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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리뷰/교회

[책리뷰] 스탠리 하우어워스 · 윌리엄 윌리몬 - 하나님의 나그네 된 백성

by 카리안zz 2020. 4.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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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낀 점

 작년 교역자 필독서여서 읽은 책이다. 나에게 스탠리 하우어워스는 어려운 사람이었다. 그의 <교회됨>을 읽고 어려워서 나중에 읽어야 할 저자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런데 교역자 필독서로 정해지니 읽어야 했다. 그래서 읽었다. 그런데 왠걸. 이 책 어렵지 않고 나를 뜨럽게 한다. 

 나를 왜 뜨겁게 했을까. 그전에 칼 바르트와 폴 틸리히를 설명해야 겠다. 칼 바르트는 위로부터의 신학을 강조했고 틸리히는 아래로부터의 신학을 말했다고 한다. 그렇기에 칼 바르트는 초월을 강도하고 틸리히는 내재를 강조한다. 민경찬 연구원의 설명을 듣는다면 더 정확할 것이다. https://youtu.be/eqOSFUMCUAI (53:58부터 시작한다)

 스탠리 하우어워스는 바르트의 길을 간다.(이 책 38-50에 틸리히와 바르트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이 책을 읽는다면 그 뜻이 어떤 뜻인지 명확히 보일 것이다. 그의 <교회됨>보다는 이 책을 가장 먼저 읽었어야 했다. 그렇다면 그가 생각하는 방향을 어느 정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쫄지도 않았을 테고.  

 

콘스탄티누스주의(크리스텐돔, 기독교 제국주의)

 하우어워스가 비판하는 개념이 바로 '콘스탄티누스주의'다.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를 국교로 공인한 뒤로 이어져 온 국가와 교회 간의 연합을 말한다고 옮긴이는 설명한다. 313년부터 1963년에 끝이 났다는 것이 하우어워스와 윌이몬의 생각이다. 1963년인 이유는 폭스 극장이 엄격한 정부 법규에 도전해 주일(일요일)에 문을 열고 영화를 상영한 해이다. 아마도 저자들은 그날을 기점으로 기독교가 세상으로부터 외면을 받게 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같다. 콘스탄티누스 이후로 기독교는 국가와 뗄 수 없는 관계가 되었다. 서구권에서는. 그래서 후카이 토모아키는 신학이 필요한 이유가 그런 서구의 역사때문이라고 했다. 민주주의니 자유주의니 사실은 기독교 없이 나온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토양이 기독교였다. 오스 기니스도 비슷하게 서구 역사를 비 서구권 기독교인들이 배워야 한다고 말했다. 

 그런데 하우어워스는 그런 일련의 움직임이 사실은 교회가 어떤 곳인지 잘 드러내지 못하게 했다고 강하게 말한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옛 세상이 힘을 잃게 되면서 비로소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진리를 새롭게 볼 수 있는 기회가 열렸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진리란,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불러내셔서 이 세상이 자기 스스로는 이룰 수 없는 대안적인 사회를 세우셨는데, 그것이 바로 교회라는 것이다. (34-35)

 

 그는 오히려 지금이 기회라고 말한다. 지금이 하나님의 세상이, 뜻이, 나라가 어떤 곳인지 교회가 잘 보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하우어워스가 가고자 하는 방향은 확고하다. 교회가 해야할 일이 무엇인가? 그것을 묻는 것이다. 그것은 세속의 눈치를 보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문제는, 어떻게 하면 기독교 신앙을 현대 세계가 신뢰할 수 있게 만드느냐에 있지 않다. 그런데 어떤 의미에서는, 불신앙이나 무신론은 지적인 문제가 아니라 정치적인 문제다. 오늘날 사회운동은 일반적으로 정의로운 평화의 세상을 세우는 데 하나님은 필요 없다는 전제 위에서 이루어진다. (59)

 

과연, 대한민국에서는 얼마나 설득력 있을까? 

 대한민국에서 하우어워스의 논의가 얼마나 적실할까 싶다. 이 책을 읽고 뜨거워 졌다. 심정적으론 대단히 동의를 한다. 하지만 또 하나 떠오르는 물음은 우리나라가 언제 서구처럼 기독교가 중심에 있었나 싶다. 물론, 이승만부터 90년 대까지 그리고 지금 기독교 인구가 상당히 높기때문에 정치적으로는 기득권층일 수 있다. 그러나 서구처럼 기독교가 정치의 중심에서 섰던 역사가 그리고 기독교가 문화의 중심에서 삶의 구석까지 스며드는 역사가 있었나 싶다. 몇 몇 그런 부분들이 보이기는 하지만 서구의 역사보다(앞서 이 책의 저자들이 언급한대로 1000년 이상의 역사) 우리는 훨씬 짧은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콘스탄티누스주의랄까 크리스텐돔이랄까 그러한 개념이 우리에게 성립될까 싶기도 하다. 대한민국 사람들의 중심은 유, 불, 전통종교가 더 깊숙히 있지 않은가. 

 그럼에도 지금의 개신교가 콘스탄티누스주의를 지향하는 것은 분명하다. 대한민국 개발기 시기 개신교 역시도 부흥의 시기였다. 후에 리뷰를 남길 책이지만 김덕영의 <에리식톤 콤플렉스>에서 그걸 제법 설득력 있게 말해준다. 그리고 강남권 초대형교회들과 독재정권시기, 이명박 대통령 때를 생각해보면 보수 개신교는 늘 주류의 눈치를 봤고 주류가 되고 싶은 욕망이 있다. 그래서 고지론 vs 저지론 논쟁이 있었던 것 같다. 하우어워스와 윌리몬에 따르면 고지론은 복음적이지 않은 것이다. 

 

 코로나 정국에서 이 책을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정권에 따라서 나의 입장이 달라진다. 만약 미통당 정권이었고 코로나 사태가 터졌다면 나는 예배드리지 말라는 그들의 권면에 저항했을 것이다. 하지만 더불어민주당 정권 하에서 나는 그들의 조언을 따른다. 물론, 특수한 상황이기에 저항이 교회에서 예배드리겠다 그런 의미는 아니고, 아마도 틱틱거리며 지들이 뭔데 라고 하면서 불만을 표했을 것은 뻔하다. 아마 지금의 어르신들의 심정이 어느 정도 이해가 가는 심정이다. 입장바꿔 생각해보면 그런 마음이 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면 ㅅㄹㅈㅇ교회처럼 대놓고 마스크 안 쓰고 예배드리는 몰상식한 행동은 하지 말아야 한다. 어디까지나 에배를 드린다 하더라도 방역을 철저히 해야 하는 것은 기본 상식이고 신앙인의 자세다. 여튼, 정권에 따라 달라지만 내 포지션이 참으로 애석하게 느껴졌다.  

오락가락하는 내 마음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정치적 과제는 세상을 변혁시키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세우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 세상을 더 좋게 만드는 것이 우리의 첫째가는 과제라고 말하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교회를 통하지 않고서는 세상을 바르게 해석하거나 정확하게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60-61)

 대표적으로 나를 뜨겁게 만드는 문장이었다. '그래! 우리가 하는게 세상 좋으라고 하는 게 아니야!" 이 책의 저자들은 세상을 좋게 하더라도 교회의 사명을 잊지 말고 해야 해! 라고 말하는 것 같다. 반론이 생각났던 이유는 이 책을 읽을 당시에는 (그가 비판을 받는) 고립주의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앞서 말한 '세상을 좋게 하더라도'는 빼먹고 '세상은 그러면 뭐냐?', '불의나 뭐 그런 것들은 놔두라고?!' 이런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지금에야 정리가 조금 되어서 교회로서의 모습을 챙기고 세상을 보라는 그의 말로 읽힌다.  물론, 밑에 메모를 보면 알겠지만 내가 헷갈렸던 이유는 교회들이 세상을 변화시켜려는 행동을 모두 콘스탄티누스주의로 말하는 것 같아서 이다. 그래서 두 저자가 조금 정의를 정교하게 다듬어주었으면 헷갈리지 않았을 것 같다. 

 

식민지?

 여기서 우리는, 교회를 식민지로 보는 이미지에 곤란함을 느끼게 된다. 식민지가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한곳에 정착하고 자기 소유권을 주장하고 울타리를 치고 자기의 영역을 지키는 것을 의미한다. (79)

 전혀 공감이 되지 않는 정의이다. 저자들의 식민지라는 표현이! 확실히 식민지 국가가 되어보지 못한 국민이다 싶다. 여간 불편했다. 북토론하는 분들 중에도 이를 지적하는 분이 계셨다. 하나님 나라의 식민지라기 보다는 하나님 나라의 교두보가 어떨까 싶다. 식민지라고 한다면 대한민국 사람들은 뭔가 억압하고 폭정을 일삼는 이미지가 떠오른다. 일본처럼. 아마도 콘스탄티누스주의처럼 본인 스스로도 서구열강의 시각을 자기도 모르게 하고 있는 것 아닌가 싶다. 

나가면서

 이야기하고 싶은 내용이 참 많다. 생각해볼 여지를 많이 던져주었다. 특히 나에게 좋았던 점은 교회로서의 정체성을 확고히 하자는 메세지였다. 그와 같은 궤를 하는 월터 부르그먼도 그렇고 목회자란 무엇인가도 목회자의 정체성을 깨우는 책이기에 교회의 정체성을 깨우는 이 책이 참 좋다. 교회란 어떤 곳이여야 하는가. 그 자세한 모습을 저자들은 그려준다. 교회란 어떤 모습을 보여야 하는지 우리 모두 던져야 할 때다. 교회를 다니던 다니지 않던 세상 속 교회의 발자취가 무시할 수준이 아니기 때문에 안팍에서 교회란 어떤 곳인지 물어야 한다. 물론, 안아서는 더더욱!

 신학생들은 이 책을 꼭 읽어봤으면 좋겠다. 

 

 

 


메모

그리스도인은 그린 빌이나 다른 어떤 장소에서 저절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모험적인 교회에 의해, 다시 말해 올바른 질문, 오직 그리스도만이 정답을 제공해 줄 수 있는 질문을 던질 줄 아는 교회에 의해, 계획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36)

- 문화에 기댄 기독교인가, 복음에 기댄 기독교인가? 

 

 

 

국가가 신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전에는 교회의 손에 달려 있던 교육과 치료, 공공복지에 대한 책무가 점점 더 국가로 넘어갔다. 금세기에 이 운동은 "복지국가"의 출현으로 인해 훨씬 더 빠르게 진행되었다. 이전 세대들은 하나님만이 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들, 곧 공포와 굶주림과 질병과 결핍으로부터의 자유, 한마디로 말하면 "행복"을 이제는 중앙정부가 줄 수 있고 또 마땅히 주어야 한다는 생각이 널리 퍼지게 되었다. (56)

- 동감.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러나 고백 교회가 말하는 회심이란, 세례를 받아 새로운 백성, 즉 대안적인 폴리스이자 교회라 불리는 대항문화적 사회조직체에 접붙여지는 긴 과정을 의미한다. 고백 교회는 교회를 이룸으로써 이 세상에 영향을 끼치고자 노력한다. (71-72)

-이것 자체는 콘스탄티누스주의가 아닌가? 교회가 세상에 영향력을 끼치는 그 자체가 문제인가? 아니면 그 순서와 방식이 문제인가? 정의가 정교하지 못한 것 같음.

 

 

 

내가 대답했다. "그래요, 학생의 말에도 일리가 있습니다. 이 일에 대한 기독교적 대응은 어떤 것일까요?" 그러고는 틈을 주지 않고 내가 답을 했다. "기독교의 응답은 아마도 다음과 같은 식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 내일 아침 미국 연합감리교회가 리비아로 천 명의 선교사를 파송하겠다고 선포하는 겁니다. 우리는 그 나라가 복음을 전하기에 기름진 땅이라는 사실은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선교사들을 보낸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 적어도 이것은 기독교 전통적인 응답이지요." (74)

- 이것은 콘스탄티누스주의가 아닌가? 

 

 

 

근본주의 성서해석과 성서 고등비평은 흔히 동전의 양면과 같아 보인다. 근본주의 해석자들은 스코틀랜드 상식철학파에 뿌리는 두고 있는데(그래서 근본주의는 현대판 이단이다), 이 상식철학파의 주장에 의하면, 사고하는 합리적인 사람이라면 누구나 명제를 이해할 수 있다. 합리적인 사람이라면 누구나 하나님이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는 주장을 상식으로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기독교 설교자는 단지 이러한 명제를 주장해야 하며, 또 그것은 참된 것이기에 상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누구나 이해할 수가 있는 것이다. (230)

- 극딜?

 


책 맛보기

하나님 없이도 자신이 진리가 된다고 주장하는 정치적 강령들을 믿어서는 안 된다고 가르쳐 주는 것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다. (61)


오늘날 자유와 평등이라는 명분으로 모든 사람을 사로잡아 버린 무신론적인 문화는 기독교 신민지를 적으로 간주하고, 그 소중한 미덕들에 끈질기게 공격과 비난을 가하고 있으며, 항상 젊은이들을 빼앗아 가려고 노리고 있는데, 이러한 처지로 밀려난 기독교 신민지는 자기 구성원들에게까지 하나의 도전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79)


여기에 재난이 발생했고 저곳에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터졌다고 떠들어대고 나서는, "이제 이것"이 꼭 필요하다고 말하면서 우리 세상은 잘 돌아가고 있다는 느낌을 우리에게 회복시켜 주는 광고를 내보낸다. 현대인이 제아무리 자유와 선택의 능력이 있다고 큰소리친다 해도, 사실은 이리저리 내몰리고 서로 분열되어 있어서 아무런 힘도 쓸 수 없는 무기력한 떼거리에 불과하다. 그저 저주 위에 저주를 덧쌓고 있을 뿐이다. (83)


우리는 예수를 따르지 않고서는 그를 알 수 없다. (84-85)


현대 세계에서 사람들은 경제적 조건과 사회계급, 교육, 인종, 지식, 심리적 문제를 기준으로 판단을 받으며 그에 따라 당신은 운 나쁜 희생자요 그러니 불평하기보다는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면 좀 더 행복해 질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품도록 길들여진다. (101)


일련의 학급을 거쳐 공부를 했기에 교회 안에 남아 있게 된 사람이 얼마나 될까? 우리 중에 책을 읽거나 교회학교를 다녀서 그리스도인이 되고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149-150)


우리가 지금 얘기하는 목회가 사람들의 어려움을 다루는 것이라면 저도 그 생각에 찬성합니다. 그런데 그렇지가 않잖아요. 우리가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자동차를 두 대나 소유하고 호숫가에 별장을 갖고 있으면서, 캠핑카를 사기 위해 날마다 열심히 씨름해야 하는 사람들에 대한 목회입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사람들이 그렇게 열심히 일하고 자녀들을 방치하는 것입니다. 저는 정말이지 교회가 그러한 풍조에 휘말리고 그것을 조장하는 것이 보기 싫습니다. (170)


기독교 신학이 씨름해야 할 가장 큰 과제는 번역이 아니라 실행이다. 현대의 위대한 신학자들이 우리의 언어를 현대성에 맞게 번역하려고 애썼던 주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교회가 실행에 무기력하게 되어 버렸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러나 제아무리 세련된 신학 사상이라 해도 하나님에 관한 언어를 몸으로 살아 내는 사람들의 공동체인 교회를 대신할 수 없다. 이 공동체 속에서는 우리가 함께하는 삶과 우리의 말이 모순되지 않으며, 따라서 하나님에 관한 담화는 솔직하게 이루어진다. 교회란,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하나님의 용서를 받으며 그로 인해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할 수 있게 된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에 관한 우리의 언어가 가시적이고 정치적인 형태로 실행된 것이다. (240-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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