅니다. 4절에 ‘제사장과 다투는 자처럼 되었다’고 했습니다. 아마 이 의미는 사람들이 제자를 많이 드리지 않아서, 정성 드려서 제사를 드리지 않아서 지금의 타락이 시작되었다고 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더 깊은 정성을 요구하고 더 많은 속죄제사가 드려집니다. 그러면 현실은 이 제사를 통해서 제사장들이 더욱 배가 불러집니다. 8절이 바로 그 말이었습니다. 8절을 다같이 읽어보겠습니다.
8절: 그들이 내 백성의 속죄제물을 먹고 그 마음을 그들의 죄악에 두는도다
제사장들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공동체의 중재를 맡아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그가 자신의 종교적 지위를 이용하여 이익을 추구했습니다. 그로 인해 백성들은 잘못된 길을 가게 됩니다. 예언서 여러곳에서 이러한 실정을 고발하였습니다.
제사장들은 지위를 이용해 자신들의 배를 불렸을 뿐만 아니라 당시 왕권과도 밀접하게 결탁하였습니다. 이 역시도 많은 예언서에서 고발을 하였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당시 이스라엘에만 국한된 모습은 아닙니다. 대한민국 역사에서도 이러한 사례들이 있습니다. 때는 대한민국이 독립을 하였을 때입니다. 대한민국 정부에게 일본이 한국 땅에 남기고 간 재산의 권한이 넘어갔습니다. 이 재산을 대한민국 정부는 여러 기업들에게 나눠주었습니다. 그 기업들은 재벌의 초석이 되기도 합니다. 기업들만이 아니라 교회에게도 이 재산을 나눠주기도 했습니다. 재산 중에 땅도 있는데 개신교에서 특혜를 많이 받았습니다. 그리고, 독재의 시대에도 이 흐름은 이어집니다. 박정희 정권때 모 교단과 모 선교단체는 정권과 거래를 하며 자신들의 이득을 받았습니다. 모 선교단체의 유명한 목사님은 설교 중에 이런 말을 하기도 했습니다. “10월 유신은 실로 세계정신사적 새 물결을 만들고 신명기 28장에 약속된 성서적 축복을 받을 것이다”고 말입니다. 또, 광주의 학살을 자행한 전두환에게 하나님의 종이라고 안수를 해주는 처참한 현실을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우리가 신사참배에 많은 회개를 했지만 독재 시대때 자행되었던 우리의 죄 역시도 처절하게 회개해야 합니다.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일까요? 이스라엘 백성이 이렇게 된 게 예배를 많이 안드리고 정성이 부족해진 걸까요? 한국교회가 이렇게 된 게 어떤 분들 말처럼 저녁 예배가 사라져서 그런걸까요? 아닙니다. 오늘 말씀에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여러보암 2세 시대 때 번영했습니다. 7절에 번성과 영광에 대한 언급이 이를 말해줍니다. 왕국은 번성했고 제사장 수도 역시 증가했습니다. 북왕국을 일으킨 여로보암 1세때 이미 이런 조짐을 보였습니다. 그는 벧엘과 단에 금송아지를 배치하고 성소를 세웠습니다. 제사장 역시도 레위인이 아닌 일반인 중 아무나 임명을 했습니다. 그러한 바탕에 제사가 매우 많아지고 번성하게 되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물질적으로도 번성했지요.
11-19절
번성과 번영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은 이스라엘의 모습이 11절 이후에 나타납니다. 11절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11절: 음행과 묵은 포도주와 새 포도주가 마음을 빼앗느니라
음행과 묵은 포도주와 새 포도주는 1장과 2장에서 고멜이 다른 남자를 찾아간 이유였습니다. 음행과 두 포도주는 풍요를 말합니다. 풍요를 위해서는 어떠한 일이라도 한 것입니다. 그러니 올바르게 현실을 돌아 볼 수 없었습니다. 분석할 수도 없었습니다. 고민하고 판단하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 생각을 해야 하는데 음행과 포도주가 그 생각을 마비시킨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그들의 음행이 이제 나타납니다. 이방 민족이 하듯이 이스라엘도 나무에게 묻고 나무가 그들에게 대답합니다. 아무 나무도 아니었습니다. 그 나무는 아세라를 상징하는 목상이었습니다. 13절에 산 꼭대기와 작은 산에서 제사를 드린다고 했는데 가나안의 높은 곳에는 이렇게 산당들이 많았습니다. 가나안 이방 예배를 그대로 드린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 그곳에는 신전의 창기들이 있었습니다. 이방 예배를 드리면서 쾌락까지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이는 음행이었습니다. 몸으로 드리는 음행이었고 우상을 사랑함으로 하나님께 음행을 저지를 것이었습니다.
앞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과 혼인한 관계였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부부간에 서로 간의 도리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이 마땅히 해야할 도리 즉, 인애도 진실도 없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랑하면 알고 싶어지는데 이스라엘은 그 모습을 저버리고 다른 이방종교를 더 알고 싶어했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이스라엘 백성을 더 알려고 했고 그들의 행동을 직시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끝까지 알고 싶어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계속 말씀하십니다. 15절에 벧아웬이라는 지명이 나옵니다. 이 지명은 원래 벧엘이었습니다. 벧엘은 하나님의 집이란 뜻이지요. 하지만 벧아웬으로 바뀌었습니다. 벧아웬은 죄악의 집이란 뜻입니다. 하나님의 집이었던 장소가 이제 죄악의 집이 되었습니다. 수치스럽게 변한 벧엘을 비꼬면서 사용된 단어입니다. 뒤이어 나오는 길갈은 어떤 장소입니까? 그 옛날 여호수아의 가나안 정복과 관련된 장소입니다. 대단히 중요한 성지이지요. 이러한 모습에서 벧엘과 길갈을 찾아다니며 종교의식을 활발히 행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장소는 힘이 없습니다. 그저 종교의식으로 열심을 내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그래서 호세아서의 가장 유명한 구절인 호세아 6장 6절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제사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드리는 제사가 지금 어떤 제사인가? 무엇을 위한 제사인가? 묻는 것입니다. 예배 역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있는가? 하나님을 알고 싶은 마음이 있는가? 호세아는 계속해서 묻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예배를 돌아봐야 하며 교회를 돌아봐야 합니다. 우상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다른 형태로 오늘 우리 시대를 위협합니다. 자본이 중심이 되거나 나 자신이 중심이 되거나 무엇이든 우상이 될 수 있는 시대입니다. 내 자신이 너무 거대해져서 스스로 우상이 될 수도 있습니다. 세상은 그것을 권장하겠지요.
자본 역시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은 자본으로 더욱더 많은 것을 할 수 있게 만들고 싶을 것입니다. 그것이야 말로 우상의 성질입니다.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 말입니다. 바알신앙이 풍요를 줄 수 있는 것처럼 말하듯이 자본으로 인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우리는 유혹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도 여전히 우상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돌아봐여 할 과거는 어게인 1907과 같은 과거의 영광이 아닙니다. 70년대에서 90년대 초성장을 했던 교회의 모습도 아닙니다. 그것을 그리워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알고 싶은 그 마음을 그리워 해야 합니다. 우리의 미래는 그 마음에 달려 있습니다.
김근주, <소예언서 어떻게 읽을 것인가> 60-75 요약과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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