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낀 점
아주 긴호흡이 필요한 책이다. 깨알같은 글자로 700페이지가 넘는데 왠만한 양장본으로 만들면 1000페이지는 넘어갈 책이다.
그의 작업을 보고 나니 왜 신학계의 두 라이트가 있다고 하는지 알 것 같다. 신약이야 톰 아저씨고 구약은 바로 크리스토퍼 라이트다. 시종일관 그는 하나님의 선교라는 관점으로 성경을 읽어나간다. 물론 나는 용어에 태클을 좀 걸고 싶긴 하다. 선교라는 말에 오해할까 싶어서다. 앨런 록스버러의 강의에서 어느 분이 질문했다. "아직 선교적 교회가 우리나라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고 또 안다고 해도 선교사를 파송하는 그정도로 이해하고 있다. 선교적 교회의 그 담론을 오해하지 않고 그대로 이어받으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뭐 대충 이런 요지의 질문이었다. 앨런의 답은 명쾌했다. 선교적이라는 말을 쓰지 않아도 된다. 사실 하나님의 일하심이 더 명확하게 이해되긴 한다. 선교라고 하면 뭔가 선교사가 파송되어야 하고 그런 그림이 그려지기 쉽다. 라이트도 그러한 좁은 의미의 선교가 아니라 아주 넓은 의미의 선교라고 계속 강조를 하긴 한다. 크게 문제될 것은 아니지만 그저 다른 식으로 받아드릴까 염려될 뿐.
이런 긴 호흡이 필요한 책을 자세히 논할 수는 없고 간단하게 생각나는 점들을 적자면 그는 집대성을 하는 쪽이다. 연구를 깊게 해서 낸다기보다는 여러 신학자들이 깊이 연구한 걸 가져다가 취합한다. 당장 생각나기로 리처드 보컴, 골딩게이 등이 있다. 김세윤, N. T. 라이트, G. K. 빌의 작업도 그는 빌려온다(물론 김세윤은 다메섹 언급에서 잠깐이었지만;;ㅋㅋ). 톰 라이트가 이런 식으로 작업을 한다던데 크리스토퍼 라이트도 딱 이렇다.
그래서 그런지 성경신학이 무엇인지 알려면 이 책이 참 좋을거 같다. 그의 지도 비유는 너무 맘에 든다! 나야 바둑의 기보로 비유를 뒀는데 바둑을 두지도 못하면서 이런 비유를 들었다. 라이트의 지도 비유와 비교해보니 너무 허접하다.
크리스토퍼 라이트의 지도 비유(주석, 성경신학)
주석이나 성경신학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나는 '바둑 기보를 보는 것'으로 예를 들곤 했다. 바둑에 기보라는 것이 있듯이 성경의 주석들도 그 기보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그런데 나는 바둑을 둘줄 몰라서 기보가 어떤건지 자세히 모른다. 그저 기보란 바둑을 두는 법을 알려주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사전적 정의가 그러니깐. 그런데 그보다 크리스토퍼 라이트의 비유를 보니 훨씬 주석이 무엇인지 훨씬 잘 드러내 준다. 그의 글을 가져와 보겠다.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어떤 틀이든 필연적으로 본문을 어느 정도 왜곡시킨다. 성경 본문을 왜곡시키지 않는 방법은 그대로 복사하는 것뿐이다. 본문을 요약하거나, 파악하기 위한 어떤 체계나 유형을 제공하거나, 그 내용을 조직하기 위해 어떤 구조를 제공하려 하면 원래의 본문 자체를 왜곡시킬 수밖에 없다.
이 점에서 성경을 읽기 위한 해석학적 틀은(성경 신학의 모든 도식과 마찬가지로) 어느 정도 지도와 비슷하다. 지도 제작자들이 동의하듯, 기존의 모든 지도와 앞으로 만들어질 모든 지도는 실재를 어느 정도 왜곡하고 있다. 세계 지도가 가장 분명한 예다... 어떤 선택을 하는가는 그 지도가 누구를 대상으로 한 것이며 일차적으로 무엇을 보여 주려 하는 것인가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비교적 작은 지역을 나타내는 대축적 지도(예를 들어, 시골길을 걷거나 도시에서 길을 찾기 위한 지도)의 경우에는, 모든 지도에 나타내는 상징적 묘사에 무엇을 포함시키고 무엇을 제외시킬까 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 진짜 풍경의 특징을 모두 다 지도 위에 표현할 수는 없다. 그래서 또 하나의 질문은 그 지도의 용도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이 지도를 사용하는 사람이 분명하게 보아야 할 가장 중요한 특징들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어떤 것은 빼놓을 수 있는가? 빼놓은 것이 있다면 그것들이 지리적인 실재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특정한 방식으로 그 실재를 볼 때 일차적으로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우리는 모두 지하철 지도가 그것이 설계된 목적을 위해 실재를 왜곡한다는 것을 안다. 그 목적이란 우리가 실제로 런던의 지하철을 편리하고 안전하게 타고 다닐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그 정도 왜곡은 정당화되고 받아들여진다. 우리는 그것이 거짓이라거나 대중을 현혹시킨다고 비난하지 않는다. 이런 맥락에서 왜곡과 부정확은 절대 같은 것이 아니다. 런던 지하철 지도는 나름대로 완전히 정확한 문서다.
나는 해석학적 틀이 이렇게 지도와 비교하는 것은 일말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주어진 실재는 성경 본문 전체다. 어떤 틀도 모든 세부 사항을 설명해 줄 수는 없다... 하지만 지도와 마찬가지로, 해석학적 틀은 전체 지역을 보는 방식, 그곳을 통과해 나가는 방식, 가장 중요한 것을 관찰하는 방식, 실재 자체를 만나는 방식을 제공해 준다. (81-83)
이 비유가 성경 신학이랄까 성경의 주석이랄까, 그러한 것들을 설명하기에 가장 적합한 비유가 아닐까 싶다. 이후로 나는 지도 비유에 성경 신학과 주석을 이야기한다. 확실히 이 책은 "하나님의 선교"라는 큰 틀에서 성경을 읽어나가기에 이런 해석학적 틀에 대해서 설명할 필요가 더더욱 있을 것이다. 물론, 보수적인 성경신학이 주로 그런 것 같지만 큰 틀에서 읽으려는 시도가 있다. 성전, 그리스도 중심적, 하나님 나라가 지금 떠오르는 키워드다. 그렇다보니 너무 큰 틀에 맞춰서 본문을 보려는 것 아닌가 하는 비판을 많이 받는다. 특히나 톰 라이트의 비판점이 이 부분이다. 크게 봤을 땐 그런데 세세하게 보면 그 틀이 통용되지 않을 때가 있어서 그렇다.
나가면서
읽으면서 내내 톰 라이트의 <마침내 드러난 하나님 나라>가 떠올랐다. <하나님의 선교>는 신학에 관심있거나 특히, 성경신학, 신학을 전공한 사람들에게 추천한다. 비전공자들은 <마침내 드러난 하나님 나라>가 나을것 같다. 음, 여기에도 분량이 많기에 덜 부담되는 스캇 맥나이트의 <예수, 왕의 복음>을 추천한다. 성경의 큰 그림을 그려주는 그의 작업을 추천한다! 이미 가지고 있다면 좀더 세세히 다시 그림을 살펴보라고 추천한다. 구약의 에코를 잘 보여준다. 또, (보수적인?) 성경신학이 어떤 것인지 알고 싶다면 이 책을 추천한다!
(아! 나는 하나님의 선교라는 제목보다 박영선 목사님이 선점한(?) <하나님의 열심>이 더 뜻에 부합하다고 한다. 하나님의 일하시는 행동들 성경 전체에서 찾아나선 것이 이 책의 주요한 작업이다.)
메모
물론, 구약 학자들 간에는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등장해서 역사의 기록에 출현하게 되는 사건들을 역사적으로 재구성하는 문제를 놓고 상당한 논쟁이 있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에서 그러한 역사적 논쟁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다. 어떠한 과정에 의해서든 이스라엘은 분명 등장했으며, 그 이후 인간 역사에 누가 뭐라고 해도 심오한 영향을 끼친 하나의 사회와 전통들 및 본문들을 만들어 냈기 때문이다. (66, 각주 10)
- 그냥 퉁치고?!ㅋㅋ
우리는 선교라는 단어의 의미를 축소해서 전도와 비슷한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면 특히 그렇다. 전체 성경이 전도 이야기만 하는 것은 분명 아니다. 그리고 나 역시 성경이 전도 이야기만 한다고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다. (73)
- 내가 그랬음...
이스라엘의 하나님 야웨와 애굽의 왕(그리고 신)인 바로(그리고 애굽의 다른 모든 신들 사이에 벌어진 대규모 능력 대결이다. (116)
- 총신대 구약학 박철현 교수는 이 의견에 반론을 제기했다. 그 책은 박철현의 <출애굽기 산책>을 참조하라.
1세기 헬라어를 사용하던 유대인이라면 누구든 이 용례를 대단히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헬라어 성경을 읽으면서, 호 퀴리오스를 대할 때 '그 이름', 야웨를 생각하는 것은 대단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134-135)
- 음... 당시 황제나 격이 낮을 수도 있지만 노예의 주인에게도 퀴리오스라고 쓰질 않나?(물론 관사가 붙은 호 퀴리오스를 썼는지는 모르겠다. 크리스토퍼 라이트도 여기에 대한 각주가 없다. 그게 아쉽다.)
온 세계가 예수님에게 속해 있다면, 우리가 선교하기 위해 갈 수 있는 땅의 어느 한 모퉁이도 그분께 속하지 않은 곳은 없다. 이 지구상의 어느 한 뼘도 겉으로 보기엔 어떠하든 다른 어떠한 신에게도 속하지 않는다. (140)
- 아브라함 카이퍼! 영역 주권.
우리가 살펴본 본문들의 폭만 보아도 이것이 단순히 뒤늦게 생겨난 생각이나, 또는 단지 진화하는 역사의식이 아니었음을 보여 준다. 구약에 나오는 보편적 차원을 수세기 동안 이어져 내려온 편협한 민족주의 가운데서 후대에 생겨난 의식이라고 말하는 것은 잘못이다. 반대로, 그것은 여러 다른 역사적 시대에 기록된 다영한 정경 장르에서 발견된다. (319)
- 크리스토퍼 라이트의 성경 비평 비판.
우리는 교회 내에서 아우구스티누스적 칼뱅주의와 알미니안주의 주창자들 간에 일어난, 길고 때로는 격렬한 논쟁의 역사에 대해 지겹도록 들었다. 또 하나님이 유대인들만 편애하여 선택하심으로서, 왠지 그분의 구원 계획을 망쳐 놓았다는 비난이 설득력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전자에 대해서는 선택, 예정, 영벌 및 관련 개념들의 의미에 대한 많은 논쟁들이 조직적 추상화와 이원적 논리의 차원에서 이루어져 왔다는 점을 말해야 한다. 그런 논쟁들은 구약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것에 대해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 잊어버린 듯하다. 예수님의 히브리 성경에 나오는 선택과, 공식화된 신학 체계들 안에 나오는 선택 간에는 때로 큰 간격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쪽에서 저쪽으로 건나가는 다리는 너무 좁다.
후자에 대해서는, 즉 이스라엘을 선택한 것이 본질적으로 부분적이고, 부당하며, 온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양립될 수 없다는 비난에 대해서는 몇 가지 사항들을 상기해 보아야 한다.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본문들로부터, 구약의 선택에 대해 다음과 같은 단언들을 할 수 있다. (333)
- 성경신학의 강점이다. 성경은 이 교리적 작업에 대해서 어떻게 말할까? 성경학자들은 이에 대해 언어적, 문법적으로 접근한다.
출애굽에 대한 총체적인 선교적 해석에 미치지 못하는 두 가지 해석 방법이 있다. 하나는 그것의 영적 의미에 집중하고 그 이야기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측면을 소홀히 여기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그것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측면에 너무 집중하고 영적 측면을 무시하는 것이다. 다음에 나오는 나의 비판은 하나는 옳고 다른 하나는 틀렸다고 어느 한 쪽의 편을 드는 것이 아니다. 둘 다 그들이 주창하는 긍정적인 측면에 대해서는 성경적으로 강한 지지를 받기 때문이다. 나의 요점은 어느 한 쪽을 너무 과도하게 지향하면, 균형을 잃어버린 성경적으로 온전하지 못한 선교학적 입장이 된다는 것이다. 두 접근법은 하나님이 결합시켜 놓은 것을 떼어 놓는 잘못을 범하고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출애굽 이야기가 담고 있는 모든 것을 결헙시키는 것이다. (349)
- 보수 vs 진보? 이런 총체적 이해에서 우리는 해방신학과 만날 수 있다. 월터스토프의 <정의와 평화가 입맞출 때까지>가 거기에 대한 내용이 아니겠는가?
그들은 구약을 단지 신약을 '예시하는' 것으로 취급한다. 그 결과 구약 이야기는 자체적으로 지니고 있는 고유한 의미를 다 잃어버리고 만다. 히브리서에 나타난 '그림자' 비유를(히 8:5) 오용하는 이런 식의 접근법으로 인해 성경의 진리는 플라톤 식 이원론으로 왜곡되고 만다. 그래서 물질적이고 역사적인 영역은 열등하고 일시적인 것으로 간주되고, 영적이고 초시간적인 영역만이 '정말로 진짜인' 것으로 간주된다. (352)
- 플라톤식 이원론!
바울의 몇몇 서신에서 흔히 나타나는 유형은 첫 부분에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부르신 것에 대한 가르침이 나오고, 그 다음에 그에 따른 윤리적 반응이 나오는 것이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1:4에서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라고 말하며, 그가 들은 그들의 삶의 질에서 이에 대한 증거를 본다...
하지만 우리가 선택받은 것에 대한 반응으로 그처럼 변화된 삶을 사는 것은 단순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만이 아니다. 또한 외인들이 그것을 관찰하게 된다. 열방 가운데 있던 이스라엘처럼, 데살로니가 신자들은 그들 자신이 더 큰 사회의 주목을 받는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486-487)
- 구약의 반향!!(eco)
책 맛보기
그렇다면 기독교 유일신론의 선교사적 본질은 고질적인 종교적 제국주의나 군사적 형태의 승리주의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여러 시대마다 그 바이러스에 아무리 많은 오염되었다 해도), 구약 이스라엘과 유일하게 참되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믿음에 대한 우리 신앙의 뿌리에서 나온다. 그 하나님은 세상을 향한 사랑의 선교로 인해 이스라엘을 택하셨고 교회를 보내셨다. 열방을 복주시기로 확고히 결심하셔서 아브라함을 택하신 분은 바로 이 하나님이며 다른 신은 없다.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사 자신의 독생자를 보내신 분은 오직 이 하나님이시다. 오직 이 하나님만이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자시관 화목시키셨다. 그리고 화목의 선교와 사역을 예수님이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고 말씀하신 사람들에게 맡기신 분은 바로 이 하나님이다. 그것이 성경적 유일신론의 선교사적 본질이다. (168)
우상숭배는 하나님을 왕위에서 물러나게 하고, 피조물을 왕위에 오르게 한다. (205)
우리의 선교는 그러한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하여, 그것의 최종적 완성을 예상하면서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과 피조물의 구분을 흐리게 하는 우상들의 정체를 폭로하기 위해 계속 일하는 것, 그리고 사람들을 그 우상들이 조장하는 파괴적 망상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다. (206)
우리는 이스라엘의 세계관의 기둥들에는 그들이 아브라함 안에서 야웨에 의해 선택된 것, 그들이 출애굽에서 구속된 것, 그들이 이 하나님과 더불어 맺고 있는 언약 관계, 그리고 이 관계가 요구하는 삶과 예배의 거룩함이라는 윤리적 반응 등이 포함된다는 점을 살펴보았다. 그들은 이 모든 것들이 다른 민족들에게 적용되지 않는 독특한 방식으로 그들 자신에게 해당된다고 믿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또한 그들의 구속주 하나님이 또한 모든 다른 나라들을 포함해서 온 우주의 창조주시라는 것도 알았다. 그래서 그들은 그 나라들에 대한 하나의 신학적 관점을 분명하게 표현했다. 그것은 역사적 현실주의(현재 열방이 이스라엘의 경험에서 배제되어 있는 것)를 놀라운 종말론적 낙관론(궁극적으로 열방이 이스라엘이 그들 자신에 대해 믿은 모든 것에 포함되는 것)과 섞어 놓은, 확고하게 일관성을 지닌 관점이다.
이 광대한 관점에 따르면, 세상의 모든 민족들은 야웨에 의해 창조되었고, 그들의 역사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그 야웨의 통치 아래 있으며, 도덕적으로 그리고 특히 정의를 행하는 일에서 그 야웨께 책임이 있다. 하지만 이스라엘과 마찬가지로 모든 민족들은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으며, 동일하게 의무 불이행 상태에 있다.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는 것이다. 그 심판은 이스라엘에게 임했던 것처럼 열방에게 확실히 임할 것이다. 하지만 심판 너머에는 소망이 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에게는 언제나 소망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이 역사적으로 바벨론 포로라는 무덤에서 돌아오면서 하나님의 기적적인 회복의 은혜를 경험한 것처럼, 궁극적으로 열방의 남은 자들은 유일하신 구원의 하나님 야웨께 돌아올 것이다. 그들은 모든 거짓 신들을 거부하고, 이스라엘과 더불어 오직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그렇게 할 때, 하나님 자신이 그들을 언약 관계로 한데 묶으실 것이다. 그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을 통해 확립된 위대한 언약이 우선적으로 성취되면서, 궁극적으로 야웨께 속한 다국적 공동체 안에서 그리고 그분과의 복된 관계 안에 사는 것에서, 이스라엘과 열방 간의 차이는 궁극적으로 사라져 버릴 것이다. 구약 역사 내에서 열방과 다른 이스라엘의 특수성은 하나님의 선교에 필수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하나님의 선교는 열방이 흘러들어와 이스라엘과 연합하고 동일화되면서, 그 차이가 궁극적으로 사라지게 할 것이다 신약 복음만이 어떻게 그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보여 줄 것이다. 그리고 오직 신약 선교만이 그것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또 어떻게 열방이 완전히 다 모여들 때가지 계속 일어날 것인지 보여 줄 것이다. (628-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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