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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리뷰/교회

[책리뷰] A. K. M. 아담, 스티븐 파울, 케빈 벤후져, 프란시스 왓슨 - 교회와 함께 읽는 성경

by 카리안zz 2020. 4.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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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낀 점

 학교 과제로 읽은 책이다. 학교 과제로 낸 책 중에 읽고 싶은 책이나 읽어야 할 책이 잘 없었다. 그런데 이 책은 읽어야 했다. 이유는 프란시스 왓슨이라는 이름 때문이다. 시카고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분이 계시다. 그분의 새관점에 대한 강의를 들은 적이 있었다. 그분은 해외 신약저널에 기고를 할 정도로 실력자다. 그분은 그 강의에서 주목하는 바울신학자로 존 바클레이, 미하엘 볼터 그리거 프란시스 왓슨을 말했다. 프란시스 왓슨이 그정도로 대단한 사람이구나 싶었는데 그때 이 책의 저자 중 프란스시 왓슨이 있더라! 그가 해석학 관련된 책을 두껍게 냈던데 이 책의 기고자인 이유가 있었다 싶었다. 그뒤에 A. K. M 아담과 스티븐 파울 역시도 대단한 대가라고 들었던 거 같다. 아마 스티븐 파울까진 모르겠지만 아담은 확실히 이름을 종종 들었던 것 같다. 물론, 저자 중 한국에서 제일 유명한 사람은 케빈 벤후져이다. 가장 많이 번역되기도 했다. 그래서 원래 책 저자는 케빈 벤후져밖에 몰랐다.

 학교 과제로 읽었지만 여러 유익한 점이 많았다. 그 부분을 조금 옮겨보겠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성경해석

 무신론자인 러셀이 토마스 아퀴나스 정도라면 논쟁의 상대로 삼을 만하다고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느 책인지는 모르겠지만. 토마스 아퀴나스는 신학을 집대성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역사에서도 어거스틴 다음으로 이름이 나올 정도다. 그 정도로 엄청난 사람이다. 우리는 고등학교 윤리 시간에 토마스 아퀴나스를 한 번씩 배웠을 것이다. 신학을 집대성했을 만큼 그는 조직신학에 대가이지만 이 대가가 성경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취했을까? 이 책에서 어느 정도 그 궁금증을 풀 수 있다. 

 난 토마스 아퀴나스라고 하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을 그냥 신학에 적용한 사람으로 배웠다. 그리고 어떤 이는 그는 그저 이슬람권에서 유행하고 있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서적을 번역했을 뿐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는 "신학대전에 1000단어마다 5.44개의 성경 인용들이 있다는 것과 성구인용이 신학대전의 모든 인용 가운데 가장 많은 39퍼센트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48)에서 그는 성경신학자일 수도 있고 성경에 대해서 큰 관심을 가진 사람으로 볼 수도 있다. 어쨌든 그의 신학에서 성경은 빼놓을 수 없다는 말이다. 그의 성경해석은 이렇다. 

 

 그는 성경의 영적인 의미와 문자적 의미 사이를 구분한다. 성경의 영적인 의미는 성경 본문과 성경 안에서 지시하는 것들이 다른 것들을 가리키는 기호라고 다룬다. 따라서 구약에서 증언된 것들은 신약에서 증언된 것들을 가리킬 수 있다.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들은 우리가 본을 받아야 하는 것을 가리키는데 사용될 수 있다. 미래를 지시하는 것들은 현재 우리의 소망을 인도하는 길들을 가리킬 수 있다. 이러한 영적인 의미들을.... 영적인 의미들을 읽어내는 것은 이 둘 사이의 연결 고리들을 파악하는 훈련을 실천하는 것이다. (49)

 

 영적인 의미를 가리키는 것인이 바로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들', '미래를 지시하는 것들'로 볼 수 있다. 이를 풍유적, 도덕적, 신비적 해석으로 부를 수 있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이러한 영적인 의미들에 대해 두 가지 중요한 것들을 말했다. 

 

 첫째, "영적인 의미들은 두 대상 사이의 유사성들을 식별해내는 일에 달려 있다"(50). 하지만 이를 식별해내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불안정하고 그렇기에 영적인 의미들은 신학 또는 신학적 논의의 기초로 삼기에 적합하지 않다. 

 둘째, "토마스는 성경의 어떤 교훈적인 영적 해석은 몇몇 성경 본문에 대한 문자적인 의미에 기초해야만 한다고 주장했다."(50) 여기에서 문자적인 의미는 "성경의 문자적 의미는 단순히 성경에 쓰인 단어들에 의해 이해되도록 성경의 저자가 의도한 것이다"(50) "토마스는 성경의 제 1저자가 하나님,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성령이심을 주장한다"(50) 그렇기에 성령의 영감 아래에 있는 성경의 저자들도 중요해 진다.

 성경의 1저자가 하나님이시기에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들을 이해시킬 수 있고 더 많은 의도를 담을 수 있다. 아마 그렇기에 무수한 시대를 지나왔지만 성경은 아직도 읽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신학대전에서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렇게 말했다. "문자적 의미는 저자가 의도한 것이기 때문에, 그리고 성경의 저자는 한 행동에 의해 모든 것을 단번에 이해하시는 하나님이시기에, 어거스틴이 말했듯이, 심지어 많은 의미들이 성경 본문의 문자적 의미 안에 있어도 그것은 결코 이상한 것은 아니다"(51) 바로 이 말은 성경에는 다면적, 문자적 의미가 있는데 이는 사람들을 혼란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을 막게 해주는 것이라고 말한다.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성경이란?

 

 그런데 토마스 아퀴나스는 단순히 성경을 연구하는 것 자체에 목표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59). 그는 성경을 통해 하나님과 더 깊은 사이가 되기에 성경을 읽어야 한다고 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성경이 삶의 질서를 잡아주고, 삶의 본질을 가르쳐 인간이 세상을 바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해주는 가장 중요한 하나님의 섭리적 선물로 생각"(61)했다. "성경의 다면적 문자적 의미는 하나님, 세상, 사람들, 그리고 하나님 안에서 우리의 참된 목적이 이루어지도록 우리의 미래 가능성을 증진시키는 모든 방식들을 이해하는데 아주 훌륭한 방법이 될 것"(61)이라고 봤다. 

 

 확실히 중세는 근대 전의 사회이기 때문에 경건과 학문하는 것이 같이 갔구나 하는 걸 느낀다. 수행과 신학이 같이 간다랄까? 근대 이후 학문과 신앙이 갈리져서 그런가 앎과 실천, 그리고 마음가짐이 다 따로노는 느낌이다. 이럴 때 대선배 토마스 아퀴나스의 이러한 태도는 신학을 전공하는 사람에게 귀감이 되는 글이라고 본다. 

 

나가면서

 이외에도 벤후져의 담화에 대한 이야기와 프란시스 왓슨의 이야기도 흥미롭다. A. K. M. 아담의 이야기는 동의할 수 없는 부분들이 조금 있긴 하다. 그렇지만 그들의 이야기는 어렵지만 충분히 의미있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교회와 해석학에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한 번 쯤 도전해 보길 바란다!

 

 

 

 


메모

드 셀티우는 성경은 본문의 풍경 안을 돌아다니는 침입자, 아마도 좀 더 정확하게는 이삭을 줍는 자들인 권한 없는 독자들에게도 열려 있다는 점을 우리들에게 상기시킨다. 특권을 가진 해석자들이 자신들만의 닫힌 공동체 안에서 조경을 까다롭게 다시 장식하고 있을 동안에, 자격 없는 성경독자들은 학문적 비평의 쓰레기 수납고 안에서 귀한 의미들을 지속적으로 발견한다. (26)

- 그러나 이러한 입장은 독자반응비평으로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 역사비평을 피하려다가 다른 지뢰를 밟는 꼴일 수 있다. 

 

 

 

진정 우리는 불일치를 다양한 정황들로부터 출현하여 다양한 실행자들에 의해 표현된 성경신학자들의 진정한 표시라고 간주해야만 한다. 마치 두 명의 하프연주자가 악보를 다르게 나누며 연주하듯이 두 명의 성경 신학자들도 그들의 영적인 악보를 다르게 연주하는 것이다. (36)

- 텍스트가 본래 의미하는 바에 대해서는 대답하지 않는 듯하다. 물론, 실천을 하면(예배, 예전 등) 알 수 있는 것들이 있겠지만, 원 의미을 알려고 하지 않는 것은 올바른 방법이 아닌 듯하다.(음, 개인적으로 나는 설교의 영역에서는 이렇게 할 수 있다고 본다. 하지만 성경주석학자들이 이러한 태도를 가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본다. 그들을 어떤 해석이 더 맞는가, 말이 되는가, 설득력 있는가에서 격렬하게 논쟁해야 한다고 본다.)

 

 

 

p. 43 메모

- 아퀴나스의 이런 논지는 충분히 받아드려 질 만하다. 

 

 

 

그것들은 성찬식에서 어떤 역할도 수행하지 않는다. 그것들 중 어떤 것은 실제로 주님이 자신의 살과 피를 취하셔서 자신을 떡고 포도주 같은 것으로 주셨다는 생각에 사상적으로 배치되기도 한다. 이런 텍스트들은 (안디옥의 이그나티우스가 말한 것처럼) "성찬을 우리의 죄를 위해 고난당하시고 하나님의 선하심 안에서 일으킴 받으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살로 고백하지 않는" 자들의 작품이다. (158)

- 성찬식이라는 역사적 실천을 통해 외경을 반박할 수 있구나.

 

 

 


책 맛보기

 

빌레몬서는 교회에게 사도적 제안을 하고 있다. 만약 그것이 받아들여진다면 그 자체로 엄정한 하나님의 드라마의 논리에 따라 실행된다. 교회는 사회라는 큰 덩어리 속에 존재하는 누룩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이미/아직 아니'의 상태는 언젠가 우주적 역사가 될 부활 - "모든 무릎이 꿇을 것이요"(롬 14:11; 참조. 사 45:23) - 의 첫 열매가 될 것이다. 
 ... 우리가 여전히 서로를 향해 높거나 낮은 신분으로 연기하기를 선택해야 할지도 모르지만, 사실 우리의 모든 사회적 신분의 상징들은 이미 무너졌다. 우리의 복음적 신분의 상징들은 세례의 물, 떡과 포도주이다. 하나님은 세상적인 신분의 모든 지혜들을 허무셨다. (122)


만약 누군가의 해석적 작업이 일반 해석학 이론에 지배를 받는다면, 성경에 관한 신학적 해석이 다른 비신학적인 기초 위에서 수행된 주석에 신학적 관심사를 덧붙이는 활동이 되어버리는 상황을 피하기가 매우 어렵게 될 것이다. 내가 지난 몇 년 동안 지속적으로 주장하였던 것들 중 하나는 신학적으로 해석하는 것의 열쇠는 다른 무엇보다 신학적인 관심을 최우선으로 유지하는 것에 있다. (172)


기독교 공동체들, 지역의 회중들은 그리스도 안의 참된 목적이라는 빛 안에서 성경을 읽도록 말씀과 성례를 통해 그리스도인들이 훈련받는 장소가 되어야 한다. 교회는 그들이 (교리교육, 예배, 기도를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선한 목적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도록 하기 위해 훈련되어지는 장소이다. (174)


모든 교회의 분열은 근본적으로 사랑의 실패에 기인한다. (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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