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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리뷰/신앙서적

[책리뷰] 손봉호 - 주변으로 밀려난 기독교

by 카리안zz 2020. 4.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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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낀 점

 손봉호 교수님을 처음 알게 된 건 군대에서다. 고신대학교 석좌교수로 잡지 <에세이>에 글이 실렸다(인터뷰였는지 기고글이었는지는 기억이 가물가물). 군대에서 잡지 <에세이>를 즐겨 읽던 터라 고신대학교에 이런 분이 있으셨구나 싶었다. 그런데 알고보니 이분은 서울대 명예교수시기도 했고 동덕여대 총장까지 하셨던 분이셨다. 그리고 기독교 세계관 운동을 일으킨 분이기도 했다. 이후 군대를 전역하고 학교를 복학하니 손봉호 교수님의 강의가 있었다. 그런데 못 들었다. 아마 전공필수와 겹쳐서 못들었던거 같다. 그때 그냥 들었어야 했다... 언제 손봉호 교수님 수업을 다시 듣겠는가ㅠ 그것도 라이브로...ㅎㅎ 

 

 손봉호 교수님은 기독교 철학자이기도 하다. 네덜란드 자유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으셨다. 자유대학은 아브라함 카이퍼가 세운 학교다. 내가 알기론 반 퍼슨이 지도 교수로 알고 있다. 그리고 강영안 교수님의 지도 교수도 반 퍼슨으로 알고 있다. 예전 <하나님을 사랑한 철학자 9인>을 읽었을 때 알게된 정보다. 바빙크 - 도예베르트 - 반 퍼슨으로 이어지는 걸로 안다. 하지만 반 퍼슨은 특유의 학파를 형성하지 않았단다. 물론, 오래된 기억에 의존한 정보여서 정확한 건지는 모르겠다. 반 퍼슨이 학파를 형성하지 않았던 것은 확실히 기억난다. 

 이렇게 손봉호와 강영안은 한국 철학사를 논할 때 언급되는 인물이기도 하다. 이화여자대학교출판문화원에서 나온 <한국 현대  철학 - 그 주제적 지형도>를 보면 "2장 고통의 조건 2. 손봉호와 고통 철학", "4장 철학으로서의 인문학 2. 강영안의 주체 인문학"이 있을 만큼 한국 철학계의 역사 속에 등장하기도 한다. 두 분다 한국철학학회 회장을 하시기도 했다. 신칼빈주의자인 플란팅가와 월터스토프 역시도 미국철학학회의 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는데 마찬가지로 칼빈주의자인 이 두 분 역시도 한국철학학회의 우두머리를 하시기도 했다. 이만큼 학계에서도 기독교 안에서도 실력을 두루 갖추신 분이시다. 

 그래서 그랬나? 강준만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보수주의자로 손봉호를 꼽았다. 그만큼 그는 교계의 어른이기도 하다. 1987년형 복음주의에게 안녕을 고했지만 그럼에도 아직 큰 기둥으로 느껴진다. 손봉호-이만열-김진홍-홍정길(흔히 복음주의 4인방으로 알려진 홍정길, 옥한흠, 이동원, 하용조 목사님들로는 복음주의를 다 표현하지 못한다. 이분들을 쇄신파라고 표현했나? 대표격인 홍정길 목사님에게 두는 것 같다.)
 김진홍 목사님이야 그의 전향때문인지 홍정길 목사님은 은퇴하셔서 그런지 영향력이 그닥 느껴지지 않는다. 아니면 언론에 노출도 때문인가? (최근에 홍정길 목사의 실언이 연일 화제였다. 도대체 이 어른들이 갑자기 왜 이러는 걸까. 보수교단들은 갑자기 왜 미쳐 날뛰는 걸까. 장로교 합X은 자신의 모든 교회에다가 이번 4월 총선이 무슨 체제를 선택하는 선거가 될거라고 한다. 평소 얌전하던 대형교회 목사들도 미쳐서 날뛰고 있다. 왜 이분들은 진짜 독재하던 시절에 독재자들에게는 강아지가 되던가 침묵을 유지했으면서 왜 지금 와서야 독재라고 체제를 선택하는 선거냐고 날뛸까? 만만해서? 박정희랑 전두환처럼 사람들 여럿 죽이는 놈들이니 얌전했다가 이제 만만한 사람들 들어오니 미쳐서 날뛰는 걸까? 물론, 김진홍, 인명진 이런 분들의 과거까지 없는 것처럼 말하고 싶진 않다. 김진홍은 남산감옥에서 고문을 받다가 어느 쪽인진 모르겠지만 손이 불편하다. 감옥에서 죽을 뻔도 했고. 인명진 역시도 감옥을 4번인가, 5번인가 갔다 왔다. 언제는 설교 한 번 했는데 그 설교로 인해 감옥 갔다. 그렇기에 이 두 사람의 전향은 참 가슴 아픈 것이고 함부로 말하기가 꺼려진다. 

 여튼, 그래도 손봉호, 이만열 교수님은 아직 건제하신 거 같은 느낌적 느낌이다. 어른이라고 한다면 단연 이분들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이 책은 CUP에서 낸 책 답게 기독교 세계관을 다룬다. 하지만 학술적인 책이 아니라 에세이다. 기독교 세계관 열풍을 일으킨게 손 교수님으로 알고 있는데 평생을 몸담았던 기독교 세계관 운동가(?)답게 또, 기독교 철학자답게 세상을 깊게 분석한다.
 이건 진짜 딴 이야기지만 모 출판사에 나온 책에 굉장히 실망한 적이 있다. 한 책은 아무 분석도 없이 그냥 신자유주의 나빠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짱짱 이 수준으로 책을 냈더라. 또, 한 책은 유명 저자에다가 학술적인 주석인 줄 알고 샀는데 무슨 말랑말랑한 책인지;; 책이 분명히 주석처럼 소개되었고, 구약 교수님이신데 설교를 써놓으셔서 참 당황했다. 그 출판사에서 나오는 한국인 저자책은 이제 신중히 사는 걸로. 번역서는 참말로 좋은게 많이 나오는데ㅜㅜ

 

인류문명을 바꾼 종교개혁

  그의 시각에서 참으로 많은 것을 배웠다. 근대를 탄생시키는데에는 종교개혁이 한 몫했다. 특히나 자본주의를 칼뱅주의자들이 탄생시킨 건 아니지만 발전을 시키는데 큰 공헌했단 건 상식이다. 그뿐만이 아니라 현대 과학도, 기술도 사실 종교개혁을 무시할 수 없다. 괜히 칼뱅이 근대의 아버지라 불리겠나? 손 교수님은 이를 잘 지적해준다.

 

 종교개혁이 인류역사에 공헌한 것이 한둘이 아니다. 민주주의, 기본 인권 사상, 자본주의, 현대 과학 등 현대 문명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것들이 대부분 직간접적으로 종교개혁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그들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또 하나 있는데 바로 현대 교육이다. 오늘날 전 세계 대부분의 나라가 시행하고 있고 너무나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의무교육제도는 사실 종교개혁자들의 가르침에 의해 시작되었다. 
 종교개혁 이전에는 오직 소수의 귀족만이 교육을 받았고, 주로 사제, 의사, 공직자 등 전문직 양성이 주목적이었다. ... 그러나 칼뱅은 교육의 목적이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며, 그 내용은 성경과 하나님의 창조라고 가르쳤다. 그런 지식은 귀족이나 전문직 종사자들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다.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하나님을 알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므로, 모든 사람이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칼뱅은 국가는 모든 시민이 의무적으로 교육을 받도록 강제력을 행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루터의 생각도 비슷했다. (233-234)

 물론 직업에서의 성공을 곧 예정의 증거로 보았다는 베버의 주장에는 이의가 많다. 그러나 소명론, 근검절약, 이자 허용은 모두 역사적 사실이고, 칼뱅주의가 자본주의를 태동시켰다 할 수는 없어도 자본주의 발전에 크게 공헌한 것은 부인할 수 없다. 따라서 오늘의 개신교인들은 자본주의의 악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책임을 져야 한다. (239)

 

 그러나 종교개혁으로 인해 이룬 큰 흐름은 양날의 칼이 되어 우리를 겨눈다고 했다. 어느 부분이 그런가 하면 "개인의 자유가 신장된 것"(244)이 그렇다. "종교개혁이 눈에 보이는 교회의 권위를 상대화하고 누구든지 성경을 읽고 해석할 수 있으며 개인이 교회나 사제의 매개 없이 하나님께 바로 기도하고 자신의 양심에 따른 판단과 행동에 대해서 하나님 앞에 직접 책임지는 것이 허용되었으므로 개인의 자유가 신장되고 개인주의가 강화되었다."(245) 물론 이는 종교개혁 때문만은 아니지만 개인의 자유를 실제 가능케 한 것은 종교개혁때문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지나치게 확장되는 개인주의로 인해 사회와 문화가 얼마나 심각한 문제를 보이는지 저자는 심히 걱정한다. 

 <종교개혁 시대의 예술>을 이야기하면서 위기를 꺼낸 것이지만 경제를 이야기할 때도 위기를 말한다. 하지만 이때는 극복하는 방법 역시도 알려준다. 이 방법은 칼뱅에게서, 종교개혁자들에게서 배우자고 저자는 말한다. 현대의 위기를 극복하는 법을 배우자고 한다. 

 

 그러나 칼뱅이 이자를 허용한 것에 대해서는 올바른 이해가 필요하다. ...
 그는 무조건 이자를 허용하지는 않았다. 인간의 전적 부패에 누구보다 민감했던 칼뱅은 이자 허용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를 잘 알았다. 그래서 그는 이자를 허용하되 일곱 가지 조건을 충족시킬 것을 요구했다. ...
...
 현대 개신교는 현대 사회가 무시해 버린 개혁자들의 가르침을 회복하야 한다. 가난한 자를 돌보고 이익과 무관하게 열심히 일하며 무엇보다 더 절제해야 한다. 종교개혁자들은 '세계내적 금욕'을 실천했다는 베버의 주장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239-240)


 성경이 가르치고 종교개혁이 되살린 중요한 가르침들은 직간접적으로 한국의 발전에도 기여했다. 만약 한국이 종교개혁 정신으로 발전한 나라들의 정치와 경제제도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개신교를 수용하지 않았다면 우리가 오늘만큼 발전할 수 있었겠는가? 그 전통의 핵심에는 이웃 사랑이 있고 그것을 제거하면 종교개혁 정신은 빈 껍칠만 남을 것이다. (250) 

 

철학자의 시선

 그 외에도 철학자의 시선이 오롯이 담겨 있어 배운 바가 많았다. 확실히 이정모 관장은 과학자여서 과학자의 시서을 이번에 손봉호 교수님은 철학자이기에 철학자가 바라보는 시선을 제대로 맛 볼 수 있었다. 대표적으로 칼 포퍼의 반증가능성의 원리가 이런 의미인줄 감을 잡았다.

 

 물리학자요 철학자였던 칼 포퍼는 모든 자연과학적 설명은 '가설연역적 방법'에 따라 이뤄진다고 주장했다. 여기저기서 그리고 서로 다른 시간에 온도가 0도일 때 물이 어는 현상을 보고 "모든 물은 0도엣 언다"는 결론을 내리는 귀납적 방법이 아니라, 과학자는 우연의 경험이나 창조적인 사고를 통해 먼저 "물은 0도에서 언다"고 가정하고, 그 가정을 반증하기 위해 실험한다. 만약 그 가설이 실험을 통해 한 번이라도 반증되면, 즉 0도에서 물이 얼지 않은 경우가 한 번이라도 있으면, 그 가설은 폐기된다. 따라서 그 가정은 폐기될 때까지만 타당한 이론으로 인정된다. 그것은 어떤 이론도 영원히 폐기되지 않으리란 보장은 없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모든 과학적 진리는 잠정적으로만 타당하다. 그리스도인이 거기에 목을 맬 이유는 없다. (204-205)

 

 A는 B다는 것이 과학적으로 밝혀졌다는 것이 무조건 올바르다는 것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그것은 반증이 가능한 상태에 있으며 그렇기에 잠정적으로 타당한 것이다. 과학은 진리가 아니다. 그것은 과학자들이 더욱 그렇다고 말한다. 과학은 가치판단을 말하지 않는다. 과학은 있는 그대로의 설명을 말할 뿐이다. 존 폴킹혼이 <쿼크, 카오스, 그리고 기독교>에서 멋지게 설명했듯이 과학은 물이 끓을 때 "어떻게"라는 관점에서 설명해주며 신학은 "왜"라는 관점에서 설명을 해준다. 과학에게 "왜"라는 물음을 던지지 말라. 답변은 "100도에서 끓어" 뿐이다. 그것은 "왜"라는 물음에 대답이 아니다. 신학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물을 끓이고 계셔"와 같은 대답을 해준다. 반대로 신학에게 "어떻게"라는 물음을 던지지 마라. 그 질문에 대답을 하는 것이 창조과학이다. 말도 안 되는 질문에 대한 답은 역시 말도 안 되는 대답이다. 

 노회한 철학자의 시선이 오롯이 담겨 있어서 참 재미있다.

 

나가면서

 한 장, 한 장에 울림이 크다. 손 교수님의 시각이 나랑 닮아서 일까? 공감되는 말들이 너무나 많고 평소 생각했던 바를 더 확장해나갔다. 머리가 아픈 책을 읽고 있을 때 이 책은 긴장을 풀어준다. 이런 책 또 읽고 싶다. 나의 뇌의 건강을 위해서?  

 

 


책 맛보기

 

돈의 노예가 되는 것은 자신을 경멸하는 것이다.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써야 할 곳에는 돈을 써야 한다. (69)


상황이 이러함에도 한국에서는 교회조차 돈의 우상숭배에서 벗어나지 못할 뿐 아니라 더 나아가 이상하게도 교회 자체가 우상이 되고 있다. 자기가 출석하고 자기가 섬기는 '우리 교회'가 우상으로 변질되고 있다. 그리스도보다 '우리 교회'가 더 중요하게 되어서 그리스도의 영광과 복음에 이익이 되어도 '우리 교회'에 이익이 되지 않으면 시도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영광과 복음에 해가 되어도 '우리 교회'에 이익이 되면 감행한다. (73-74)


한국인은 한복을 입지 않는다. 한복은 명절에만 입는 사치품이 되었다. 현대인에게 종교는 마치 한국인의 한복처럼 되고 말았다. 우리 삶의 한가운데는 경제와 정치, 기술, 학문이 자리 잡고 있고, 스포츠와 예술, 연예 등은 중간지대에서 왔다 갔다 하는데, 한때 삶의 중심부에 있었던 종교는 주변으로 밀려나 사적인 공간에서 쉬는 시간에나 관심을 쓰는 대상이 되고 말았다. 기독교도 예외가 아니다. (91)


그러나 우리는 한 문화의 어떤 요소는 잘못되었고 어떤 요소는 훌륭하다고 평가할 수 있어야 한다. 아프리카 어느 부족의 상부상조 제도는 칭찬할 수 있고 인도의 과부 화장제도나 중부 아프리카 여자 할례제도는 그것이 그들 문화에서 아무리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더라도 우리는 강력하게 비판해야 한다. 한 문화 전체의 우열을 판단할 수는 없지만 한 문화가 가진 어떤 특정 요소를 칭찬하거나 비판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문화상대주의는 인정하되 도덕적 상대주의는 수용할 수 없다. (133)


창조 교리가 자연에서 신적인 요소를 제거했고, 출애굽 사건이 국가가 누려 왔던 신적인 권위를 허문 것처럼, 기독교적 학문 활동도 학문적 지식은 모든 가치와 이념을 초월하고 객관적이고 보편적이며 인류가 당면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환상을 제거하고 그 능력에 적절한 위치를 제시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166)


그런데 오늘의 교육, 특히 한국의 교육은 점점 더 종교개혁 이전의 교육과 비슷한 모습으로 변질되고 있다. 하나님을 알고 이웃을 사랑하도록 가르치는 인간 교육이 아니라 좋은 직장을 얻고 더 많은 힘을 획득하기 위한 직업 교육이 되고 있다. (235)


종교 개혁자 칼뱅은 사유 재산도 옹호하고 이자도 허용하며 부의 축적을 하나님의 축복으로 간주함으로(이것은 칼뱅이 아니라 칼뱅의 일부 추종자들의 주장인 것으로 드러남) 자본주의를 싹트게 했다고 베버와 토니가 주장했다. 그러나 칼뱅의 사회사상을 연구한 비엘러는 칼뱅 사상을 '사회적 인간주의'라고, 트뢸치는 '기독교적 사회주의'라고 했다. 그 어느 주장도 칼뱅의 사상을 완전히 대변한 것 같지는 않다. 다만 분명한 것은 칼뱅이 경제적인 부를 그 자체로 가치 있는 것으로 취급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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