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낀 점
올슨의 책이 신학개론격이라면 버릿지의 책은 복음서의 개론격인 책이다. 민경찬 편집자의 작업 메모를 종종봐서 그런지 비아 출판사의 책은 믿고 본다. 이 책 역시도 유익하게 읽었다.
네 편의 복음서를 전통적으로 그렸던 이미지가 있다. 마가는 날뛰는 사자, 마태는 이스라엘 선생인 인간, 누가는 무거운 짐 짊어지고 가는 소, 요한은 높이 나는 독수리로 그린다. 이 이미지에 맞게 복음서를 잘 보여준다. 물론 각 서별로 자세히 본다면 비판할 지점이 있을 순 있겠지만 큰 차원에서 배울 만하다. 마지막 정리하는 지점에선 비평에 대해서 나름의 대답을 한다. 충분히 네 편의 그림을 통해서 한 분 예수님을 그려낸다고 말이다.
저자는 복음서가 그려내는 초상화를 비유를 사용하며 설명한다.
한 손에는 붓을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승리의 V자를 그리며 바지는 일상복을, 상의는 군복을 입은 채 슬리퍼를 신고 차를 마시며 루스벨트와 협상을 벌이는 처칠의 모습을 상상해 보라. 이런 터무니없는 모습은 네 명의 작가들, 더 나아가서는 그림의 주 소재인 처칠에게도 온당치 않은 결과물이다. 처칠은 한 명뿐이지만 네 장의 그림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그의 개성을 묘사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한 사람을 온전히 음미하려면 다양한 초상이 있어야 하며 역사적 연구라는 도구를 가지고 각 초상을 숙고해야 한다. 그렇게 한 뒤에, 아니 그렇게 해야만 우리는 각각을 조화롭게 엮고 균형감이 있게 아울러 한 사람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 네 장의 그림을 갈기갈기 뜯어 기괴한 한 장의 혼합물로 만든다면 제대로 된 이해는 불가능하다. (26)
그렇다. 오히려 복음서의 각각의 그림들을 조화롭게 이해함으로 더 대상에 다가갈 수 있다. 역사비평의 방식이 어느 정도 도움을 주지만 그것만 한다면 버릿지의 말처럼 '기괴한 한 장의 혼합물'될 가능성이 높다. 버릿지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성서의 네 복음서를 잘 그려낸다. 그는 이렇게 서술한다. "예수는 '인간'으로 태어나 '소'처럼 희생되었고 '사자'와 같이 다시 일어나 승리했으며 자기 백성을 보호하기 위해 '독수리'처럼 날개를 펴 하늘로 올라갔다"(66-67).
각 복음서를 어떻게 그렸는지 버릿지는 잘 설명해 준다. 이를 요약해서 정리해 놓으면 도움이 될 것이다. 그 요약을 여기에서는 쓰지 않을 것이다. 버릿지가 마지막 장 '6. ... 하나의 예수'를 이야기해 보겠다.
챕터 6. ... 하나의 예수?(285-314): 다양성과 통일성의 문제에 대해
근대를 지나며 성경은 비평의 시대를 건너게 된다. 그 시대를 건너며 무수히 많은 질문과 대답들이 생겼다. 그리고 이제는 근대 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길을 건너게 되기도 했다. 성경 역시도 전과는 이제 보는 방식이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서 사복음서의 다양한 모습은 과연 모순적인 그림일까? 아니면 하나의 통일적인 무언가 있는 것일까? 부딪힐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일단 초대 교회가 부딪힌 문제는 "네 개의 일대기가 있음에 따라 그리스도론이 넷이라는 점"(287)이었다. 비그리스도교 비평가들이 이를 문제시 삼았고 곧 여러 이야기가 존재하니 완벽하지 않다고 비평을 했다. 이레네우스 또, 오리게네스에서 아우구스티누스까지 복음서가 지닌 다양성을 변호하였다. 초대 교회는 타티아누스(모든 복음서를 하나로 묶어냄), 마르키온[루가의 복음서만 전용(1. 남과 공동으로 쓰지 아니하고 혼자서만 씀. 2. 특정한 부류의 사람만이 씀. 3. 특정한 목적으로 일정한 부문에만 한하여 씀)]을 단호하게 거부했다.
이처럼 복음서 구절을 쉽게 합치려는 시도는 경계해야 한다. "마태오의 복음서에 등장하는 동방 박사 이야기에 특별한 문학적, 신학적 목적이 있음을(이를테면 왕권, 경배, 예수에게 찾아온 유력한 이방 사람들) 알게 되었을 것이다. 또한 루가가 그린, 여관 뒤로 목자들이 찾아온 초라한 장면은 예수가 낮고 비천한 자들의 짐을 대신 짊어지고 가는 존재라는 루가의 복음서의 주제를 드러낸다... 두 주제는 충돌을 일으켜 어떠한 것도 제대로 전달되지 않을 것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마르코는 십자가에 달려 한 마디 외침만을 남긴 고적한 예수를 그린다... 그러나 요한은 예수가 남긴 승리의 외침을 강조한다... 어느 쪽이든 이 구절들은 각 복음서가 그려낸 그림과 그림에 담긴 신학이 나타난 결정적인 지점이다. 전례 독서를 할 때 두 구절을 한꺼번에 낭독한다면 사람들은 첫 번째 구절에 담긴 참혹함도, 두 번째 구절에 담긴 강력한 힘도 느낄 수 없을 것이다."(289)
역사적 예수의 문제
우리는 여러 질문에 봉착한다.
역사 속에서 실존했던 예수와 네 편의 초상 사이에는 어떠한 역속성이 있는가? 마르코의 복음서는 '마르코의 예수'(이 말은 마르코의 창작물임을 암시한다)를 이야기하는 것일까, 아니면 '마르코가 바라본 예수'(이 말은 복음서 저자가 역사 속에서 실존했던 인물을 특정한 방식으로 바라보고 이해했음을 암시한다)를 이야기하는 것일까? 복음서 저자들은 자신들이 갖고 있던 원자료에서 적절한 자료를 '선택한 것'일까? 아니면 그들이 직접 '만든 것'일까? '그의 이야기'his story와 '역사'history는 어떠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일까? '그의 이야기'가 '역사'가 아니더라도 진리일 수 있을까? (292)
여기에 대한 물음에 버릿지는 단호하게 이렇게 대답한다.
우리는 고대인들이 진리truth와 신화myth, 거짓lies과 허구fiction를 어떻게 이해했는지 고려하지 않은 채 현대적인 개념들을 고대 문서에 들이대서는 안 된다. 현대적인 사고방식으로 볼 때 '신화'는 진실이 아닌 '옛날이야기'를 뜻한다. 그러나 고대 세계에서 신화는 심오한 진리, 다시 말해 단순한 사실보다 훨씬 더 참된 진리를 전달하는 매개였다. 진리의 반대말은 허구가 아니라 거짓과 기만이다. 역사는 기만하는 데 이용될 수 있듯 이야기는 진리를 전하는 데 활용될 수 있다. 고대 세계가 진리와 허구를 어떻게 이해했는지는 무척 복잡한 문제이기에 이 자리에서 상세기 다루기는 힘들다. 그러나 기억해야 할 점은 고대인들이 특정 진술의 논리적 중요성보다 그 진술이 담고 있는 도덕적 가치와 철학적 유용성에 더 관심을 기울였다는 것이다. 고대인들은 사실fact보다 진리truth에 관심했다. (292-293)
저자의 이 명쾌한 대답에 이어 타키투스가 쓴 고대 전기 <아그리콜라>를 예시로 말한다. 이 작품에서도 전투가 벌어진 시간이나 장소 같은 단순한 '사실'보다 더 중요한 '진리'를 설명하는데 이 고대 전기를 사용한 것이다. 당시 고대 "전기 작가들은 역사 서술을 할 때보다는 더 적극적으로 주인공을 '해석'했다. 그렇다고 해서 주인공에 관한 찬가나 고대 소설을 쓰듯 하지는 않았다. 기사는 역사 속에 실존했던 인물과 연관성이 있어야 했다. 이는 복음서 저자들이 저자 특유의 예수를 그릴 때 확보할 수 있는 운신에 제약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고대 전기, 그리고 복음서를 접했을 때 우리는 역사를 바라보는 현대적 기준을 들이대서는 안 된다. 그렇다고 전설이나 소설에서 볼 수 있는 창의성을 기대해서도 안 된다."(295)
그래서 저자는 사실 그대로의 역사 서술이 없기에 복음서를 인정하지 않는 일부 연구자들에게 동의하지 않는다. 무자비한 역사 비평의 칼을 예수에게 들이대는 것을 저자는 완강히 거부한다. 이는 엑서터 대성당을 '한낱 돌무더기'라 부르는 것과 똑같으며 인간을 '화학 성분 한 줌과 물 한 동이를 합친 혼합물', 혹은 '이기적 유전자의 모음'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296).
저자는 적절한 균형을 잡는데 역사 비평(저자는 실제 역사 복원이라고 표현한다)을 무리하게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적절하게 사용해야 한다고 말한다. 너무 유대적 배경에서 설명하려고 한다면 왜 모든 사람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려 했는가가를 이해하기 어려워 진다고 했다.
이후 예수를 보는 다양한 관점이 생겨났다. <역사적 예수 논쟁>에서나 크레이그 에반스의 <만들어진 예수>에서 나왔듯이 엄청나게 많은 예수를 사람들은 만들어 냈다. 과연 그렇게 만들어낸 예수가 다 올바르다 할 수 있을까? 저자는 한계가 있다고 본다. 복음서가 마흔 네권이 아니라 네 권이라는 것에서 다양성의 한계를 말한다. "초대 교회는 네 개의 구별되는, 서로 다른 예수상을 간직함으로써 미래에 그려질 예수상이 나아갈 수 있는 경계선을 마련했다."(306) 저자는 비유를 통해 이 경계선 이야기를 한다. 비유가 참 좋다. 한 번 보시라.
네 편의 복음서가 지닌 다양성은 수천 년에 걸쳐 수많은 예수상이 생기는 데 자극제 역할을 했다. 또한 우리가 살아가는 근대 이후의postmodern, 나아가 무신론 이후의post-atheistic세계, 서구권의 낙관적인 과학적 인본주의와 동구권의 공산주의가 모두 붕괴하고 난 21세기 세계에 걸맞은 새로운 예수상을 그리도록 사람들은 고무한다. 그렇다면 어디까지 이를 허용할 수 있을까? 그 한계란 무엇일까? 네 편의 복음서는 어떻게 이 모든 그림을 '제어'할 수 있을까? 흥미롭게도, 4라는 수는 운동경기장을 둘러싼 면의 수이기도 하다. 축구든 미식축구든, 럭비든, 야구든, 경기를 진행하려면 공은 경기장 안에 있어야 한다. 경기장 밖으로 공이 나가는 것은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기에 심판은 '라인아웃'이나 '스로인'을 선언해 공을 경기장 안으로 다시 넣고 이때에야 비로소 경기는 재개된다. 한계, 경계선을 넘어가면 크리켓에서는 6점을 얻고 야구에서는 홈런이 된다. 모든 사람은 여기에 갈채를 보낸다. 그러나 경기가 계속되려면 공은 다시금 경기장 안으로 들어와야 한다. (308-309)
절묘한 비유가 아닐 수 없다. 내가 이해하는 바로는 해방신학과 같이 해방하는 예수의 이미지, 아니면 민중신학처럼 민중 예수의 모습이 한계를 넘어 홈런과도 같을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저자의 말처럼 다시 경기장 안으로 들어와서 다시 경기를 이어가야 한다. 복음서를 다시 만나야 한다는 말이다. 저자는 그리스도교 교리가 이 경계라고 말한다. 삼위일체 같은 교리도 사실은 하느님의 본성을 정의하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한계를 긋는데 그 목표가 있다고 말한다.
새로운 예수상을 제시하는 사복음서인 동시에 제어 장치의 역할을 하는 사복음서 역시 된다. 이 절묘한 긴장과 균형이 이 책의 장점이다. 저자의 글은 이 책만 읽어서 저자의 장점인지는 잘 모르겠다. 누군가 성공회가 균형을 잘 잡는다고 하는데 어쩌면 성공회 신학자이기에 나오는 장점일 수 있겠다.
나는 저자의 의견에 동의한다. 아니, 저자의 의견말고 어느 편에 서는 것이 의미가 있을 싶다. 역사성만 강조하랴? 의미만을 강조하랴? 나는 리처드 버릿지처럼 이것이면서 저것이라고 말하겠다.
나가면서
나에게 이 책의 묘미는 맨 마지막 장이었다. 정리되지 않은 문제들이 이 책을 읽고 나름 정리가 되었다. 균형을 잡는 것이다. 그리고 나중에 이 책을 차분히 보며 각 복음서를 정리하는 것도 의미가 있지 싶다. 사복음서 개론으로 나는 이 책을 적극 추천한다.
메모
예수가 쓰던 아람어에서 '사람의 아들'이라는 말은 "사람이 자기 밥값은 해야지. 안 그래?" 같은 표현에 쓰이는 '사람'처럼 자기 자신을 에둘러 가리킬 때 쓰던 말이었다. (101)
- 인자에 대한 내 생각과 많이 다르다. 나같은 보수신학 안에 있는 사람들은 이 인자를 하나님을 의미한다고 본다. 다니엘과 시편의 나타난 인자를 배경으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나는 버릿지가 말한 단순한 표현이라는 지점은 조금 연구가 부족하다고 본다. 너무 쉽게 단정했달까?
이처럼 마태오는 절묘하게 산이라는 소재를 활용하여 예수의 정체를 독자들에게 보여준다. 그는 산에서 가르치고 기적같이 많은 사람을 먹이는 또 다른 모세이며, 시온 산에서 종말론적 완성을 예언하는 다윗의 자손, 산에서 모든 민족에게 경배를 받는 하느님의 아들이다. 예수는 이스라엘의 선생이면서 그 이상의 존재다. 그는 산 위에 떠 있는 구름처럼 가려진 존재가 아니라 백성 가운데 한 사람으로 자신을 드러내신 하느님이다. (139)
-아멘!
책 맛보기
헌데 바로 이때, 그가 하느님의 아들임을 알아보는 첫 번째 사람이 나타난다. 그는 제자도, 가족도, 종교 지도자도 아닌 로마군 백인대자이다(막 15:39). (118)
군중도(마 12:23, 21:9, 15), 그에게 도움을 청하는 사람들(마 9:27, 15:22, 20:30~31)도 예수를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른다.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호칭을 마르코의 복음서에 아예 언급하지 않는다. 그러나 마태오의 복음서에서 이 호칭은 창세기에 등장하는 위대한 영웅을 떠오르게 하는 동시에,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셨던 약속, 곧 "모든" 민족이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는 약속이 성취됨을 가리킨다. (128)
마르코의 복음서에서 버림받은 예수가 부르짖는 소리는 다른 이에게 닿지 않으나 마태오의 복음서에서는 절망에 찬 예수의 울부짖음에 초자연적이며 묵시적인 사선들이 응답한다. 땅이 흔들리며 바위가 갈라지는 일은('세이스모스') 하느님의 현현(마 27:51, 판관 5:4, 2사무 22:8, 1열왕 19:11, 시편 68:8, 77:15~20을 보라)이나 주님의 날(하깨 2:6~9, 20~23)을 가리키는 표징이다. (173)
마르코의 복음서에서 십자가 수난은 예수가 겪는 고난의 절정이지만, 마태오의 복음서에서 십자가 수난은 그리스도론의 절정이다. (173)
그리스 극 작품에서 서막은 이러한 의도를 갖고 관객을 준비시켰으며 그 의도를 극 끄트머리에 나오는 종막에서 압축적으로 다시 제시되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발레나 서곡은 본막을 기다리는 관객이 이어서 등장할 주제에 익숙해지게 하는 역할을 한다. 루가는 여는 이야기를 통해 짐을 짊어지고 가는 이, 가난하고 비천한 사람들 가운데 함께하는 이, 기도하며 성전에 거하는 이로 예수를 그리기 시작한다. 그럼에도 여기에는 보편성이라는 함의가 담겨 있다. (183)
마르코가 그린 사자가 숨 가쁘게 달리는 반면 루가가 그리는 소는 천천히, 터벅터벅 걸어간다. (183)
마태오와 마르코의 복음서에서도 세례자 요한은 이사야서에 나온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를 말한다. 그러나 루가만 이를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게 될 것"이라는 말로 이어간다(눅 3:6, 이사 40:5를 인용). 다시 한번 그는 이 이야기를 유대의 역사와 로마의 역사, 당시 세계의 통치자들 안에 자리매김한다(눅 3:1~2). 마태오의 복음서는 아브라함에서 요셉까지의 족보로 시작하지만 루가는 이 족보를 예수의 공적 활동이 시작되는 세례 사건 이후에 둔다. (187)
마르코는 곧장 예수가 세례받는 장면부터 시작하며 마태오의 복음서는 예수의 탄생, 이방인 박사들이 그를 경배하기 위해 찾아온 사건이 공적인 의미를 갖는다고 제안한다. 루가는 시점을 더욱 앞당겨 탄생 이전의 일, 기적과 같은 엘리사벳의 임신, 세례자 요한의 출생으로 이야기를 시작함으로써 예수가 나아갈 길을 예비한다. 그러나 요한은 시간을 훌쩍 뛰어넘어 훨씬 더 과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가 보기에 예수를 시간과 장소, 혹은 족보라는 인간적인 기원으로 설명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요한이 보기에 예수는 모든 시간 "이전부터" 존재하기 때문이다. (235)
독수리의 여정은 높고도 높은 곳에서 시작해 땅속 깊은 곳까지 내려갔다 다시 올라오는 여정이었다. 요한의 복음서에서 일어난 모든 일은 하느님이 하느님으로 다시 돌아오는 과정, 독수리가 둥지를 떠났다가 아버지의 품으로 다시 돌아오는 여정이라 할 수 있다. (2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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